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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열주의》全部章節:第 181 章 - 第 190 章

255 章節

181화. 아직 아닌 사이, 먼저 온 말 (6)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젖은 코트를 걸고 손을 씻었다.문도 잠갔다.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이번엔 조금 덜 망설였다.[들어왔어.]전송.읽음.답이 왔다.[강태준]문은?나는 웃었다.[잠갔어.][강태준]오늘은 물어봐도 괜찮은 날 맞네.나는 침대 끝에 앉았다.[응.]잠깐 생각하다가 하나 더 썼다.[오늘은.]읽음.태준의 답은 조금 늦었다.[강태준]오늘 고마웠어.나는 화면을 보았다.고마웠어.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같이 걸어준 것.예전에는 빼라고 한 것.지금도 아는 사이라고 해준 것.전부.나는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다.괜찮아.그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런데 오늘은 그 말만 보내고 싶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입력했다.[나도.]손이 멈췄다.너무 큰가.지웠다.다시 썼다.[나도 오늘은 괜찮았어.]전송.읽음.이번엔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몇 초 뒤 답이 왔다.[강태준]그 말 오래 들고 있으면 안 돼?나는 한숨처럼 웃었다.진짜 이 사람.[너무 오래는 말고.][강태준]그럼 오늘까지만.나는 잠깐 화면을 보다가 답했다.[응. 오늘까지만.]읽음.태준의 답이 왔다.[강태준]잘 자.나는 조금 놀랐다.더 보내지 않았다.정말 잘 자 하나만 보냈다.나는 한참 그 문장을 보고 있었다.이제 그는 가끔 나보다 먼저 멈춘다.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나는 답했다.[잘 자.]그리고 화면을 껐다.방 안은 조용했다.창밖에는 비가 계속 내렸다.사진은 노트북 폴더 안에 있었다.이름 없는 복사본으로.그걸 아직 지우지 않았다.아마 오늘도 지우지 않을 것이다.나는 침대에 누웠다.오늘 들은 말들이 차례로 떠올랐다.예전에 아는 사이였습니다.정확한데 좀 별로였어.나도 몰라.보고 싶어서.오늘은 싫지 않아.예전에는 빼고.지금도 아는 사이.나는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아는 사이.너무 가볍고,너무 부족하고,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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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이름 없는 사이, 가까워진 밤 (1)

금요일이 왔다.별일 없이 온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이상하게 며칠 전부터 금요일을 의식하고 있었다.야간 조명 컷 재촬영.일정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그냥 업무였다.현장에 다시 가서 조명을 켜고, 사진 몇 장 찍고, 필요한 컷 확인하고, 정리하면 끝나는 일.그런데 내 머릿속에서는 그 일정이 자꾸 다른 말로 바뀌었다.밤.비.현장.태준.나는 아침부터 괜히 바빴다.메일을 보내고, 일정표를 다시 정리하고, 촬영 체크리스트를 출력했다.이미 확인한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오타도 없고, 빠진 것도 없었다.그런데 손이 자꾸 움직였다.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났다.지금도 아는 사이.내가 한 말인데도, 그 말이 자꾸 내 쪽으로 돌아왔다.아는 사이.그건 안전한 말이었다.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말.그런데 문제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었다.우리는 서로의 잠버릇까지 알았던 사람이고,말투가 바뀌는 순간도 알아차리는 사람이고,좋아하는 커피 온도와 싫어하는 침묵까지 기억하는 사람이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는 사이라고 한다.틀린 말은 아니었다.그래서 더 이상했다.점심쯤 팀장님이 내 자리로 와서 물었다.“서윤 씨, 오늘 야간 촬영 몇 시에 나가죠?”“여섯 시 반쯤 출발하면 될 것 같아요. 촬영은 일곱 시 반부터고요.”“강 디렉터님도 같이 가시죠?”나는 모니터를 보며 대답했다.“네. 조명 확인 때문에 현장으로 바로 오신다고 했어요.”“우진 씨도?”“네. 장비 체크 때문에 같이 갑니다.”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늦겠네요. 끝나고 바로 집에 가요. 정리는 월요일에 해도 됩니다.”“네.”“또 네 하고 밤새 정리하지 말고요.”나는 웃었다.“안 할게요.”“믿어도 되나.”“오늘은 믿으셔도 돼요.”오늘은.요즘 이 말을 너무 자주 쓴다.팀장님은 웃으며 돌아갔고, 나는 다시 화면을 봤다.오늘은.오늘까지만.오늘은 괜찮은 날.오늘은 물어봐도 되는 날.오늘은 싫지 않은 날.하루 단위로 겨우 버티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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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이름 없는 사이, 가까워진 밤 (2)

우진이 뒤에서 말했다.“강 디렉터님, 조명 라인 먼저 확인하면 될까요?”태준은 시선을 내게서 거뒀다.“네. 오른쪽 벽면부터 보면 됩니다.”일이 시작됐다.촬영팀은 장비를 세웠고, 우리는 조명과 동선을 확인했다.나는 체크리스트를 들고 다니며 촬영 컷 순서를 맞췄다.입구 전경.중앙 벽면.패널 디테일.야간 조명 반사.외부 유리 너머 장면.태준은 촬영 감독 옆에서 조명 각도를 조정했다.그는 일할 때 말이 줄어든다.필요한 말만 하고, 쓸데없는 설명을 하지 않는다.손짓은 정확했고, 눈은 어두운 공간 안에서 이상하게 더 선명했다.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얼른 시선을 내렸다.일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반칙이다.그 사람이 나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얼굴을 할 때, 오히려 더 신경이 간다.나는 체크리스트 맨 위 항목에 표시했다.입구 전경 완료.촬영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비가 오는 덕분에 유리 너머로 번지는 빛이 좋았다.촬영 감독은 계속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비 오는 게 오히려 살렸네요.”우진이 웃었다.“저희는 힘든데 사진은 예쁘죠.”나는 유리벽 옆에 서서 화면을 확인했다.카메라 모니터 안의 공간은 실제보다 더 어둡고, 더 깊어 보였다.빛이 천천히 번지고, 벽면의 그림자가 길었다.그때 태준이 내 옆으로 왔다.가까이 오지는 않았다.딱 모니터가 같이 보일 정도.“어때.”그가 물었다.“좋아.”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나는 바로 덧붙였다.“사진.”태준이 아주 작게 웃었다.“알아.”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그 말 이제 너무 빨리 알아듣네.”“틀릴까 봐 빨리 확인하는 거야.”“그것도 웃겨.”“응.”그는 화면을 봤다.촬영 감독이 다음 컷을 준비하러 가자, 잠깐 주변이 조용해졌다.우진은 장비 쪽에 있었고, 우리는 유리벽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태준은 내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오늘 비 올 줄 알았으면.”나는 그를 봤다.“응?”“우산.”그는 잠깐 멈췄다.“잡아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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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이름 없는 사이, 가까워진 밤 (3)

나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하려다가 멈췄다.또 괜찮아.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도, 그 말이 먼저 떠올랐다.나는 대신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괜찮다는 뜻이기도 했고,오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태준은 멈췄다.정확히 유리문 앞에서.그가 멈추는 걸 보자, 이상하게 가슴이 내려앉았다.다행이었다.그리고 조금 미안했다.촬영은 금방 끝났다.내가 자리에서 나오자 우진이 물었다.“괜찮아요? 아까 살짝 흔들리던데.”“괜찮아요.”말하고 나서 이번엔 그냥 웃었다.이제 이 말이 자동으로 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나 보다.태준은 조금 떨어져 있었다.나를 보지 않는 척했다.하지만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이 꺼져 있었다.그가 아무것도 안 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나는 그것까지 알아차리는 내가 싫었다.촬영팀은 마지막 컷을 준비했다.전시장 안쪽의 가장 어두운 벽면.그곳은 조명이 낮게 깔려 있어서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생겼다.촬영 감독은 태준에게 말했다.“강 디렉터님, 이 컷은 직접 한 번 서주시면 안 될까요? 뒷모습만 필요해서요.”태준은 잠깐 나를 봤다.왜 나를 보지.내 허락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나는 일부러 체크리스트를 봤다.태준은 말없이 벽면 앞으로 갔다.그는 조명 아래에 섰다.검은 코트가 어둠에 거의 묻혔다.어깨선만 남고, 옆얼굴은 아주 조금 빛을 받았다.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가까이 가고 싶다는 말보다,저 사람이 왜 저렇게 외로워 보이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혼자 서 있는 태준은 늘 조금 멀어 보였다.예전에도 그랬다.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이상하게 혼자 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나는 그게 멋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지금은 조금 아팠다.촬영 감독이 말했다.“좋습니다. 조금만 고개 오른쪽으로.”태준이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그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아주 잠깐.촬영용으로 고개를 돌린 것뿐인데, 나는 괜히 들킨 사람처럼 굳었다.태준도 바로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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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화. 이름 없는 사이, 가까워진 밤 (4)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신호는 빨간불이었다.차들이 지나갔다.젖은 도로 위로 헤드라이트가 길게 퍼졌다.옆에서 태준이 말했다.“아까.”“응.”“유리 안쪽에서 흔들렸을 때.”“별거 아니었어.”“알아.”“근데?”“가고 싶었어.”나는 신호등을 봤다.빨간 사람 모양이 너무 선명했다.“근데 멈췄잖아.”“네가 오지 말라고 한 것 같아서.”“손 들려다가 말았어.”“봤어.”“그런 것도 봐?”“응.”“너 진짜 피곤하겠다.”“조금.”태준은 낮게 웃었다.“근데 안 보면 더 피곤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신호가 바뀌었다.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우리는 같이 움직였다.중간쯤 갔을 때, 옆에서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며 내 우산을 스쳤다.우산이 크게 흔들렸다.몸이 살짝 밀렸다.그 순간 태준의 손이 내 우산대를 잡았다.이번엔 멈추지 않았다.손이 정확하게 우산대를 잡았고, 내 어깨에 비가 떨어지지 않게 각도를 세웠다.나는 걸음을 멈출 뻔했다.태준도 바로 손을 떼지 않았다.딱 신호를 다 건널 때까지.길을 건너고 나서야 그는 손을 놓았다.“미안.”그가 말했다.“잡아도 된다고 해서.”나는 우산 손잡이를 다시 쥐었다.심장이 좀 빠르게 뛰었다.우산인데.그냥 우산인데.“응.”내가 말했다.“그건 괜찮았어.”태준은 아주 짧게 나를 봤다.“다행이다.”“근데.”“응.”“그렇게 조심스럽게 사과하면 더 이상해.”태준은 잠깐 멈칫했다.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그럼 다음엔 안 미안하다고 할게.”“그것도 이상해.”“어렵네.”“응.”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려워.”둘 다 웃지는 않았다.그런데 공기가 아주 조금 풀렸다.지하철역 입구가 가까워졌다.이제 여기서 헤어지는 게 익숙해질 때도 됐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입구가 너무 빨리 왔다.나는 계단 앞에서 멈췄다.태준도 멈췄다.비가 우산 위에 계속 떨어졌다.“오늘.”내가 먼저 말했다.태준이 나를 봤다.“응.”“우산 잡아준 거.”말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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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이름 없는 사이, 가까워진 밤 (5)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 열차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안으로 들어갔다.손잡이를 잡고 서자, 손끝에 아직 우산대의 감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내 손 위에 닿은 건 아니었다.그런데도 그가 잡아준 방향이 남아 있었다.몸은 참 이상하다.직접 닿지 않은 것도 기억한다.집에 도착해서 문을 잠갔다.젖은 우산을 펼쳐놓고, 코트를 벗었다.오늘은 휴대폰을 바로 들지 않았다.일부러 조금 늦췄다.손을 씻고, 물을 마시고, 머리를 묶었다.그리고 나서야 메시지를 보냈다.[들어왔어.]읽음.답은 바로 왔다.[강태준]문은?나는 웃었다.[잠갔어.][강태준]우산은?나는 잠깐 멈췄다.우산은?이 사람 진짜.[펴놨어.]읽음.답이 왔다.[강태준]잘했어.나는 화면을 보다가 답했다.[그 말은 네가 할 말 아닌 것 같은데.][강태준]그래도 하고 싶었어.나는 침대 끝에 앉았다.한참 입력창을 열어두고 있다가 썼다.[오늘 우산 잡은 거.]읽음.답은 없었다.기다리는 것 같았다.나는 이어서 보냈다.[기억하지 마.]보내자마자 후회했다.너무 차갑나.곧바로 태준의 답이 왔다.[강태준]그건 어려운데.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또.또 이런다.[그래도 너무 크게는 말고.]읽음.한참 뒤 답이 왔다.[강태준]응.잠깐.[강태준]작게 기억할게.나는 결국 웃었다.작게 기억할게.그게 말이 되나.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휴대폰을 내려놓았다.방 안은 조용했다.창밖에는 비가 여전히 내렸다.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했다.몸보다 마음이 더.현장.유리벽.흔들린 발.멈춘 태준.잡힌 우산.싫지 않았다는 말.그중 뭐가 제일 크게 남았는지 모르겠다.아마 전부 조금씩.나는 눈을 감았다.어제보다 조금 가까워졌고,오늘도 아주 멀리 가지는 않았다.그 정도면 됐다.아직은.⸻【태준의 속마음 33】비가 오면 아직도 네가 먼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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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잡지 않은 손, 남은 비 (1)

토요일 아침에는 알람보다 먼저 깼다.눈을 뜨자마자 비 소리가 들렸다.아직도 온다.어제 그렇게 내렸으면 됐지, 뭘 또 그렇게까지.나는 이불 속에서 한참 천장을 보고 있었다.몸이 무거웠다.어제 촬영 때문에 늦게 들어와서 그런 것도 있고, 비 오는 길을 오래 걸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그런데 진짜 피곤한 건 몸보다 머리였다.우산은?작게 기억할게.태준의 메시지가 자꾸 떠올랐다.나는 휴대폰을 보지 않으려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소용없었다.안 봐도 기억나는 건 안 보는 걸로 없어지지 않는다.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새 메시지는 없었다.강태준에게서도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나는 그걸 보고 잠깐 멈췄다.잘하고 있네.또 그 생각.그런데 이제는 그 말 안에 짜증이랑 고마움이 같이 들어 있었다.정말 잘하고 있어서 고마웠고,정말 잘하고 있어서 조금 서운했다.사람 마음이 이렇게 못됐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일어났다.젖은 우산은 현관 옆에 펼쳐져 있었다.어제 밤에 대충 펴놓은 그대로였다.검은 우산 천 끝에 물방울이 조금 남아 있었다.나는 우산을 접으려다 멈췄다.손잡이 쪽을 봤다.어제 태준이 잡았던 곳.정확히 어디였는지 모르겠다.그냥 이쯤.우산대 중간쯤.나는 손끝으로 그 부분을 살짝 만졌다.진짜 왜 이러지.내 손도 아니고, 그의 손도 아니고, 그냥 우산인데.그런데 그날 횡단보도 한가운데에서 기울던 우산을 그가 잡아 세웠던 순간이 너무 또렷했다.손은 닿지 않았다.그래도 기억났다.사람이 꼭 닿아야만 남는 건 아닌가 보다.나는 우산을 접고, 욕실로 들어갔다.찬물로 얼굴을 씻었다.거울 속 얼굴은 멀쩡했다.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싫었다.어젯밤 그렇게 흔들려놓고, 오늘 아침 얼굴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중얼거렸다.“진짜 티 안 나네.”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아침을 대충 먹고, 세탁기를 돌리고, 집안을 조금 정리했다.토요일인데 쉬는 느낌이 없었다.계속 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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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잡지 않은 손, 남은 비 (2)

점심쯤 비가 조금 약해졌다.나는 집에 계속 있으려고 했다.진짜 그럴 생각이었다.그런데 냉장고 안이 텅 비어 있었다.계란도 없고, 우유도 없고, 먹을 만한 게 거의 없었다.배달을 시킬까 하다가, 이상하게 나가고 싶어졌다.비가 오는데도.아니, 비가 와서였을지도 모른다.나는 검은 코트를 걸치고, 작은 우산을 들었다.집 앞 마트에만 다녀오면 된다.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밖은 축축했다.비는 거의 안개처럼 내렸다.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안 쓰면 결국 젖는 비.어제와 비슷했다.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주말 오후의 골목은 조용했다.문 닫은 가게도 많았고, 빵집 앞에는 비닐 우산을 든 사람이 서 있었다.마트에서 계란, 우유, 생수, 컵라면 몇 개를 샀다.그렇게 사면 안 될 것 같아서 샐러드도 하나 집었다.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이번엔 강태준이었다.나는 마트 입구 앞에서 멈췄다.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화면을 열었다.[강태준]비 오네.나는 그 문장을 보고 웃을 뻔했다.비 오네.또 날씨.이 사람은 요즘 날씨로 나를 부른다.나는 답장을 썼다.[응. 계속 오네.]읽음.조금 뒤 답이 왔다.[강태준]우산은?나는 우산 손잡이를 봤다.검은 우산.어제와 같은 우산은 아니었다.오늘은 작은 접이식이었다.[썼어.][강태준]흔들리진 않고?나는 입술을 눌렀다.이 사람 진짜.[안 흔들려.]보내고 나서 바로 하나 더 썼다.[나 지금 마트 앞이야.]읽음.답이 조금 늦게 왔다.[강태준]혼자?나는 잠깐 화면을 봤다.혼자.그게 왜 이렇게 가까운 말처럼 느껴지지.[응.]읽음.답이 오지 않았다.나는 우산을 펴고 집 쪽으로 걸으려 했다.그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무거워?나는 비닐봉지를 내려다봤다.계란, 우유, 생수.생수가 조금 무겁긴 했다.하지만 들고 갈 수 있었다.[괜찮아.]보내려다가 멈췄다.또 괜찮아.나는 그 문장을 지웠다.그리고 다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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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잡지 않은 손, 남은 비 (3)

나는 마트 앞에서 혼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십 분.그 시간 동안 나는 그냥 서 있었다.마트 앞에 비닐봉지를 든 채로.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기도 애매해서, 처마 밑에서 우산을 반쯤 접고 서 있었다.사람들이 지나갔다.어떤 사람은 나를 보고,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쳤다.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십 분은 생각보다 길었다.오 분쯤 지났을 때, 진짜 내가 뭐 하는 건가 싶었다.집 앞 마트에서 생수 하나 들기 힘들다고 전남친을 기다리는 여자.이렇게 쓰면 진짜 별로다.그런데 전남친이라는 말도 이상했다.아는 사이.지금도 아는 사이.나는 그 말을 속으로 굴렸다.그때 건너편 골목에서 태준이 보였다.검은 우산.검은 코트.검은 셔츠.비 오는 동네 골목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나를 발견하고도 뛰지 않았다.그냥 빠르게 걸었다.딱 과하지 않을 만큼.가까이 와서 멈췄다.“많이 기다렸어?”“아니.”“봉지.”나는 비닐봉지를 내려다봤다.“들 수 있어.”말하고 나서 또 웃겼다.그럼 왜 불렀는데.아니, 부른 적은 없다.부른 건 아니고.허락한 거다.그게 더 이상했다.태준은 손을 뻗지 않았다.“들어줄까?”물었다.나는 그 질문을 듣고 조금 화가 날 뻔했다.왜냐하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묻는 게.기다리는 게.내가 대답할 수 있게 남겨두는 게.나는 비닐봉지를 그의 쪽으로 조금 내밀었다.“생수만.”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생수만.”그는 봉지 안에서 생수 묶음만 꺼냈다.정말 생수만.계란이 든 봉지는 내 손에 남겨두었다.그 정확함이 또 웃겼다.“너 진짜…”“왜.”“아니야.”“말해.”“너무 정확해서.”태준은 생수를 들고 내 옆에 섰다.“틀리면 안 되잖아.”그 말이 오늘은 조금 덜 아팠다.나는 우산을 다시 폈다.태준도 자기 우산을 폈다.우리는 나란히 걸었다.집까지는 정말 멀지 않았다.골목 두 개만 지나면 된다.그런데 그 짧은 길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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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잡지 않은 손, 남은 비 (4)

집 앞 골목 입구에 도착했다.우리 집 건물은 바로 보였다.나는 멈췄다.여기서부터가 애매했다.건물 입구까지 같이 갈 건지.여기서 생수를 받을 건지.올라가라는 말은 절대 안 할 건데, 그렇다고 너무 빨리 끊는 것도 이상했다.태준은 내보다 먼저 멈췄다.“여기서 줄게.”내가 생각한 걸 먼저 말했다.나는 그를 봤다.“응.”그는 생수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나는 비닐 손잡이를 잡았다.손이 아주 잠깐 가까워졌다.닿지는 않았다.닿지 않았는데도 둘 다 손을 조금 조심했다.웃기다.생수 하나 주고받는 것도 이렇게 어렵다.나는 생수를 받아 들었다.“고마워.”“응.”“여기까지 와줘서.”말하고 나서 조금 민망했다.태준은 나를 가만히 봤다.“나한테는 오는 게 더 쉬워.”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안 오는 게 어렵고.”그 말은 컸다.너무 컸다.나는 우산 아래에서 잠깐 숨을 골랐다.비가 옆으로 조금 들이쳤다.“그런 말.”“응.”“오늘은 좀 커.”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알면서 해?”“응.”“왜.”그는 생수 봉지를 내려놓은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오늘은 너무 숨기면 거짓말 같아서.”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정말 싫지 않아서 더 난처했다.나는 가방끈을 고쳐 쥐었다.“그럼 나도 말할게.”태준의 눈이 아주 조용해졌다.“응.”“오늘 네가 온 거.”말이 느리게 나왔다.“싫진 않았어.”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가 숨을 참는 것 같았다.나는 그걸 보고 얼른 덧붙였다.“근데 다음부터 생수 하나 들었다고 매번 오라는 뜻은 아니야.”“알아.”“진짜 알아?”“응.”“오늘만이야.”“응. 오늘만.”이 말도 이제 너무 익숙해졌다.그래도 오늘은 그 말이 필요했다.나는 생수를 든 손에 힘을 줬다.“그리고.”“응.”“집 앞까지는.”태준이 나를 봤다.나는 건물 입구를 힐끗 봤다.“오늘은 여기까지.”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가 너무 쉽게 끄덕여서, 나는 또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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