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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한 걸음 뒤에, 남은 온도 (5)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할 때쯤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나는 몇 초만 참았다.정말 몇 초.그러고 나서 화면을 열었다.[강태준]천천히 가.나는 그 문장을 보고 아주 작게 웃었다.또 그 말.천천히 가.요즘 우리는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그런데 같은 말인데도 조금씩 달랐다.어제의 천천히 가는 조심스러운 말이었고,오늘의 천천히 가는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렸다.나는 답장을 썼다.[응.]손이 멈췄다.또 응.나는 지웠다.그리고 다시 썼다.[너도 너무 늦지 않게 와.]전송.읽음.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나는 우산을 접고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계단 중간쯤에서 답이 왔다.[강태준]그 말은 좀 좋다.나는 멈췄다.좀 좋다.그 말이 너무 솔직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그런데 곧바로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너무 크게 안 좋아할게.나는 계단에 서서 화면을 오래 봤다.정말.진짜 이 사람은.나는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다.부담스럽다고 쓰려다가, 또 멈췄다.기분 나쁜 건 아니라고 쓰려다가, 그것도 멈췄다.오늘은 이미 너무 많이 말했다.그런데 이상하게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천천히 입력했다.[그건 좀 웃긴데.]보내고 나서 바로 하나 더 썼다.[기분 나쁘진 않아.]읽음.답은 조금 늦게 왔다.[강태준]같이 들을게.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눌렀다.또 그 말.같이 들을게.웃긴데.기분 나쁘진 않아.그 두 말을 하나만 고르지 않고, 같이 듣겠다는 말.나는 그 문장을 보고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플랫폼에는 사람이 많았다.열차가 곧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노란 선 뒤로 물러섰다.나는 그 사이에 서서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심장이 조금 느리게 뛰었다.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아직도 무서웠다.보고 싶다는 말은 아직 크고,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더 크고,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는 건 아직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힌다.그런데 오늘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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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한 걸음 뒤에, 남은 온도 (6)

나는 그 문장을 보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그걸 네가 말해?나는 바로 답했다.[그래도 기분 나쁜 건 아니지?]읽음.이번엔 답이 빨랐다.[강태준]응.잠깐.[강태준]엄청 아닌데.나는 결국 웃었다.현관 불빛 아래에서 혼자 웃고 있는 내 얼굴이 유리문에 희미하게 비쳤다.너무 티 났다.나는 고개를 숙이고 신발장에 기대섰다.진짜 망했다.그런데 오늘도, 그 망함이 그렇게 싫지 않았다.방으로 들어가기 전, 태준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강태준]오늘은 여기까지 할게.나는 화면을 오래 봤다.오늘은 여기까지.내가 어젯밤 말하지 않아도 정해두었던 자리.태준이 오늘 먼저 말해준 자리.나는 천천히 답장을 썼다.[응.]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그리고 조금 있다가 하나 더 보냈다.[그 정도가 좋아.]읽음.태준의 답은 짧았다.[강태준]알았어.또 잠깐.[강태준]그 정도로 있을게.나는 휴대폰을 가슴 쪽에 잠깐 올려두었다가, 바로 민망해서 내렸다.정말 왜 이래.방 안은 조용했다.그 조용함이 오늘도 덜 외로웠다.한 걸음 뒤에 남은 온도.그건 손끝에 붙은 밴드처럼 작고,우산 위에 남은 빗소리처럼 약하고,금방 사라질 것처럼 보이는데도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나는 침대 끝에 앉아 밴드 붙은 손끝을 보았다.아직 조금 따끔했다.그런데 이상하게 그 따끔함까지 싫지 않았다.오늘만.그 순간만.그 정도.우리는 자꾸 작은 말들로 선을 긋고 있었다.그런데 그 선들이 조금씩 길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아주 조금.정말 아주 조금.⸻【태준의 속마음 31】해볼게.그렇게 보내고도 나는 오래 화면을 봤다.잘 자.오늘 고생했어.내일 보자.보고 싶어.전부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참았다.네가 멈춘 자리에서나도 멈춰야 했다.아침에도 휴대폰을 봤다.잘 잤어?그 한 줄도 보내지 않았다.내가 먼저 한 발 더 들어가면또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현장에서 너를 봤다.너는 피하지 않았다.그게 좋았지만그 말도 속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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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화. 오늘의 거리, 내일의 말 (1)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손끝이 먼저 느껴졌다.밴드 붙은 손가락.아주 작은 상처였는데, 이상하게 존재감이 컸다.나는 이불 속에서 손을 들어 올려 한참 보고 있었다.하얀 밴드가 어제보다 조금 구겨져 있었다.손을 씻고, 가방을 들고, 휴대폰을 쥐고, 현관문을 잠그는 동안 자꾸 닿았으니 당연했다.그런데도 그게 꼭 어제의 일이 아직 내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태준의 손.조심스럽게 받쳐주던 손.붙이고 나서 바로 놓던 손.놓는 게 더 어렵다는 걸 알아버린 사람의 손.나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따끔한 건 거의 없었다.문제는 아픈 게 아니었다.별것도 아닌 게 자꾸 생각나는 쪽이 문제였다.휴대폰은 조용했다.어젯밤 마지막 메시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강태준]그 정도로 있을게.그 문장을 다시 보려고 한 건 아니었다.그냥 알림창을 보려다가, 자연스럽게 대화방을 열었고, 자연스럽게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자연스럽게.참 편한 말이다.요즘 나는 자꾸 자연스럽다는 핑계로 태준을 확인했다.메시지가 왔는지.안 왔는지.읽었는지.멈췄는지.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나는 화면을 껐다.오늘은 오픈 첫날이었다.정신 차려야 했다.진짜로.씻고 나와 옷장을 열었다.한참을 보다가 검은 니트를 꺼냈다.그 위에 어제와 비슷한 코트를 걸쳤다.거울 앞에 서니 어제보다 얼굴이 더 말라 보였다.잠을 못 잔 티가 났다.입술 색도 흐렸다.나는 립밤을 발랐다가, 다시 닦아냈다.너무 꾸민 것 같았다.그런데 안 바르면 너무 지쳐 보였다.결국 아주 조금만 다시 발랐다.이런 사소한 짓까지 신경 쓰는 내가 싫어서, 거울을 오래 보지 않았다.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심장이 먼저 반응했다.나는 괜히 신발 끈을 한 번 더 만지고 나서 화면을 봤다.[강태준]오늘 비 온대.나는 그 문장을 한참 봤다.비 온대.그냥 날씨 이야기였다.그런데 그가 고른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출근 조심해도 아니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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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오늘의 거리, 내일의 말 (2)

오픈 시간 직전, 우진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서윤 씨, 이거요.”“아, 고마워요.”“당 떨어질 것 같아서요.”“벌써 보여요?”“조금요.”우진은 웃었다.그는 내 피곤함을 잘 알아차렸다.그게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는, 알아차린 뒤에도 나를 밀지 않아서였다.그냥 커피를 건넨다.받으면 끝.더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따뜻했다.“오늘 끝나면 진짜 쓰러지실 것 같은데요.”“그 정도는 아니에요.”“그 말은 보통 그 정도라는 뜻이던데요.”나는 웃었다.“우진 씨도 은근히 말 안 믿네요.”“업계 생활 오래 하면 다 그렇게 됩니다.”그 말에 나도 모르게 다시 웃었다.그때 시선이 느껴졌다.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래도 알았다.태준이 우리 쪽을 봤다.아주 잠깐.그리고 바로 시선을 거뒀다.예전이었다면 분명 다가왔을 것이다.무슨 얘기해.왜 웃어.커피는 왜 받아.그런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몸으로 티가 났을 것이다.오늘은 아니었다.그는 멀리서 보고, 멀리서 멈췄다.그래서 내가 더 의식했다.사람은 이상하다.가까이 오면 부담스럽고,멀리 있으면 신경 쓰인다.진짜 못됐다.나는 커피 컵을 내려놓았다.우진이 물었다.“많이 쓰세요?”“아니요. 괜찮아요.”“다행이네요.”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웃었다.그래서 더 미안했다.모르는 사람 앞에서 혼자 너무 많은 걸 생각하는 내가.오픈이 시작되자 정말 정신이 없었다.명단에 없는 사람이 왔고, 예정 시간보다 일찍 온 사람이 있었고, 꽃바구니가 도착했고, 사진기자가 조명 위치를 물었다.나는 안내하고, 확인하고, 고개 숙이고, 전화하고, 다시 안내했다.몸이 바쁘니 마음이 조금 잠잠해졌다.그게 좋았다.사람들 사이에서 태준과 마주치는 횟수도 줄었다.멀리서 움직이는 모습만 보였다.그는 일할 때 집중하는 얼굴이었다.감정이 들어갈 틈이 없는 얼굴.나는 그 얼굴을 잘 안다.예전에도 많이 봤다.회의실에서.차 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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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오늘의 거리, 내일의 말 (3)

점심은 대충 샌드위치로 때웠다.사람들이 번갈아 쉬는 동안 나는 뒤쪽 작은 대기실에서 잠깐 앉았다.손끝 밴드는 아침보다 더 구겨져 있었다.떼어낼까 하다가 그냥 뒀다.우진이 들어와서 물었다.“손 괜찮아요?”“네. 거의 안 아파요.”“어제 베인 거예요?”“응. 박스 정리하다가.”“조심하지.”그는 가볍게 말했다.그 말이 편했다.조심하지.끝.그런데 머릿속에는 다른 목소리가 겹쳤다.그건 도와줘도 돼?나는 샌드위치 포장지를 접었다.진짜 그만 생각해.“서윤 씨.”우진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저 하나 물어봐도 돼요?”“뭔데요?”그는 바로 묻지 않았다.커피 빨대를 한 번 만지작거렸다.그가 이런 식으로 망설이는 건 드물었다.“강 디렉터님이랑요.”나는 손끝이 멈췄다.“네.”“예전에 아는 사이였어요?”질문은 생각보다 담백했다.그래서 더 대답하기 어려웠다.아는 사이.그 말은 너무 넓었다.아는 사이였고,모르는 사이가 되려고 했고,지금은 다시 뭐가 되어가는지 모르는 사이.나는 잠깐 포장지를 내려다봤다.“네.”그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것 같았어요.”“티 났어요?”“조금요.”나는 헛웃음을 냈다.“많이 났나 보네요.”“아니요. 많이는 아니고.”우진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두 분 다 안 보려고 하는 게 보여서요.”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두 분 다 안 보려고 하는 게 보여서요.너무 정확해서, 조금 아팠다.“안 보려고 하는 건 보이나 봐요.”“그게 더 잘 보일 때도 있죠.”우진은 커피를 마셨다.나는 그를 봤다.그는 평소처럼 웃지도, 장난치지도 않았다.그냥 조용했다.“불편했어요?”내가 물었다.“아뇨.”그는 바로 대답했다.“서윤 씨가 불편해 보일 때가 있어서 그게 좀 신경 쓰였어요.”“저요?”“네.”나는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멈췄다.오늘은 이상하게 그 말이 목에 걸렸다.“많이 불편한 건 아니에요.”내가 말했다.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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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오늘의 거리, 내일의 말 (4)

사진을 몇 장 더 찍었다.태준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내 쪽으로 더 오지도 않았고, 멀어지지도 않았다.사진이 끝나자마자 그는 한 걸음 물러났다.정말.한 걸음.나는 그걸 보고 말았다.“수고하셨습니다.”사진기자가 말했다.사람들이 흩어졌다.나는 중앙에서 빠져나오려다가 태준과 다시 마주쳤다.아무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태준이 먼저 말했다.“괜찮았어?”나는 잠깐 멈췄다.괜찮았어.괜찮아? 가 아니라.이미 지나간 순간을 묻는 말.나는 대답을 골랐다.“조금 긴장했어.”태준의 눈이 어두워졌다.“미안.”“아니.”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네가 가까워져서 그런 게 아니라.”말하고 나서, 너무 직접적으로 말한 것 같아 입술을 눌렀다.태준은 기다렸다.나는 피할 수 없어서 끝까지 말했다.“사람들이 보니까.”태준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정도였어.”그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알았어.그 말이 예전보다 부드러웠다.예전의 태준은 알았다고 하고도 잘 몰랐다.지금은 몰라도, 모른다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그 차이가 컸다.나는 괜히 덧붙였다.“사진은 괜찮았어.”태준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응.”“그냥.”나는 손끝 밴드를 만졌다.“사진은.”아무 말도 아닌데, 너무 많은 말 같았다.같은 사진 안에 들어온 건 괜찮았다는 말.아직 더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은 나쁘지 않았다는 말.태준은 알아들은 것 같았다.하지만 이번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고마워.”그 한마디만 했다.나는 고개를 돌렸다.“고마울 일도 많다.”“나한텐 많아.”말문이 막혔다.그런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전혀 아무렇지 않은 말이 아니라서.나는 도망치듯 안내 데스크 쪽으로 걸어갔다.뒤에서 태준은 따라오지 않았다.오후가 지나 저녁으로 넘어갈 때, 밖에는 비가 굵어졌다.유리문 너머로 젖은 도로가 보였다.차 불빛이 길게 번지고, 사람들이 우산을 접었다 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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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오늘의 거리, 내일의 말 (5)

비가 내리고 있었다.우산을 펴자, 어제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톡.톡.톡.나는 지하철역까지 걸었다.오늘은 메시지를 기다리지 않으려고 했다.정말로.그런데 역 입구에 다다랐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나는 한숨처럼 웃고 말았다.이 사람도 참.화면을 열었다.[강태준]사진 오면 같이 봐도 돼?나는 멈춰 섰다.비가 우산 위에 계속 떨어졌다.같이.그 단어 하나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업무 사진인데.그냥 프로젝트 사진인데.같이 본다는 말이 왜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 들릴까.나는 답장을 쓰지 못하고 한참 서 있었다.지하철역 입구로 사람들이 내려갔다.우산들이 스치고, 물방울이 떨어지고, 신호음이 멀리서 들렸다.나는 천천히 입력했다.[사무실에서?]읽음.답은 바로 왔다.[강태준]네가 편한 데서.또.자리를 나한테 넘기는 말.나는 그게 고맙고, 조금 얄미웠다.전부 내가 정해야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내가 정할 틈도 없었다.지금은 그 틈이 생긴 것이다.나는 대답을 고르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사무실에서 봐.]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너무 차갑나.그래서 한 줄을 더 썼다.[그래도 같이 보는 건 괜찮아.]전송.읽음.답이 조금 늦게 왔다.[강태준]응.또 잠깐.[강태준]그 말도 같이 들을게.나는 우산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진짜.이 사람은 요즘 자꾸 같은 말로 나를 멈추게 했다.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대신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오늘은 사람이 많았다.퇴근 시간은 지났지만, 비 오는 밤이라 그런지 플랫폼이 붐볐다.나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물기 묻은 우산을 접었다.손끝 밴드가 젖어 있었다.새로 갈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때 옆에서 한 커플이 손을 잡고 지나갔다.남자는 여자 우산을 대신 접어주고 있었고, 여자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나는 그 모습을 잠깐 봤다.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장면이었다.아니, 어쩌면 못 본 척했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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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오늘의 거리, 내일의 말 (6)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대신 침대에 앉았다.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고, 가방에서 오늘 받은 자료들을 꺼냈다.그 사이 휴대폰은 조용했다.태준은 더 보내지 않았다.정말 오늘만 들고 있는 모양이었다.나는 그게 고마웠다.그리고 조금 보고 싶었다.그 말을 인정하는 데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보고 싶다.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메시지로 보내지도 않았다.그냥 속으로만 아주 작게 말했다.보고 싶다.그 말은 아직 컸다.너무 컸다.하지만 예전처럼 무조건 지워야 하는 말은 아니었다.나는 불을 끄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천장에 빗소리가 아주 약하게 얹혔다.오늘 하루가 천천히 지나갔다.같은 사진 안에 섰고,같은 말을 다시 들었고,괜찮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썼고,오늘만이라는 말로 내일을 아주 조금 미뤘다.그게 전부였다.그런데 이상하게 그 전부가 자꾸 마음 안에서 자리를 넓혔다.나는 손끝을 다시 봤다.밴드는 없었다.상처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그런데도 아직 따끔한 것 같았다.사라진 자리에 남는 감각.그게 꼭 태준 같았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대화방을 열었다.마지막 문장은 그대로였다.[강태준]오늘만 잘 들고 있을게.나는 입력창을 눌렀다.아무것도 쓰지 않았다.보고 싶어.쓰면 안 될 것 같았다.아직은.대신 아주 짧게 썼다.[잘 자.]보내고 나서 숨을 멈췄다.읽음.답은 금방 왔다.[강태준]잘 자.끝.그걸로 끝.나는 화면을 껐다.오늘은 여기까지.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거기서 끝나는 게 아쉽지 않았다.내일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나는 눈을 감았다.비가 계속 내렸다.그리고 그 소리가, 오늘은 조금 따뜻했다.⸻【서윤의 기억 19】예전에 태준은 기다리는 걸 못했다.내가 답을 늦게 하면 전화를 했고,전화를 안 받으면 집 앞에 왔고,집 앞에 오면 꼭 말했다.“걱정돼서.”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정말 걱정했을 것이다.그런데 걱정이라는 말로내가 숨을 곳을 전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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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같은 사진 안에, 다른 숨 (1)

사진 파일은 오후 두 시쯤 도착했다.나는 그때 사무실 회의실 구석에 앉아 있었다.오픈 첫날 결과 보고서 초안을 정리하는 중이었다.방문자 수.체류 시간.현장 반응.사진 자료.언론 노출 예정 리스트.숫자와 문장들이 화면 위에 줄지어 있었다.이런 일은 익숙했다.정리하고, 보기 좋게 만들고, 아무도 현장에서 허둥댄 티를 못 느끼게 다듬는 일.나는 그런 걸 잘했다.다만 오늘은 손이 자주 멈췄다.이메일 제목 때문이었다.[현장 사진 전달드립니다]별것도 아닌 제목.그런데 그 안에 어제 우리가 같이 찍힌 사진이 있을 거라는 걸 아는 순간부터,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끝이 이상하게 굳었다.나는 메일을 열지 않고 한참 제목만 봤다.웃기다.사진 한 장이 뭐라고.업무 사진이었다.프로젝트 기록용 사진.보고서에 들어갈 수도 있고, 보도자료 후보로 빠질 수도 있는 흔한 파일.그런데 내 머릿속에는 계속 어제의 순간이 먼저 떠올랐다.조금만 더 가까이요.사진기자의 목소리.옆에서 아주 작게 움직이던 태준.어깨는 닿지 않았는데, 닿은 것처럼 느껴졌던 거리.나는 한숨을 삼키고 메일을 열었다.첨부파일이 열두 개였다.현장 전경.입구.패널.관계자 컷.단체 사진.나는 하나씩 저장했다.파일명을 바꾸고, 폴더를 나누고, 보고서용으로 쓸 것과 내부 기록용으로 둘 것을 나눴다.그리고 마지막에서 멈췄다.단체_메인_03.jpg썸네일 속에서 나는 태준 옆에 서 있었다.작게.하지만 분명하게.나는 파일을 열었다.화면이 크게 바뀌었다.사진 속의 나는 어색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긴장한 티가 났다.입술은 조금 굳어 있었고, 어깨도 평소보다 올라가 있었다.그 옆의 태준은 나보다 훨씬 차분해 보였다.아니, 차분한 척하는 얼굴이었다.나는 그걸 알아봤다.그는 앞을 보고 있었지만, 몸의 방향이 아주 조금 내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어깨가 닿지 않게 애쓴 거리.그런데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은 거리.사진은 이상하게 솔직했다.우리가 감추려고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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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같은 사진 안에, 다른 숨 (2)

회의실 유리문 너머로 태준이 보였다.검은 셔츠에 어두운 코트.오늘은 현장 옷차림 그대로 사무실까지 온 것 같았다.머리는 약간 젖어 있었다.비가 왔나.창밖을 보니 하늘이 흐렸다.비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곧 올 것 같은 색이었다.태준이 문 앞에서 멈췄다.노크했다.그 작은 소리에 내가 먼저 웃을 뻔했다.노크.이제는 회의실 문도 그냥 열지 않는다.“들어와.”문이 열렸다.태준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완전히 닫지는 않았다.조금 열어둔 채였다.그게 또 보였다.누가 보면 이상하지 않게.내가 불편하지 않게.너무 닫힌 공간처럼 느껴지지 않게.이런 것까지 신경 쓰는 사람이 된 건가.아니, 원래도 신경은 썼을 것이다.방향이 틀렸을 뿐.태준은 내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테이블 옆쪽에 섰다.“앉아도 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아주 가까운 옆은 아니었다.의자 하나 반 정도 떨어진 자리.회의실 테이블은 넓었고, 노트북 화면은 내 쪽에 있었다.나는 화면을 돌려야 했다.마우스를 잡은 손이 조금 어색했다.“사진.”“응.”“먼저 봤어.”내가 말했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봤구나.”“업무용이라.”“응. 당연하지.”당연하지.그 말이 나를 조금 편하게 했다.나는 폴더를 열었다.“전경부터 볼래?”“네가 보고 싶은 거부터.”그 말에 손이 멈췄다.또 나한테 맡긴다.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그럼 단체 사진부터.”“응.”파일을 열었다.사진이 화면을 채웠다.나란히 선 우리.그리고 다른 사람들.회의실 공기가 조용해졌다.태준은 화면을 봤다.나는 화면을 보는 척하면서, 옆에 앉은 태준의 반응을 더 많이 보고 있었다.그는 오래 말이 없었다.너무 조용해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나 이상하게 나왔지.”태준이 고개를 돌렸다.“아니.”“긴장한 거 티 나잖아.”“조금.”“봐. 티 나네.”“근데 이상한 건 아니야.”나는 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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