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약을 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단목현이 항복 대신 내놓은 것은 조건이었다. 그 사람다운, 세상에서 제일 답답한 조건."서약은 뇌겁 전날 밤에 한다. 그 전에 마음이 바뀌면 — 언제든, 이유를 묻지 않고 무른다.""안 바뀌어요.""사십사 일 남았다. 바뀔 시간은 충분하다.""안 바뀐다니까요?""바뀌어도 된다는 뜻이다."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날부터 사부는 이상해졌다. 아니 — 이상하게 정직해졌다. 사십사 일 동안 마음이 바뀔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그는 그녀에게 저의 가장 나쁜 것들을 하나씩 꺼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물건의 하자를 전부 고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장사꾼처럼."나는 삼백 년간 사람과 밥을 먹지 않았다. 같이 살기에 재미없는 성정이다.""알아요. 국수 반 그릇 남기는 것도 알아요.""나는 잠이 없다. 밤에 마당을 걷는다. 거슬릴 것이다.""알아요. 초사흘엔 고목 옆에, 보름엔 절벽 쪽에 서 있죠.""…알고 있었나.""저도 잠 없어요. 창문으로 다 보여요."그런 문답이 마흔 번쯤 오갔다. 하자 고지는 갈수록 궁색해졌고("나는 감 씨를 뱉는 법을 모른다", "나는 웃는 법을 잊어 얼굴이 굳었다", "나는 삼백 년 치 옛날 사람이라 말투를 고칠 수 없다"), 연소하는 그 궁색함이 좋아서 매번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씨는 제가 발라 드리고, 웃는 건 눈으로만 웃어도 알아보고, 말투는 — 사실 그 말투가 좋다고는 차마 말해주지 않았다. 알면 더 심해질 테니까. 앵두는 그 옆에서 "두 분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싸우는 거예요, 좋아 죽는 거예요?"라고 물었고, 백리유음은 설봉에 다녀갈 때마다 반보씩 멀어지는 두 사람의 거리 아닌 거리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웃지 않는 사람은 하나였다.위지란은 서약 의식의 준비를 도맡았다 — 금서를 해독할 수 있는 것이 그뿐이었으니까. 진법의 배치, 서약문의 고증, 두 혼의 공명 주기 측정까지. 누구보다 성실하게, 누구보다 말없이. 어느 밤 연소하는 마당에서 홀로 진법 도면을 그
Last Updated : 2026-07-14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