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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열주의》全部章節:第 201 章 - 第 210 章

255 章節

201화. 들여보내지 않은 밤, 남겨둔 목소리 (5)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내가 정말 그렇게 느꼈다는 걸 알았다.태준은 웃지 않았다.대신 눈가가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나도.”나는 더 서 있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이번에는 도망치는 기분이 아니었다.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문을 닫았다.삐리릭.도어락은 잘 잠겼다.나는 신발을 벗기도 전에 휴대폰을 꺼냈다.잠깐 망설이다가 메시지를 보냈다.[들어왔어.]곧 읽음이 떴다.[강태준]문은 잘 잠겼어?나는 도어락을 돌아봤다.[응. 잘 잠겼어.][강태준]이번에는 배터리 탓할 일 없겠네.[내가 갈았으니까.]잠시 뒤 답이 왔다.[강태준]그러니까.짧은 문장이었다.나는 화면을 보며 웃었다.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었다.주방으로 가 물을 한 잔 마셨을 때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강태준]사실 오늘은 내가 먼저 물어보려고 했어.[뭘?][강태준]역까지 같이 가자고.나는 식탁에 기대어 답장을 썼다.[늦었네.][강태준]응.그래도 네가 먼저 말해줘서 좋았어.입력창을 누르고 한동안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했다.그 말을 부담스럽다고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다.나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나는 짧게 적었다.[나도 좋았어.]전송 버튼을 누른 뒤 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곧바로 화면이 다시 켜졌다.[강태준]잘 자.나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너도.]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방 안은 조용했다.비가 그쳐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없었다.어젯밤처럼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런데 집 안이 비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오늘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함께 걸었다.그걸 내가 먼저 골랐다.그리고 좋았다고 말했다.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했다.⸻【서윤의 기억 22】예전에는 늘 이유가 있었다.비가 와서.늦어서.짐이 무거워서.태준과 함께 걷는 데도,그가 내 곁에 있는 데도그럴듯한 이유가 하나씩 필요했다.어쩌면 우리는그냥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하지 못했던 것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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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화. 이유 없는 걸음, 먼저 고른 거리 (1)

화요일 아침에는 햇빛이 났다.며칠 동안 창문을 두드리던 비가 그치고, 도로 위에 남아 있던 물기도 거의 말라 있었다.나는 커튼을 조금 더 열었다.맑은 빛이 방 안으로 길게 들어왔다.비가 오지 않는 아침이 이렇게 낯설었나.어제 태준과 걸었던 길이 떠올랐다.우산도 없었고, 무거운 짐도 없었다.그냥 같이 걷고 싶어서 내가 먼저 불렀다.집에 돌아와서는 좋았다고도 말했다.어젯밤에는 별생각 없이 보냈는데, 아침에 다시 떠올리니 얼굴이 괜히 뜨거워졌다.그래도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씻고 출근 준비를 했다.검은 재킷을 걸치고 가방을 챙긴 뒤 현관문을 열었다.도어락은 잘 작동했다.닫힌 문에서 짧은 잠금음이 들렸다.삐리릭.어제까지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배터리가 제대로 끼워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오늘은 그냥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이제 괜찮겠지.문도.나도.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회의가 잡혀 있었다.금요일 촬영본 최종 셀렉과 다음 프로젝트 일정 조율을 한꺼번에 끝내겠다는 팀장님의 의지였다.나는 노트북과 출력물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갔다.우진은 이미 자리에 앉아 엑셀 파일을 열고 있었고, 태준은 맞은편 끝자리에서 조명 시안을 넘겨보고 있었다.비에 젖지 않은 머리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어제와 같은 검은 셔츠에 짙은 회색 재킷.태준이 고개를 들었다.잠깐 눈이 마주쳤다.그는 먼저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나도 별일 아니라는 듯 자리에 앉았다.그 짧은 인사가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회의가 시작되자 모두 화면을 보느라 바빴다.팀장님은 촬영본을 한 장씩 넘겼고, 우진은 최종 파일 번호를 정리했다.“외부 공유는 열다섯 컷 정도면 충분하겠죠?”“네. 디테일 컷 조금 줄이고 전경을 더 넣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내가 대답하자 팀장님이 다음 사진으로 넘겼다.비에 젖은 유리창과 그 안쪽에 흐릿하게 서 있는 사람의 실루엣.night_glass_07.사진 속 인물이 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얼굴이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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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화. 이유 없는 걸음, 먼저 고른 거리 (2)

나는 최종 리스트 옆에 표시했다.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노트북을 닫고 출력물을 챙기는데 종이 몇 장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아.”내가 허리를 숙이자 태준도 맞은편에서 손을 뻗었다.그가 가까운 쪽의 종이를 주웠고, 나는 의자 아래로 들어간 한 장을 꺼냈다.“여기.”태준이 종이를 내밀었다.“고마워.”“이건 다음 프로젝트 일정표네.”“응. 팀장님이 세 번째 바꾼 거.”“오늘 안에 한 번 더 바뀔 것 같은데.”나는 종이를 받아 들며 웃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손끝이 잠깐 스쳤다.정말 잠깐이었다.태준은 굳이 손을 급하게 거두지 않았고, 나도 놀란 사람처럼 피하지 않았다.종이를 받아 노트북 위에 올렸다.그걸로 끝이었다.별일 아닌 일이 별일 아닌 채로 지나갔다.그게 좋았다.태준이 회의실을 나가려다 돌아봤다.“도어락은 괜찮아?”“응. 아침에도 잘 잠겼어.”“다행이네.”“내가 제대로 갈았으니까.”내 말에 태준의 입가가 올라갔다.“그러네.”그는 더 묻지 않고 회의실을 나갔다.나는 남은 자료를 정리했다.어제 같았으면 그의 짧은 말 하나에도 다른 뜻이 있는지 오래 생각했을 것이다.오늘은 그러지 않았다.그냥 도어락이 잘 작동했고, 태준이 그걸 물었다.그 정도였다.오후에는 최종 사진을 정리했다.입구 전경.외부 야간 컷.패널 디테일.조명 클로즈업.그리고 7번 사진.팀장님은 완성된 리스트를 확인하다가 모니터에 떠 있는 사진을 한 번 더 봤다.“이 사람 서윤 씨 맞죠?”나는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척했다.“아마요. 촬영할 때 저쪽에 서 있었으니까.”“외부 공유해도 괜찮아요?”“얼굴도 안 보이고,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혹시 모르니까 최종본 나오면 다시 확인해줘요.”“네.”팀장님이 자리로 돌아간 뒤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7번 컷 외부 공유해도 괜찮아?나는 방금 팀장님과 나눈 대화를 그가 들었나 싶어 회의실 쪽을 봤다.유리문 너머로 태준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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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화. 이유 없는 걸음, 먼저 고른 거리 (3)

그렇다고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유리 안쪽에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은 그 정도면 괜찮았다.퇴근 시간은 평소보다 늦어졌다.팀장님의 예상대로 일정표는 한 번 더 바뀌었고, 최종 리스트에도 사진 두 장이 추가됐다.우진은 먼저 퇴근했고, 사무실에는 몇 사람만 남아 있었다.나는 파일을 저장하고 가방을 챙겼다.태준은 회의실 안에서 통화 중이었다.오늘은 먼저 가야겠다 싶어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버튼을 누르자 숫자가 천천히 올라왔다.문이 열렸다.안으로 들어가 닫힘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회의실에서 나온 태준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거리는 애매했다.그가 뛰면 탈 수 있고, 평소 속도로 걸으면 문이 먼저 닫힐 것 같았다.나는 열림 버튼을 눌렀다.태준이 걸음을 조금 빠르게 했다.“고마워.”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조금만 늦었으면 그냥 갔어.”“알아.”“어떻게 알아.”“네 얼굴에 쓰여 있어서.”나는 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정말 그런가 싶었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다음에는 뛰어.”“알았어.”태준은 웃고 있었다.그 웃음이 얄밉지는 않았다.엘리베이터 안에는 우리 둘뿐이었다.태준은 이번에는 한 걸음 뒤가 아니라 내 옆에 섰다.가까운 거리였지만 불편하지 않았다.팔을 움직이면 소매가 닿을 것 같았다.우리는 굳이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회의 길었어?”내가 물었다.“조금. 일정이 또 바뀌었어.”“우리 쪽도.”“다음 주 힘들겠네.”“이번 주부터 이미 힘들어.”태준이 낮게 웃었다.“커피라도 사줄까?”“지금 마시면 잠 못 자.”“그럼 다음에.”다음에.그 말이 자연스럽게 지나갔다.나는 굳이 언제인지 묻지 않았다.1층에 도착해 건물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서늘했다.비는 오지 않았고 도로는 거의 말라 있었다.태준은 입구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난 이쪽으로 갈게.”그가 가리킨 방향은 지하철역과 반대쪽이었다.나는 걸음을 멈췄다.“어디 가는데?”“편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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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이유 없는 걸음, 먼저 고른 거리 (4)

편의점에 들어가자 따뜻한 공기와 라면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태준은 생수 두 병을 집었다.나는 음료 냉장고 앞에 서서 라떼를 구경했다.태준이 내 옆에 멈췄다.“안 사?”“아침에 마실 거 하나 살까 생각 중.”“저당?”“응.”나는 가장 안쪽에 있는 병을 꺼냈다.태준이 물었다.“왜 굳이 안쪽 걸 꺼내.”“더 차가울 것 같아서.”“똑같지 않나.”“기분이 다르지.”태준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런 표정 짓지 마.”“무슨 표정.”“처음 듣는다는 표정.”“처음 들었으니까.”나는 피식 웃으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태준이 내 손에 든 라떼를 봤다.“그거 내일 아침에 마실 거야?”“아마도.”“아침은 따로 먹고?”“먹을 거야.”“뭘.”“아직 정하지도 않았는데.”“계란?”나는 태준을 흘겨봤다.그가 웃었다.“그 얘기 언제까지 할 거야.”“생각날 때까지.”“생각보다 오래 가네.”“요즘은 그런 게 오래 가.”별것 아닌 말들이.먹었다는 말.집에 들어왔다는 말.같이 걷자고 했던 말.나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태준이 생수 봉지를 한 손으로 바꿔 들었다.그의 걸음이 나보다 조금 빨랐다가 곧 느려졌다.“너 원래 이렇게 천천히 걸었어?”내가 물었다.“아니.”“그럼?”“너랑 걸을 때만.”나는 앞을 보며 걸었다.“예전에도?”“아마.”기억을 더듬어봤다.태준은 늘 내 옆에서 걸었다.내가 굽 높은 신발을 신은 날에는 평소보다 천천히 걸었고, 지하철 시간이 촉박한 날에는 내 손목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빠져나갔다.그때는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그가 맞춰주는 걸 당연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몰랐어.”내가 말했다.“말한 적 없으니까.”“그런 건 보통 말 안 하잖아.”“그러네.”태준이 대답했다.그는 생수 봉지를 들고 내 옆에서 걸었다.손을 잡지도 않았고, 일부러 거리를 두지도 않았다.그저 같은 속도로 걸었다.이 정도면 됐다.지하철역 입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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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화. 이유 없는 걸음, 먼저 고른 거리 (5)

“나도 내가 좀 신기해.”태준의 눈이 부드러워졌다.“싫지는 않고?”나는 잠시 생각했다.“싫었으면 두 번 안 했겠지.”말하고 나니 생각보다 직접적이었다.그래도 되돌리지 않았다.태준이 입술 안쪽을 한번 깨물었다.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웃어도 돼.”내가 말했다.“진짜?”“그 정도는.”태준이 결국 웃었다.크게 웃지는 않았지만, 눈가까지 확실히 풀렸다.그 얼굴을 보니 나도 따라 웃게 됐다.“좋아 보이네.”“좋으니까.”이번에는 그 말이 부담스럽지 않았다.나도 좋았으니까.“내일도 퇴근 시간 맞으면 같이 가.”태준의 표정이 잠깐 멈췄다.내가 먼저 덧붙였다.“안 맞으면 어쩔 수 없고.”“맞출 수 있어.”“일 일부러 미루지는 말고.”“그건 안 해.”“그럼 됐어.”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보자.”나는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한 계단 내려갔다가 다시 그를 봤다.“물 무거우면 다음에는 작은 걸 사.”태준이 손에 든 봉지를 내려다봤다.“이 정도는 안 무거워.”“알아. 그냥 한 말이야.”“응.”“가.”“조심해서 들어가.”나는 지하철역 안으로 내려갔다.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대신 입가에 남은 웃음을 굳이 지우지도 않았다.집에 도착하자 도어락이 익숙한 소리를 냈다.문을 닫고 신발을 벗었다.가방과 라떼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뒤 휴대폰을 꺼냈다.[들어왔어.]어제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보냈다.답도 금방 왔다.[강태준]나도 방금 들어왔어.[물은 잘 들고 갔고?][강태준]응.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어.[걱정한 건 아니고.]그렇게 쓰고 보니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나는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다.[다행이네.]읽음이 뜬 뒤 답이 왔다.[강태준]내일은 몇 시쯤 끝나?[아직 몰라.][시간 맞으면 연락할게.][강태준]그래.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다가 다시 들었다.[오늘도 좋았어.]전송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바라봤다.어제보다 덜 떨렸다.답은 잠시 후에 왔다.[강태준]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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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화. 이유 없는 걸음, 먼저 고른 거리 (6)

조금 뒤 짧은 메시지가 왔다.[강태준]다행이다.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기쁘다거나,고맙다거나,기다렸다는 말보다오늘은 다행이라는 말이 좋았다.나는 침실로 들어가기 전 냉장고 문을 열었다.사온 라떼를 문 쪽 칸에 넣었다.차가운 병이 선반에 가볍게 부딪쳤다.내일 아침에 꺼내 마실 것이다.그때 오늘 밤을 잠깐 떠올릴지도 모른다.이유 없이 함께 걸었던 첫날보다,편의점까지 돌아 걸었던 두 번째 날을.나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오늘은 태준이 옆에 있는 일이 전보다 편했다.그 사실을 애써 다른 말로 바꾸지 않았다.그냥 편했다.그리고 좋았다.⸻【태준의 속마음 35】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네가 열림 버튼을 눌렀다.조금만 늦었으면 그냥 갔을 거라고 했지만,나는 네가 잠깐 기다려줬다는 걸 알았다.그걸 굳이 말하지 않았다.네가 해준 일을 알아보는 것과그 의미를 내가 먼저 정하는 건다른 일이니까.우리는 편의점에 들렀다.나는 생수를 샀고,너는 내일 마실 라떼를 골랐다.냉장고 안쪽에 있는 병이더 차가울 것 같다는 네 말이 남았다.예전에도 들었을지 모른다.내가 잊었거나,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요즘은 그런 말들이 오래 남는다.무얼 먹었는지.몇 시에 들어왔는지.걸을 때 어떤 속도를 편해하는지.별것 아닌 것들을다시 알아가는 중이다.너는 내가 걸음을 맞추는 걸처음 알았다고 했다.말한 적이 없으니모르는 게 당연했다.나는 늘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러면서도 네가 알아주기를 바랐다.말하지 않은 기대가서운함이 되었다는 걸이제는 안다.그래서 오늘은 그냥 말했다.너와 걸을 때만천천히 걷는다고.너는 몰랐다고 했고,나는 말한 적 없다고 했다.그걸로 충분했다.지하철역 앞에서 너는내일도 시간이 맞으면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바로 시간을 맞추겠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네가 허락한 건일을 미뤄서라도 만나자는 약속이 아니었다.시간이 맞으면다시 함께 걷자는 말이었다.그 정도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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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화. 말하지 않은, 닮아가는 것들 (1)

수요일 아침에는 다시 하늘이 흐렸다.비가 올 것처럼 잔뜩 낮아져 있었지만, 창문에는 아직 물방울 하나 붙지 않았다.나는 냉장고를 열어 어젯밤 사다 둔 라떼를 꺼냈다.차가운 병을 손에 쥐고 창밖을 봤다.우산을 가져가야 하나.잠깐 고민하다가 휴대폰으로 날씨를 확인했다. 비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애매한 예보였다.나는 라떼 뚜껑을 열었다.이럴 때 꼭 안 가져가면 비가 오는데.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현관 옆의 검은 우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가방을 챙겨 문을 나섰다.삐리릭.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문을 가볍게 밀어봤다.잘 잠겼다.이제는 굳이 두 번 확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출근해?나는 들고 있던 라떼를 한 모금 마신 뒤 답장을 보냈다.[지금 나가.]잠시 뒤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강태준]우산은?나는 현관 쪽을 돌아봤다.이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있었다.[안 챙겼어.][너는?][강태준]나도.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웃었다.[비 오면 둘 다 큰일이네.]답은 짧았다.[강태준]그러게.어제 편의점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저당 라떼를 고르던 나와 생수 두 병을 들고 있던 태준.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며 같이 걷던 길.그런 일들이 하루가 지난 뒤에도 자연스럽게 남아 있었다.이번에는 애써 다른 생각으로 밀어내지 않았다.그냥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사무실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우진은 먼저 와서 모니터 두 대를 번갈아 보고 있었고, 팀장님 자리는 비어 있었다.“좋은 아침입니다.”“좋은 아침이에요.”나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어제 최종으로 고른 촬영본을 외부 공유용 폴더에 옮기고, 파일명을 다시 확인했다.며칠째 같은 사진을 보고 있어서 이제는 순서까지 외울 것 같았다.노트북이 파일을 복사하는 동안 탕비실로 갔다.문을 열자 태준이 커피 머신 앞에 서 있었다.그가 먼저 나를 봤다.“왔어?”“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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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화. 말하지 않은, 닮아가는 것들 (2)

커피 머신이 작게 울렸다.나는 종이컵에 물을 받고 창가 쪽을 바라봤다.아침보다 하늘이 더 어두워져 있었다.“비 오겠다.”내 말에 태준도 창밖을 봤다.“그러게.”“우리 둘 다 우산 없는데.”“퇴근 전에는 그칠 수도 있고.”“안 그치면?”태준이 컵을 들었다.“편의점 가야지.”평범한 대답이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야겠다.”그는 자기 커피를 들고 먼저 문을 열었다.내가 지나갈 때까지 문을 잡아준 뒤 함께 사무실로 돌아왔다.우리는 각자 자리로 갔다.그게 전부였다.예전에는 같은 공간 안에서 태준을 마주칠 때마다 내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부터 생각했다.무심한 척할지,아무렇지 않은 척할지,먼저 보지 말아야 할지.요즘은 그런 생각을 하는 시간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었다.오전에는 다음 프로젝트 회의 자료를 정리했다.일정은 또 바뀌었고, 팀장님은 어제 정리한 표를 새로 만들자고 했다.우진이 옆자리에서 한숨을 내쉬었다.“차라리 다음 주에 정하자고 하면 안 될까요?”“그러면 다음 주에 또 바뀔걸요.”“그렇겠죠?”우진은 체념한 얼굴로 엑셀 파일을 열었다.나도 웃으며 노트북을 돌려 일정표를 다시 맞췄다.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때부터 창문에 작은 물방울이 붙기 시작했다.처음에는 한두 방울이었다.오후 세 시가 지나자 유리 전체가 얇게 젖었다.사무실 안에서 누군가 말했다.“비 오네요.”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봤다.세차게 쏟아지는 비는 아니었다.그렇다고 우산 없이 걸을 수 있을 만큼 약하지도 않았다.아침의 메시지가 떠올랐다.나도.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놨다.태준도 창밖을 봤을 것이다.둘 다 우산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그렇다고 당장 무언가를 정할 필요는 없었다.퇴근할 때까지 기다려보면 된다.그 생각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오후 여섯 시가 넘어도 비는 그대로였다.우진은 먼저 가방을 챙겼다.“저는 편의점에서 우산 사야겠네요.”“저도요.”“같이 내려가실래요?”나는 모니터에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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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화. 말하지 않은, 닮아가는 것들 (3)

“비 안 그쳤네.”내가 말했다.“응.”“편의점 가야겠다.”“같이 가자.”태준이 먼저 말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자동문 너머로 비에 젖은 보도가 보였다. 편의점은 건물 옆으로 조금만 걸으면 됐지만, 그사이에도 옷이 젖을 것 같았다.태준이 출입문 앞에 서서 바깥을 확인했다.“뛸까?”“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걷다가 후회할걸.”“그럼 조금 빨리 걷자.”문이 열리자 축축한 바람이 안으로 들어왔다.우리는 동시에 밖으로 나갔다.비는 생각보다 차가웠다.몇 걸음 지나지 않아 재킷 어깨가 젖고, 머리카락에도 물기가 붙었다.나는 가방을 몸 안쪽으로 당기며 걸음을 빠르게 했다.태준도 옆에서 속도를 맞췄다.“뛰자니까.”그가 말했다.“지금 뛰면 더 이상해.”“이미 젖었는데?”“그래도.”태준이 웃었다.“알았어. 빨리 걷자.”편의점까지는 정말 짧은 거리였다.그런데 비를 맞으며 걷고 있으니 평소보다 멀게 느껴졌다.처마 아래에 도착하자 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넘겼다.태준이 내 얼굴을 보다가 손을 조금 들었다.그러다 멈췄다.“왜?”내가 묻자 그가 자기 눈가를 가리켰다.“여기 머리카락 붙었어.”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됐어?”“아니. 반대쪽.”다시 손을 댔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태준이 나를 보며 물었다.“내가 해도 돼?”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응.”그의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차가운 손끝이 눈가 가까이에 닿았다가 금방 떨어졌다.머리카락 한 가닥을 옆으로 넘겨준 것뿐이었다.그런데도 그 짧은 순간이 또렷했다.비가 처마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도,편의점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잠시 멀어진 것 같았다.“됐어.”태준이 말했다.나는 젖은 앞머리를 손끝으로 한번 만져봤다.“응.”“괜찮아?”“괜찮아.”목소리가 생각보다 늦게 나왔다.태준은 더 묻지 않았다.나도 괜히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편의점 자동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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