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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미열주의: Chapter 171 - Chapter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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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화. 같은 사진 안에, 다른 숨 (3)

나는 다음 사진을 열었다.우리가 조금 더 멀리 찍힌 컷이었다.그나마 업무용으로 쓰기 좋아 보였다.“이건 괜찮다.”내가 말했다.“보고서에는 이걸 쓰면 될 것 같아.”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응.”“보도자료용은 아마 대표님 단독 컷으로 갈 거고.”“그럴 거야.”“우리 나온 건 내부 기록용 정도.”“응.”업무 이야기로 돌아오자 공기가 조금 가벼워졌다.나는 안심했다.동시에 조금 아쉬웠다.진짜 못됐다.그때 태준이 물었다.“그 사진.”“응?”“네가 싫으면 안 남겨도 돼.”나는 그를 봤다.태준은 화면이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무슨 뜻이야?”“내가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된다고.”나는 눈을 깜빡였다.생각도 못 한 말이었다.사진을 같이 보자고 한 사람이,그 사진을 안 남겨도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업무 파일인데?”“업무 파일 말고.”태준은 잠깐 말을 멈췄다.“내가 따로 저장하는 거.”그 말이 조심스럽게 왔다.조금 웃기기도 했다.사진 한 장 따로 저장하는 것까지 허락을 구하는 사람.예전의 태준은 허락 같은 걸 생각하지 않았다.내 사진이 있으면 그냥 가졌고,같이 찍은 사진이면 당연히 간직했고,내가 지워달라고 해야 그때야 봤다.싫은 건 아니었다.그때도 늘 싫기만 한 건 아니었다.그런데 당연한 것처럼 되는 게 싫었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와 관련된 무언가가 그의 세계 안에 들어가 있는 것.그게 가끔 숨 막혔다.나는 사진을 다시 봤다.우리 둘이 나란히 선 사진.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닌 사진은 아니었다.“저장하고 싶어?”내가 물었다.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대답이었다.나는 그를 봤다.“하고 싶구나.”“응.”솔직했다.너무 솔직해서 내가 오히려 말을 잃었다.태준은 덧붙였다.“근데 네가 싫으면 안 할게.”나는 화면을 봤다.사진 속의 나는 여전히 긴장한 얼굴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괜찮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컸다.그렇다고 싫지는 않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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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같은 사진 안에, 다른 숨 (4)

나는 사진 파일을 닫았다.“보고서에 넣을 사진만 추려서 팀장님께 보낼게.”“응.”“저장은.”나는 일부러 화면을 보며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태준이 대답했다.“고마워.”“고마워할 일 아니야.”“나한텐 맞아.”나는 그 말을 듣고도 이번엔 도망치지 않았다.그냥 노트북을 닫았다.회의실 안이 조금 어두워졌다.창밖 하늘이 더 흐려져 있었다.곧 비가 올 것 같았다.태준이 일어났다.“나갈게.”“응.”그는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멈췄다.“서윤아.”“응.”“오늘은.”나는 고개를 들었다.“사진까지만 좋아할게.”나는 그 말을 듣고 멍하게 태준을 봤다.진짜.뭐 이런 말을 이렇게 한다.웃기고, 조금 안쓰럽고, 조금 위험했다.나는 대답을 골랐다.좋아하지 말라고 하기엔 늦었다.좋아하라고 하기엔 컸다.그래서 말했다.“그 정도는.”태준은 기다렸다.나는 입술을 눌렀다가 끝까지 말했다.“기분 나쁘진 않아.”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는 나갔다.문은 조용히 닫혔다.완전히.이번엔 열어두지 않았다.나는 닫힌 문을 잠깐 봤다.이상하게 답답하지 않았다.혼자 남은 회의실이 무섭지도 않았다.나는 노트북을 다시 열고 사진 폴더를 봤다.단체_메인_03_최종.파일명 옆에 작은 썸네일이 떠 있었다.우리 둘은 여전히 나란히 서 있었다.나는 그 사진을 내부 기록 폴더에 넣었다.그리고 잠깐 망설이다가, 복사본 하나를 따로 만들었다.아무 이름도 붙이지 못해서 그대로 두었다.복사본.그게 더 웃겼다.태준한테 의미 부여하지 말라고 해놓고.나는 파일명을 바꿨다.기록.너무 딱딱했다.다시 지웠다.사진.너무 흔했다.한참을 보다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그냥 그대로.단체_메인_03_최종 - 복사본.지금의 내 마음 같았다.아직 이름 붙이기 애매한 것.오후가 지나면서 비가 시작됐다.사무실 창에 빗방울이 하나둘 붙었다.팀장님이 돌아왔고, 보고서 초안을 확인했다.“좋네요. 사진도 잘 골랐고.”“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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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같은 사진 안에, 다른 숨 (5)

퇴근할 때쯤 비는 꽤 굵어져 있었다.사무실 사람들은 하나둘 우산을 챙겼다.팀장님은 택시를 부른다고 했고, 우진은 지하철을 타러 나갔다.나는 조금 늦게 짐을 챙겼다.보고서 최종본을 저장하고, 메일을 보내고, 노트북을 껐다.사무실은 거의 비어 있었다.태준은 이미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이상하게 허전했다.오늘은 사무실에서 사진까지 같이 봤으니까, 더 볼 일이 없었다.그게 맞았다.맞는데.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휴대폰을 봤다.아무 메시지도 없었다.진짜 잘하네.또 그 생각.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잘해서 허전하고,못하면 부담스럽고.강태준도 참 어려운 사람을 좋아했다.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 유리문 너머로 1층 로비가 보였다.비 오는 거리.우산들.젖은 바닥.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나는 안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기 직전, 누군가 빠르게 걸어왔다.태준이었다.그는 내 얼굴을 보고 잠깐 멈췄다.엘리베이터 문은 다시 열렸다.“타.”내가 말했다.태준은 들어왔다.안에는 우리 둘뿐이었다.그 순간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숫자가 천천히 내려갔다.나는 손잡이를 잡지 않고 가방끈을 쥐었다.태준은 내 옆이 아니라 대각선 뒤에 섰다.정말.한 걸음 뒤.나는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그의 모습을 봤다.검은 코트.젖은 머리.조금 피곤한 눈.비친 얼굴이라 더 흐릿했다.“언제 나갔어?”내가 물었다.“잠깐 아래 다녀왔어.”“왜?”“비 많이 와서.”그가 말을 멈췄다.나는 거울 같은 벽에 비친 그의 눈을 봤다.태준은 직접 말하지 않았다.우산이 없으면 같이 가자고 하려고 했겠지.아니면 택시를 불러줄까 물어보려고 했겠지.그런데 말하지 않으려고 또 한 번 고른 얼굴이었다.“우산 있어.”내가 말했다.“응. 봤어.”“봤어?”“아까 네 자리 옆에 있는 거.”그 말에 나는 헛웃음을 냈다.“관찰력이 너무 좋은 거 아니야?”“줄여볼게.”나는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실패했다.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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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같은 사진 안에, 다른 숨 (6)

비 오는 거리는 어두웠다.가게 불빛이 젖은 바닥에 길게 번졌고, 신호등 빨간빛이 물웅덩이에 흔들렸다.사람들은 빠르게 걸었다.우리만 조금 느렸다.“사진.”태준이 말했다.“응.”“저장했어.”“벌써?”“응.”“의미 부여 하지 말라니까.”“했어.”나는 걸음을 멈출 뻔했다.태준은 바로 덧붙였다.“근데 너한테 부담 주지는 않을게.”“그 말 너무 편하게 쓰는 거 아니야?”“안 편해.”그가 말했다.“지금도 엄청 조심해서 말하는 중이야.”나는 옆을 봤다.태준은 앞을 보고 있었다.옆모습이 어두웠다.비와 가로등 때문에 눈 밑 그림자가 더 깊어 보였다.“무슨 의미 부여 했는데.”내가 물었다.묻지 말았어야 했다.그런데 이미 물었다.태준은 잠깐 말이 없었다.우리는 신호등 앞에 멈췄다.빨간불.사람들이 옆에 모였다.우산 아래에서 태준이 낮게 말했다.“같은 사진 안에 다시 들어왔다는 거.”나는 신호등을 봤다.빨간빛이 젖은 도로 위에 퍼져 있었다.“그 정도.”태준이 말했다.“오늘은 그 정도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정도만.그 말이 오늘은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초록불이 켜졌다.사람들이 움직였다.우리는 같이 건넜다.길 중간에서 바람이 불었다.우산이 흔들렸다.내 우산이 한쪽으로 밀렸고, 어깨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태준의 손이 움직였다.순간적으로 내 우산을 잡으려던 것 같았다.그런데 그는 멈췄다.정말 찰나였다.나는 그 손을 봤다.잡으려다 멈춘 손.요즘 자주 보는 손.나는 아무 말 없이 우산 손잡이를 다시 세웠다.그리고 말했다.“이건 잡아도 됐어.”태준이 나를 봤다.나는 앞을 보며 덧붙였다.“우산.”그는 아주 짧게 웃었다.“다음엔 잡을게.”“다음엔?”말이 이상하게 나갔다.다음.나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놓고 나서야 알아차렸다.태준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하지만 그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그냥 고개를 끄덕였다.“비슷한 일이 있으면.”“말 되게 조심한다.”“응.”“힘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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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같은 사진 안에, 다른 숨 (7)

나는 답장을 썼다.[오늘은.]읽음.태준의 답이 왔다.[강태준]응. 오늘은.그 짧은 반복이 좋았다.너무 멀지 않고,너무 가깝지도 않고.나는 한참 화면을 보다가 말했다.소리 내지 않고.오늘은.그리고 답했다.[잘 자.]이번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강태준]잘 자.끝.오늘도 거기까지.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앉았다.창밖에는 비가 계속 내렸다.사진은 어딘가 폴더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태준의 휴대폰에도.내 노트북에도.같은 사진.같은 거리.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나는 불을 끄고 누웠다.눈을 감자 사진 속 우리가 떠올랐다.조심스럽게 나란히 선 두 사람.나는 그 사진 속의 내가 아주 조금 안쓰러웠다.그런데 싫지는 않았다.아무것도 아닌 척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남았고,전부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너무 무서웠다.그래서 오늘은 그냥 그 사이에 두기로 했다.그 정도.오늘의 거리.오늘의 사진.오늘의 걸음.그리고 오늘만큼의 마음.그 정도면 됐다.오늘은.⸻【태준의 속마음 32】사진이 왔다고 했다.그 한 줄을 보고 한참 있었다.보고 싶은 건 사진보다그 안에 서 있는 너였다.어제 같은 프레임 안에서내가 너를 제대로 봤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회의실 문 앞에서 노크했다.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네가 안에 있으면 그냥 들어갔다.서로를 아는 사이라는 이유로,내가 들어가도 괜찮을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했다.그래서 이번에는 기다렸다.문도 조금 열어두었다.네가 불편하지 않게.너는 아마 그걸 봤을 것이다.너는 요즘내가 애쓰는 걸 너무 잘 알아본다.사진 속의 너는 긴장한 얼굴이었다.도망가고 싶지만도망가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예전에도 네가 그런 얼굴을 했을 것이다.나는 알아보고도내 마음이 더 급해서 모른 척했다.예쁘다고 말하고 싶었다.당연히 예뻤다.하지만 그 말은 너무 쉬웠다.네가 참고 있던 마음까지덮어버리는 말 같았다.그래서 참는 것처럼 나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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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화. 아직 아닌 사이, 먼저 온 말 (1)

아침에 일어났을 때, 비는 그쳐 있었다.창문 밖은 흐렸다.마른 것도 아니고, 젖은 것도 아닌 색.어제 비를 맞은 도로가 아직 덜 깨어난 얼굴로 누워 있었다.나는 침대에 앉아 한참 창밖을 봤다.휴대폰은 조용했다.강태준에게서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이제는 그게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매번 새로웠다.보내지 않는 사람.참는 사람.그리고 그걸 자꾸 확인하는 나.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대화방을 열지는 않았다.그 대신 사진첩을 열었다.어제 저장한 사진은 없었다.노트북에만 있었다.그게 괜히 다행이었다.휴대폰에 있으면 너무 자주 볼 것 같아서.아니, 이미 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그런 핑계를 대는 것이다.나는 세수하러 일어났다.거울 속 얼굴은 어제보다 조금 덜 피곤해 보였다.잠을 푹 잔 것도 아닌데 그랬다.이상했다.마음이 좀 가라앉으면 얼굴이 덜 망가지는 건가.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혼자 웃었다.진짜 별생각을 다 한다.출근길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우산은 챙기지 않았다.대신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작은 접이식 우산을 확인했다.있었다.괜히 손으로 한 번 만졌다.어제 태준이 내 우산을 잡으려다 멈춘 손이 떠올랐다.이건 잡아도 됐어.우산.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말하고 나서도 믿기지 않았다.다음엔 잡을게.다음엔?그 짧은 대화가 아직도 귀 뒤쪽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나는 버스 창밖을 보았다.도로는 느리게 밀렸다.사람들은 월요일 아침처럼 지친 얼굴로 서 있었고, 신호등은 자꾸 빨갛게 바뀌었다.나는 휴대폰을 꺼냈다.아무 알림도 없었다.그런데도 화면을 한참 봤다.요즘 내 손은 너무 자주 나를 배신한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팀장님이 나를 불렀다.“서윤 씨, 어제 보고서 최종본 좋았어요. 오늘 내부 공유용으로 사진 몇 장만 추가해서 다시 올릴게요.”“네. 단체 컷도 넣을까요?”“넣죠. 그 사진 괜찮던데요.”나는 대답이 아주 조금 늦었다.“네.”“왜요? 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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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아직 아닌 사이, 먼저 온 말 (2)

나는 커피를 가지러 탕비실로 갔다.머그컵에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우진이 들어왔다.“서윤 씨, 아까 공유된 사진 봤어요?”“아직요.”“단체 컷 들어갔더라고요.”“그래요?”나는 모르는 척했다.우진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말했다.“근데 강 디렉터님이랑 같이 나온 컷이 제일 낫던데요.”손이 잠깐 멈췄다.커피가 컵 안으로 계속 떨어졌다.“그래요?”“네. 두 분 다 조금 굳어 있긴 한데, 그래서 오히려 분위기 있던데요.”“분위기요?”“네.”우진은 뚜껑을 열었다가, 내 얼굴을 보고 살짝 웃었다.“불편하면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아니요. 불편한 건 아닌데.”말하다가 멈췄다.또 그 말.불편한 건 아닌데.요즘 나는 뒷말을 너무 자주 남긴다.우진은 더 묻지 않았다.“저는 사진 고르러 갈 때마다 눈이 반쯤 감겨 있어서요. 잘 나온 사람 부럽습니다.”그 가벼운 말 덕분에 숨이 조금 풀렸다.“저도 잘 나온 건 아니에요.”“서윤 씨 기준이 높은 겁니다.”“그런 거 아니에요.”“그럼 강 디렉터님 기준이 높은 건가.”“네?”우진은 바로 손을 들었다.“농담입니다.”나는 커피를 들고 웃지도, 화내지도 못했다.그때 탕비실 문이 열렸다.태준이었다.검은 셔츠에 짙은 재킷.어제보다 머리는 조금 정리되어 있었다.눈 밑은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그는 들어오다가 우리를 보고 멈췄다.아주 잠깐.“커피 마시러 왔어?”내가 먼저 물었다.말하고 나서 나도 놀랐다.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태준도 조금 늦게 대답했다.“응.”우진은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물병을 들고 나가며 말했다.“두 분 커피 타임 하세요.”“우진 씨.”내가 부르자 그는 뒤돌아 웃었다.“농담입니다. 진짜 갑니다.”문이 닫혔다.탕비실에 둘만 남았다.커피 머신 소리가 괜히 크게 들렸다.나는 컵을 들고 옆으로 비켜섰다.“마셔.”태준은 컵을 꺼내며 말했다.“사진 봤어?”“아직.”거짓말이었다.어제도 봤고, 오늘도 폴더를 열었다.태준은 나를 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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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아직 아닌 사이, 먼저 온 말 (3)

그때 탕비실 문이 다시 열렸다.팀장님이었다.“어머, 둘이 여기 있었네.”나는 컵을 들고 바로 몸을 돌렸다.“네. 커피 마시러요.”“마침 잘됐다. 강 디렉터님, 아까 공유된 사진 보셨죠?”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단체 컷 괜찮죠? 두 분이 제일 자연스럽게 나왔던데.”자연스럽게.나는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자연스럽다니.우리 둘이?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팀장님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실무 담당자랑 디렉터가 같이 나온 컷이라 내부 자료 첫 장에 넣기 좋겠더라고요.”“네. 괜찮습니다.”태준이 말했다.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나는 커피컵만 보고 있었다.팀장님은 내 쪽을 보며 말했다.“서윤 씨도 괜찮죠?”나는 고개를 들었다.괜찮죠.이 말은 왜 오늘따라 자꾸 이렇게 정확한 곳에 박힐까.나는 아주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네.”그리고 조금 덧붙였다.“괜찮아요.”말하고 나서도 이상하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태준이 나를 본 것 같았지만, 나는 보지 않았다.팀장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문이 닫히자 탕비실이 다시 조용해졌다.나는 커피를 들고 먼저 움직였다.“나 갈게.”“서윤아.”나는 멈췄다.“응.”“방금.”“뭐.”“괜찮다고 한 거.”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말했다.“업무 얘기야.”“알아.”“사진 얘기고.”“알아.”“그 이상으로 듣지 마.”태준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응.”나는 문을 열고 나왔다.그런데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이상하게 발끝이 가벼웠다.아니, 가볍다기보다는 덜 무거웠다.내가 먼저 괜찮다고 말했다.업무 얘기였고, 사진 얘기였고, 그 이상은 아니었다.그런데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었다.이런 애매한 말들 속에서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서 있을까.그 생각을 하다가, 또 혼자 웃었다.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언제까지냐니.오후에는 외부 업체와 짧은 회의가 있었다.행사 후 유지관리 일정과 추가 촬영 가능 여부를 정리하는 자리였다.팀장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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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화. 아직 아닌 사이, 먼저 온 말 (4)

태준이 말했다.“미안.”나는 고개를 들었다.“왜 네가 미안해.”“그 말이 네가 듣기에 이상했으면.”“이상한 건 아니야.”“그럼?”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정확해서.”태준은 나를 보고 있었다.“정확한데 좀 별로였어.”말하고 나서 얼굴이 뜨거워졌다.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내가 더 민망해졌다.“아니, 그렇다고 다른 식으로 말하라는 건 아니고.”“응.”“지금 우리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응.”“그냥.”나는 손끝으로 노트북 모서리를 만졌다.“좀 그랬다고.”태준은 한참 뒤에 말했다.“나도 그랬어.”나는 그를 봤다.“뭐가.”“예전에 아는 사이.”그의 목소리가 낮았다.“내가 말해놓고도 별로였어.”“왜 그렇게 말했는데.”“지금이라고 말하면.”그는 잠깐 숨을 고르듯 멈췄다.“너한테 너무 가까울 것 같아서.”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아직이라고 말하면.”태준이 나를 보았다.“그건 너무 내 욕심 같았고.”아직.그 단어가 회의실 바닥에 조용히 떨어진 것 같았다.나는 그 말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내렸다.아직.아직 아닌 사이.아직 끝난 것도 아닌 사이.아직 다시 시작한 것도 아닌 사이.우리는 계속 그 애매한 말 속에 서 있었다.“그럼 뭐라고 해야 되는데.”내가 물었다.태준은 아주 조금 웃었다.“나도 몰라.”그 대답이 이상하게 좋았다.모른다는 말.요즘 태준이 하는 말 중에 제일 믿을 만한 말 같았다.나는 한숨처럼 웃었다.“너도 모르는구나.”“응.”“다 아는 척하더니.”“예전엔 그랬지.”“지금은?”“지금은 모르는 게 많아.”태준은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너를 어떻게 좋아해야 되는지도.”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너무 컸다.나는 바로 말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부담스럽기는 했다.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이 말도 이제 너무 자주 쓰게 된다.나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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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아직 아닌 사이, 먼저 온 말 (5)

그 말이 로비의 차가운 공기 안에서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나는 눈을 깜빡였다.보고 싶어서.그는 바로 덧붙이지 않았다.미안하다고 하지도 않았고, 작게 좋아하겠다고 하지도 않았다.그냥 말했다.보고 싶어서.나는 잠깐 숨을 고르며 그를 보았다.“그 말은.”“응.”“커.”“응.”“근데.”태준은 기다렸다.나는 가방끈을 한 번 고쳐 쥐었다.“오늘은 싫지 않아.”태준의 눈이 아주 천천히 나를 잡았다.나는 그 시선을 오래 받지 못하고 먼저 문밖을 봤다.“지하철역까지?”태준이 물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같이?”나는 우산을 폈다.“응. 같이.”그 한마디가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태준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내가 먼저 한 걸음 나가자 그제야 따라왔다.비는 어제보다 조금 굵었다.우산 두 개가 나란히 펴졌다.오늘도 서로 닿지는 않았다.그런데 어제보다 조금 가까웠다.아마.나는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그게 나쁘지 않았다.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날은 드물다.특히 우리 사이에서는.예전에는 침묵이 싸움의 전조 같았고, 이별의 예고 같았고, 누군가 먼저 터지기 직전의 숨 같았다.그런데 오늘은 그냥 침묵이었다.비 오는 길.젖은 보도.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그리고 옆에서 걸어가는 사람.그 정도.지하철역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멈췄다.어제와 같은 자리였다.태준도 멈췄다.“여기까지.”내가 말했다.“응.”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여기까지.”나는 계단 쪽을 보았다.내려가야 했다.그런데 발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이제는 내가 더 문제였다.나는 태준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아까.”“응.”“예전에 아는 사이였다고 한 거.”“응.”“다음에 누가 또 물어보면.”태준이 나를 봤다.나는 우산 손잡이를 세게 쥐었다.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도 잘 몰랐다.그냥 이 말을 안 하고 내려가면, 밤새 생각할 것 같았다.“그냥.”숨이 조금 막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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