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의 모든 챕터: 챕터 41 - 챕터 50

100 챕터

제41화

창현은 잘 저어 둔 커피가 든 잔을 자연스럽게 아림 앞으로 밀어주었다. 아림은 컵을 받아들어 한 모금 마셨다.그때 창현이 손을 들어 아림의 입가에 묻은 우유 거품을 가볍게 닦아주었다.친한 친구 사이에서 흔히 나올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차 안에서 그 모습을 보던 이헌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고, 몸도 잠깐 굳었다.얼마나 오래 두 사람을 바라봤는지 이헌도 알지 못했다. 옆에서 지희가 다시 부르고서야 무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뒀다.“뭐 보고 있어?”“아무것도 아니야.”이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희는 이헌에게서 평소와 다른 기류를 느꼈다.지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헌 쪽으로 몸을 기울여 창밖을 보려 했다.“출발해.”지희가 제대로 확인하기 전에 이헌이 굳은 얼굴로 기사에게 말했다.기사는 짧게 대답하고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이동하는 내내 이헌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아림의 표정이 떠올랐다. 창현 앞에서 편하게 웃던 얼굴... 이헌과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느긋한 표정이었다....주말이 되자 창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서구 쪽에서 새 전시가 열렸는데 함께 보러 갈 생각이 있느냐는 내용이었다.아림은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로아는 오늘 무용 수업에 갔고 혼자 집에 있어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잠시 고민한 뒤 답했다. [네, 같이 가요.]외출 전 아림은 옷을 갈아입었다. 크림색 얇은 니트 카디건에 베이지색 와이드 팬츠를 입고 굽 낮은 메리제인 슈즈를 신었다.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풀어 두었다. 전체적으로 힘을 뺀 편안한 차림이었다.창현의 차는 아파트 앞에 서 있었고, 창현은 차 앞쪽에 기대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었다.연한 하늘색 리넨 셔츠 소매를 자연스럽게 걷어 올린 모습이 길고 반듯한 체형과 잘 어울렸다.아림이 가까이 오자 창현은 들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이거 마셔요, 아림 씨 거예요.”아림은 고맙다고 인사한 뒤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전시장 내부는 조명이 부드러웠고 관람객도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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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권 대표님.”옆쪽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창현이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이헌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차가운 표정이었다.이헌 옆에는 반듯한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이 함께 있었다. 사업상 동행한 사람처럼 보였다.유송진이었다.이 전시장은 유송진이 투자한 문화사업 공간 중 하나였다. 오늘 유송진이 이헌을 따로 초대한 자리였는데, 뜻밖에도 창현과 마주친 것이다.더구나 낯선 여대생이 창현의 옷소매를 붙들고 있는 장면까지 보게 됐다.이헌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곧장 두 사람 쪽으로 걸어갔다.억지로 다가붙던 여대생은 이헌의 서늘한 분위기에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창현의 소매에서도 손을 떼고 자리를 피했다.이헌은 여대생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창현만 똑바로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권 대표님.”창현은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행동을 조금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이헌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자 창현은 처음에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곧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미간을 찌푸렸다.“박 대표님이 관여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누군가를 진지하게 만나실 생각이면 불필요한 오해는 만들지 않으시는 게 좋겠죠.” 이헌은 흐트러짐 없는 슈트 차림으로 창현을 바라봤다.유송진은 옆에서 흥미롭게 두 사람을 지켜봤다. 한 사람을 두고 남자 둘이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이라니, 젊었을 때의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었다.창현의 눈매에 웃음이 번졌다. “박 대표님, 지금 아림 씨와 대표님은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죠. 저는 진심으로 아림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현재는 아림 씨 동생의 남편이시니 설명은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 저분은 오늘 처음 본 사람입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습니다.”‘동생의 남편’이라는 말이 나오자 이헌 주위의 공기가 한층 차갑게 가라앉았다....일주일 뒤, 아림은 선배 엄준과 함께 오스트리아 빈행 비행기에 올랐다.트라우마 심리치료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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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오늘 지희는 이헌의 파트너 자격으로 자리에 함께했다.지희는 정교하게 메이크업하고 샤넬의 이번 시즌 최신상인 짙은 와인색 벨벳 드레스를 입었다. 몸짓 하나하나가 단정하고 세련됐다.식사 중에는 적절한 때 이헌 대신 술을 받아 주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표정과 몸짓까지 지나치게 완벽해서 오래 연습해 온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브라운은 지희를 몇 초 바라본 적이 있었지만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헌과 사업 이야기를 계속했다.식사 중간 지희가 화장을 고치러 잠시 자리를 비우자, 브라운이 와인잔을 들고 유창한 영어로 낮게 말했다.“박 대표님, 실례가 될 수 있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옆에 계신 그분은... 박 대표님과 잘 맞는 사람 같지 않습니다.”이헌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와인잔을 쥔 손이 아주 조금 멈췄다.브라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40년 넘게 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봤습니다. 사람 보는 눈이 아주 형편없지는 않아요. 대표님은 그분과 함께 있을 때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군요.”“눈은 거짓말을 잘 못 합니다. 그분 곁의 대표님은 따뜻해 보이지 않아요.”브라운은 그 말만 남기고 자신의 잔으로 이헌의 잔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리고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지희가 옆에서 이런저런 말을 계속했지만, 이헌의 생각은 이미 오래전으로 흘러가 있었다.6년 전, 이헌과 아림이 결혼한 지 몇 달쯤 됐을 때였다.그날도 외국에서 온 중요한 고객을 접대하던 중이었다. 상대가 갑자기 이헌의 집을 구경하고 싶어 했고, 현지 가정식도 맛보고 싶다고 했다.아림은 별말 없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 쪽에서 아림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직접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림은 셰프와 메뉴 구성을 상의할 때 누구보다 진지했다. 고객도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식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직접 고객을 배웅하고 나란히 집 안쪽으로 돌아왔다.늦가을 밤이었다. 찬바람이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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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백요한은 기록을 적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술에도 핏기가 없었다.“아림아!” 백요한은 놀라 아림을 불렀다.아림은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린 채 책상 가장자리를 짚어 겨우 몸을 지탱했다. “괜찮아요. 아마 저혈당이...”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림은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백요한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뻗었다.하지만 사이에 회의용 테이블이 있어 제때 잡을 수 없었다.아림이 바닥으로 넘어지기 직전, 뒤에서 뻗어 나온 단단한 팔이 허리를 받쳤다. 몸 전체가 그 팔에 이끌려 안전하게 품 안으로 들어갔다.익숙한 우디 향과 베르가못 향이 가까이 번지자 아림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괜찮아?” 머리 위에서 이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미세하게 긴장된 톤이었다.‘박이헌?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이헌은 이날 병원 측과 의료기기 협력 사업을 논의하러 와 있었다. 관계자들과 복도를 지나던 중 회의실 문에 난 유리창 너머로 아림을 발견했다.잠깐 시선이 멈췄지만 곧 일행을 따라 지나가려 했다. 그러다 아림의 몸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생각할 여유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헌은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아림을 받아 낸 뒤에야 이헌은 품 안의 사람이 믿기 어려울 만큼 가볍다는 걸 깨달았다.5년 전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원래도 가느다란 골격인데 살이 거의 붙어 있지 않은 듯했다.이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과 답답함이 올라왔다.“교수님, 최 원장이 마지막으로 식사한 게 언제입니까?” 백요한을 향한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화를 억누르는 감정이 느껴졌다.‘자기 몸을 이렇게까지 안 챙기는 이유가 뭐야?’백요한은 안경을 고쳐 쓰며 차분하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다. “아마... 어제 저녁이었을 겁니다.”제자가 저혈당으로 쓰러졌으니, 가까이서 일하던 백요한도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이헌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더 묻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아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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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아림은 가슴이 철렁해서 고개를 돌리자 바로 이헌의 눈과 마주쳤다.입술을 살짝 다문 아림은 어색하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여기 계속 있을 필요 없어. 나 진짜 괜찮아.”이헌은 대답 대신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기찬아, ‘해산정’에 식사 주문해. 소고기 아스파라거스 볶음, 연근 볶음, 능이버섯 닭곰탕, 찹쌀 마죽까지.”이헌은 빠르지 않은 속도로 메뉴를 하나씩 또렷하게 말했다.아림은 눈가가 붉어진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라봤다.‘해산정’은 두 사람이 함께 살던 당시 아림이 자주 찾던 식당이었다.방금 이헌이 주문한 메뉴도 당시 아림이 자주 먹고 특히 좋아하던 음식들이었다.그런 사소한 취향까지 이헌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전화를 끊은 이헌이 아림을 바라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 교수님한테 들었어. 마지막으로 뭘 먹은 게 어젯밤이라며. 네 몸은 무쇠로 만들어진 줄 알아?”아림은 입을 열었다가 할 말을 찾지 못했다.결국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일이 바빠서 잊었어.”“잊었다고?” 이헌은 수액이 꽂힌 아림의 손등을 바라보며 눈빛을 낮췄다. “네가 의사잖아. 그런 말을 네가 하고도 믿어?”아림은 입을 다물었다.병실이 조용해졌다. 오랜만에 단둘이 있는 분위기가 두 사람 모두에게 낯설었다.아림은 화제를 돌렸다. “난 이제 괜찮으니까 바쁘면 먼저 가.”“안 바빠.”아림이 자는 동안 이헌은 필요한 업무를 모두 처리해 둔 상태였다.“그럼...”“네가 밥 먹는 거 보고 갈게.”평온한 말투였지만 결정을 바꿀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림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았다.아림은 이헌을 한 번 보고는 나가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20여 분 뒤 기찬이 보온 가방 두 개를 들고 병실 문을 노크했다. 이동식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고 눈치 있게 밖으로 나갔다.아림은 실제로 배가 많이 고팠다. 상체를 일으켜 가방을 열려고 했다.하지만 이헌이 먼저 가방을 열고 포장 용기를 하나씩 꺼내 가지런히 놓았다.닭곰탕은 뚜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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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식사가 절반쯤 지나자 아림의 마음도 조금은 편안해졌다.‘해산정’의 음식은 예전과 다름없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특히 능이버섯 닭곰탕은 진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아 몇 숟가락 먹고 나니 몸속까지 따뜻해졌다.아림은 맞은편에 앉은 이헌을 몰래 바라봤다. 이헌은 식사할 때도 조용했고 젓가락을 쥔 자세부터 모든 동작이 늘 반듯하고 질서정연했다.정장 재킷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었고 셔츠 소매는 두 번 접어 올려 단단한 손목이 드러나 있었다. 손목에는 이헌이 오래전부터 차고 다니던 짙은 빛깔의 나무 염주 팔찌가 있었다.둘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흐르던 중 이헌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이헌은 발신자를 확인하고 잠깐 망설이다 전화받았다.아림은 일부러 들으려 한 게 아니었지만 병실이 넓지 않아 통화 내용이 또렷하게 들렸다.[오빠, 어디야? 나 집에 혼자 있는데 좀 무서워...]지희였다. 부드럽고 가느다란 목소리에는 이헌에게 의지하는 기색과 애교가 짙게 묻어났다.이헌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한층 누그러졌다. “장모님과 유빈이는?”[엄마 아빠가 유빈이 데리고 근교로 놀러 가셨어. 집에 나 혼자야...]“무서워하지 마. 창문 잘 닫고 있어. 금방 갈게.”[오빠...]“내 말 들어.”아림은 젓가락을 든 채 굳었다. 속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뒤엉켜 올라왔다.조금 전까지의 따뜻한 분위기가 갑자기 우스운 착각처럼 느껴졌다.아림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 어긋난 감정에서 급히 빠져나왔다.통화를 마친 이헌이 돌아봤을 때 아림의 눈빛은 이미 차갑고 멀어져 있었다.이헌은 미간을 좁혔다.“저기...”아림의 목소리도 다시 평소처럼 담담해졌다. “늦었어. 이제 가 봐. 나보다 당신이 더 필요한 사람이 있잖아.”“수액 아직 안 끝났어.”“거의 다 들어갔고 간호사도 있어.” 아림은 옅게 웃었다. “오늘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신세 졌어.”이헌은 아림을 한동안 바라보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들었다.문 앞까지 간 뒤 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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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안으로 옮겨 주세요.”거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던 로아는 상자 안의 둥글고 하얀 로봇을 발견하자 까만 눈을 반짝였다.“엄마! 로봇이다!”기술자들은 설치와 기본 설정을 마친 뒤 기찬과 함께 돌아갔다.로아는 벌써 로봇 앞에 쪼그려 앉아 여기저기를 만지고 있었다. “너 이름이 뭐야?”로봇 상단의 표시등이 깜빡이더니 기계적인 음성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저는 919번 로봇입니다. ‘구구’라고 불러 주세요.]“구구! 구구!” 로아는 신이 나서 두 팔을 흔들었다. “노래도 할 수 있어?”[네. 어떤 노래를 듣고 싶으세요?]“반짝반짝 작은 별!”구구가 동요를 재생하자 로아는 그에 맞춰 춤을 췄다. 동작은 서툴고 자꾸 엇나갔지만 어린아이 특유의 해맑음과 생기가 가득했다.아림은 현관 쪽 문틀에 기대 아이의 모습을 바라봤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고 입가에도 옅은 웃음이 걸렸다.‘그래. 로아가 좋아하면 됐지.’...그 뒤 며칠 동안 아림도 시간이 날 때면 구구에게 몇 마디 말을 걸었다. 그러다 919가 생각보다 훨씬 정교한 AI라는 걸 알게 됐다.대화 상대에 따라 말투와 반응 방식을 조절할 뿐 아니라 가끔은 기계답지 않게 사람 냄새 나는 말을 툭 던지기도 했다.어느 날 밤, 아림이 야근하며 내담자 기록을 정리하다 무심코 ‘오늘 정말 피곤하다’라고 중얼거렸을 때도 그랬다.919의 표시등이 켜지더니 바로 답했다. [피곤하면 조금 일찍 쉬세요. 일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으니까요.]아림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들었다. “로봇이 사람한테 쉬라고도 하네?”[제 데이터베이스에는 ‘휴식’과 관련된 조언이 20만 건 넘게 저장돼 있습니다. 주인님께 들려드릴까요?]“아니, 괜찮아. 고마워.”아림은 고개를 저으며 요즘 AI 기술의 발전 속도가 놀라울 정도라고 생각했다.그래도 TG그룹을 생각하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인공지능 기술을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이었고 이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었다....아림은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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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이헌의 집 서재.이헌은 습관처럼 919번의 메인 시스템에 접속했다. 화면에 곧 아림의 음성 파형이 나타났다.“구구야, 너는... 남자들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해?”우유 잔을 들던 이헌의 손이 멈췄다.AI에게 자동 응답을 맡기지 않았다.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둔 채 그대로 기다렸다.아림은 소파 쿠션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거렸다.“내 전남편 있잖아. 너한테 말해 줄까... 진짜 마음도 차갑고 정나미라고는 없는 사람이야.”화면을 바라보던 이헌의 눈빛이 낮아졌다. 들고 있던 잔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나랑 살 때는 늘 차갑고, 매일 가까이 가기 어려운 사람처럼 굴었어. 원래 성격이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이혼하고 지금 아내한테는 얼마나 다정하고 잘 참아 주는지...”아림은 몸을 돌려 쿠션에서 얼굴을 빼고 눈을 가늘게 뜬 채 919번의 불빛을 바라봤다. 눈가가 술기운과 감정 때문에 붉어져 있었다.“최지희를 정말 사랑하나 봐. 그러니까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마음은 우스운 일이 된 것 같아.”아림은 작게 딸꾹질하고 다시 웅얼거렸다. “난 그 사람이 제일 싫어. 그렇게 원하던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잘 살면 되잖아. 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근데... 그 사람이 시켜 준 ‘해산정’ 닭곰탕은 진짜 맛있었어... 하하...”말이 끝난 뒤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아림은 쿠션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기울이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919번은 수십 초 동안 반응을 기다린 뒤 낮은 기계음으로 안내했다. [대화 모드를 종료합니다. 주인님, 편안한 밤 보내세요.]서재에서 이헌은 손을 키보드에서 거두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화면에 남은 대화 기록을 바라보자 가슴 안쪽이 답답해졌다.이헌은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그때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기찬이 보낸 메시지였다.[대표님, 내일 오전 10시에 백 교수님과 최지희 씨 치료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다른 일정 조정해 드릴까요?]이헌은 메시지를 읽은 뒤 한참 동안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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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이렇게 하면 적어도 아림이 돈을 내고 산 아침밥이 되는 셈이었다. 버릴 이유는 없었다....오전 10시, 지희는 이헌과 함께 상담실 안으로 들어왔다.지희는 연한 노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부드러운 머리를 어깨에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화장도 옅어서 얌전하고 순한 인상이 더 강했다.평소처럼 백요한이 치료를 진행하고 아림은 옆에서 기록을 맡았다.40분쯤 지나 치료가 일단락됐다. 물을 가지러 탕비실로 가는 아림을 지희가 가로막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맞닿았다. 지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눈에는 경고가 선명했다. “언니, 이헌 오빠는 지금 내 남편이야. 언니가 좀 멀리했으면 좋겠어.”아림은 지희를 차분히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무시당한다는 생각에 지희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질투가 섞인 목소리로 따졌다. “나도 알아. 언니랑 이헌 오빠가 나 몰래 연락하고 있는 거.”“말 다 끝났어?”아림의 담담한 반응에 지희는 숨이 막히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곧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는 엄마 아빠를 내 곁에서 가져가 놓고, 이제 이헌 오빠까지 빼앗으려고 하는 거야?”조금 전 지희는 우연히 이헌의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아림이 보낸 송금 내역과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그걸 본 지희의 속에서는 아림을 향한 증오가 거세게 치밀었다.아림은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송금은 빚지고 싶지 않아서 한 것이고, 대화라고 해 봐야 짧은 메모 한 줄뿐이었다.아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자기 생각에 갇힌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었다.“그럴 일 없어. 이제 비켜 줄래? 물 가지러 가야 해.”아림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지희의 얼굴이 굳었다. 5년 전 아림을 몰아냈을 때처럼 다시 상황을 만들려던 중, 지희의 시야에 이헌이 들어왔다.반듯한 흰 셔츠는 짙은 회색 슬랙스 안에 정갈하게 넣어 입었고, 소매 끝의 고급 커프스 링크가 단정한 차림에 힘을 더했다.지희는 곧 눈가를 붉히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꼭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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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밤.로아는 919번과 수수께끼 놀이를 하다 지쳐 돌보는 아주머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거실은 이내 조용해졌다.아림은 소파에 앉아 무릎 위에 논문 한 편을 펼쳐 두었지만 단 한 줄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결국 919번 앞으로 가 쪼그려 앉은 뒤 둥근 머리를 손끝으로 가볍게 건드렸다.“구구야.”[안녕하세요, 주인님.]919번의 불빛이 깜빡였다.“네가 보기에 나는... 전남편한테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을까?”아림은 쪼그린 자세 그대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지희는 자극받으면 안 되고, 나는 괜찮은 거야?”잠깐 말을 멈췄다. 목소리가 더 작아지고 씁쓸함이 섞였다.“최지희가 거짓말해도 그 사람은 그렇게 쉽게 믿는 걸까?”혼잣말을 마친 아림은 919번의 금속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애초에 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대로 일어나 씻으러 갔다.919번의 불빛이 꺼지고 로봇은 조용히 거실 한쪽으로 이동했다....이헌의 서재. 이헌은 굳은 얼굴로 의자에 기대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방금 아림이 한 말이 그대로 기록돼 있었다.이헌의 시선은 ‘최지희는 자극받으면 안 되고, 나는 괜찮은 거야?’와 ‘최지희가 거짓말해도 그 사람은 그렇게 쉽게 믿는 걸까?’라는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손을 들었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려놓았다.가슴이 답답했다. 이헌은 눈을 감았다가 결국 원격 접속 화면을 종료했다....며칠 뒤 창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그때 아림은 진료 기록을 넘겨 보던 중이었다.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자세를 바꾸며 물었다. “여보세요. 창현 씨, 무슨 일이세요?”[컨벤션센터에서 로봇 기술 전시회가 열립니다. 업계 주요 기업들이 많이 참가하고요. 초대장이 두 장 있는데, 같이 갈래요?]아림은 잠깐 망설였다.[로아한테 들었는데 집에 가정용 AI 로봇이 있다면서요. 마침 기회가 생겼으니 업계 최신 기술도 같이 보자는 겁니다. 아림 씨가 진행하는 치료 연구에 활용할 만한 로봇이 있을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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