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Chapter 11 - Chapter 20

27 Chapters

10화. 살아 있었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사무실 한쪽에서는 도시락 뚜껑 여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는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모니터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엑셀 파일이 수십 개째 열리고 닫혔다.숫자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의 지도로 이어지고 있었다.겉으로 보기에는 정신없는 회사였다.하지만 돈의 흐름은 생각보다 선명했다.분명한 길이 있었다.다만 그 길 곳곳에 썩은 찌꺼기가 쌓여 있을 뿐.서린은 잠시 눈을 감고 미간을 눌렀다.모니터를 오래 들여다본 탓인지 눈이 뻐근했다.그 순간.머릿속에 익숙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강민재.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5년 전.그는 공지안의 연인이었다.그리고 누구보다 권력을 원하던 남자였다.서린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높은 빌딩 사이로 흐릿한 하늘이 보였다.사고 이후.강민재는 슬픔에 잠긴 유족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들었다.아버지 앞에서는 눈물을 흘렸고,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며 무릎까지 꿇었다고 했다.사람들은 그를 의리 있는 청년이라고 불렀다.아버지도 그렇게 믿었다.딸을 잃은 시간을 함께 견뎌낸 사람.그래서 곁에 두었다.믿었다.하지만 서린은 알고 있었다.그것이 사죄가 아니라 거래였다는 것을.차가운 물속에 자신을 남겨두고 떠난 남자.그 비밀을 묻은 채 권력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간 남자.어머니만은 처음부터 그를 믿지 않았다.구체적인 이유는 설명하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경계했다.그리고 지금.강민재는 더 이상 수행비서가 아니었다.권력의 복심.여당의 젊은 기수.차기 총선의 핵심 전략가.서린의 손이 천천히 주먹으로 말려 들어갔다.손톱 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그는 성공했다.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만든 대가로.“신입, 이거 정리 좀 해 봐.”툭.서류 뭉치 하나가 책상 위에 떨어졌다.상념이 끊어졌다.고개를 들자 옆 팀 과장이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그는 서린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다른 직원에게 소리를 지르며 걸어갔다.서린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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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찾아낸 것

출근 이튿날 오전 10시.서린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와요.”문을 열고 들어가자 차수혁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했고, 테이블 위에는 식어버린 커피와 풀어헤친 넥타이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밤을 새운 흔적이었다.수혁은 턱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벌써 끝났어요?”대수롭지 않게 묻는 말투였다.기껏해야 영수증 몇 장 안 맞는 걸 찾아왔거나, 직원들 소소한 횡령 정도를 들고 왔겠거니 생각하는 눈치였다.서린은 대답 대신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툭.묵직한 소리가 났다.수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서류로 향했다.“생각보다 많네요.”“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수혁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서린은 맨 위 페이지를 펼쳤다.형광펜으로 표시된 숫자들이 빼곡했다.“처음엔 단순 누락인 줄 알았습니다.”“처음엔?”“네.”서린은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사각.종이 넘기는 소리가 조용한 대표실 안에 울렸다.“그런데 같은 패턴이 반복됐습니다.”수혁이 몸을 조금 앞으로 숙였다.“무슨 패턴인데.”“특정 딜러 세 명.”서린이 표시된 이름을 짚었다.“이 사람들을 통해 매입된 차량만 유독 비쌉니다.”“얼마나?”“평균 시세보다 15퍼센트.”“그럴 수도 있죠.”“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서린은 또 한 장을 넘겼다.“그래서 수리비를 봤습니다.”수혁의 시선이 서류에 고정됐다.“수리비가 추가로 붙어 있습니다. 평균 10퍼센트.”“오래된 차면 이상할 거 없고.”“문제는 그 다음입니다.”잠시 정적이 흘렀다.서린은 수혁을 바라봤다.“수리한 흔적이 없습니다.”수혁의 손이 멈췄다. 담배 끝에서 재가 길게 늘어졌다.“뭐라고?”“정비소 청구서는 있습니다.”서린은 다른 자료를 꺼내 나란히 놓았다.“그런데 부품 발주 내역이 없습니다.”“......”“엔진을 들어냈다는데 가스켓 하나 산 기록이 없어요.”“같은 방식이 세 달째 반복됐습니다.”서린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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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그러면 그렇지

무안할 법도 한데, 동하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서지 않았다.“아니,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러죠. 여기 차가 3천 대가 넘어요. 혼자서 못 찾으십니다. 번호만 불러주세요. 제가 발은 진짜 빠르거든요.”그의 눈은 진심이었다.어떤 흑심이나 수작이 아니라, 그저 땀 흘리는 사람이 안쓰러워 도와주고 싶어 하는 순수함.“필요 없다고 했습니다.”“혹시… 그 차 찾으시는 거 아니에요?”서린이 돌아서려는데, 동하가 서린의 손에 들린 리스트를 힐끔 보고 말했다.“12가 34XX. 검은색 제네시스.”서린의 발이 멈췄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아세요?”“알죠. 제가 지난주에 입고 처리했거든요.”동하는 뿌듯한 표정으로 캔커피를 서린의 손에 쥐여주었다.“근데 그 차, 여기 없어요.”서린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없다니요?”“‘유령차’거든요. 서류상으로는 B-12 구역에 주차되어 있다고 나오지만.”서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유령차.“그게 무슨 말입니까?”“아, 모르시는구나. 여기서는 그렇게 불러요. 서류만 들어오고 차는 안 들어오는 거. 보통 높은 분들이 잠깐 서류 작업 필요해서 돌리는 거라고 하던데…. 저희 같은 말단들은 건드리면 안 되는 차죠.”동하는 목소리를 낮추며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근데 그거 찾으시는 거면, 조심하세요. 김 사장님이 관리하는 거라 예민하시거든요.”결정적인 단서였다.서린의 시선이 리스트 위에 멈췄다.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씩 맞물리기 시작했다.서린은 손에 들린 차가운 캔커피를 꽉 쥐었다.이 남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그저 도와주고 싶어서, 친절을 베풀고 싶어서 던진 말이 서린에게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다.서린은 동하를 올려다보았다.그는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서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동하를 밀어내는 대신, 처음으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박동하 씨라고 했죠.”“네! 동하라고 부르시면 됩니다.”“그 유령차, 또 어디 있는지 알아요?”“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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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과장 발령

평소라면 전화벨 소리와 고성으로 아수라장이었을 사무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직원들은 출근을 하자마자 하루 일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있었다.“주목.”짧고 낮은 목소리 하나가 소음을 잠재웠다.차수혁이었다.그는 평소처럼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사무실 중앙에 서 있었다.그 옆에는 공서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호기심, 경계, 그리고 무시. 다양한 감정이 섞인 눈빛들이었다.“인사해. 오늘부로 경영지원팀 과장으로 발령 난 공서린 씨다.”술렁임이 일었다.과장.입사 이틀 차, 그것도 경력직 면접만 보고 들어온 외부인에게 주어지기엔 파격적인 직책이었다.영업 1팀장 심재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려 했지만, 수혁이 더 빨랐다.“앞으로 회사 내 모든 자금 집행, 정산, 그리고 감사 권한은 공 과장이 갖는다.”수혁의 시선이 사무실을 천천히 훑었다.“10원짜리 하나라도 공 과장 결재 없이는 밖으로 못 나간다. 딜러 수수료, 매입 자금, 하다못해 너희들 회식비까지 전부.”“대표님, 그건 너무…”“불만 있나?”수혁이 심 팀장을 쳐다보았다.서늘한 눈빛에 심 팀장은 입을 다물었다.“공 과장의 말은 곧 내 말이다. 협조가 아니라, 지시에 따르도록. 이상.”수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표실로 들어갔다.블라인드가 내려가고, 사무실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직원들은 멍하니 서린을 바라보았다.이제 그녀는 투명 인간이 아니었다.그들의 밥줄을 쥔 ‘감시자’였다.사무실 구석에서 작은 숨소리들이 새어 나왔다."입사 이틀 만에 과장?""감사 권한까지 준다고?""대표가 미친 거 아냐?"누군가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이미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그동안 대충 넘기던 영수증 하나, 관행처럼 처리하던 정산 하나까지 모두 다시 들여다볼 사람이 생겼다는 뜻이었다.특히 몇몇 직원들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장 크게 동요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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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제대로 물어왔네

“아까 말했던 그 유령차들.”동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서린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아, 업무 때문에 그러시는구나.”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테이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그거요, 보통은 ‘F구역’ 끝에 둬요. 단지 제일 안쪽이라 가로등도 없고 CCTV 사각지대거든요.”“F구역….”“거기 있는 차들은 대부분 ‘대기 중’인 차들이에요. 서류 작업 끝나면 밤늦게 트레일러가 와서 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저번에 야근하다가 몇 번 봤어요.”빙고.서린이 찾던 정보였다.밤에 몰래 실어간다는 것은, 정상적인 매매가 아니라는 뜻이다.“다 먹었으면 일어나죠.”“네? 벌써요? 아직 반도 안 드셨는데….”서린은 계산서만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동하는 허겁지겁 남은 국밥을 입안에 밀어 넣으며 뒤를 따라 나왔다.“과장님, 설마 지금 바로 가시려고요?”“네.”“해 지면 F구역은 아무도 안 가는데….”“그래서 지금 가는 겁니다.”동하는 영문도 모른 채 침을 꿀꺽 삼켰다.과장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어둠이 짙게 깔린 매매 단지 안쪽, F구역.이곳은 다른 구역과 공기부터 달랐다.폐차 직전의 차들이 쌓여 있어 음산했고, 가로등은 깨져서 깜빡거리고 있었다.“과장님, 진짜 들어가시게요? 여기 좀 위험한데….”동하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확인만 하고 갈 거예요. 무서우면 돌아가요.”“아뇨! 제가 지켜드려야죠. 발밑 조심하세요.”동하는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서린의 발밑을 비춰주었다.자신이 더 무서워하면서도 앞장서는 모습.서린은 쓴맛을 삼키며 차대번호를 대조했다.[12가 34XX. 제네시스 G80.]서류상으로는 ‘엔진 침수로 인한 전체 교체 및 판금 도색’으로 1,500만 원의 수리비가 청구된 차였다.“찾았다.”구석진 곳, 먼지가 뽀얗게 쌓인 검은색 세단이 보였다.서린은 다가가 보닛을 열려 했지만, 잠겨 있었다.곤란해하자 동하가 주머니에서 만능 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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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소란피우지 마세요.

다음 날 아침, 출근한 서린의 책상 위에는 거대한 서류 탑이 쌓여 있었다.어제까지만 해도 전자 결재로 넘어오던 건들이 죄다 종이 뭉치로 돌아와 있었다.매입 계약서, 성능 점검 기록부, 딜러 수수료 청구서. 수백 장은 족히 되어 보였다.“이거, 오늘 오전까지 다 처리해 줘요.”영업 1팀장 심재호가 지나가듯 툭 던지고 갔다.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서린은 말없이 서류 더미를 바라보았다.‘이제 시작이구나.’단순한 업무 지시가 아니었다.일종의 시위였다.‘감히 우리 밥그릇을 건드려? 어디 한번 당해 봐라.’그러거나말거나.오전 내내 사무실은 아수라장이었다.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렸다.“야! 경리! 내 돈 언제 들어와! 차 판 지가 언젠데 아직도 입금이 안 돼!”“서류 반려됐다는 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다 이렇게 해왔는데!”현장 딜러들이 사무실로 들이닥쳐 고성을 질렀다.심 팀장은 그들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난처하다는 듯 연기를 했다.“아니, 나한테 그러지들 말고. 저기 새로 오신 공 과장님한테 따져. 그분이 깐깐하셔서 결재를 안 해주신다잖아.”화살은 정확히 서린에게로 향했다.험상궂은 딜러 몇 명이 서린의 책상을 둘러쌌다.책상을 쾅 내리치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어이, 신입. 펜대 좀 굴린다고 유세 떠나 본데, 우리 같은 현장직들 굶어 죽으라는 거야?”“규정? 웃기지 마라 그래! 대표님도 안 건드리는 걸 네가 뭔데 막아!”욕설이 섞인 고성이 서린의 고막을 때렸다.보통의 여직원이라면 울음을 터뜨리거나 겁에 질려 도망쳤을 상황이었다.하지만 서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녀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소란 피우지 마세요. 업무 방해입니다.”“뭐? 업무 방해?”딜러 중 한 명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그때 심 팀장이 슬그머니 다가왔다.그는 딜러들을 진정시키는 척하며 서린의 책상 앞에 섰다.“공 과장. 융통성 있게 갑시다, 좀. 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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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쫄지도 않고.

심 팀장은 김 대리를 쏘아보다가, 다시 서린을 돌아보며 주먹을 쥐었다.그때였다.“그만.”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대표실 쪽에서 들려왔다.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서린도 고개를 돌려 차수혁을 바라보았다.대표실 문이 열려 있었다.차수혁이 문가에 기대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을까.그의 표정은 무표정해서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하지만 이 상황이 그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무표정한 얼굴 뒤로 스쳐 지나가는 기대감만큼은 서린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차수혁을 발견한 심 팀장이 놀란 듯 당황하며 손을 내렸다.“대, 대표님.”그는 억울하다는 듯 표정을 바꾸며 수혁에게 다가갔다.“아니, 대표님. 저 신입 과장이 말입니다. 현장 상황은 무시하고 규정 타령만 하니 지금 업무가 마비됐습니다. 제가 교육 좀 시키려고….”수혁은 심 팀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천천히 걸어왔다.그의 구두 소리가 뚜벅뚜벅 사무실을 울렸다.서린의 책상 앞에 멈춰 선 그의 시선이 난장판이 된 서류 더미와 모니터에 떠 있는 횡령 리스트를 훑었다.수혁의 시선이 서린에게 닿았다.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보통은 이쯤에서 변명하거나,대표 뒤로 숨으려 한다.아니면 겨우 한 번 이겼다는 기세에 취해 얼굴부터 달라진다.하지만 서린은 달랐다.이긴 사람의 표정도,구원받은 사람의 표정도 아니었다.해야 할 일을 마친 사람처럼 담담했다.수혁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합격’이 정도면 칼로 써먹어도 되겠네. 생각보다 더 잘하는데.“심 팀장.”“예, 대표님.”“당신,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수혁은 책상 위에 놓인 서린의 파일(심 팀장의 비리 내역)을 집어 들었다. 쓱 훑어보더니 심 팀장의 가슴팍에 툭 던졌다.“이 회사가 굴러가는 건, 너희들이 차를 잘 팔아서가 아니야. 내가 너희들 뒤를 봐주고 있어서지.”“……예?”“사고 차를 무사고로 속여 팔고, 수리비 삥땅 치고.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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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비서가 필요해

모두가 퇴근한 늦은 밤 11시에도 한도오토링크 사장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테이블 위에는 공서린 과장이 넘기고 간 보고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혁은 넥타이를 풀어 헤친 채, 붉은 펜으로 난도질 된 서류들과 씨름하고 있었다.눈이 뻑뻑했다. 머릿속에는 딜러들의 이름과 자금의 흐름, 그리고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뒤엉켜 돌아다녔다.띠리릭, 띠리릭, 척.정적을 깨고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노크도, 인터폰 호출도 없었다.이 사무실의 비밀번호를 아는 외부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문이 열리고,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손에는 서류 가방 대신 편의점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꼴 봐라. 한도그룹 회장님 되기 전에 과로사부터 하겠네.”정민우였다.국내 굴지의 로펌 소속 변호사이자, 수혁의 대학 동기.그리고 5년 전 수혁의 부모님 장례식장에서부터 지금까지, 유일하게 곁을 지킨 친구였다.수혁은 고개도 들지 않고 서류를 넘기며 대꾸했다.“남의 사무실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변호사라는 놈은 주거 침입 죄도 모르냐?”“비밀번호 0000으로 해놓은 놈이 할 말은 아니지. 보안 의식이라곤 없는 놈.”민우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비닐봉지에서 캔커피 두 개와 샌드위치를 꺼냈다.값비싼 위스키나 시가가 아니었다.두 사람의 우정은 그런 허세가 필요 없을 만큼 건조하고 단단했다.“먹고 해. 빈속에 담배만 피우지 말고.”수혁은 그제야 펜을 놓고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이 시간에 웬일이야. 청구할 자문료라도 생겼냐?”“지나가던 길이다. 네가 요즘 사고 치고 다닌다는 소문이 하도 흉흉해서, 친구 얼굴이나 보러 왔지.”민우는 수혁이 보고 있던 서류 뭉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그 ‘신입’이 만든 거냐? 새로 뽑았다는 경리 과장.”“어. 칼이 아주 잘 들더라고. 덕분에 심 팀장 그놈은 지금 숨도 못 쉬고 있고.”“잘됐네. 근데 수혁아.”민우는 커피 캔을 따서 수혁에게 건네며,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칼이 너무 날카로우면, 칼집도 좋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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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직통라인

다음 날 아침, 하루 근무가 시작됨과 동시에 수혁이 인터폰을 눌렀다.“경영지원팀 한지우 대리. 지금 내 사무실로 와.”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한지우가 들어왔다.단정한 정장 차림, 흐트러짐 없는 쪽 찐 머리, 그리고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뿔테 안경. 마치 감정보다 규율이 먼저 배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그녀가 수혁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부르셨습니까, 대표님.”목소리에는 톤이 없었다.서린의 차가움과는 다른, 철저히 훈련된 사무적인 건조함이었다.수혁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30대 초반. 일 잘하고 입 무거운, 전형적인 비서실의 에이스였던 여자.왜 그녀를 잊고 있었을까.“한 대리.”“네.”“아니, 이제 한 실장이라고 불러야겠네.”지우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것이 그녀가 보인 유일한 동요였다.“오늘부로 자리를 옮겨. 내 방 바로 앞으로.”“… ?”“비서실장이다. 내 일정, 결재 서류, 외부 미팅, 그리고 내 책상 위에 올라오는 모든 것들. 네가 1차로 걸러. 내 허락 없는 사람은 쥐새끼 한 마리도 들이지 말고.”수혁은 의자를 돌려 창밖을 보며 덧붙였다.“할 수 있겠어?”보통이라면 당황하거나, 이유를 물었을 것이다.하지만 지우는 질문하지 않았다.“알겠습니다. 대표님.”대답은 즉각적이었다.마치 지난 3년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지금 바로 책상 옮기고 업무 파악 시작하겠습니다. 10분 뒤에 커피 올리겠습니다. 투 샷에 얼음 세 개, 맞으시죠?”수혁은 픽 웃었다.자신의 취향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래. 부탁해.”지우는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사무실을 나갔다.문을 나서자마자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대표실 앞 비어 있던 책상은 불과 십여 분 만에 새로운 자리로 바뀌었다.노트북과 일정표, 결재함이 빈틈없이 정리됐고, 전화기 선 하나까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사무실 직원들이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한 대리가 저기로 갔네.""그동안 비서들은 1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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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본사 호출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지 않는다.대신, 더 큰 포식자에게 제 발로 목줄을 내민다.영업 1팀장 심재호가 그랬다.서린의 압박에 의해 횡령액 2억 4천만 원을 토해내야 할 상황.그는 돈을 갚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유흥비와 도박으로 탕진한 지 오래였다.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밀고뿐이었다.늦은 밤, 아무도 없는 비상계단 구석에서 심재호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수신인은 한도오토링크가 아닌, 한도그룹 본사 비서실의 직통 번호였다.연결음이 길어질수록 심재호의 입술이 바짝바짝 탔다.— 여보세요.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재호는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비굴하게 속삭였다.“예, 실장님. 접니다. 심재호입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용건만 말해요.“지금 상황이 심각합니다. 차 대표가… 예, 완전히 돌았습니다. 외부에서 근본 없는 여자를 경리 과장으로 앉히더니, 장부를 다 뒤집고 있습니다.”심재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단순한 감사가 아닙니다. 이러다가는… ‘그 자금’ 루트까지 다 드러나게 생겼습니다. 회장님께서 신경 쓰시는 그쪽 라인까지 건드리고 있다고요. 제 선에서는 이제 통제가 안 됩니다. 예, 예… 부탁드립니다.”전화기 너머는 잠시 침묵했다.심재호는 숨도 쉬지 못한 채 대답을 기다렸다.— 알았어요.짧은 한마디뿐이었다.더 이상의 질문도, 화도 없었다.하지만 그 담담한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심재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본사 비서실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움직인다는 건, 이미 회장에게 보고가 끝났다는 뜻이었다.전화를 끊은 심재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하지만 입가에는 비열한 미소가 번졌다.흐흐 네가 아무리 독사라 해도, 회장 앞에서는 지렁이에 불과할 테니.어떻게 되나, 어디 한번 보자.***오늘도 어제와 같은 아침이었다. 수혁의 책상에는 식은 커피가 놓여있었다.짧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대표실 문이 열리더니 한지우 실장이 들어왔다.그녀의 표정은 평소처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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