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Chapter 11 - Chapter 20

197 Chapters

10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사무실 한쪽에서는 도시락 뚜껑 여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는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었다.그때였다.“신입, 이거 정리 좀 해 봐.”툭.서류 뭉치 하나가 책상 위에 떨어졌다.고개를 들자 옆 팀 과장이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오늘 지급 나갈 거니까 전산이랑 맞는지만 확인해.”“네.”서린은 서류를 집어 들었다.차량 이전비 정산 내역이었다.아직 정식으로 맡은 업무도 없던 터라 서린은 모니터에 띄워놓았던 자료를 한쪽으로 밀고 서류를 펼쳤다.차량번호.매입일.이전비.지급처.전산에 입력된 내역과 하나씩 대조했다.단순한 일이었다.몇 장을 넘겼을 때 손이 멈췄다.같은 차량번호가 두 번 있었다.[12가 34XX / 차량 이전비 / 1,280,000원]그리고 몇 줄 아래.[12가 34XX / 차량 이전비 / 1,320,000원]첫 번째는 지급 완료.두 번째는 오늘 오후 지급 예정이었다.‘중복인가?’서린은 두 숫자를 다시 보았다.금액이 달랐다.단순 중복 입력이라면 금액까지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오전에 보았던 매입 자료가 떠올랐다.서린은 해당 날짜의 파일을 찾아 열었다.눈동자가 빠르게 화면을 훑었다.그리고—[12가 84XX / 차량 이전비 / 1,320,000원]마우스가 멈췄다.차량번호 한 자리.3과 8이 바뀌어 있었다.“과장님.”“왜?”“이거 지급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걸어가던 과장이 돌아봤다.“뭐가?”“같은 차량번호로 이전비가 두 번 잡혀 있습니다.”과장이 서류를 흘끗 보았다.“중복 입력했나 보네. 하나 지워.”“중복은 아닙니다.”“뭐?”“금액이 다르잖아요.”과장이 그제야 가까이 다가왔다.서린은 모니터의 두 항목을 차례로 가리켰다.“두 번째 건 34XX가 아니라 84XX 차량 이전비예요. 차량번호를 잘못 입력한 것 같습니다.”“잠깐만.”과장의 표정이 굳었다.“이거 오늘 지급 건이잖아.”“네.”과장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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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출근 이튿날 오전 10시.서린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와요.”문을 열고 들어가자 차수혁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했고, 테이블 위에는 식어버린 커피와 풀어헤친 넥타이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밤을 새운 흔적이었다.수혁은 턱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벌써 끝났어요?”대수롭지 않게 묻는 말투였다.기껏해야 영수증 몇 장 안 맞는 걸 찾아왔거나, 직원들 소소한 횡령 정도를 들고 왔겠거니 생각하는 눈치였다.서린은 대답 대신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툭.묵직한 소리가 났다.수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서류로 향했다.“생각보다 많네요.”“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수혁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서린은 맨 위 페이지를 펼쳤다.형광펜으로 표시된 숫자들이 빼곡했다.“처음엔 단순 누락인 줄 알았습니다.”“처음엔?”“네.”서린은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사각.종이 넘기는 소리가 조용한 대표실 안에 울렸다.“그런데 같은 패턴이 반복됐습니다.”수혁이 몸을 조금 앞으로 숙였다.“무슨 패턴인데.”“특정 딜러 세 명.”서린이 표시된 이름을 짚었다.“이 사람들을 통해 매입된 차량만 유독 비쌉니다.”“얼마나?”“평균 시세보다 15퍼센트.”“그럴 수도 있죠.”“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서린은 또 한 장을 넘겼다.“그래서 수리비를 봤습니다.”수혁의 시선이 서류에 고정됐다.“수리비가 추가로 붙어 있습니다. 평균 10퍼센트.”“오래된 차면 이상할 거 없고.”“문제는 그 다음입니다.”잠시 정적이 흘렀다.서린은 수혁을 바라봤다.“수리한 흔적이 없습니다.”수혁의 손이 멈췄다. 담배 끝에서 재가 길게 늘어졌다.“뭐라고?”“정비소 청구서는 있습니다.”서린은 다른 자료를 꺼내 나란히 놓았다.“그런데 부품 발주 내역이 없습니다.”“......”“엔진을 들어냈다는데 가스켓 하나 산 기록이 없어요.”“같은 방식이 세 달째 반복됐습니다.”서린은 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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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무안할 법도 한데, 동하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서지 않았다.“아니,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러죠. 여기 차가 3천 대가 넘어요. 혼자서 못 찾으십니다. 번호만 불러주세요. 제가 발은 진짜 빠르거든요.”그의 눈은 진심이었다.어떤 흑심이나 수작이 아니라, 그저 땀 흘리는 사람이 안쓰러워 도와주고 싶어 하는 순수함.“필요 없다고 했습니다.”“혹시… 그 차 찾으시는 거 아니에요?”서린이 돌아서려는데, 동하가 서린의 손에 들린 리스트를 힐끔 보고 말했다.“12가 34XX. 검은색 제네시스.”서린의 발이 멈췄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아세요?”“알죠. 제가 지난주에 입고 처리했거든요.”동하는 뿌듯한 표정으로 캔커피를 서린의 손에 쥐여주었다.“근데 그 차, 여기 없어요.”서린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없다니요?”“‘유령차’거든요. 서류상으로는 B-12 구역에 주차되어 있다고 나오지만.”서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유령차.“그게 무슨 말입니까?”“아, 모르시는구나. 여기서는 그렇게 불러요. 서류만 들어오고 차는 안 들어오는 거. 보통 높은 분들이 잠깐 서류 작업 필요해서 돌리는 거라고 하던데…. 저희 같은 말단들은 건드리면 안 되는 차죠.”동하는 목소리를 낮추며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근데 그거 찾으시는 거면, 조심하세요. 김 사장님이 관리하는 거라 예민하시거든요.”결정적인 단서였다.서린의 시선이 리스트 위에 멈췄다.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씩 맞물리기 시작했다.서린은 손에 들린 차가운 캔커피를 꽉 쥐었다.이 남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그저 도와주고 싶어서, 친절을 베풀고 싶어서 던진 말이 서린에게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다.서린은 동하를 올려다보았다.그는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서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동하를 밀어내는 대신, 처음으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박동하 씨라고 했죠.”“네! 동하라고 부르시면 됩니다.”“그 유령차, 또 어디 있는지 알아요?”“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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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평소라면 전화벨 소리와 고성으로 아수라장이었을 사무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직원들은 출근을 하자마자 하루 일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있었다.“주목.”짧고 낮은 목소리 하나가 소음을 잠재웠다.차수혁이었다.그는 평소처럼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사무실 중앙에 서 있었다.그 옆에는 공서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호기심, 경계, 그리고 무시. 다양한 감정이 섞인 눈빛들이었다.“인사해. 오늘부로 경영지원팀 과장으로 발령 난 공서린 씨다.”술렁임이 일었다.과장.입사 이틀 차, 그것도 경력직 면접만 보고 들어온 외부인에게 주어지기엔 파격적인 직책이었다.영업 1팀장 심재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려 했지만, 수혁이 더 빨랐다.“앞으로 회사 내 모든 자금 집행, 정산, 그리고 감사 권한은 공 과장이 갖는다.”수혁의 시선이 사무실을 천천히 훑었다.“10원짜리 하나라도 공 과장 결재 없이는 밖으로 못 나간다. 딜러 수수료, 매입 자금, 하다못해 너희들 회식비까지 전부.”“대표님, 그건 너무…”“불만 있나?”수혁이 심 팀장을 쳐다보았다.서늘한 눈빛에 심 팀장은 입을 다물었다.“공 과장의 말은 곧 내 말이다. 협조가 아니라, 지시에 따르도록. 이상.”수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표실로 들어갔다.블라인드가 내려가고, 사무실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직원들은 멍하니 서린을 바라보았다.이제 그녀는 투명 인간이 아니었다.그들의 밥줄을 쥔 ‘감시자’였다.사무실 구석에서 작은 숨소리들이 새어 나왔다."입사 이틀 만에 과장?""감사 권한까지 준다고?""대표가 미친 거 아냐?"누군가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이미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그동안 대충 넘기던 영수증 하나, 관행처럼 처리하던 정산 하나까지 모두 다시 들여다볼 사람이 생겼다는 뜻이었다.특히 몇몇 직원들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장 크게 동요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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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아까 말했던 그 유령차들.”동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서린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아, 업무 때문에 그러시는구나.”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테이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서린은 박동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다 먹었으면 일어나죠.”“네? 벌써요? 아직 반도 안 드셨는데….”서린은 계산서만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매매단지로 돌아오자 건물 앞에 익숙한 남자가 서 있었다.차수혁이었다.담배를 물고 있던 수혁의 시선이 동하에게 갔다가 서린에게 돌아왔다.“밥까지 먹었나 보네요.”“네.”서린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수혁이 동하를 턱으로 가리켰다.“그래서. 그 ‘입’한테 뭐 좀 건졌어요?”동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입이요?”서린은 대답 대신 수혁에게 다가갔다.“지금 확인할 게 있습니다.”수혁의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유령차가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수혁의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어딘데.”“F구역 끝입니다. 밤에 트레일러가 와서 차를 빼간답니다.”수혁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지금 확인하러 가려고?”“네.”수혁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구두 끝으로 비벼 껐다.“가죠.”서린이 그를 바라봤다.“대표님도요?”“내 회사에서 뭘 빼먹고 있는지 보겠다는데, 내가 빠질 이유가 있나.”어둠이 짙게 깔린 매매단지 안쪽, F구역.폐차 직전의 차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고, 멀쩡한 가로등조차 드물었다.“대표님, 과장님. 발밑 조심하세요.”동하가 핸드폰 플래시를 켜 앞장섰다.이곳에서만큼은 동하가 가장 익숙했다.“이쪽이에요. 제가 본 차들이 저 끝에 있었어요.”서린은 들고 온 리스트를 확인했다.[12가 34XX. 제네시스 G80.]“이 차부터 찾아요.”동하가 번호를 확인하며 차들 사이를 빠르게 움직였다.잠시 후.“과장님! 여기요.”구석진 곳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검은색 세단이 서 있었다.서린은 리스트와 차대번호를 대조했다.일치했다.서류상으로는 ‘엔진 침수로 인한 전체 교체 및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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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다음 날 아침, 출근한 서린의 책상 위에는 거대한 서류 탑이 쌓여 있었다.어제까지만 해도 전자 결재로 넘어오던 건들이 죄다 종이 뭉치로 돌아와 있었다.매입 계약서, 성능 점검 기록부, 딜러 수수료 청구서. 수백 장은 족히 되어 보였다.“이거, 오늘 오전까지 다 처리해 줘요.”영업 1팀장 심재호가 지나가듯 툭 던지고 갔다.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서린은 말없이 서류 더미를 바라보았다.‘이제 시작이구나.’단순한 업무 지시가 아니었다.일종의 시위였다.‘감히 우리 밥그릇을 건드려? 어디 한번 당해 봐라.’그러거나말거나.오전 내내 사무실은 아수라장이었다.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렸다.“야! 경리! 내 돈 언제 들어와! 차 판 지가 언젠데 아직도 입금이 안 돼!”“서류 반려됐다는 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다 이렇게 해왔는데!”현장 딜러들이 사무실로 들이닥쳐 고성을 질렀다.심 팀장은 그들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난처하다는 듯 연기를 했다.“아니, 나한테 그러지들 말고. 저기 새로 오신 공 과장님한테 따져. 그분이 깐깐하셔서 결재를 안 해주신다잖아.”화살은 정확히 서린에게로 향했다.험상궂은 딜러 몇 명이 서린의 책상을 둘러쌌다.책상을 쾅 내리치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어이, 신입. 펜대 좀 굴린다고 유세 떠나 본데, 우리 같은 현장직들 굶어 죽으라는 거야?”“규정? 웃기지 마라 그래! 대표님도 안 건드리는 걸 네가 뭔데 막아!”욕설이 섞인 고성이 서린의 고막을 때렸다.보통의 여직원이라면 울음을 터뜨리거나 겁에 질려 도망쳤을 상황이었다.하지만 서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녀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소란 피우지 마세요. 업무 방해입니다.”“뭐? 업무 방해?”딜러 중 한 명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그때 심 팀장이 슬그머니 다가왔다.그는 딜러들을 진정시키는 척하며 서린의 책상 앞에 섰다.“공 과장. 융통성 있게 갑시다, 좀. 현장 애들 다 죽어나가는 꼴 보고 싶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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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심 팀장은 김 대리를 쏘아보다가, 다시 서린을 돌아보며 주먹을 쥐었다.그때였다.“그만.”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대표실 쪽에서 들려왔다.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서린도 고개를 돌려 차수혁을 바라보았다.대표실 문이 열려 있었다.차수혁이 문가에 기대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을까.그의 표정은 무표정해서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하지만 이 상황이 그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도 저 얼굴이었다.겁먹기는커녕 제 할 일을 하던 여자.볼수록 마음에 들었다.무표정한 얼굴 뒤로 스쳐 지나가는 기대감만큼은 서린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차수혁을 발견한 심 팀장이 놀란 듯 당황하며 손을 내렸다.“대, 대표님.”그는 억울하다는 듯 표정을 바꾸며 수혁에게 다가갔다.“아니, 대표님. 저 신입 과장이 말입니다. 현장 상황은 무시하고 규정 타령만 하니 지금 업무가 마비됐습니다. 제가 교육 좀 시키려고….”수혁은 심 팀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천천히 걸어왔다.구두 소리가 뚜벅뚜벅 사무실을 울렸다.서린의 책상 앞에 멈춰 선 그의 시선이 난장판이 된 서류 더미와 모니터에 떠 있는 횡령 리스트를 훑었다.수혁의 시선이 서린에게 닿았다.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보통은 이쯤에서 변명하거나,대표 뒤로 숨으려 한다.아니면 겨우 한 번 이겼다는 기세에 취해 얼굴부터 달라진다.하지만 서린은 달랐다.이긴 사람의 표정도,구원받은 사람의 표정도 아니었다.해야 할 일을 마친 사람처럼 담담했다.수혁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합격’이 정도면 칼로 써먹어도 되겠네.생각보다 더 잘하는데.“심 팀장.”“예, 대표님.”“당신,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수혁은 책상 위에 놓인 서린의 파일(심 팀장의 비리 내역)을 집어 들었다. 쓱 훑어보더니 심 팀장의 가슴팍에 툭 던졌다.“이 회사가 굴러가는 건, 너희들이 차를 잘 팔아서가 아니야. 내가 너희들 뒤를 봐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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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모두가 퇴근한 늦은 밤 11시에도 한도오토링크 사장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테이블 위에는 공서린 과장이 넘기고 간 보고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수혁은 넥타이를 풀어 헤친 채, 붉은 펜으로 난도질 된 서류들과 씨름하고 있었다.눈이 뻑뻑했다.머릿속에는 딜러들의 이름과 자금의 흐름,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뒤엉켜 돌아다녔다.그때.띠리릭, 띠리릭, 척.대표실 문이 벌컥 열렸다.“꼴 봐라. 한도그룹 회장님 되기 전에 과로사부터 하겠네.”정민우였다.국내 굴지의 로펌 소속 변호사이자, 수혁의 대학 동기.수혁은 고개도 들지 않고 서류를 넘기며 대꾸했다.“남의 사무실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변호사라는 놈은 주거 침입 죄도 모르냐?”“애초에 비밀번호를 알려 주지를 말든가.”민우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비닐봉지에서 캔커피와 샌드위치를 꺼냈다.“먹고 해. 빈속에 담배만 피우지 말고.”수혁은 그제야 펜을 놓고 다가왔다.“이 시간에 웬일이야. 청구할 자문료라도 생겼냐?”“네가 요즘 사고 치고 다닌다는 소문이 흉흉해서 친구 얼굴이나 보러 왔지.”민우는 서류 뭉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그 ‘신입’이 만든 거냐? 새로 뽑았다는 경리 과장.”“어. 칼이 아주 잘 들더라고.”단순한 숫자의 오류에서 유령차를 찾아내더니, 심재호까지 몰아붙였다.“잘됐네. 근데 수혁아.”민우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일 처리하는 거 보니까 보통내기가 아니더만. 자금 세탁 루트까지 파내고, 딜러들 약점 잡아서 찍어 누르고. 유능한 건 알겠는데 브레이크가 없어 보여.”민우는 정확했다.서린은 멈추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수혁 역시 그걸 알기에 그녀를 자신의 직속으로 묶어둔 것이었다.“내가 잡고 있잖아.”“그 전에 너부터 챙겨. 비서 하나 제대로 붙여.”“비서?”“너 혼자 대표 일에 현장까지 다 쥐고 있으니까 이 꼴이지. 믿을 만한 사람 하나 옆에 두고 손발로 써. 넌 판단만 하고.”수혁은 잠시 생각하다 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생각해 보지.”“생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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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다음 날 아침, 하루 근무가 시작됨과 동시에 수혁이 인터폰을 눌렀다.어젯밤 민우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새 사람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일 잘하고 입 무거운 사람이라면 이미 곁에 있었다.“경영지원팀 한지우 대리. 지금 내 사무실로 와.”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한지우가 들어왔다.단정한 정장 차림, 흐트러짐 없는 쪽 찐 머리, 그리고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뿔테 안경. 마치 감정보다 규율이 먼저 배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그녀가 수혁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부르셨습니까, 대표님.”목소리에는 톤이 없었다.서린의 차가움과는 다른, 철저히 훈련된 사무적인 건조함이었다.수혁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한 대리.”“네.”“아니, 이제 한 실장이라고 불러야겠네.”지우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것이 그녀가 보인 유일한 동요였다.“오늘부로 자리를 옮겨. 내 방 바로 앞으로.”“… ?”“비서실장이다.”수혁은 의자를 돌려 창밖을 보며 덧붙였다.“할 수 있겠어?”보통이라면 당황하거나, 이유를 물었을 것이다.하지만 지우는 질문하지 않았다.“알겠습니다. 대표님.”대답은 즉각적이었다.마치 지난 3년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지금 바로 책상 옮기고 업무 파악 시작하겠습니다. 10분 뒤에 커피 올리겠습니다. 투 샷에 얼음 세 개, 맞으시죠?”수혁은 픽 웃었다.자신의 취향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래. 부탁해.”지우는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사무실을 나갔다.그녀가 나간 지 불과 십여 분 만에 대표실 앞 비어 있던 책상이 새로운 자리로 바뀌었다.사무실 직원들이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한 대리가 저기로 갔네.""그동안 비서들은 1년도 못 채우고 다 잘렸는데.""한 대리는 얼마나 버티려나."하지만 지우는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았다.그녀에게 중요한 건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었다.대표의 시간이 단 1분도 허투루 낭비되지 않는 것.그것이 그녀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역할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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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지 않는다.대신, 더 큰 포식자에게 제 발로 목줄을 내민다.영업 1팀장 심재호가 그랬다.서린의 압박에 횡령액 2억 4천만 원을 토해내야 할 상황.하지만 그 돈은 유흥비와 도박으로 탕진한 지 오래였다.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밀고뿐이었다.늦은 밤, 아무도 없는 비상계단에서 심재호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한도그룹 본사 비서실 직통 번호였다.— 여보세요.건조한 목소리가 들리자 심재호가 비굴하게 입을 열었다.“예, 실장님. 접니다. 심재호입니다.”— 용건만 말해요.“지금 상황이 심각합니다. 차 대표가 외부에서 여자를 경리 과장으로 앉히더니 장부를 다 뒤집고 있습니다.”심재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단순한 감사가 아닙니다. 이러다가는 ‘그 자금’ 루트까지 다 드러나게 생겼습니다. 회장님께서 신경 쓰시는 그쪽 라인까지 건드리고 있다고요. 제 선에서는 통제가 안 됩니다.”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알았어요.짧은 한마디뿐이었다.더 이상의 질문도 없었다.전화를 끊은 심재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하지만 입가에는 비열한 미소가 번졌다.흐흐. 네가 아무리 독사라 해도 회장 앞에서는 지렁이에 불과할 테니.어떻게 되나, 어디 한번 보자.***오늘도 어제와 같은 아침이었다. 수혁의 책상에는 식은 커피가 놓여있었다.짧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대표실 문이 열리더니 한지우 실장이 들어왔다.그녀의 표정은 평소처럼 침착했지만,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손에 들린 태블릿 PC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대표님.”“말해.”“본사 회장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서류에 서명하던 수혁의 펜이 뚝 멈췄다.본사.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남달랐다.지난 3년간 그를 유배 보내고 철저히 무시해 왔던 곳.그들이 먼저 연락을 해올 리가 없었다.쥐새끼가 꼬리를 흔들지 않고서야.“회장님께서 점심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십니다.”“장소는?”“본사 35층 접견실입니다.”수혁은 피식 웃으며 펜을 내려놓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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