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Chapter 31 - Chapter 40

100 Chapters

제31화

“나... 나...” 지희의 몸은 여전히 제멋대로 떨려서 도저히 멈출 수 없었지만, 거칠었던 숨은 한결 잦아들어 있었다.그때 민혜정이 과일 접시를 들고 다이닝룸에서 나오다가 눈앞의 상황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놀랐다. “지희야!”과일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지만, 민혜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급히 지희에게로 달려갔다.이어 사정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아림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림아! 너 또 지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얘 퇴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네가 좀 참아 주면 안 돼?!”아림의 몸이 살짝 굳었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민혜정을 비롯한 가족들이 언제나 지희 편을 들고,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아림을 탓하는 일에는 이미 익숙했다.마음이 아프냐고? 당연히 아팠다.억울하냐고? 그래도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몇 분이 지나 지희의 호흡과 감정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줄곧 침묵하던 이헌이 입을 열었다.“이건 유빈이 줘.”이헌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감정이 거의 묻어나지 않았다. 다만 짙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 아림의 표정을 차마 보지 못하는 듯했다.아림은 겉으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요하던 마음에는 잔물결이 번졌고, 가슴 한편이 저릿했다. 아림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였다. 이헌과 지희, 유빈의 관계를 떠나 지금 환자의 상태만 놓고 본다면, 이헌의 말은 지희를 안정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선택이었다.하지만 엄마로서는 로아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해 왔다는 사실이 마음 아플 수밖에 없었다.왜냐하면... 로아도 분명 이헌의...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로아는 로봇 생각에 먼저 안으로 뛰어들어 와 있었다.이헌의 말은 그대로 어린 로아의 귀에 박혔다.로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끈이 끊어진 팔찌에서 떨어지는 구슬처럼 한 방울, 또 한 방울 바닥을 적셨다.“근데... 이거 나 주는 거라고 했는데...”로아의 목소리는 작고 잠겨 있었고, 서러움이 가득 묻어났다.아림은 가슴이 죄어 왔다.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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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문을 연 사람은 아림이었다.아림은 편한 티셔츠에 리넨 바지를 입고 머리를 대충 묶은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이헌을 보자 잠깐 놀랐지만, 이내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무슨 일이야?” 아림은 문 앞을 막아선 채 안으로 들일 생각이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로아는 괜찮아? 이건... 로아 주려고 가져왔어.” 말을 꺼내는 이헌은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괜찮아. 벌써 잠들었어.”사실 로아는 자지 않았다. 초인종이 울리자 아림이 몇 마디 일러두었고, 로아는 방에서 얌전히 퍼즐을 맞추며 기다리고 있었다.이헌은 길고 단단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마디가 하얗게 질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쇼핑백을 내밀었다. “그럼 네가 대신 전해줘.”“저기...” 아림이 말을 끊었다. “오늘 일 때문에 미안해할 필요 없어. 로아는 당신 딸이 아니고, 필요한 것도 없어.”아림의 말투는 차분했다. 공격적인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오히려 그 담담한 말투 때문에 거리감이 확실하게 느껴졌다.몇 개의 쇼핑백이 그대로 허공에 멈췄다.“늦었어. 이제 가. 앞으로는 이런 의미 없는 일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한테도, 나한테도, 최지희한테도 부담만 될 뿐이야.”아림은 이헌의 눈앞에서 문을 닫았다.이헌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손에 든 쇼핑백이 무거운 건지, 마음이 무거운 건지 구분되지 않았다.시선을 내리자 쇼핑백 안의 정교하게 만들어진 핑크색 토끼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권창현이 준 건 받으면서, 내가 준 건 왜 안 받는 거지?’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센서 등이 꺼지며 주변이 캄캄해졌다.마치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는 불이 들어올 일이 없을 것처럼 암흑 같았다.이헌은 어둠 속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핸드폰이 진동하고 기찬에게서 내일 오전 이사회가 있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뒤에야 굳어진 몸을 돌려 떠났다....최근 이헌은 자꾸만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평소라면 기계처럼 정해진 생활을 지켜 밤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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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직원이 예약자 명단을 확인한 뒤 이헌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오셨어요? 상태는 백요한 교수님께 간단히 들었어요. 앉으세요.”이헌이 들어오자 아림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차분한 태도로 철저히 업무적으로 대했다.아림도 의자를 당겨 앉은 뒤 노트북을 켜 평가지를 모니터에 띄웠다.이후 아림은 내내 전문가다운 태도를 유지했다. 사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한 채 전문가답게 이헌을 마주했다. “최근 2주 동안 긴장되거나 불안해서 가만히 있기 힘들었던 날이 자주 있었나요?”“있어.”“빈도는요?”“기억 안 나.” 이헌은 상담용 리클라이너에 기대 천장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아림은 이헌을 한 번 올려다본 뒤 평가표의 ‘자주’ 항목에 표시했다.“요즘 수면은 어떠세요? 잠드는 데 오래 걸리거나 자주 깨시나요?”“가끔.”“집중력은요? 일할 때...”언제부터였는지 이헌의 시선은 아림의 손목에 머물러 있었다. 아림은 예전에 이헌이 경매에서 낙찰받았던 값비싼 문 스톤 팔찌를 차고 있었다.문 스톤은 부드러운 빛 아래에서 안개처럼 은은한 광택이 번지는 보석이었다.팔찌는 아림에게 유난히 잘 어울렸다. 가느다랗고 하얀 손목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박이헌 씨, 제 말 듣고 계세요?”“미안. 뭐라고 했어?”아림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평가표에 한 줄을 더 적었다.평가는 약 40분 동안 이어졌고, 그 사이 이헌은 세 번이나 집중을 놓쳤다.마지막으로 아림은 노트북을 덮고 기록을 정리했다.“1차 평가 결과로는 경도 수준의 불안으로 보여요. GAD-7 점수는 9점이고, 현재로서는 약물치료가 꼭 필요한 정도는 아닙니다.”이헌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결과를 예상했던 사람처럼 담담했다.“다만 업무 강도가 워낙 높으시잖아요. 긴장도가 높은 환경에 오래 노출되면 불안 반응이 나타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니까, 결과 자체를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아림은 전문가답게 차분히 설명했다.“정기적으로 상담받아 보세요. 가능하면 일주일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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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말씀하세요.” 창현의 눈은 밝았지만 깊은 곳에는 작은 불안이 섞여 있었다.“저... 박이헌 대표랑 1년 정도 결혼생활을 했어요. 여러 사정이 겹쳐서 결국 끝났고요.” 아림은 맑은 눈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일이지만, 권 대표님께 숨기고 싶지는 않았어요.”창현은 꽃다발을 든 손을 멈췄다. 프라이빗 룸 안이 조용해졌다.아림은 손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게 식었다.창현이 마음을 접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창현은 눈을 한 번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요?”“그게 전부예요. 이미 이혼했고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아니, 지금 따지고 보면 제 동생의 남편이기는 하네요.”창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놀랐잖아요. 저는 또 아림 씨가 저를 거절하려는 줄 알았어요.”창현은 혼자 웃음을 흘리다가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제가 아림 씨를 좋아하는 건 아림 씨가 좋은 사람이어서예요. 저를 끌어당기는 건 아림 씨의 신분도, 과거도 아닙니다.”“요즘 보셨겠지만, 전 로아도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지난번에 로아가 저를 ‘창현 아저씨’라고 불렀을 때는 정말 마음이 다 녹아버리는 줄 알았어요.”창현의 진심 어린 얼굴을 보자 아림은 선뜻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때 민혜정의 말이 머릿속에 스쳤다. 로아한테도 온전한 가족이 필요하다는 말...로아는 네 살이었다. 최근 몇 번의 일을 겪으면서 아림은 자신의 가정에 아빠라는 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로아에게 온전히 사랑을 쏟아 줄 수 있는 아빠의 자리.“지금 당장은 답을 못 드리겠어요.”“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 아림이 곧바로 거절하지 않자 창현의 표정이 환해졌다. “생각해 보겠다고 해 주신 것만으로도 아주 좋습니다.”아림은 창현의 반응에 웃음을 터뜨리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럼 이제 밥 먹어도 되는 거죠? 권 대표님?”“창현이라고 불러 주세요.”‘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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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창현의 말에 지희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자 아림은 속이 시원했다. 창현에 대한 호감도 조금 더 올라간 듯했다.‘둘이 만난다고...’이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입술이 열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헌은 그 자리에 서서 창현이 신사적으로 차 문을 열어 아림을 태우고, 가벼운 걸음으로 운전석을 돌아 차에 올라 출발하는 모습을 지켜봤다.그러는 내내 아림은 이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이헌은 주먹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마이바흐가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아림은 고개를 살짝 돌려 룸미러 너머로 두 사람을 한 번 확인하고 곧 시선을 거뒀다.창현은 아림의 작은 행동을 놓치지 않았지만 눈치 있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20여 분 뒤, 아림의 아파트.창현은 아림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잠깐 올라갈 생각도 했지만 비서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아림도 야간 근무를 마친 뒤라 피곤해 보였기에 아쉬움을 접고 돌아섰다.창현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림의 핸드폰이 진동했다.[권창현은 만나 온 여자가 셀 수도 없이 많아. 너랑 안 맞는 사람이야.]이런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이헌이었다.아림은 메시지를 십여 초 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짧은 웃음을 흘렸다.웃긴 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나온 헛웃음이었다.아림은 싸늘한 눈으로 화면을 내려다보며 몇 글자를 입력해 전송했다.[내 일에 신경 쓰지 마.]메시지를 보낸 뒤 핸드폰을 테이블에 엎어 놓았다. 방으로 들어가 잔잔한 음악을 틀고 편한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너무 피곤했다. 지금은 그저 푹 자고만 싶었다....한편 아림의 답장을 확인한 이헌은 핸드폰을 든 손에 힘을 준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넓고 푹신한 가죽 의자에 등을 곧게 세운 채 앉아 있었고, 주변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이헌은 굳은 얼굴로 대화창을 닫다가 우연히 아림의 프로필 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햇빛 아래 로아를 품에 안고 환하게 웃는 아림의 옆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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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며칠 뒤.아림은 내담자 평가를 마친 뒤 비서에게 배웅을 부탁하고, 보고서를 정리해서 저장했다.모든 일을 끝낸 후에야 의자 등받이에 기대 어깨를 천천히 주물렀다.핸드폰이 두 번 진동하더니 엄준의 메시지가 떴다. [내려와. 밥 먹자. 네가 좋아하는 식당 예약했어. 아래에서 기다릴게.]아림은 익숙한 식당 이름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며칠째 쌓여 있던 피로가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건물 아래에는 엄준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날이 제법 풀린 탓인지 엄준은 연회색 캐주얼 슈트에 흰 면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단추를 하나 풀어 둔 옷차림은 평소 의사로서의 반듯하고 엄격한 분위기를 덜어 내고 한층 편안해 보였다.엄준은 차 문에 기대 서 있었다. 반듯하게 뻗은 체형 위로 한낮의 햇살이 쏟아져 시선이 절로 갔다.아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 보니까 선배도 꽤 잘생겼네.’‘나중에 어떤 여자한테 제대로 빠지려나?’“왔어? 가자. 네가 좋아하는 능이버섯 닭백숙도 시켜 놨어. 가서 많이 먹어.” 엄준은 익숙한 손길로 아림의 목에 스카프를 둘러 주었다. “요즘 얼마나 못 챙겨 먹었으면 이렇게 말랐어. 교수님이 보면 내가 널 제대로 안 챙겼다고 또 한 소리 하시겠다.”아림은 가볍게 웃으며 엄준의 잔소리를 그대로 받아 주었다....식당.아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가득 차려진 상을 보고 눈빛을 누그러뜨렸다.사양하지 않고 따뜻한 닭백숙 국물부터 한 숟갈 떠먹었다.푹 고아진 닭고기는 부드럽게 풀어졌고, 능이버섯 향이 은근하게 밴 진한 국물은 목을 타고 내려가 아림의 속까지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지난 몇 년 동안 백요한 교수와 선배들을 따라 눈코 뜰 새 없이 지냈지만, 아림이 그분들에게 부족함 없이 보살핌받아 온 것만은 분명했다.아림이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 다 모두가 훤히 알고 있었다.아림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던 엄준은 웃으며 도미찜 생선 살 한 점을 집어 그릇에 올려 주었다. “요즘 뭘 그렇게 바쁘게 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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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하지만 엄준도 알고 있었다. 아림과 가족의 관계가 지금처럼 망가진 데에는 결국 그 사람이 가장 큰 이유로 얽혀 있었다.이틀 뒤.아림이 내담자 한 명을 배웅한 직후, 안내데스크 직원이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 들어왔다.“원장님, 밖에 원장님을 찾는 분이 계세요. 아무래도 항의하러 오신 것 같아요. 저희가 아무리 막아도 안 들으세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한혜주였다.한혜주는 문 앞에서 아림을 발견하자마자 목청을 높였다. 같은 층 전체에 들릴 만큼 큰 소리였다.“아림아! 이제 부모 전화까지 일부러 안 받는 거야?!”대기실에 있던 내담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비교적 안정돼 있던 몇 사람의 표정에도 불안이 번지기 시작했다.아림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긴장했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안 돼!’이곳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이었다.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자극에 민감하거나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혜주가 계속 소란을 피우면 상황이 커질 수 있었다.“여긴 제가 일하는 곳이에요. 할 말 있으면 밖에서 하세요.” 아림은 굳은 얼굴로 한혜주의 팔을 잡아 밖으로 데려가려 했다.“밖에서? 싫어. 내가 전화할 때는 안 받더니 이제 와서 나를 내보내겠다고?” 한혜주는 버티며 목소리를 더 키웠다. “지금 확실하게 대답해. 이번 주말에 집에 와서 밥 먹을 거야, 말 거야?”아림은 대기실 쪽을 흘끗 보고 손끝을 세게 눌렀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으로 정신을 붙들었다.이게 아림이 오래 봐 온 가족의 방식이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상대의 사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게다가 한혜주는 이유 없이 직접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 굳이 여기까지 온 목적이 단순히 식사 약속 하나 때문일 리도 없었다.그래도 지금은 그 이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언제예요?”한혜주의 표정이 바로 풀렸다. “이번 주 토요일 저녁 6시. 늘 가던 우린호텔. 네 아빠가 룸까지 예약해 놨어.”이미 예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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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아림은 한혜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공용 젓가락으로 생선 한 점을 덜었다.상에 오른 음식 대부분이 지희가 좋아하는 메뉴였다. 아림에게 그나마 손이 가는 건 담백하게 구운 생선뿐이었다.한혜주는 아림의 무심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못마땅하게 노려봤다.소광섭은 술잔을 들어 이헌에게 건넸다.“박 서방, 지희가 자네랑 함께 있으니 우리도 마음이 놓인다. 지희는 어릴 때부터 워낙 똑똑했고 젊은 나이에 밖에서도 인정받았잖아.”“그런데 누구는 공부를 오래 해 놓고도 부모를 봐도 인사 하나 제대로 못 하니 원...”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아림은 씹던 움직임을 잠깐 멈췄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반찬을 덜었다.이 자리에 아림을 부른 이유는 이미 분명했다. 아림을 깎아내리고 지희를 치켜세우려는 것이었다. 아림이 반응하지 않으면 두 사람도 오래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한혜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지희는 성격도 부드럽고 살뜰해서 사람 챙길 줄도 알지. 아림이랑은 완전히 달라.”“아림이는 어릴 때부터 고집만 세서 조금만 말해도 정색하고, 어디 가서 내놓기가 민망했다니까.”이헌은 고개를 숙이고 식사하는 아림을 바라봤다.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고, 원래도 차가운 얼굴이 더 무거워졌다.‘아림은...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살았던 건가?’지희는 이헌의 변화에 재빨리 눈치챘다. 분위기를 풀어주는 척 부드럽게 말했다. “엄마, 아빠. 아림 언니도 요즘 일 때문에 많이 바쁘고 스트레스도 많잖아요.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언니도 잘하고 있어요. 이제 백요한 교수님 밑에서 보조 업무까지 맡고 있잖아요.”겉으로는 아림을 감싸는 말처럼 들렸지만, 뜻을 뒤집어 보면 오랜 시간 공부한 끝에 겨우 교수의 보조 업무를 하고 있다는 식의 깎아내림이었다.한혜주는 지희의 말에 잠시 멈추고 이헌의 표정을 몰래 살폈다.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접었다. “그래, 그래.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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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오늘은 조용하네. 많이 바빴어?]아림은 작게 웃으며 읽고 있던 자료를 무릎 위에 엎어 놓았다.두 사람은 거의 1년 동안 연락해 왔지만 어디까지나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아림은 상대의 신상정보를 전혀 몰랐고, 상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처음에는 아림이 익명 고민 상담 커뮤니티에 아무 생각 없이 글 하나를 올렸다. 그런데 누군가 진지한 답글을 달았고, 몇 번 대화를 주고받다 개인 메시지로 이어졌다. 그 사람이 ‘나무그늘’이었다.나무그늘은 아림의 본명이나 성별, 직업, 사는 곳을 묻지 않았다. 아림도 상대에게 개인 신상에 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화면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부담 없는 가장 편한 거리를 유지했다.아림은 메시지를 입력했다. [맞아. 요즘 일이 이것저것 많아서 조금 지쳐.]보내고 나니 괜히 투정처럼 느껴져 한 줄을 덧붙였다. [그래도 별일은 아니야.]답장은 금방 왔다. [예를 들면?][예를 들면... 좀 멀어지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자꾸 이런저런 이유로 내 앞에 나타나서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을 흐트러뜨려.][전 남자친구?][비슷해.]아림은 그 말을 몇 초 동안 바라보다가 대충 답했다.‘전남편도 전 남자친구라고 할 수 있으려나?’상대는 잠시 답이 없더니 긴 메시지를 보냈다. [이미 지나간 사람이나 일에 에너지 쓰지 마. 지금 네 생활 잘 지키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아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소광섭 부부 때문에 엉망이 됐던 기분도 조금 나아져서 바로 답장을 보냈다.[고마워. 우리 둘 다 좋은 일만 생기면 좋겠다.]다른 편에서 ‘나무그늘’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굳어 있던 미간이 풀리고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다음 날 오전, 아림이 병원에 도착하자 비서 세영이 곁으로 와 목소리를 낮췄다.“원장님, 백요한 교수님이 오늘 아침에 전화하셨어요. 중요한 고객 한 분이 요즘 금령시에 업무차 와 계시는데 교수님은 아직 돌아오기 전이시라 저희 쪽으로 소개하셨대요. 상장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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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끝났습니다. 끝났고말고요. 백요한 교수님께서 추천하신 곳답게 상담 체계도 전문적이고 고객 응대도 진솔해서 아주 좋았습니다.”유송진의 말에는 아림에 대한 만족과 칭찬이 그대로 묻어났다.유송진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림을 한 번 훑어보고 이헌도 바라봤다.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걸렸다.“가만 보니 박 대표님과 최 원장님, 나란히 있으니까 꽤 잘 어울립니다.”이헌의 몸이 잠깐 굳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회장님도 참...” 아림은 옅게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감히 박 대표님을 넘볼 수 있겠어요?”그 말을 들은 이헌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느꼈다. 입을 열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송진은 작게 웃으며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최 원장님, 자신을 그렇게 낮춰 볼 필요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최 원장님은 아주 훌륭한 분이에요. 박 대표님이 이미 결혼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제가 정말 둘을 한번 소개해 보고 싶었을 겁니다.”아림은 가볍게 웃은 뒤 책상 위 서류를 정리했다.유송진은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고 손뼉을 한번 쳤다. “그럼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오늘부터 새 협력 파트너가 된 기념이니 최 원장님도 함께하시죠.”아림이 거절하려 하자 유송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사양하지 마세요. 백요한 교수님도 최 원장님을 아주 높게 평가하더군요. 그 인연까지 생각해서 오늘은 내 체면 한번 세워주세요.”“알겠습니다.”이헌까지 함께한다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유송진은 지도교수 백요한에게 각별한 사람이었고 방금 협력하기로 한 상대이기도 했다. 이런 자리에서 대놓고 아림도 더 이상 거절하기는 어려웠다....저녁 7시, 레스토랑.세 사람은 차례로 프라이빗 룸에 들어갔다. 유송진은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아림에게 내밀었다.“최 원장님이 먼저 고르시죠.”“회장님이 정해주세요. 저는 딱히 가리는 음식 없어요.” 아림은 예의 있게 웃으며 메뉴판을 다시 밀어주었다.오늘 식사는 유송진이 초대한 자리였다. 호스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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