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로판 말고 로또 주세요!: Chapter 21 - Chapter 30

35 Chapters

21. 원래 세계로

문 너머는 온통 하얀 공간이었다. 처음 이세계에 오기 전 만났던 바로 그곳과 똑같았다.“여기…”그때, 낯익은 실루엣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버지였다.“…아빠?”“로젤리나야.”익숙한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토록 원망했던, 하지만 그리워했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아빠가 왜 여기 있어?”“내가 이 게임을 만들었으니까.”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시스템의 진짜 정체가 아버지였다니.“무슨 소리야, 그게…”“엄마를 찾기 위해서였어. 엄마가 원작 로판 소설에 빙의된 걸 알고, 널 데려오면 나도 같이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거든.”“그럼 이 모든 게, 다 나 때문에…”“아니야. 다 아빠 욕심 때문이었지. 미안하다.”아버지의 눈에 진심 어린 후회가 담겨 있었다.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원망도, 그리움도, 화도,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그럼 이제 이 게임, 끝낼 수 있는 거야?”“응. 네가 원한다면.”“크리스는? 황후 폐하는?”“다 데리고 나갈 수 있어. 다만…”아버지가 잠시 말을 멈췄다.“한 가지 조건이 있어.”“조건이 뭔데?”“이 세계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아야 해. 그게 원래 목표였잖아.”“그건 알아. 근데 아직 결정을 못 했어.”“빨리 결정해야 해. 게임의 문은 곧 닫힐 거거든.”다급한 마음이 들었다.나는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 크리스와 황후를 데리고 나왔다.문 앞에서 크리스가 아버지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당신이… 진짜 신이었던 겁니까?”“신은 아니고, 그냥 미련한 아빠였을 뿐이지.”크리스가 허탈하게 웃었다.“그럼 저는요? 저는 이 세계의 진짜 존재입니까, 아니면 그냥 데이터에 불과합니까?”아버지가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네가 느끼는 감정이 진짜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크리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처음으로 보는 인간적인 모습이었다.“…저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그럼 도와줄게. 대신 다시는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해.”“약속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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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남겨진 사람들

문이 닫혔다.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정적만 남았다. 칼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있던 허공을 바라보았다.“가버렸네.”혼잣말이 텅 빈 제단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러스티도 옆에서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다시는 못 볼 사람이라는 걸. 그런데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실감이 안 났다.“…괜찮아?”칼이 먼저 물었다. 러스티가 고개를 저었다.“괜찮지 않습니다. 근데 괜찮아져야겠죠.”의외로 담담한 대답이었다. 칼은 그 말이 오히려 더 아프게 들렸다.크리스는 그 자리에 가장 오래 남아있었다. 문이 있던 자리, 이제는 그냥 낡은 벽밖에 없는 그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전하.”시종이 조심스레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전하, 이만 돌아가셔야 합니다.”“…알았어.”발걸음이 무거웠다. 궁으로 돌아가는 길, 크리스는 처음으로 궁이 낯설게 느껴졌다. 태어나서부터 살아온 곳인데, 이상하게도 남의 집 같았다.‘나는 이제 뭘 해야 하지.’회귀도 끝났고, 어머니도 떠났고, 죽이려 했던 여자도 떠났다. 남은 건 텅 빈 자리와,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자신뿐이었다.*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크리스는 정무를 보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귀찮다고 미뤘을 일들을, 이상하게도 꼬박꼬박 처리했다. 대신들이 놀랄 정도로 성실했다.“전하, 요즘 많이 달라지셨습니다.”“그런가.”“전보다 훨씬… 인간적이십니다.”크리스가 픽 웃었다. 인간적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비웃었을 표현이었다. 근데 지금은 그 말이 싫지 않았다.밤이 되면 그는 종종 궁 안의 작은 정원에 나가 앉아있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곳이었다.“어머니.”대답 없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는 게 습관이 되었다.“저 잘하고 있는 걸까요.”바람만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 바람을 대답이라고 여기기로 했다.*칼은 상단을 떠나지 않았다. 예전처럼 밤마다 남의 집 담을 넘는 일도 그만두었다. 대신 낮에 정직하게 장사를 하고, 밤에는 술을 마셨다.“요즘 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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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남은 것은 추억뿐

러스티가 문득 그렇게 물었다.그러자 칼이 술을 홀짝이며 답했다.“몰라. 근데 여기보다는 편한 곳이겠지. 목숨 걸고 싸울 일은 없을 테니까.”“편한 게 좋은 걸까요.”“글쎄. 근데 적어도, 그 여자는 거기서 웃고 있었으면 좋겠어.”크리스가 잔을 들어 올렸다.“그 사람을 위해.”“그 사람을 위해.”세 사람의 잔이 동시에 부딪혔다. 짧은 침묵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그리움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이윽고 몇 년이 지났다.크리스는 좋은 황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자애로운 황제라고 불렀다. 예전의 광기 어린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었다.칼은 상단을 대륙 최고로 키워냈다. 여전히 혼자였지만, 외롭지는 않았다.러스티는 기사단장이 되었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매년 같은 날, 로젤리나가 처음 빵을 나눠주었던 거리에 나가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었다.“이거 왜 하시는 거예요, 기사단장님?”어린 기사가 묻자 그는 옅게 웃으며 답했다.“그냥, 누군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세 사람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매년 같은 날 같은 정원에 모여 같은 사람을 추억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남겨진 사람들은,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앞으로 나아갔다.*[황태자, 현실 세계로]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었다.황궁 깊은 곳, 아무도 열 수 없는 낡은 제단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대로 황실에서만 은밀히 전해지던 그 존재를, 크리스는 황제가 된 후 처음으로 다시 찾았다.“아직 남아있으려나.”먼지 쌓인 제단 앞에 서서, 그는 오랜만에 손을 얹었다.[오랜만이군요, 전 플레이어.]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는 놀라지 않았다. 어쩐지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 같았다.“아직 있었네.”[규칙을 관리하는 존재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요.]“물어볼 게 있어.”[말씀하세요.]“그쪽 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시스템이 잠시 침묵했다.[가능은 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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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로젤리나를 찾아서

이어서 눈을 떴을 때, 그는 낯선 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사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철제 마차들, 하늘 높이 솟은 건물들, 처음 보는 옷차림의 사람들.“…여기가.”말도, 글씨도 낯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스템이 마지막 배려로 넣어준 것인지, 언어는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가진 것 하나 없이, 신분도 없이,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홀로 서 있었다. 두려움보다는 이상한 해방감이 먼저 밀려왔다.‘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네.’그는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거리의 간판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그는 하나하나 눈길을 주며 걸었다. 이 넓은 세계 어딘가에 그녀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 하나만 붙들고서.가진 건 없었지만, 잃을 것도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그날 저녁, 노을이 낯선 도시의 하늘을 붉게 물들일 때, 크리스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찾을게, 로젤리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그의 새로운 삶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첫날 밤, 크리스는 길에서 잤다.정확히는 잘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나는 낯선 소음, 밝게 빛나는 간판들, 처음 겪는 추위. 공원 벤치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이 세계는 밤에도 이렇게 밝구나.’익숙했던 궁전의 밤과는 전혀 다른 밤이었다. 그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황제였던 사람이 노숙이라니. 근데 이상하게 서럽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다음 날, 그는 처음으로 ‘돈’이라는 것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배가 고팠지만 살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가진 건 이 세계에서는 아무 가치도 없는, 낡은 예복 한 벌뿐이었다.“저기, 실례합니다.”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지나갔다. 이 세계에서 그는 그저 행색이 수상한 이방인일 뿐이었다.*일주일쯤 지나서야, 그는 어느 편의점 사장의 눈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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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황태자의 여정

그러다 반년이 지났을 무렵. 크리스는 우연히 인터넷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게임업계 화제, ○○스튜디오 대표의 감동 실화 – 오랜 별거 끝 딸과 재회] 기사에는 흐릿한 사진이 하나 실려 있었다. 중년 남성과, 그 옆에 서 있는 젊은 여성. 화질은 안 좋았지만, 크리스는 한눈에 알아봤다. “…로젤리나.” 손이 떨렸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확실한 단서를 찾은 순간이었다. 기사에는 회사 이름과 대략적인 위치만 나와 있었고, 그녀의 실명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시작점은 찾은 셈이었다. 그는 그날 밤, 편의점 사장에게 그동안 모은 돈을 다 털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짐을 챙겼다. “진짜 가는 거야?” “네. 찾았어요, 실마리.” “잘됐네. 가서 꼭 찾아.” “감사했습니다, 사장님. 이 세계에서 처음 도와주신 분이에요.” * 그가 찾아간 스튜디오 앞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크리스는 며칠간 근처를 서성이며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지켜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익숙한 실루엣이 건물을 나섰다. 연분홍빛은 아니었지만, 검은 생머리 아래 낯익은 옆얼굴. 걸음걸이. 웃는 방식.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로젤리나.”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낯선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당연했다. 이 세계에서 그녀는 그를 만난 적이 없으니까. “누구세요?” 크리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이세계, 회귀, 황태자, 그 모든 걸 어떻게 한 문장으로 담을 수 있을까. “…저를 모르시겠지만.” 그때, 그녀 뒤에서 한 여자아이가 걸어 나왔다. 스물이 조금 안 되어 보이는, 어딘가 낯익은 분위기의 아이였다. “언니, 누구야?” * 그 순간, 크리스는 깨달았다. 얼굴은 비슷하지만, 이 여자는 로젤리나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눈매도, 표정도 조금씩 달랐다. 닮았을 뿐, 다른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허탈함이 밀려왔다. 반년을 헤맨 끝에 찾은 단서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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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드디어 재회

인사 기록에 남아있던 주소는 낡은 원룸촌이었다. 크리스는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반년 넘게 헤매며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문 앞에 서니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안녕하세요, 저는 사실 다른 세계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반년을 편의점에서 일하고, 노숙을 하고, 낯선 세계의 언어와 규칙을 익힌 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수도 없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을 더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계단에 걸터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벌써 밤 열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골목의 가로등이 깜빡이며 낡은 빛을 뿌렸다. * 세 시간쯤 지났을까.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걸음걸이였다. 크리스는 벌떡 일어섰다. 가로등 아래로 걸어오는 실루엣. 검은 생머리, 피곤에 절어 있지만 또렷한 눈매. 손에는 편의점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 “…로젤리나.” 그녀가 놀라 걸음을 멈췄다. “누구세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였다. 당연했다. 밤늦게 자기 집 앞에 낯선 남자가 서 있으니 무서울 만도 했다. “저, 위험한 사람 아닙니다. 잠깐만 얘기 좀 하고 싶어서요.” “싫은데요. 신고할게요.”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려는 순간, 크리스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도담 씨, 스물여덟 살. 야간 편의점 알바를 했었고, 아버지가 게임 회사를 운영하시고, 오랫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셨죠.” 그녀의 손이 멈췄다. “…그걸 어떻게.” “그리고 미연시 게임을 좋아하셨고, 최애 캐릭터를 매일 밤 텔레비전 화면으로 플레이하셨죠. 어느 날 밤, 게임 화면이 이상하게 변하면서 정신을 잃으셨고요.” 이도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신, 뭐야.”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도 될까요.” “…미쳤어요?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집에 들여요.” 도담의 반응은 당연했다. 맞는 말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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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정체를 밝히다

크리스가 조용히, 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말도 안 돼.” 이도담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럴 만도 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온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그 이세계에서의 기억을 마치 오래된 꿈처럼 정리하며 살아왔다. 가끔 떠오르긴 했지만, 현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 진짜 크리스 맞아요?” “네.” “증명할 수 있어요?” 크리스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 무도회 날 나한테 손목 잡혔을 때 오른손잡이인데도 왼손으로 나이프를 쥐고 있었어요. 오른손을 다쳤다고 거짓말했지만, 사실은 왼손잡이인 척하면서 방심시키려는 거였죠.” 이도담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러스티가 준 리본, 왼쪽 손목에 묶고 다녔고, 칼이 준 목걸이는 옷 안쪽에 숨겨서 아무도 못 보게 했어요. 나는 그게 못마땅했지만 티는 안 냈죠.” “…” “그리고 무도회에서 어머니가 저를 막았을 때, 당신은 제일 먼저 저한테 달려온 게 아니라 어머니한테 먼저 달려갔어요. 그게 서운했지만, 이해했습니다.” 이도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진짜네. 진짜 크리스구나.” 이도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왜, 왜 이렇게까지 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크리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떠난 뒤로, 저는 처음으로 진짜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회귀에 쫓기느라, 어머니한테 집착하느라, 제 진짜 감정이 뭔지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거든요.” “…”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어요. 제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 모든 순간에도, 사실은 당신이 살아있길 바랐다는 걸요. 죽이려는 시도가 매번 실패했던 것도, 어쩌면 제 안 깊은 곳에서는 그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이도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당신이 어머니와 재회하는 걸 보면서, 처음으로 알았어요. 진짜 사랑이 뭔지. 소유하거나 집착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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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고백과 대답

“계획도 없이, 돌아갈 방법도 없이, 그냥 저 하나 보겠다고 다 버리고 왔다는 거잖아요.” “맞아요.” 이도담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나 참, 이런 사람을 어떻게 미워해요.”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크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워하시는 거예요?” “아니요. 그 반대예요.” 이도담이 그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겠다, 싶어서요.” 그 말에 크리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반년 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고생은요, 뭘.” “했잖아요. 노숙도 하고, 알바도 하고, 언어도 새로 배우고. 그 세계에서는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다 알아서 해주던 사람이.” “그건 그렇지만, 후회는 안 해요.” “근데 하나만 물어볼게요.” 이도담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왜 하필 저예요? 그 세계에 사람 많았잖아요. 근데 왜 굳이 저를 찾으려고 이 고생을 한 거예요?” 크리스는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저도 몰랐어요. 그냥 사명감 같은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회귀를 끝내게 해준 사람이니까,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다고요.” “근데요?” “근데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당신이 겪었을 삶을 조금씩 체험하면서 깨달았어요. 당신이 그렇게 힘든 삶을 살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 “그 세계에서 당신은 항상 웃고 있었잖아요. 로또 얘기 하면서 장난치고, 힘든 순간에도 농담하고. 근데 사실은 그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생존 방식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이도담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런 당신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반했던 것 같아요.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처음 만났을 때는 그냥 이용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당신이 웃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편해졌어요.” “…”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순간에도, 사실 제일 무서웠던 건 정말로 당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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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프러포즈

며칠 뒤, 크리스는 이도담의 아버지를 만났다. 처음에는 딸의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반신반의하던 그였지만, 크리스의 진지한 태도와, 무엇보다 딸의 눈빛이 예전과 달라진 걸 보고 마음을 열었다. “정말 그 세계에서 온 사람이란 말이지.” “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믿어. 우리 딸이 그 세계 갔다 온 것도 진짜였으니까, 못 믿을 것도 없지.” 그는 흔쾌히 크리스의 신분 문제를 도와주기로 했다. 정확히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크리스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몇 주 후 그는 이 세계의 정식 주민이 되어있었다. 이름은 이도담이 지어주었다. “크리스… 한국 이름으로 하면 뭐가 좋을까. 음, 크리스탈에서 따서, ‘결’ 어때요? 맑고 투명하다는 뜻으로.” “결이요?” “성은… 그냥 제 성 따라갈래요? 이결.” “이결.” 크리스, 아니 이결은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낯설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제 뭐 하고 살 거예요?” 이도담이 물었다. 이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당신 아버지 회사에서 일해볼까 해요. 스토리 관련 일이요.” “그거 잘할 것 같긴 하네요. 실제로 그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이니까.” “당신이 도와주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도담이 눈을 흘겼다. “은근슬쩍 저랑 계속 같이 일하려고 하는 거 다 보여요.” “티가 났나요.” “많이요.” 둘은 마주 보며 웃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낯선 세계였지만,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 몇 달 후, 두 사람은 작은 회사에 함께 취직했다. 이도담은 다시 스토리 작가로, 이결은 신입 기획자로. 매일 밤늦게까지 야근하는 날도 있었지만, 예전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삶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칼이랑 러스티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어느 날 밤, 야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도담이 문득 물었다. “잘 지낼 거예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 둘 다 씩씩했으니까.” “보고 싶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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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둘의 결혼

결혼식은 조촐했다. 이도담은 화려한 걸 원하지 않았고, 이결도 마찬가지였다. 큰 예식장 대신, 작은 정원을 빌려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했다. “그 세계에서 이미 한 번 결혼했었잖아요, 우리.” “그건 강제였잖아요. 이번엔 다르죠.” “그건 그렇죠.” 준비는 소박했지만, 마음만큼은 그 어느 결혼식보다 진심이었다. 이도담의 아버지가 눈물을 훔치며 그녀의 손을 이결에게 넘겨주었다. “내 딸, 잘 부탁하네.”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 표현, 좀 무섭다니까요.” 이도담이 옆에서 픽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하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결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했다.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게 낫네.” 주례는 없었다. 대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짧은 편지를 읽어주기로 했다. 이도담이 먼저 종이를 펼쳤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사랑이 뭔지 잘 몰랐어요. 로또처럼 운으로 얻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이제는 알아요. 사랑은 운이 아니라, 매일 선택하는 거라는 걸요. 힘든 날에도, 화가 나는 날에도, 그래도 당신을 선택하겠다고 다짐하는 것. 그게 진짜 사랑이라는 걸 당신을 통해 배웠어요.” 이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가 이어서 편지를 읽었다. “저는 평생 껍데기로 살았어요. 진짜 저를 봐준 사람이 없었거든요. 사람들은 제 얼굴을, 제 지위를, 제 쓸모를 사랑했지 저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한 적은 없었어요. 근데 당신은, 제가 제일 미친 짓을 했을 때도, 제가 가장 볼품없었을 때도 저를 봐줬어요. 그래서 저는 이제, 평생 당신 곁에서 진짜 제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그 자체로 사랑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매일 느끼게 해드릴게요.” 박수 소리가 정원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낯설었던 세계가, 완전히 그들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피로연에서는 칼과 러스티 이야기가 잠깐 화제에 올랐다. “그 두 사람,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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