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Chapter 91 - Chapter 100

100 Chapters

제91화

“진짜? 롤러코스터 타도 돼요? 날아가 버리는 거 아니에요?” 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안 날아가. 아저씨가 옆에 같이 타서 꽉 잡아줄 거야.”아림은 로아의 안전벨트를 채워 주다가 고개를 들어 룸미러 속 창현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이를 달래듯 웃어 주는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드림아일랜드 테마파크 티켓 교환소.주말이라 사람이 많아서 줄이 제법 길었다.창현은 모녀가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 음료와 간식까지 챙겨 주고 몇 마디 당부한 뒤 티켓을 받으러 창구 쪽으로 갔다.아림은 로아의 손을 잡고 한쪽에서 기다렸다. 로아는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가 과자를 한입 베어 먹으며 제법 얌전히 시간을 보냈다.그때 로아가 아림의 손을 잡아당기며 커다란 곰 인형 조형물 쪽을 가리켰다. “엄마, 유빈이다! 유빈이야!”아림은 아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티켓 교환 창구 반대편에 이헌이 유빈을 한 팔로 안고 서서 핸드폰에 뜬 모바일 티켓을 확인하고 있었다.편한 검은색 얇은 V넥 니트는 목 선을 살짝 드러냈고, 아래에는 짙은 회색 팬츠를 입었다. 왼쪽 손목에는 절제된 디자인의 파텍 필립 시계, 오른쪽에는 익숙한 묵주 팔찌가 자리하고 있었다.시끌벅적한 테마파크 한가운데에 서 있는데도 이헌만은 주변과 동떨어진 사람처럼 차갑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겼다.곁에는 환하게 웃는 지희가 바짝 붙어 있었다.지희는 아이보리 원피스에 플랫 스니커즈를 신고, 긴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왼쪽 어깨 앞으로 늘어뜨렸다.세 사람 모두 눈에 띄는 외모라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얼핏 보면 다정하게 나들이 나온 세 식구 그 자체였다.아림은 시선을 거두며 로아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다. 그때 유빈도 로아를 발견했다.“로아 누나! 누나!” 유빈이 이헌의 품에서 내려가려고 몸을 비틀며 짧은 다리를 버둥거렸다. “아빠, 내려줘! 나 로아 누나한테 갈래!”이헌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핸드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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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창현의 말은 높지도 거칠지도 않았지만 지희의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지희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잠깐 굳었다.창현은 로아를 다시 안아 올리고 아이 손바닥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가볍게 털어 주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최지희 씨, 제가 아림 씨를 좋아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건 숨기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제 마음을 다른 사람이 대신 걱정해 줄 필요가 없어요.”창현은 턱을 살짝 들었다. 길게 뻗은 눈매에는 웃음이 남아 있었지만 온기는 없었다.“오히려 남의 연애에 이렇게까지 관심이 많으신 걸 보면, 최지희 씨 일상이 꽤 한가한가 봅니다.”지희는 치맛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이헌 쪽을 돌아봤다.이헌은 지희를 대신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내리깔고 유빈의 재킷 칼라만 반듯하게 정리해 주고 있었다.창현의 어깨에 엎드린 로아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더니 지희를 향해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창현 아저씨가 제일 좋아요!”그 말에 창현의 어깨가 웃음으로 들썩였다. 결국 손을 들어 로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고개를 조금 숙인 아림의 긴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웃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조금 풀린 모습이었다.그 작은 변화까지 이헌의 시선에 그대로 들어왔다.창현과 로아가 자연스럽게 붙어 있는 모습까지 겹치자 이헌의 목울대가 한번 움직였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고 가슴 깊은 곳에 눌러앉는 답답함이 무엇인지는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이헌은 허리를 굽혀 유빈을 다시 안아 들었다.유빈은 마침 로아의 양 갈래머리 끝에 묶인 하트 모양을 신기하게 보며 잡아당기고 있었다. 갑자기 안겨 올라가자 두 팔과 짧은 다리를 다시 버둥거렸다.“아빠, 나 누나랑 아직 얘기 안 끝났어.”“이제 들어가야지.”이헌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높낮이도 거의 없었다. 왼팔로 유빈을 안정적으로 받친 채 걷자 오른쪽 손목의 묵주 장식이 발걸음에 맞춰 작게 흔들렸다.아림 쪽은 다시 보지도 않았다. 일행을 지나쳐 넓은 보폭으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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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이헌은 지희가 물은 것들에는 답하지 않았다.지희의 눈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더 묻지는 못했다.유빈은 이헌의 어깨에 기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빠, 나 로아 누나랑 같이 놀고 싶어...”이헌은 시선을 내리며 복잡한 기색을 감췄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유빈의 목소리에 정신은 다시 눈앞으로 돌아왔다.줄이 두어 걸음 앞으로 움직이자 이헌도 유빈을 안은 채 따라갔다....롤러코스터에서 내린 로아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창현의 목을 꼭 끌어안고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아저씨, 이제 롤러코스터 안 탈래요...”창현은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아림은 가방에서 물을 꺼내 뚜껑을 열고 로아에게 두 모금 정도 마시게 했다.조금 진정한 로아는 금세 다시 눈을 반짝이며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시선은 곧 옆에 있는 회전목마에 붙잡혔다.시간이 갈수록 테마파크는 더 붐볐다. 풍선과 솜사탕을 든 아이들, 아이를 바라보며 웃는 부모들이 곳곳을 채웠고 음악과 비명, 웃음소리가 뒤섞여 활기찬 소음을 만들었다.아림은 웃는 눈으로 로아의 손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때 앞쪽에서 여자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도와주세요! 누가 우리 아이 좀 살려주세요!”절박한 비명과 거의 동시에 시설 전체에 긴급 대피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평온하던 인파는 곧바로 흐트러졌다. 사람들이 자기 아이를 챙기며 사방으로 빠르게 물러났다.아림과 창현이 고개를 들자 광장 중앙 분수대 옆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서른을 조금 넘겨 보이는 남자가 한 손으로 5살쯤 된 여자아이의 옷깃 뒤쪽을 거칠게 움켜쥐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번뜩이는 과도가 들려 있었고 칼끝은 아이의 목 바로 앞을 겨누고 있었다.아이는 공포 때문인지 조여진 옷깃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든 건지 얼굴이 보랏빛으로 질리고 입술도 하얗게 떠 있었다. 울음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남자는 온몸을 떨며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같은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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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사람들은 위험한 곳에서 멀어지려고 조용히 움직였다. 그 흐름을 거슬러 앞으로 나가는 사람은 아림뿐이었다. 연한 파란색 셔츠가 흩어지는 인파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남자와 약 5미터 정도 거리를 남겨 두고 아림은 걸음을 멈췄다.더 가까이 가면 남자를 자극할 수도 있었다.“저기요.”아림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말투는 최대한 느리고 부드럽게 눌렀다.남자가 고개를 홱 들어 아림을 노려봤다. 아이 목 근처에 있던 칼끝도 불안하게 흔들렸다.“오지 마! 더 오면 얘 찌를 거야!”아림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안 갈게요.”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저 여기 서 있을게요. 그냥 조금 얘기만 해요.”남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아림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얘기 필요 없어! 아무도 내 얘기 들어준 적 없어!”“제가 들을게요.” 아림은 말의 속도를 더 늦췄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한테 말해 주실 수 있어요?”남자는 뜻밖의 말에 멈칫했다. 충혈된 눈으로 아림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회사에서 잘렸어... 8년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했는데 하루아침에 다 그만두고 나가래! 마누라는 애 데리고 떠났고... 우리 엄마까지 나를 사람 취급 안 해!”말을 이어 갈수록 남자의 감정은 더 격해졌다. 과도를 움켜쥔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따님이 있으세요?” 아림은 남자가 흘린 마지막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딸 하나. 세 살.”“세 살이군요.” 아림은 머릿속으로 대응 방향을 잡았다. “지금 안고 있는 아이도 따님이랑 나이가 크게 차이 안 나 보이죠?”남자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팔에 붙잡혀 얼굴이 창백해지고 거의 눈이 뒤집힐 듯한 아이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목에 붙어 있던 칼끝이 몇 센티미터 바깥으로 밀려났다.남자의 주의가 아이에게 쏠린 틈에 아이 아버지가 옆에서 달려들어 딸의 팔을 붙잡고 힘껏 끌어당겼다.모든 일이 너무 빠르게 이어졌다.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에 자극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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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아림은 군더더기 없이 논리를 정리해 말했다. 다만 아직 조금씩 떨리는 손끝만이 뒤늦게 몰려온 공포를 드러냈다.이헌은 아림을 한참 바라봤다. 목울대가 낮게 한번 움직였다.무슨 말을 하려던 때 지희가 눈물범벅이 된 채로 달려왔다. “오빠, 오빠, 괜찮아? 아까 왜 그렇게까지...”말을 끝내기도 전에 지희는 아림을 매섭게 노려봤다.‘다 저 여자 때문이야. 다 최아림 때문이라고.’‘최아림만 아니었으면 이헌 오빠가 자기 몸 생각도 안 하고 뛰어들 일은 없었어.’이헌은 지희에게 대답하지 않고 품에서 유빈을 받아 안았다.유빈은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작은 얼굴을 이헌의 목에 묻은 채 어깨를 계속 들썩였다.그때 창현도 로아를 안고 빠르게 다가왔다.창현은 먼저 아림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급히 살폈다. 다친 곳이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눈을 들어 이헌을 느긋하게 훑었다.이헌의 품에서 울음을 삼키는 유빈과, 옆에서 눈물 맺힌 채 이헌의 팔을 붙잡고 있는 지희를 번갈아 봤다.창현이 낮게 비웃었다. “박 대표님, 정말 바쁘시네요.”느슨한 말투에 비꼬는 기색이 섞였다. “자기 아내랑 아이 챙기기도 바쁠 텐데, 이혼한 전 아내와 아이까지 직접 챙길 여유가 있으시고요.”이헌의 표정이 가라앉았다.창현은 대꾸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아림 앞을 자연스럽게 가린 뒤 고개를 숙여 말했다. “가요, 아림 씨. 로아도 많이 지쳤어요. 뭐라도 먹으러 가죠.”아림은 더 말하지 않고 창현의 품에서 로아를 받아 안았다.“엄마...”로아는 두 팔로 아림의 목을 꼭 감싸고 얼굴을 어깨에 묻고 작은 목소리로 아림을 불렀다.창현은 자연스럽게 아림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아직 어수선한 사람들과 거리를 만들어 주며 테마파크 출구 쪽으로 걸었다.세 사람의 뒷모습은 곧 붐비는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로아가 아림의 어깨에 엎드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아까 나쁜 사람 잡으러 간 거야?”“엄마는 도와주러 간 거야.” 창현이 아림을 한번 내려다보고 대신 설명했다. “로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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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아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텀블러 안에 든 뜨거운 물이 오른 손등과 팔뚝 위로 그대로 쏟아졌다. 텀블러에 물이 반쯤밖에 없었던 게 다행이었지만 흰 가운의 소매가 넓게 젖어 버렸다.아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따가운 통증에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고, 곧바로 흰 가운을 벗었다.문밖에서 기다리던 이헌은 안에서 소리가 나자 바로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들어서자 반소매 셔츠 차림의 아림이 보였다. 손등부터 팔뚝까지 피부가 넓게 붉어져 있어 누가 봐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책상 위에는 엎어진 텀블러와 물에 흠뻑 젖은 기록지가 널려 있었고 바닥에도 물이 흥건했다.상황을 짐작한 듯 이헌의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무슨 일이야?”마침 그때 상담실 문이 다시 열리고 백요한이 돌아왔다.아끼는 제자의 팔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자 백요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게 무슨 일이야?”지희는 아림을 보며 뜻대로 됐다는 듯 아주 옅게 웃었다.하지만 곧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가를 붉히며 놀란 척 표정을 바꿨다.“언니, 죄송해요. 저,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괜찮으세요?”“너 일부러 그랬잖아.”지희는 속으로 흠칫했지만 곧 이헌의 팔을 붙잡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제가 어떻게 일부러 뜨거운 물을 언니한테 끼얹겠어요? 저 정말 실수한 거예요.”“오빠, 나 믿지?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너 방금 분명히...”“그만해.” 아림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헌이 미간을 찌푸리며 끊었다. “지희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해.”아림은 멍하니 이헌을 바라봤다. 가슴 안쪽에 눌러 둔 상처가 조금씩 번졌다.지희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아림을 바라보는 눈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도발이 담겨 있었다.‘이제 박이헌의 마음속... 네 위치가 어디인지 알겠지?’‘내가 일부러 그랬으면 뭐 어때?’‘이헌 오빠도 결국 나한테 뭐라고 못 하잖아.’아림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숙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손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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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가장 아끼는 제자에게 환자가 고의로 상처를 입혔다. 백요한은 이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지희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치맛자락을 쥔 손에 긴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CCTV 영상은 안 돼. 절대로 이헌 오빠가 보면 안 돼.’그 생각이 떠오르자 지희는 목까지 차오른 불만을 억지로 삼켰다. 고개를 숙이고 몸이 불편한 사람처럼 힘없는 기색을 보였다.“오빠, 나... 몸이 안 좋아. 집으로 데려다줘.”이헌은 지희의 말에 바로 답하지 않고 백요한을 바라봤다.백요한은 표정이 굳은 채 이헌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이헌도 굳게 다문 입술로 가볍게 목례를 건넨 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지희의 표정은 몇 번이나 바뀌었다. 결국 급히 발걸음을 옮겨 이헌을 따라 나갔다....이헌은 저녁 무렵 아림의 집을 찾아왔다.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은은한 연고 냄새가 흘러나왔다.이헌이 시선을 내리자 아림의 하얀 팔과 손등에 화상 연고가 두껍게 발라져 있는 게 바로 보였다.이헌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입을 열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아림은 미간을 좁히며 현관 앞에 선 이헌을 바라봤다.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남자를 대하는 눈은 맑고 차갑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이헌이 손에 든 봉투를 아림 쪽으로 내밀었다.약국에서 나온 봉투였다.“화상 연고랑 소염제.”아림은 받지 않았다.“이것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이헌은 약 봉투를 현관 바닥 한쪽에 내려놓고 반걸음 물러났다. “오늘 일은 미안해.”“됐어.” 아림은 감정이 읽히지 않는 평범한 목소리로 끊었다. “나랑 최지희 사이의 일은 당신이 사과할 필요 없어.”“그동안은 지희 상태랑 치료를 생각해서 문제 삼지 않았어. 이제 내가 치료를 맡는 것도 아니고.” 아림의 표정은 차분하게 굳어 있었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또 생기면 그땐 그냥 넘기지 않을 거야.”이헌은 입술을 다문 채 아림을 바라봤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림은 잠시 기다렸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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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토요일 오후.민혜정은 맞선 자리를 어떻게든 성사시키려고 일찌감치 아림의 아파트로 왔다.아림이 로아를 자신에게 맡기고 먹빛이 도는 회색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화장까지 마친 것을 확인하고서야 민혜정은 안심한 표정으로 로아를 데리고 나갔다.상대는 진명훈이었다. 금테 안경을 썼고 키는 180센티미터가 조금 넘었다. 오늘은 베이지색 캐주얼 재킷을 입고 있었다.아림이 도착했을 때 명훈은 이미 자리에 앉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차분한 인상이었다.아림이 앉은 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한번 살펴보고 간단히 자기소개를 나눴다.예상대로 명훈은 점잖고 말수가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만 말할 때는 여유 있고 분명해서 아림에게 꽤 괜찮은 첫인상을 남겼다.명훈은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림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만큼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아림 씨, 저는 말을 돌려 하는 편이 아닙니다. 아림 씨 첫인상이 정말 좋았어요. 아림 씨도 괜찮으시면 몇 번 더 만나 보고 싶습니다.”“제 기본적인 상황은 어느 정도 들으셨을 테니, 듣지 못하셨을 만한 얘기를 할게요.”아림은 찻잔을 든 채 명훈을 바라보며 차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병원 일이 바쁘고 갑자기 수술이 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만나더라도 자주 시간을 내지 못할 수 있어요.”“진명훈 씨.” 아림은 찻잔을 내려놓고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도 불편한 점은 없어요. 몇 번 더 만나면서 서로 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명훈의 눈빛이 밝아졌다. 안경을 한번 올려 쓰고는 배려하듯 먼저 대화할 만한 주제를 꺼냈다.이후의 분위기는 아림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다.식사는 거의 한 시간 반 정도 이어졌다. 두 사람은 각자의 생활 습관을 얘기했고 명훈은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계획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아림은 내내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명훈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자신이 예상했던 만큼의 거부감이 없었다.명훈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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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로아는 이상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전화 끊어진 거예요? 이모부, 이모부?”[응.]이헌은 주먹을 쥔 채 낮게 물었다. [누가 그런 말 했어?]“외할머니... 엄마 오늘 소개팅 갔는데... 잘되면 그 사람이 엄마 남자친구 된대요.” 로아는 작은 코를 찡긋거렸다. “남자친구가 뭐예요?”통화 너머가 다시 조용해졌다.“이모부...”[로아야. 다음에 엄마가 또 약속 있다고 하면 이모부한테 전화해. 그때 이모부가 남자친구가 뭔지 설명해 줄게.]이헌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통화를 끝냈다.로아는 꺼진 화면을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아직 안 알려줬는데요...”...사흘 뒤.명훈은 아림에게 도심에 있는 일식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아림은 짙은 남색 허리선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높게 묶었다. 차분하고 맑은 분위기가 두드러졌다.아림이 도착했을 때 명훈은 이미 식당에 도착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림에게 의자를 빼 주는 행동도 자연스러웠다.약속 시간을 정확히 지킨 것만으로도 아림에게는 꽤 좋은 인상이 더해졌다.“아림 씨, 입맛을 정확히 몰라서 제가 먼저 주문하지는 않았어요.” 명훈은 메뉴판을 아림 쪽으로 밀고 직원에게 주문을 조금 기다려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아림은 자리에 앉아 편하게 메뉴판을 들었다. 메뉴를 고르려던 중 시야 한쪽에 낯익은 사람이 들어왔다.키가 크고 늘씬한 남자가 짙은 회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있었다. 목에는 네이비색 머플러를 느슨하게 둘렀고 한 손은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었다.그보다 눈에 더 들어온 것은 이헌이 양갈래 머리를 한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아림은 놀라서 그대로 굳어졌다. 이헌과 로아였다.로아는 아림을 보자마자 이헌의 큰 손을 놓고 짧은 다리로 힘껏 달려왔다. “엄마!”명훈은 멈칫했다. 시선이 아림에게서 아이에게로, 다시 뒤따라오는 이헌에게로 옮겨 갔다.이헌은 훤칠한 체격에 선명하고 차가운 이목구비를 지녔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사람을 저절로 긴장시키는 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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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명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기고 아림에게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갔다.두 사람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말을 대놓고 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가 서로에게 남겨 줄 수 있는 마지막 예의였다.아림은 메뉴판을 내려놓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이헌은 로아에게 일회용 턱받이를 둘러 주고 있었다.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짧게 답했다. “응.”“지금 뭐 하는 거야?”“로아 밥 먹이려고.”아림은 이헌을 바라봤다. 가슴에 눌러 두던 화가 점점 커졌다. 결국 가방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로아야, 가자.”“근데 엄마...”이헌이 고개를 들어 아림을 바라봤다. 지나칠 만큼 차분한 표정이었고 목소리에도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로아 아직 밥 못 먹었어.”아림은 걸음을 멈췄다. 가방끈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갔다.결국 아림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도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헌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식당을 나갈 때 로아를 안고 문 앞까지 갔는데 뒤에서 이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그 의사는 너랑 안 맞아.”이헌은 문 안쪽에 서 있었다. 천장의 밝은 조명이 훤칠한 몸 뒤로 긴 그림자를 늘어뜨렸다.아림은 이헌의 말에 대답하지도,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명훈이 자리를 피했다는 이야기는 결국 민혜정의 귀에도 들어갔다.민혜정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며칠 뒤 다시 전화를 걸어 다른 사람 이야기를 꺼냈다.[아림아, 이번에는 명희 이모가 소개해 준 사람이야. 금융 쪽에서 일하고 조건도 괜찮대. 하나 걸리는 건... 그쪽도 이혼했고 아이가 하나 있어.]아림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그리고 너무 따지지만 마. 너도 이혼했고 로아 키우고 있잖아. 직장 조건이나 수입도 그쪽이 더 낫다는데 일단 만나기라도 해봐. 얘기가 잘 통할 수도 있지.]아림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여기서 거절하면 민혜정이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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