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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열주의》全部章節:第 211 章 - 第 220 章

255 章節

211화. 말하지 않은, 닮아가는 것들 (4)

처마 아래에서 동시에 비닐을 벗기고 우산을 펼쳤다.투명한 우산 두 개가 나란히 섰다.가로등 불빛이 비닐 위에서 흐리게 번졌다.태준의 얼굴도 투명한 우산 너머로 조금 다르게 보였다.“지하철역까지 갈 거지?”그가 물었다.“응.”우리는 다시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각자 우산을 쓰고 걷는데도 생각보다 가까웠다.한 사람이 조금 옆으로 움직일 때마다 우산 끝이 가볍게 부딪쳤다.툭.나는 우산을 옆으로 조금 옮겼다.태준도 반대쪽으로 움직였다.몇 걸음 뒤에 또 우산 끝이 닿았다.이번에는 둘 다 동시에 웃었다.“길이 좁은가?”내가 물었다.“우리가 가까이 걷는 것 같은데.”나는 앞을 보며 우산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그럴 수도 있고.”태준은 더 말하지 않았다.비가 투명한 우산 위로 떨어졌다.검은 우산 아래에서는 소리만 들렸는데, 투명 우산은 물방울이 맺히고 흘러내리는 모습까지 보였다.앞도,옆도,태준의 우산도 전부 흐릿하게 비쳤다.싫지 않았다.편의점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회사 일정과 저녁 메뉴 같은 이야기를 했다.“저녁 뭐 먹을 거야?”태준이 물었다.“아직 안 정했어.”“라면?”“또 그 얘기야?”“계란 넣을 수도 있잖아.”“오늘은 밥 먹을 거야.”“뭐랑?”“집에 있는 거 보고.”“제대로 먹어.”나는 태준을 한번 바라봤다.그의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걱정하면서도 대답을 확인받으려 하지는 않았다.그래서 나도 가볍게 받아들였다.“너도 물만 마시지 말고.”“어제 산 물?”“응.”“그렇게까지 오래 마시진 않아.”“모르지. 강태준인데.”그가 웃었다.“그건 무슨 뜻이야?”“그냥 그런 뜻.”“너도 요즘 그냥이라는 말 많이 한다.”“편하잖아.”“그러네.”지하철역 입구가 가까워졌다.사람들이 우산을 접으며 계단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나는 처마 밑에 서서 새 우산을 접었다.태준도 내 옆에서 우산을 털었다.“같은 우산 두 개네.”내가 말했다.태준이 접은 우산들을 내려다봤다.“헷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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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화. 말하지 않은, 닮아가는 것들 (5)

나는 젖은 비닐을 정리해 손에 들었다.“잘 들어가.”“너도.”계단 쪽으로 한 걸음 옮기다 멈췄다.“태준아.”“응.”“내일은 우산 챙겨.”태준이 내 손에 들린 투명 우산을 한번 봤다.“너도.”“나는 이제 생겼잖아.”“나도 생겼어.”당연한 대답인데 웃음이 났다.“그러네.”“내일 보자.”“응.”나는 계단을 내려갔다.세 칸쯤 내려간 뒤에 고개를 들었다.태준은 아직 입구 앞에 서 있었다.투명 우산을 펼치기 전이었다.눈이 마주치자 그가 먼저 우산을 살짝 들어 보였다.나는 손에 든 우산을 똑같이 들어 보이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에 우산을 펼쳐두었다.검은 우산 옆에 투명 우산이 섰다.모양도 색도 전혀 달랐는데, 나란히 놓고 보니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나는 잠시 우산 두 개를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옷을 갈아입고 젖은 머리를 말렸다.거울을 보다가 눈가에 손을 댔다.태준이 머리카락을 넘겨준 자리에는 당연히 아무 흔적도 없었다.그런데 손끝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은 남아 있었다.불편하지 않았다.그 사실이 조금 낯설었을 뿐이었다.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들어갔어?나는 침대 끝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응.][너는?][강태준]나도 방금 들어왔어.곧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강태준]우산 펴놨어?나는 현관 쪽을 바라봤다.[응. 검은 우산 옆에.][너는?][강태준]나도 펴놨어.나는 화면을 보며 웃었다.아침부터 계속 같은 대답이었다.나도 우산이 없고,나도 비를 맞았고,나도 같은 우산을 샀고,나도 집에 돌아와 펼쳐두었다.잠시 고민하다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오늘은 자꾸 같네.]읽음 표시가 떴다.답은 금방 오지 않았다.조금 뒤 화면이 다시 켜졌다.[강태준]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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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화. 말하지 않은, 닮아가는 것들 (6)

그리고 한 줄이 더 왔다.[강태준]나쁘지 않네.나는 현관에 펼쳐둔 투명 우산을 다시 봤다.각자의 집에 같은 우산 하나씩.그게 별일 아닌데도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응.][나도.]전송한 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창밖에는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빗소리가 창문에 잔잔하게 닿았다.오늘 우리는 같은 비를 맞았고,같은 편의점에서,같은 우산을 하나씩 샀다.나란히 걷다가 우산 끝이 두 번이나 부딪쳤다.그리고 태준의 손이 아주 잠깐 내 얼굴 가까이에 닿았다.그 모든 일이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지나갔다.나는 불을 끄기 전 현관에 한 번 더 다녀왔다.투명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검은 우산 옆에서.오늘은 닮았다는 말이 싫지 않았다.오히려 조금 좋았다.⸻【서윤의 기억 23】투명 우산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비가 너무 잘 보이니까.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도,옆으로 흘러내리는 빗물도,우산 끝에 맺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도 전부 보였다.검은 우산 아래에서는 소리만 들으면 됐다.그날은 달랐다.태준과 같은 우산을 하나씩 샀다.같이 쓴 것도 아니고,누가 누구에게 건넨 것도 아니었다.각자 계산하고,각자 손에 들었다.그런데 나란히 걷는 동안 우산 끝이 자꾸 부딪쳤다.한 번은 내가 피했고,한 번은 태준이 피했다.그러다 둘 다 웃었다.집에 돌아와 새 우산을 펼쳐두었다.검은 우산 옆에 놓인 투명 우산을 한동안 바라봤다.태준의 집에도 같은 우산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각자의 집에서,같은 비를 말리며.나는 그에게 말했다.오늘은 자꾸 같다고.태준은 나쁘지 않다고 했다.나도 그랬다.나쁘지 않았다.조금 닮아가는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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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화. 챙긴다는 말 대신, 남겨둔 것들 (1)

목요일 아침에는 비가 그쳐 있었다.창밖 도로는 아직 젖어 있었고, 건물 유리에는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길게 남아 있었다.하늘은 흐렸다.오늘도 비가 올 수 있다는 예보가 떠 있었다.나는 현관 앞에 세워둔 우산 두 개를 바라봤다.오래 쓰던 검은 우산과 어제 편의점에서 산 투명 우산.투명 우산은 밤새 펼쳐둔 덕분에 거의 말라 있었다. 끝부분에 남은 물기만 수건으로 닦은 뒤 우산을 접었다.검은 우산을 들까 잠깐 고민했지만, 손은 자연스럽게 투명 우산으로 갔다.새로 산 걸 두고 갈 이유는 없었다.나는 가방을 챙기고 현관문을 나섰다.삐리릭.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를 들은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우산 챙겼어?어제 지하철역에서 나눈 말이 떠올랐다.내일은 우산 챙겨.너도.나는 손에 든 투명 우산을 내려다보며 답했다.[응.][너는?]답장은 금방 왔다.[강태준]나도.그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거울에 비친 나는 한 손에 가방을 들고, 다른 손에 투명 우산을 들고 있었다.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출근길 모습이었다.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태준은 이미 회의실에 있었다.유리문 너머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노트북 옆에는 접힌 투명 우산이 세워져 있었다.어제 편의점에서 산 것.내 손에 들린 것과 똑같은 우산이었다.나는 잠깐 그쪽을 보다가 내 자리로 갔다.가방을 내려놓고 우산을 책상 옆에 세웠다.회의실 안의 우산 하나.내 책상 옆의 우산 하나.같은 물건이 서로 다른 자리에 놓여 있었다.그게 괜히 눈에 들어왔다.노트북을 켜자 메일이 쌓여 있었다.다음 프로젝트 제안서 수정 요청.외주 업체 견적서.오후 내부 리뷰 회의 자료.메일을 확인하는 사이 회의실 문이 열렸다.태준이 통화를 마치고 나왔다.그는 자기 자리로 가다가 내 책상 옆에 놓인 우산을 발견했다.“챙겼네.”“너도.”태준이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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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화. 챙긴다는 말 대신, 남겨둔 것들 (2)

오전에는 제안서 레이아웃을 정리했다.팀장님이 보내온 수정 사항은 생각보다 많았다. 표를 옮기고, 이미지를 교체하고, 문장을 줄였다.한 번 정리한 페이지를 다시 손대고 있으니 오전이 금방 지나갔다.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우진은 약속이 있다며 먼저 나갔다.나는 멀리 나갈 기분이 아니라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를 사 왔다.사무실 옆 휴게 공간은 비어 있었다.창가 자리에 앉아 포장을 뜯었다.두 입쯤 먹었을 때 문이 열렸다.태준이었다.한 손에는 빈 캔커피가 들려 있었다.“점심 그거야?”그가 내 앞의 샌드위치를 보며 물었다.“응. 너는?”“먹고 왔어.”태준은 빈 캔을 버리고 냉장고에서 새 커피를 꺼냈다. QR 코드를 찍어 계산한 뒤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나는 남은 샌드위치를 내려다봤다.“태준아.”그가 돌아봤다.“응.”“급한 일 있어?”“아니.”“그럼 앉았다 가.”말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나왔다.태준은 잠시 나를 보더니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커피 다 마실 때까지만.”“누가 시간 정했어?”“네 점심 방해할까 봐.”“말 안 걸면 되잖아.”태준이 캔을 열었다.딸깍.“알았어.”우리는 마주 앉아 각자 먹고 마셨다.창밖은 아침보다 어두워져 있었다.곧 비가 내릴 것처럼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태준은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나도 굳이 대화를 만들지 않았다.샌드위치를 먹고,우유를 마시고,가끔 창밖을 봤다.같은 공간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일이 전보다 편했다.예전에는 침묵이 길어지면 먼저 이유를 찾았다.화가 난 건지.할 말이 있는 건지.누가 먼저 입을 열어야 하는지.오늘의 침묵에는 그런 게 없었다.그냥 점심을 먹는 나와 커피를 마시는 태준이 있었다.“오후 회의 자료 다 봤어?”내가 물었다.“응. 견적이 좀 높더라.”“팀장님 또 한숨 쉬겠네.”“아마.”“수정 많이 될까?”“조명 쪽은 줄일 수 있는 데가 별로 없어.”“그럼 다른 데서 줄이겠네.”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레이아웃도 또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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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화. 챙긴다는 말 대신, 남겨둔 것들 (3)

잠시 뒤 나는 샌드위치 포장을 접어 쓰레기통에 버렸다.“다 먹었어?”“응.”태준은 아직 커피를 반쯤 남겨두고 있었다.“나 먼저 갈게.”“그래.”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그를 봤다.“커피 천천히 마시고 와.”태준이 캔을 든 채 나를 올려다봤다.“응.”그 대답을 듣고 휴게 공간을 나왔다.돌아보지는 않았다.굳이 기다리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태준은 커피를 마시고 들어올 것이다.나는 먼저 내 일을 하면 됐다.오후 세 시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창문에 작은 점처럼 붙더니, 내부 리뷰 회의가 시작될 무렵에는 빗소리가 제법 선명해졌다.팀장님은 견적서를 보자마자 예상대로 한숨을 쉬었다.“여기서 뭘 더 줄여야 하지?”우진이 계산기를 두드렸고, 태준은 조명 항목 중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을 설명했다.나는 제안서 화면에 수정할 내용을 표시했다.회의는 길어졌다.한 시간 안에 끝날 줄 알았던 이야기가 두 시간을 넘겼다.중간에 자료를 넘기다 유리문 옆에 세워둔 우산들이 보였다.내 자리 옆의 투명 우산.회의실 한쪽의 똑같은 우산.오늘은 둘 다 챙겨왔다.그 사실이 별것 아닌데도 마음 한쪽을 편하게 했다.회의가 끝났을 때는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나 있었다.나는 자리로 돌아가 수정 내용을 저장했다.우진과 팀장님이 먼저 나갔고, 태준은 회의실에 남아 자료를 정리했다.가방을 챙기고 우산을 들었을 때 그도 회의실에서 나왔다.태준이 내 손에 든 우산을 확인했다.“스티커 그대로네.”나는 손잡이를 내려다봤다.“오늘은 이게 표시니까.”“내일은?”“내일 떼야지.”“그럼 다른 표시를 해야겠네.”“각자 잘 들고 다니면 돼.”“그게 제일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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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화. 챙긴다는 말 대신, 남겨둔 것들 (4)

우리는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안에는 먼저 퇴근하던 직원들이 몇 명 타고 있었다.나는 앞쪽에 섰고, 태준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누군가와 어깨가 닿지 않도록 조금씩 움직이다 보니 그의 소매가 내 팔에 가볍게 스쳤다.태준이 나를 한번 봤다.나는 아무렇지 않게 앞을 봤다.정말 아무렇지 않았다.1층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로비로 나갔다.자동문 앞에서는 다들 우산을 펼치느라 잠시 멈췄다.나도 사람들 사이에서 투명 우산을 폈다.옆에서 거의 같은 소리가 났다.태준도 우산을 펼치고 있었다.우리는 서로의 우산을 보고 동시에 웃었다.“똑같네.”내가 말했다.“어제도 봤잖아.”“펴놓으니까 더 똑같아.”태준이 내 손잡이를 가리켰다.“그래도 네 건 스티커 있네.”“잘 보고 따라와.”“내가 왜 따라가.”“지하철역 가잖아.”“그러네.”우리는 빗속으로 나갔다.투명한 비닐 위로 빗방울이 연달아 떨어졌다.타닥.타닥.어제보다 비가 굵었다.길을 걷는 사람들도 많아서 몇 번이나 서로에게 가까이 붙어야 했다.우산 끝이 가볍게 부딪쳤다.태준이 우산을 반대쪽으로 기울였다.“네 어깨 젖겠다.”내가 말했다.“괜찮아.”“그러다 또 감기 걸려.”“또?”“예전에 자주 걸렸잖아.”태준이 나를 봤다.“그것도 기억해?”“같이 지낸 시간이 얼만데.”말하고 나서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같이 지낸 시간.굳이 꺼내려던 말은 아니었다.그렇다고 주워 담고 싶지도 않았다.태준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걸었다.“맞네.”그가 말했다.“오래 알았지.”나는 투명 우산 너머로 앞을 봤다.“그래도 요즘은 모르는 게 더 많잖아.”“다시 알면 되지.”담담한 말이었다.무겁지도,급하지도 않았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천천히.”“응. 천천히.”횡단보도 앞에 멈췄다.비에 젖은 도로 위로 신호등 불빛이 길게 번졌다.내일 일정이 떠올랐다.“너 내일 외부 미팅 있지?”“오전에.”“몇 시에 들어와?”“두 시쯤.”“나는 오후에 팀장님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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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화. 챙긴다는 말 대신, 남겨둔 것들 (5)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했다.우산을 접는 사람들 때문에 처마 아래가 복잡했다.나는 가장자리로 비켜서 투명 우산을 접었다.태준도 옆에서 우산을 털었다.“스티커 물에 젖었네.”그가 내 우산 손잡이를 보며 말했다.가격 스티커 가장자리가 물에 불어 조금 들떠 있었다.나는 손톱으로 떼어냈다.“이제 표시 없어.”“바뀌지 않게 잘 들고 있어.”“너나 잘 봐.”태준이 자기 우산을 한번 들어 보였다.“이게 내 거.”“똑같잖아.”“아까부터 내가 들고 있었으니까.”나는 웃었다.“그런 걸로 구분해?”“지금은.”처마 끝에서 빗물이 굵게 떨어졌다.나는 접은 우산을 손목에 걸었다.“내일 연락할게.”“응.”“너무 늦으면 먼저 가.”“알았어.”이번에는 그 대답이 서운하지 않았다.내가 늦으면 태준은 먼저 갈 수도 있다.시간이 맞으면 함께 걷고,맞지 않으면 다음에 걸으면 된다.“내일 봐.”내가 말했다.태준이 나를 바라봤다.“내일 봐.”나는 계단을 내려갔다.중간쯤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태준은 이미 우산을 펴고 돌아서고 있었다.그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붙잡지 않고,기다리지 않고,내일 보자는 말을 남기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그게 오늘은 마음에 들었다.집에 도착하자 우산부터 펼쳐놓았다.검은 우산 옆에 투명 우산이 다시 섰다.손잡이에 붙어 있던 스티커가 사라져 어제보다 조금 익숙해 보였다.나는 젖은 재킷을 벗고 손을 씻었다.저녁을 준비하려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들어갔어?[응.][너는?][강태준]나도.냉장고 안을 살피며 답장을 보냈다.[저녁은?][강태준]먹으려고.[너는 샌드위치 말고 밥 먹어.]나는 두부와 반찬통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먹을 거야.][너도 커피로 끝내지 말고.]읽음 표시가 떴다.[강태준]알았어.잠시 뒤 한 줄이 더 왔다.[강태준]내일 끝날 때 연락해.나는 반찬통 뚜껑을 열다 말고 화면을 봤다.[응.][내일 봐.]이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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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화. 챙긴다는 말 대신, 남겨둔 것들 (6)

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말은 짧았다.보고 싶다거나,기다리겠다는 말도 없었다.대신 저녁을 챙겨 먹으라는 말과,내일 보자는 말이 남았다.나는 밥을 데우고 두부를 접시에 옮겼다.태준도 지금쯤 무언가를 먹고 있을 것이다.정말 먹고 있는지 확인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내가 먹으라고 했으니 알아서 먹겠지.그 정도의 믿음은 생긴 것 같았다.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뒤 현관에 나가 우산을 확인했다.투명 우산은 조용히 물기를 말리고 있었다.내일 비가 오지 않더라도 아마 가방 옆에 세워둘 것이다.태준이 챙기라고 해서가 아니라,필요할 수도 있으니까.그리고 내일 회사에 가면 회의실 어딘가에 같은 우산이 하나 더 놓여 있을 것이다.그걸 보게 되면 아마 또 조금 웃을 것 같았다.나는 현관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오늘은 서로를 챙긴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우산을 가져왔는지 물었고,점심을 먹었는지 확인했고,저녁은 제대로 먹으라고 했다.그리고 내일 보자고 말했다.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그런 말들이 하루 끝에 남아 있었다.⸻【태준의 속마음 36】아침에 투명 우산을 챙겼다.비 예보 때문이었지만,손잡이를 쥐자 네 말이 먼저 떠올랐다.내일은 우산 챙겨.나는 네게 물었다.우산 챙겼어?너는 챙겼다고 했고,내게도 물었다.너는?네가 내 아침을 궁금해했다는 게 좋았다.회사에 도착하니네 책상 옆에도 같은 우산이 세워져 있었다.손잡이에 남은 가격 스티커로네 우산을 알아볼 수 있었다.점심에는 나가려던 나를 네가 불렀다.앉았다 가.나는 네 맞은편에서 커피를 마셨고,너는 샌드위치를 먹었다.대화를 억지로 이어가지 않아도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예전에는 네 곁에 있으면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오늘은 그냥 같은 창밖을 봤다.그걸로 충분했다.퇴근길에는 같은 우산을 펴고 걸었다.내가 우산을 기울이자너는 내 어깨가 젖는다고 말했다.예전에 내가 감기에 자주 걸렸던 것도 기억했다.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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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화. 조금만, 남겨둔 마음 (1)

금요일 아침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창밖은 흐렸지만 도로는 거의 말라 있었다. 휴대폰으로 날씨를 확인해도 하루 종일 비 소식은 없었다.나는 현관 앞에 세워둔 우산을 봤다.오래 쓰던 검은 우산과 며칠 전 편의점에서 산 투명 우산.어제까지는 출근할 때마다 둘 중 어느 걸 들고 갈지 잠시 고민했는데,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투명 우산의 손잡이를 한번 만졌다가 그대로 두었다.비가 오지 않으면 우산은 집에 있는 게 맞았다.나는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섰다.삐리릭.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를 들은 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휴대폰이 울린 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때였다.[강태준]오전 미팅 바로 가.어제 퇴근길에 들었던 일정이었다.[알아.][두 시쯤 들어온다고 했지?]답은 금방 왔다.[강태준]응.[너도 오후에 업체 미팅 있잖아.]나는 화면을 보며 작게 웃었다.서로의 일정을 기억하는 일이 이제는 놀랍지 않았다.[잘 다녀와.]전송하고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잠시 뒤 진동이 한 번 더 울렸지만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많아 확인하지 않았다.1층에 도착한 뒤에야 화면을 켰다.[강태준]너도.짧은 답이었다.그걸로 아침 인사는 끝났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에는 금요일 특유의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일은 여전히 쌓여 있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평소보다 조금 느슨했다. 우진은 책상 위에 초콜릿 봉지를 펼쳐놓고 하나씩 나눠주고 있었다.“서윤 씨도 하나 드세요.”“아침부터 초콜릿이에요?”“금요일이잖아요.”“무슨 상관이에요?”“오늘을 버티게 해주는 마지막 수단입니다.”나는 봉지 안에서 작은 다크초콜릿 하나를 집었다.“그 정도예요?”“제 일정표 보시면 이해하실 겁니다.”우진이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렸다.오전 회의 두 개, 오후 리뷰와 수정 작업, 저녁 팀 회식까지 빼곡했다.내 일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회식은 일정에서 빼도 되는 거 아니에요?”“팀장님한테 말씀해보시겠어요?”“안 할게요.”우진이 웃으며 모니터를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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