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5년 전.서린은 날짜를 짚었다.“당시 한도전자 베트남 법인이 공장 증설을 진행했는데, 자금 집행 직전에 세무 조사를 받았습니다.”“세무 조사?”“네. 그런데 본사 감사 리포트에는 해당 내용이 없습니다. 조사 기록도, 결과 보고도 통째로 빠져 있습니다.”수혁의 시선이 서류 위를 훑었다.지워진 흔적은 보통 더 또렷하다.“그리고 조사 종료 직후, 현지 법인장이 교체됐습니다.”서린의 손가락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같은 시기에 ‘기술 제휴비’ 명목으로 해외 페이퍼컴퍼니에 100억 이상 송금됐습니다.”민우가 몸을 일으켰다.“기술 제휴비? 야, 그거 우리가 심재호 건 털 때 봤던 방식이랑 똑같잖아.”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머릿속에서 다른 장면이 겹쳐졌다.‘냄새가 난다.’출장 직전, 아버지가 했던 말.숫자는 맞는데 실물이 없다.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베트남.세무 조사.기술 제휴비.법인장 교체.그리고.수혁은 천천히 물었다.“이 서류, 어디서 찾았어.”“지하 문서고요. 파기 예정 박스에서요. 차윤호 회장님 재임 시기 자료였습니다.”파기 예정.수혁의 눈빛이 깊어졌다.“정리해보자.”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세무 조사 발생. 기록 삭제. 자금 이동. 인사 교체.”서린이 숨을 삼켰다.“그럼… 선대 회장님의 출장도 그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인가요?”수혁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서린은 펼쳐진 자료를 다시 내려다 봤다.“이상하긴 해요.”“뭐가.”“없애려 했다면 이것도 같이 없어졌어야 하잖아요.”서린이 몇 장을 추려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았다.“그런데 여기에는 송금 승인 번호랑 현지 법인 계좌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민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본사 자료는 없앴는데, 이쪽까지는 손을 못 댄 건가?”“아니면 존재 자체를 몰랐거나요.”정적이 흘렀다.수혁 앞에 있는 건 겨우 몇 장의 서류였다.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누군가 감추고 싶어 했던 일이 있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서류를 보고 있자니,
오후 2시.수혁의 개인 집무실 문이 짧게 두드려진 뒤, 곧바로 열렸다.민우가 들어섰다.손에는 두툼한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탁.봉투가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알아왔어.”민우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소파에 몸을 던졌다.평소처럼 가볍게 굴었지만, 눈빛은 미묘하게 진지했다.“결론부터 말할까?”수혁은 봉투를 열지 않은 채 민우를 바라봤다.“공도윤 군은 현 대통령의 아들이야. 가족관계증명서에도 부친 공대현, 모친 윤정희. 딱 나오더라.”담담한 보고였다.수혁의 표정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다른 가족은.”민우가 피식 웃었다.“없어.”그리고 덧붙였다.“있었는데, 없어.”그는 봉투 안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수혁 앞으로 밀어 넣었다.빛이 바랜 신문 기사 스크랩이었다.오래된 종이 특유의 노란 기색이 가장자리에 스며 있었다.[대선 후보 공대현의 외동딸, 빗길 차량 추락 사고로 실종][2주간 수색 끝에 시신 미발견… 급류에 휩쓸린 것으로 추정][법원, 공지안 양에 대한 실족사 처리, 사망 인정]“외동딸 공지안.”민우가 기사 하단을 손끝으로 두드렸다.“당시 대학생. 캠프에서 활동도 했고, 이미지도 좋았어. 그런데 대선 직전에 사고로 실종. 시신은 못 찾았고, 법원에서 사망 인정.”수혁의 시선이 기사 속 사진에 멈췄다.흐릿한 인쇄 사진.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여자.눈매가 길었다.웃을 때 살짝 접히는 눈꼬리.낯설지 않았다.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내려앉았다.수혁은 기사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분명 서린과는 다른 얼굴이었다.그런데 이상했다.사진을 오래 보고 있을수록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온 국민이 애도했지.”민우가 말을 이었다.“유력 후보가 딸을 잃었다는 뉴스가 전국에 도배됐으니까. 동정 여론이 형성됐다는 분석도 있었고.”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기사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문장 하나하나를 뜯어보듯이.사고.실종.급류.사망 인정
사진으로 봤던 그 단정한 정장 차림이 아니라,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은 영락없는 대학생의 모습이었다.“오랜만이에요. 저번에 뵀을 땐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아니야. 앉아.”수혁은 도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어제 화면 속, 그 얼굴이 맞았다.이목구비, 웃을 때 생기는 눈가 주름까지.“누나, 나 물 좀.”도윤이 자리에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말했다.서린은 익숙하게 물병을 집어 도윤의 잔에 채워주었다.“천천히 마셔. 밖이 많이 더워? 더위도 안타는 애가 왜 이렇게 땀을 흘려.”“뛰어와서 그래. 늦을까 봐.”“땀 좀 닦아. 앞머리 갈라졌어.”서린이 냅킨을 건네자 도윤이 대충 이마를 닦았다.너무나 자연스러웠다.서로를 대하는 말투, 시선 처리, 사소한 챙김까지.수혁은 젓가락을 들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았다.두 사람은 가족이다.그렇다면…….“도윤 군은 요즘 뭐 하고 지내?”수혁이 짐짓 가볍게 물었다.“그냥 학교 다니죠. 졸업반이라 취업 준비도 하고요.”“취업? 전공이 경영학이라고 했나?”“네. 근데 저는 사업보다는 그냥 공부가 더 맞는 것 같아서 대학원 생각 중이에요.”도윤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어제 뉴스에서는 ‘경영 수업을 위해 유학을 준비 중’이라고 했었다.말은 달랐지만, 억지로 끼워 맞추면 못 맞출 정도는 아니었다.“부모님은 뭐라셔?”수혁이 훅 치고 들어갔다.서린의 젓가락질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아… 아버지는 뭐, 제 인생이니까 알아서 하라고 하세요. 워낙 바쁘시기도 하고.”도윤이 태연하게 받아쳤다.“바쁘시다니, 사업하시나?”“네. 뭐, 조그맣게…….”도윤이 서린의 눈치를 살짝 보며 얼버무렸다.‘조그맣게’라. 대한민국을 운영하는 게 조그만 사업이라니.수혁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식사가 이어지는 내내,수혁은 두 사람의 대화에서 모순을 찾으려 애썼다.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아참 누나, 엄마가 김치 주셨어. 차에 있는데 나중에 챙겨가.”“알았어. 안챙겨주셔도 되는데 꼭 챙기시네.”
오후 햇살이 25층 집무실 유리창을 비스듬히 가로질렀다.한도전자의 대표이사 취임식이 끝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갔다.모든 것이 빠르게 정리되었고, 자리도, 명함도, 직함도 달라졌다.한도전자 대표이사실의 대형 벽걸이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오늘 대통령은 청년 자립 지원 사업 우수 참여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 만찬을 진행했습니다.]― 대통령님, 청년 자립 정책에 유독 애정이 크신 이유가 있으십니까?기자의 질문에 공대현이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글쎄요. 내게도 아직 자리 못 잡은 아들이 하나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기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도윤이가 제대한 지도 좀 됐는데 아직 백수예요. 백수. 나라 청년들 자립시키기 전에 내 아들부터 자립시켜야 할 판입니다.이번에는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아드님께서 이 방송을 보면 서운하시겠습니다.― 그러라고 하는 말입니다. 보고 정신 좀 차리라고.공대현도 따라 웃었다.그 순간.집무실에서 결재 서류를 넘기던 수혁의 손이 멈췄다.도윤?익숙한 이름이었다.수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화면 속 대통령이 청년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고, 바로 곁에는 강민재가 서 있었다.행사장 뒤편에는 익숙한 문구가 걸려 있었다.수혁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볼륨을 높였다.조금 전 대통령의 말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됐다.도윤이가 제대한 지도 좀 됐는데 아직 백수예요.설마.“……공도윤?”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수혁은 천천히 노트북을 끌어당겼다.[대통령 아들 공도윤]검색창에 이름을 입력하자 기사와 사진들이 순식간에 화면을 채웠다.공식 행사 사진.해외 봉사 활동 사진.대통령 가족 관련 기사 캡처.그리고.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청년.“……!”수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맞았다.그 체격에 이목구비.웃을 때 접히는 눈매.어딘가 장난스러운 표정까지.틀릴 리 없었다.자신이 봤던 그 얼굴이었다.그렇다면.공서린 역시 대통령
서린은 그들에게서 도망쳤다.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당하고만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다시는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강민재를 끌어내릴 준비도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다.만일 자신이 사고를 당하더라도, 혼자 곱게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서린은 그 때의 일과 USB가 보관된 장소를 적은 고소장을 책상 깊숙이 넣어 두었다.강민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서린의 목소리가 담담했다.하지만 수혁은 알았다.그동안 얼마나 위험한 줄다리기를 하며 살아왔는지,담담하게 전하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수혁은 서린을 깊이 안았다.“난 그 놈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조금만 잘못됐어도 지금 자신의 품에 있는 사람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그 생각을 하자 뒤늦게 화가 치밀었다.그리고 그 모든 걸 혼자 견뎠을 서린을 생각하면 속이 아렸다.“지금 나 위로 해 주는거에요?”“위로는 무슨. 난 네가 그 놈과 같이 있는 것 자체가 기분 나빠.”강민재.이제 그 이름만 생각해도 속이 뒤틀렸다.“아무것도 안 해도요?”“응.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싫어.”“그 정도로?”“그러니까 너는 괜찮아도, 난 안괜찮아.”“으음... 저 기분이 좋아졌어요.”“그럼 안겨야지, 이리와.”수혁이 팔을 벌리자 서린이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입술이 닿았다.천천히, 깊어졌다.수혁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침실로 향하는 걸음이 조용했다.침대 위에 눕혀진 서린을 내려다보다가 수혁이 서린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상 줘야겠네.”“상...이요?”“응. 예뻐서.”“언제는 안예뻤어요?”“기억하고 있었잖아.”“뭘요?”“나한테 기대라는 말.”“-예? 읍-”두 사람의 숨이 섞였다.밖은 여전히 고요했다.그러나 어딘가에서, 이미 다른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걸이 밤의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희미한 햇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서린이 먼저 눈을 떴다.옆에서 느껴지는 체온.서린은 조심스럽게 그
가로등 아래로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들어가면 출발해야지.’기어에 손을 올리던 순간,시야 끝에서 붉은 불빛 하나가 짧게 번졌다.수혁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맞은편 골목 어귀.오피스텔 입구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한 남자가 서 있었다.담배를 문 채,건물 쪽을 바라보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그리고 그 뒤,어둠 속에 세워진 검은 세단.심장이 불쾌하게 내려앉았다.‘…저 새끼.’수혁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내렸다.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남자가 입에 문 담배를 길게 빨아당겼다.주황빛이 얼굴을 스쳤다.“미친….”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수혁은 그대로 서린의 뒤로 다가가 허리를 감싸 안듯 끌어당겼다.놀란 서린이 숨을 들이켰다.“쉿. 나야.”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경계가 풀렸다.“왜요…?”“뒤 돌아보지 마.”어깨를 감싸며 걸음을 내디뎠다.“그냥 나랑 가.”수혁은 그녀를 자신의 차로 데려가서 조수석 문을 열어 거의 밀어 넣듯 태웠다.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시동은 걸지 않았다.“무슨 일이에요…?”“저기.”턱짓으로 어두운 골목을 가리켰다.담뱃불이 다시 한번 깜빡였다.그 순간, 서린의 숨이 멎었다.강민재.“집요하네.”어금니를 꽈악 다물며 낮게 내뱉었다.그는 시동을 걸고, 조용히 차를 움직였다.서린의 손이 떨렸다.“죄송해요… 저 때문에—”“그만.”수혁이 말을 잘랐다.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단단히 감쌌다.“네 잘못 아니야.”서린은 그 말이 귓가를 울리고 나서야, 멈춰 있던 생각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도윤은 분명 괜찮다고 했다.엄마도, 아버지도 잘 넘겼다고.그런데 왜.오늘 집에서 원하는 대답을 못 들었나.그래서 직접 확인하러 온 건가.“오늘은 안 되겠다. 우리집으로 가자”서린이 고개를 들었다.수혁의 옆얼굴은 결심으로 단단했다.“싫다고 해도 오늘은 안 보내.”서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시각.강민재는 골목을 벗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