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Chapter 21 - Chapter 30

197 Chapters

20화.

“삼촌. 아니, 회장님.”수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착각하시는데, 거긴 제 회사입니다. 제가 주운 쓰레기장이라고요. 어떻게 치우든 그건 제 마음입니다.”“…….”“그리고 기획실? 관심 없습니다.”차윤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인자하던 가면이 벗겨지고, 탐욕스러운 노인의 민낯이 드러났다. 그는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부모를 잃고 나면, 보통은 조심해지는데… 넌 독만 남았구나.”“…….”“괜찮다. 지금은 고개 세울 수 있지. 젊은 객기라고 봐주마.”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뒷짐을 진 채,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다만, 그 목줄은 누가 쥐고 있는지는 잊지 말아라. 네가 아무리 짖어도, 줄을 당기면 끌려오는 건 너야.”차윤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명령했다.“정 내 제안이 싫다면, 한 가지만 해. 그 새로 들어왔다는 경리 과장. 공서린이라고 했던가? 내보내.”수혁의 미간이 좁아졌다.“분란의 씨앗이야. 주제도 모르고 여기저기 들쑤시는 모양인데, 그런 외부인은 위험해. 오늘 당장 정리해. 이게 내 마지막 배려다.”수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차윤호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점심 먹으러 오라고 하시더니, 밥 대신 제 회사에 칼질을 하시려고 부르신 겁니까?”접견실 안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차윤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수혁을 마주 보았다.수혁의 도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챈 눈빛이었다.“칼질이라….”차윤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못 하겠으면, 나가.”축객령이었다.“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라. 한도오토링크? 그거 공중분해 시키는 거 일도 아니야. 네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처신 똑바로 해.”수혁은 묵묵히 몸을 돌려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등 뒤로 차윤호의 서늘한 시선이 꽂혔지만,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한도오토링크로 돌아오는 차 안.후회는 없었다.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처신 똑바로 하라는 삼촌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그렇게는 안 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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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서린이 출근을 하자마자 빠르게 정리하던 서류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밤새 데이터를 돌려 찾아낸 자금 흐름의 특이사항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아직 구체적인 재단 이름까지는 아니었지만, 특정 패턴으로 돈이 빠져나가는 길목을 포착한 터였다.대표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려 하자, 책상에 앉아 있던 한지우 실장이 벌떡 일어났다.“공 과장님.”지우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안경 너머의 눈빛은 서늘했다.“보고서는 저한테 주시면 됩니다. 절차, 말씀드렸을 텐데요.”“긴급 건입니다.”서린은 물러서지 않았다.“자금 세탁 관련해서 추가로 확인된 사안입니다. 대표님이 직접 가져오라고 지시하셨고요.”지우는 서린의 결재판으로 손을 뻗었다.절대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완강한 태도였다.“절차는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서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일에 대해 말하려던 참이었다.벌컥.문이 열리고 차수혁이 나왔다.“…….”지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수혁은 굳어 있는 지우와 서린을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공 과장, 왜 이제 와?”“지금 들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왔으면 들어와야지 뭐 하고 있어. 시간 없어.”수혁은 서린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그러다 문득, 서린을 막아서고 있던 지우에게 시선이 머물렀다.“아.”수혁이 미간을 문질렀다.“내가 말한다는 걸 깜빡했는데.”지우가 눈을 들었다.“앞으로 공 과장이 감사건이라고 하면 바로 들여보내. 나머지는 한 실장이 관리하고.”“하지만… 스케줄 관리상 혼선이 생길 수도 있고, 보안 문제도….”“문제없어. 내가 직접 지시한 사항이니까, 즉시 보고 받을 수 있어야 해.”수혁의 한마디에 한 실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공식적인 절차를 건드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공 과장에게만 별도의 기준이 적용된다는 점은 분명했다.“들어와.”수혁이 대표실로 들어가자, 서린은 한 실장을 지나쳐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쾅, 하고 문이 닫혔다.지우는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손에 쥐고 있던 펜이 무의식적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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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문득 떠오른 오래된 기억은, 동하의 밝은 목소리에 금세 흩어졌다.“과장님도 한 잔 더 하실래요? 제가 뽑아올게요.”“아니에요. 괜찮아요.”서린은 고개를 저으려다, 동하의 넉살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동하 씨 거나 뽑아 와요.”서린의 미소에 동하의 얼굴이 환해졌다.그는 신이 나서 자판기로 뛰어갔다.따스한 햇살, 달콤한 믹스커피,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서린은 아주 잠시,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이 평온한 오후에 섞여 있었다.4층 창가에서 수혁은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1층 화단을 향해 있었다.늘 날이 서 있던 여자.무표정으로 데이터를 들이밀던 서린이, 직원들 사이에 앉아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그리고 웃고 있었다.아주 옅은 미소였지만, 수혁이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적응 잘하네.’수혁은 피식 웃었다.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자신은 저 자리에 끼지 못했다.사람을 믿지 않았고, 사람들도 자신을 믿지 않았다.그런데 서린은 달랐다.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어느새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그게 썩 나쁘지는 않았다.그런데.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온 박동하가 서린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그리고 뭐라 재롱을 떨며 서린을 웃게 만들고 있었다.수혁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저 자식은 일이 없나. 왜 저기서 킬킬대고 있어.’동하가 서린에게 몸을 기울이며 친근하게 구는 모습이 묘하게 거슬렸다.방금 전까지 흐뭇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동하가 뭐라고 말하자 서린이 또 한 번 웃었다.아주 잠깐이었다.하지만 그 짧은 미소가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수혁은 무심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저 미소는 자신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자신을 볼 때는 늘 일만 했다.보고서를 들고 들어올 때도, 감사 결과를 설명할 때도 늘 무표정했다.그런데 저 녀석 앞에서는 저렇게 쉽게 웃는다.별것도 아닌데 자꾸 눈이 갔다.누구한테 웃든 자신이 상관할 일이 아닌데도....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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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악몽의 잔재는 끈질겼다.새벽 내내 시달린 탓에 서린의 눈 밑은 퀭했다.그녀는 평소보다 파운데이션을 두껍게 발라 그림자를 감췄다.나는 공서린이다.지안은 그날 죽었다.출근 길에 차가운 커피를 사 들고 사무실에 들어섰다.“과장님 대표님께서 과장님 오시면 곧바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김다은 대리의 말에, 어제 올린 보고서에 추가로 더 작성한 문서를 들고 대표실로 향했다.이번에는 한 실장이 막아서지 않았다.하지만 지우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서린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볼 뿐이었다.수혁은 모닝커피를 마시며 테이블 위에 펼쳐진 서류들을 보고 있었다.어제 서린이 직통으로 보고했던 자금 흐름 데이터였다.“어제 보고한 이 내용 말이야.”수혁은 서린이 들어오자마자 서류의 한 부분을 펜으로 톡톡 두드렸다.“패턴이 묘하던데. 횡령이라기엔 지나치게 규칙적이고, 액수도 딱 떨어져. 마치 누군가에게 월급을 주는 것처럼.”그는 날카로웠다.서린이 던져준 단서만으로도 이미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네. 그래서 그 종착지를 추적했습니다.”서린은 준비해 온 새로운 보고서를 수혁의 앞에 내려놓았다.“돈이 흘러가는 ‘저수지’를 찾았습니다.”수혁의 시선이 서린이 내민 서류로 향했다.수십 개의 대포 통장을 거쳐, 세탁된 자금이 최종적으로 모이는 곳.[재단법인 미래희망]수혁의 눈썹이 꿈틀했다.그는 익숙하다는 듯, 그러나 아주 불쾌하다는 듯 이름을 읊조렸다.“미래희망재단….”“아시는 곳입니까?”“알지. 겉으로는 청년 창업을 지원한다는 공익 재단이지만, 실상은 여의도 뒷주머니니까.”수혁은 서류를 테이블에 툭 던졌다.“한도그룹이 매년 거액을 기부하는 곳이기도 해. 삼촌이 관리하는 비자금 세탁소 중 하나고.”미래희망재단.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여기 또 있었다.그것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한도오토링크는 결국 그 재단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심장이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한도오토링크의 적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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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동하의 넉살에 김 대리가 깔깔 웃었고, 서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로 이어진 일을 처리하느라, 서린은 밤 10시를 넘기고서도 사무실을 떠나지 못했다.한번 일에 집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다.그래서인지 언제나 원하는 답을 찾아냈다.그 답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파멸이었다.서늘한 어둠만 내려앉은 사무실에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서린의 자리 불빛만이 섬처럼 떠 있었다.타닥, 타닥.키보드 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서린은 미래희망재단의 과거 후원 내역을 엑셀로 정리하고 있었다.눈이 뻑뻑하고 어깨가 결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끼익.유리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아직 안 가셨어요?”고개를 든 서린의 눈이 커졌다.박동하였다.“동하 씨는 왜 다시 왔습니까?”“아, 그게…… 지나가다가 불빛이 보여서.”동하는 거짓말을 잘 못했다.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등 뒤에서 보자기로 싼 통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식당 밥 거의 남기셨잖아요. 배고프실 것 같아서.”통 안에는 김밥과 유부초밥이 들어 있었다.솜씨가 없어 김밥 옆구리는 터져 있었고, 유부초밥에는 밥알이 삐져나와 있었다.“제가 싼 거라 모양은 좀 별론데…… 맛은 있어요.”동하가 젓가락을 내밀었다.서린의 시선이 도시락에 멈췄다.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터진 김밥 옆구리.예전에도 저랬다.새벽마다 도시락을 싸면 김밥은 늘 한두 줄씩 터졌고, 계란말이는 모양이 제각각이었다.그래도 웃었다.‘맛만 있으면 됐지.’누군가의 한 끼를 챙기는 일이 행복했던 시절.서툰 도시락 하나에도 웃을 수 있었던 공지안은 바닷물 속으로 사라졌다.지금 여기 있는 사람은 공서린이었다.“동하 씨.”서린은 젓가락을 받지 않았다.“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부담스럽습니다.”동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그냥 과장님이 너무 못 드시는 것 같아서…… 걱정돼서 그런 건데.”“착각하지 마세요.”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러면 안 돼요.동하 씨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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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시끄러운 소음이 고막을 때렸다.취객들의 고성,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이모님의 걸걸한 외침.회사 근처의 허름한 포장마차는 삶의 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서린은 구석진 테이블에 홀로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을 태웠다.그 감각만이 그녀를 살아 있게 했다.그렇게라도 속을 덥히지 않으면, 아까 남겨진 그 ‘온기’ 때문에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슬픈 사람이잖아요.’동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킨 기분이었다.서린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고개를 들자, 포장마차 구석에 걸린 작은 TV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뉴스 속보가 흐르고 있었다.[여당의 젊은 기수 강민재 의원, 청년 창업 지원을 위한 ‘미래희망재단’ 이사장 취임 예정.]화면 속 강민재는 5년 전과 다름없는, 아니 더 위선적이고 완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자신을 차가운 바닷물 속에 처박아 넣고 올라간 자리.그 꼭대기에서 그는 세상을 향해 선한 얼굴을 팔고 있었다.‘나는 이렇게 힘든데, 당신은 아주 즐거워 보이네요.’소주 잔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다른 손으로 감싸 쥐었지만, 떨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그때였다.드르륵.맞은편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누군가 예고도 없이 털썩 앉았다.“도망친 곳이 겨우 여긴가? 촌스럽게.”차수혁이었다.그는 서린이 놀랄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손에 들린 빈 잔을 빼앗듯 가져갔다.익숙한 손놀림으로 소주를 따라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그리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대표님… 여긴 어떻게.”“직원이 근무지를 이탈했는데, 상사가 찾으러 오는 건 당연하지.”수혁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그는 서린을 비난하거나, 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자신의 잔을 비웠다.“박동하 그 녀석, 꽤 진심이던데.”수혁이 툭 던졌다.“왜 그렇게 모질게 굴었어요?”“…….”“아까 보니까 아주 식겁해서 도망치더구만. 귀신이라도 본 것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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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있었다.5년 전보다 조금 야윈 듯했지만, 눈빛은 더 깊어졌고 미소는 더 여유로워졌다.사람들은 그를 보며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청년의 희망.깨끗한 정치인.차기 대권 주자의 재목.서린은 저 미소 뒤에 숨겨진 살인자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이곳에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숨 막히게 느껴졌다.“공 과장, 괜찮아요?”수혁이 서린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서린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그때, 행사가 시작되고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강민재가 마이크를 잡았다.“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저 목소리.서린의 호흡이 턱 막혔다.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왜곡되어 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야….― 조금만 더 가면, 다 끝나.5년 전 그날의 말들이 강민재의 연설 위로 겹쳐졌다.화려한 연회장의 조명이 흐릿해지고,주변이 차가운 바닷물로 차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속이 메스꺼워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공서린 씨에게 트라우마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깊게 뿌리내려 있어요.유학 시절 상담실에서 들었던 의사의 목소리가 문득 귓가를 스쳤다.그때는 과장이라고 생각했다.서린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버텼다.― 그러니까 그 사람과 직접 마주하거나, 가까이 있는 상황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아요.‘아직은 괜찮아.’‘버틸 수 있어.’다행히 강민재의 연설은 끝났고,몇 사람의 축사가 이어진 뒤 리셉션이 시작되었다.강민재가 단상에서 내려와 테이블을 돌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그는 점점 서린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10미터.7미터.5미터.서린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머리로는 괜찮을 것 같아도, 실제로 만나면 몸이 먼저 알아볼 겁니다.― 그날의 공포를요.더 이상은 무리였다.그날 그 순간의 기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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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호텔에서 돌아오는 차 안은 조용했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었다.서린은 조수석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창밖으로 흘러가는 서울의 야경이 그녀의 텅 빈 동공에 맺혔다 사라졌다.손은 무릎 위에서 깍지를 낀 채 하얗게 질려 있었다.수혁은 핸들을 꽉 쥔 채 앞만 보고 운전했다.평소 같았으면 비아냥거리거나 이유를 캐물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아까 로비 기둥 뒤에서 보았던 서린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수혁은 엑셀을 밟았다. 궁금증이 일었지만, 지금은 덮어두기로 했다.차는 서린의 오피스텔 앞에 멈췄다.“내려.”서린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돌렸다.“...죄송합니다. 오늘 제 행동, 변명하지 않겠습니다.”“변명은 나중에. 지금은 들어가서 쉬어. 꼴이 말이 아니니까.”서린은 고개를 숙이고 차에서 내렸다.수혁은 백미러로 서린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그녀의 뒷모습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평소 같았으면 '내일 출근이나 제대로 해라' 정도로 끝냈을 일이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이미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간 뒤였는데도 자꾸만 그녀의 위태로운 뒷모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괜히 이대로 보내도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수혁은 거칠게 핸들을 꺾어 차를 돌렸다.단순히 일 잘하는 직원을 뽑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자신이 쥔 것은 칼이 아니라, 민우 말대로 터지기 직전의 균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그 균열이, 자신까지 삼킬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수혁의 차에서 내린 서린은 힘없이 꺾여지는 다리에 힘을 주며 쓰러지지 않으려고 입을 꽉 다물고 걸었다.벽을 짚으면서 가까스로 집 앞에 도착하여 도어록의 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가 차가운 복도를 울렸다.철컥.그 짧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서린의 다리가 힘이 풀렸다.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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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단순한 투자 약정서가 아니었다.[신소재 R&D 데이터 일체 양도][V국 페이퍼 컴퍼니로의 지적 재산권 이전]그리고―그 대가로 지불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리베이트 내역.지안의 시선이 멈췄다.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이 문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이건…… 기술 유출이잖아.”입 밖으로 나온 순간, 그 말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렸다.“그것도, 국가 단위로.”대한민국의 핵심 산업 기술을 해외로 고스란히 팔아넘기는 이면 계약.지안의 시선이 다시 화면 아래로 떨어졌다.자금 흐름의 종착지 중에 그 종착지 중 하나에 찍혀 있는 이름.강민재.그가 관리하고 있는 재단이었다.“.... 말도 안 돼.”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두 손으로 심장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심장 박동에 따라 손도 함께 떨렸다.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해 왔던 남자.불우한 아이들을 돕겠다며, 올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수없이 말하던 그 사람이―지금,이 문서 안에 있었다.거대한 범죄의 한가운데에.그때였다.띠리릭-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지안아-”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렸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여기 있었어?”강민재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급하게 뛰어 온 듯 거친 숨이 섞여 있었다.“내가 늦었어, 미―”그의 말이 중간에 끊겼다.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지안을 발견한 순간이었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강민재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으로 질렸다.그가 다가와 USB를 거칠게 뽑아냈다.“오빠.”“너 이거 왜 봐! 남의 책상에 있는 걸 함부로―!”늘 다정하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핏대가 섰다.지안은 떨리는 손을 꽉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이게…… 다 뭐야?”책상을 짚은채, 그를 올려다 봤다.“우리 기술을 해외로 빼돌리는 계약서잖아.”“네가 알 거 없어!”“게다가, 그 돈이 왜 오빠 재단으로 들어와?”“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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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지안이 비틀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윤정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지안아, 왜 이렇게 늦었어? 얼굴이 왜 이리 하얗게 질렸니. 어디 아파?”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하지만 지안은 억지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아니에요, 엄마. 그냥 좀 피곤해서요.”“저녁은? 아빠가 너 기다리시다가 방금 서재로 들어가셨는데. 같이 밥 먹자.”“저 생각 없어요. 먼저 쉴게요.”지안은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문을 닫고, 잠갔다. 등을 문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가방 속에 들어있는 은색 USB가 손에 쥔 채 놓을 수 없는 칼처럼 느껴졌다.‘어떻게 해야 하지.’당장이라도 서재 문을 두드리고, 아버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다.하지만—그럴 수 없었다.아버지는 지금 가장 중요한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평생을 바쳐 준비해 온,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그런데 딸이 만나는 남자가 국가 기술 유출이라는 거대한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그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아버지의 정치 인생은 끝이었다.아버지가 쌓아 올린 모든 명예와 꿈이, 자신 때문에 무너지게 될 게 분명했다.“안 돼. 아빠한테 말할 순 없어.”지안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그날 밤,단 한 순간도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수백 번,수천 번.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다.오빠를 설득하자.강민재를 이 늪에서 끌어내고, 그가 쥐고 있는 이 위험한 문서를 조용히 파기하게 만들자.“내가 끝까지 설득하면 들어줄거야.”그를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다.다음 날 아침.지안의 핸드폰이 울렸다.— 집 앞이야. 잠깐 나와.지안은 세수만 겨우 하고 밖으로 나갔다.집 앞 골목에 세워진 차 안에서, 강민재는 몹시 초조한 얼굴로 지안을 기다리고 있었다.지안이 조수석에 타자마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차가 도착한 곳은 조찬이 맛있기로 소문난 시내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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