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Chapter 91 - Chapter 100

100 Chapters

제91화

다음 날 아침.호건은 식탁에서 30분 가까이 기다렸지만 단미는 아침을 먹으러 내려오지 않았다.시간을 확인한 호건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오정란에게 말했다.“단미 씨가 아직 안 내려오네요. 아직 자는 건지 몸이 안 좋은 건지 한번 올라가 봐 주세요.”오정란이 대답했다.“단미 씨가 오늘 아침은 안 드신다고 하셨어요.”호건이 멈칫했다.“안 먹는다고요? 왜요?”오정란이 대답하기도 전에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호건이 고개를 돌렸다.단미가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평소보다 조금 큰 가방을 멘 채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딱 봐도 외출할 차림이었다.단미는 다이닝 룸으로 와 오정란에게 물었다.“이모님, 마당 대문 열어 두셨어요?”“네. 30분 전에 열어 뒀어요.”호건이 의아하게 단미를 바라봤다.“아침부터 어디 가?”“산부인과 산전검진.”호건의 표정이 바로 달라졌다.자리에서 일어나 단미에게 다가갔다.“검진 가는데 왜 나한테 미리 말 안 했어?”단미는 오히려 호건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봤다.“왜 당신한테 말해야 해?”‘아이를 품고 있는 건 나인데.’“나도 같이 가야지.”“됐어, 됐어.”단미가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당신도 하루 종일 중요한 일로 바쁘신 분인데 제 검진 같은 사소한 일로 번거롭게 해 드릴 수 있나요.”“이게 어떻게 작은 일이야? 내가 아빠인데 당연히...”호건이 말하던 중 단미의 핸드폰이 울렸다.단미는 바로 전화받았다.“여린아, 도착했어?”호건 쪽은 더 신경 쓰지 않고 현관으로 가 신발을 갈아 신었다.호건도 곧바로 뒤따랐다. 걸으면서 핸드폰을 꺼내 민석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여린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렸다.[우리 이미 너희 집 마당 앞이야.]“우리?”[응. 나랑 준호.]단미가 신발을 신으면서 물었다.“너만 같이 가면 되지 준호는 왜 불렀어? 준호 요즘 바쁘다며.”여린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우리 조카 첫 검진인데 삼촌이랑 이모가 같이 가야지.]단미가 웃었다.“그것도 괜찮네. 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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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호건이 대답하려던 때 핸드폰이 먼저 울렸다.화면에 민석 이름이 떠 있었다.호건은 잠깐 망설이다 단미에게 말했다.“잠깐 전화 좀 받을게.”두어 걸음 떨어져 통화를 받았다.민석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 오전 9시 반 의사결정 회의... 정말 참석하지 않으시는 겁니까?]며칠 전부터 호건이 여러 차례 직접 챙기겠다고 강조했던 핵심 회의였다.호건은 단호하게 말했다.“아침에 중요한 일이 있어. 못 가.”“회의는 네가 진행해. 내가 정리한 방향대로 추진하고 회의록은 끝나면 나한테 보내.”호건이 업무 지시를 하는 모습을 보며 단미는 고개를 저었다.‘저렇게 바쁜 사람이 굳이 검진을 왜 따라온다는 거야?’‘정말 같이 가더라도 무슨 도움이 될지 알 수도 없고.’단미가 검사를 다 끝낼 때까지 업무 전화가 계속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단미는 준호와 여린에게 말했다.“우리 가자.”준호가 호건 쪽을 봤다.“저 사람은?”“신경 쓰지 마. 일하느라 바쁘잖아.”준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운전석에 탔다.여린은 뒷문을 열어 단미가 먼저 앉게 했다.단미가 자리를 잡자 문을 닫고 반대쪽으로 돌아가려 했다.그런데 고개를 들어 보니 호건이 이미 반대편 뒷문을 열고 있었다.여린은 멈춰 섰다.차에 올라탄 호건을 본 단미도 눈이 커졌다.“당신이 왜 타?”호건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문을 닫았다.“삼촌이랑 이모도 가는데 아빠인 내가 왜 못 가?”단미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라는 사람이 회사 일은 안 보세요?”호건은 단미를 똑바로 바라봤다.“일보다 너랑 아이가 더 중요해.”목소리가 너무 진지해 단미도 잠깐 멍해졌다.여린이 조수석에 타자 호건은 운전석의 준호에게 말했다.“준호 씨, 출발하셔도 됩니다.”준호는 룸미러로 뒷좌석의 호건과 단미를 번갈아 봤다.한숨을 한번 쉬고 차를 출발시켰다.이미 타 버린 사람을 억지로 내리게 할 수도 없었다.게다가 호건은 실제로 아이의 친아버지였다.검진에 따라오지 못하게 할 이유도 없었다.차가 부드럽게 도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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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모든 검사를 끝낸 뒤 호건은 단미를 대기실 의자에 앉혔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달 직원이 보온 가방을 들고 와 호건에게 건넸다.호건은 감사 인사를 하고 받아 단미에게 말했다.“배고프지? 결과 기다리는 동안 조금 먹어.”단미가 보니 병원 근처 특급호텔에서 주문한 음식이었다.호건은 따뜻한 우유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어 건넸다.“고마워.”단미는 받아 한 모금 마셨다.그러다 옆쪽 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다른 임산부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 둘은 아내와 함께 앉아서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도 핸드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단미는 다시 자기 옆에서 간식과 음식을 하나씩 정리해 주는 호건을 바라봤다.“지 대표는 생각보다 꽤 성실한 보호자네.”전남편이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잘하고 있었다.병원에 온 뒤 호건이 업무 전화를 받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문진 내용이나 검사 항목도 오히려 단미보다 더 집중해서 확인했다.호건은 단미의 놀림 섞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부드럽지만 진지한 눈으로 단미를 바라봤다.“앞으로 검진할 때마다 내가 동행할게.”단미가 우유병을 쥔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다.“당신...”호건이 먼저 부탁했다.“거절하지 마.”깊은 눈 속에 아주 희미한 간절함이 보였다.왜인지 단미의 마음도 조금 약해졌다.차갑게 거절하는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해 뒀다.“미리 말하는데, 당신이 매번 검진 따라와도 아이는 나랑 살 거야.”“당연하지.”호건의 눈에 웃음이 짙어졌다.“내가 약속했잖아. 양육권은 네가 갖는다고.”그 대답은 단미 마음에 들었다.만족스럽게 눈썹을 한번 움직이고 우유를 다시 마셨다.호건이 작은 용기를 열었다.“계란찜 좀 먹을래? 아직 따뜻해.”옆에 앉아서 단미에게 음식을 하나씩 챙겨 먹이기 시작했다....검사 결과가 나온 뒤 의사는 결과지를 확인하고 모두 정상 범위라고 설명했다.이어 임신 초기에는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 줬다.호건은 옆에서 아주 진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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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그런데... 할머니 원래 보름 뒤에 오시는 거 아니었어? 왜 벌써 돌아오셔?”이영숙은 반년 전 위험도가 높은 심장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수술 전 월담사에 가서 무사히 회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수술이 잘 끝난 뒤에는 감사의 뜻으로 반년 동안 절에 머물면서 기도와 봉사를 하겠다고 했다.원래 일정대로라면 보름 뒤에 돌아오는 게 맞았다.호건이 말했다.“기도는 기간을 꽉 채우는 것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시더라.”단미가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그렇지.”호건은 단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할머니가 내일 본가에 와서 같이 밥 먹자고 하셨어.”잠깐 말을 멈췄다가 물었다.“너... 나랑 같이 갈 수 있어?”단미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이혼한 뒤 단미가 유일하게 미안함을 느끼는 사람은 이영숙이었다.두 사람의 결혼을 이어준 사람도 할머니였다.호건과 결혼해 들어간 뒤에도 이영숙은 단미에게 늘 친절하고 다정했다.이영숙이 돌아왔다면 당연히 한번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게 맞았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단미는 눈을 내리깔고 낮게 말했다.“저 이제 할머니 손주며느리 아니잖아. 당신이랑 같이 본가에 가는 건 좀 이상해.”호건이 바로 말했다.“하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너를 손주며느리로 알고 계셔. 오히려 네가 안 가는 게 더 이상해.”단미가 난처한 듯 미간을 모았다.“그래도...”“할머니 아직 회복 중이야. 의사도 큰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호건은 단미의 표정을 살폈다.“우리가 이혼했다는 걸 지금 알게 되시면 감정적으로 충격을 받으실 수도 있어.”그 말을 들은 단미의 눈빛이 긴장됐다.호건이 낮은 목소리로 부탁했다.“이번만 도와주면 안 돼?”“그냥 하루만 나랑 부부인 척해 줘. 지난번처럼 보수도 줄게. 괜찮아?”단미는 고개를 저었다.“할머니 때문이라면 돈은 필요 없어.”호건의 눈이 밝아졌다.“그럼 같이 간다는 뜻이야?”단미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호건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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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본가로 향하는 차 안.단미는 다시 옆의 호건에게 시선을 줬다.아무리 봐도 오늘 옷차림은 일부러 신경 써서 꾸민 것 같았다.단미가 갑자기 물었다.“오늘 본가에 다른 손님도 와?”“아니.”호건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왜?”“그냥.”예전에는 본가에 갈 때 굳이 이렇게까지 옷과 머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오늘은 왜 저러나 싶었다.그러다 호건이 오늘 하루 쉰다는 말을 떠올리자 단미의 눈꺼풀이 가볍게 움직였다.“설마 오늘 본가에 하루 종일 있는 거야?”“응.”호건은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할머니한테 오늘 쉰다고 말씀드렸어. 하루 종일 같이 있어 드릴 수 있다고.”단미의 표정이 바로 달라졌다.‘본가에 하루 종일 있다니.’‘우리 이미 이혼했다는 걸 누군가 눈치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당신 왜...”호건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할머니가 너 많이 보고 싶어 하셨어. 네가 하루 같이 있어 드릴 거라고 하니까 정말 좋아하시더라.”단미가 하려던 말이 그대로 막혔다....차가 본가 저택에 도착했다.두 사람은 함께 내렸다.호건은 단미 곁으로 가 손을 잡으려 했다.단미가 피하자 단미의 귀 가까이로 몸을 숙여 낮게 말했다.“할머니 눈치 빠르신 거 알잖아. 평소보다 조금 친하게 보여야 안 들켜.”이영숙은 오랫동안 사업을 이끌어 온 사람답게 사람의 작은 변화도 잘 읽었다.쉽게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단미가 잠깐 망설이는 사이 호건은 손을 잡았다.가느다란 손가락을 가볍게 눌러 쥐며 말했다.“가자, 여보.”단미는 입술만 꾹 다물었다.‘진짜 바로 몰입하네.’호건에게 손을 잡힌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거실에는 김혜정이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긴 소파에는 이영숙이 앉아 있었고 윤희가 바로 옆에 친근하게 붙어 있었다.윤희는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보여 주고 있었고 두 사람은 함께 웃고 있었다.윤희가 말했다.“할머니, 이거 진짜 웃기죠? 우리 과 친구가 찍은 영상이에요.”이영숙이 웃었다.“친구가 재주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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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윤희는 호건을 향해 입을 삐죽였다.김혜정은 호건이 단미 편을 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호건아, 너 지금...”“됐다.”이영숙이 김혜정을 바라봤다.“너 이 집에 시집온 지 몇 년인데 나한테 명절 선물을 따로 챙겨 준 적이 몇 번이나 있니?”“네 며느리가 이번에 딱 한 번 못 챙겼다고 그게 그렇게 불만이냐?”괜히 단미를 지적했다가 자기 흠만 들추게 된 김혜정은 민망해졌다.목소리도 바로 작아졌다.“어머님,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이영숙은 더 상대하지 않았다.대신 주머니에서 붉은 종이로 된 작은 부적 하나를 꺼내 단미 손에 올려 줬다.“이거 받아. 할머니가 절에서 너 주려고 받아 온 거야.”단미는 두 손으로 받았다.“감사합니다, 할머니.”윤희가 옆에서 몸을 기울여 구경했다.“어? 할머니, 제가 받은 거랑 새언니 거랑 다르네요?”“네 건 평안 부적이고, 단미 건 부부화합 부적이니까 다르지.”이영숙은 말하면서 단미 것과 똑같은 부적을 하나 더 꺼내 호건에게 건넸다.“이건 네 거다.”윤희가 궁금한 듯 물었다.“부부화합 부적이 뭐예요?”“부부가 서로 마음 맞춰 잘 지내라고 기원하는 부적이지.”그 말을 듣자 단미는 손에 든 종이가 갑자기 뜨거워진 것처럼 느껴졌다.반대로 호건은 거리낌없이 부적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감사합니다, 할머니.”단미가 부적을 들고 아무 반응도 못 하자 이영숙이 웃으며 덧붙였다.“스님이 기도까지 정성껏 올려 준 거라 영험할 거야.”단미는 더 난감해졌다.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큰 손이 부적을 가져갔다.호건이었다.“내가 가방에 넣어 줄게.”단미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안쪽 포켓에 넣었다.그때 집안 직원 한 명이 거실로 들어왔다.“회장님, 찾아오신 손님이 있습니다.”이영숙이 의아해했다.“내가 돌아왔다는 건 아직 밖에 알리지도 않았는데 누가 왔니?”“주채림 씨입니다.”단미의 표정이 굳었다.반사적으로 호건을 한번 바라봤다.‘그래서 오늘 저렇게 차려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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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손님을 대하는 이영숙의 태도에는 빈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자기 말도 정확히 지키는 사람이었다.차 한잔만 하고 가라고 하고 딱 그 한 잔의 시간만 허락했다.채림이 찻잔을 다 비우자 이영숙이 말했다.“인사하러 와 준 마음을 충분히 받았네.”말을 마친 뒤 아주 자연스럽게 선을 그었다.“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네. 오늘은 손주며느리가 일부러 나랑 밥 먹으러 왔거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단순한 배웅이 아니었다.단미가 이 집의 손주며느리라는 사실을 채림 앞에서 대놓고 못 박는 말이었다.단미도 이영숙의 의도를 알아들었다.채림도 모를 수 없었다.채림은 바로 김혜정을 향해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지금 김혜정이 이영숙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 리 없었다.빨리 돌아가라는 듯 조용히 눈짓했다.채림은 마지막으로 호건을 한번 봤다. 그의 표정은 이영숙보다 더 냉담했다.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뵐게요.”말을 끝내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갔다.거실이 조용해졌다.이영숙이 갑자기 불렀다.“장 집사.”집사 장수한이 바로 앞으로 나왔다.“네, 회장님.”“저 선물들 들고 나가서 돌려보내게. 우리 집은 그 선물 받을 필요 없어.”“알겠습니다.”장수한은 채림이 테이블 위에 두고 간 선물 상자들을 들고 바로 뒤를 따라 나갔다.집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이영숙은 단미에게 다정하게 웃었다.“단미야.”“너는 윤희랑 여기서 조금 놀고 있을래?”단미는 이영숙이 뭘 하려는지는 몰랐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머니.”이영숙은 김혜정과 호건을 돌아봤다.“너희 둘은 나 따라와.”말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서재로 향했다.호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이 집안을 지탱한 사람은 이영숙이었다.지금은 공식적으로 집안의 실무와 사업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났지만 가장 큰 어른으로서의 무게는 그대로였다.이영숙의 한마디는 이 집안에서 늘 가장 크게 작용했다.김혜정의 표정에 긴장이 스쳤다.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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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이영숙은 한때 강울시 재계를 주름잡던 여장부였으니, 역시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이영숙이 내뿜는 압박감은 단미에게 어딘가 익숙했다.조금 생각해 보니 이유가 떠올랐다.호건에게도 이영숙과 비슷한 기질이 있었다.“정말 답답하구나.”이영숙은 김혜정을 바라봤다. 눈에는 딸 같은 며느리가 왜 이렇게 생각이 짧냐는 답답함이 묻어났다.김혜정이 꾸민 일 정도는 이영숙에게 너무 뻔히 보였다. 굳이 캐묻지 않아도 채림이 이 집에 찾아오게 된 경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예전에 채림이네 집안과 우리 집이 혼담을 논의한 적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다시 그 집 딸을 끌어들여?”“네 며느리 면전에서 망신당하고 싶은 거야?”“누가 네 가족이고 누가 남인지 구분도 못 해?”창밖에서 듣던 단미의 마음이 울렸다.눈가까지 조금 뜨거워졌다.이영숙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감싸 줄 줄 몰랐다.윤정해와 살던 집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누구도 단미 편에 서서 이렇게 지켜 준 적이 없었다.김혜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단미 앞에서 보이던 거만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어머님, 전 그런 뜻이 아니라...”김혜정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호건이 정도 조건이면 더 좋은 집안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채림이네도 전에 우리가 혼담 상대로 생각했던 집안이었잖아요.”이영숙이 바로 물었다.“네 아들이 지금 미혼이니?”목소리가 낮아졌다.“법적으로 아내가 있는 사람한테 다른 여자랑 또 결혼하라고 할 셈이야? 아니면 멀쩡한 아내 버리고 새 여자 데려오라고?”“우리 집안에 아내를 내쫓고 새 사람을 들이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 전례는 없어.”이영숙은 단호했다.“단미가 없었다고 해도 채림이 다시 우리 집안 며느리가 될 가능성은 없었어.”김혜정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고개를 들어 물었다.“하지만 어머님, 예전에 채림이네를 혼담 상대로 직접 고르신 분도 어머님이잖아요.”“여러 집안 중 그쪽에도 기회를 줬던 건 맞아.”이영숙의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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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호건이 할머니를 바라봤다.“어떤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회사 일은 네가 알아서 잘하니 내가 걱정할 게 없지.”이영숙은 눈을 가늘게 떴다.“내가 묻는 건 당연히 네 부부 일이다.”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할머니의 눈을 마주하자 호건은 조금 불편한 듯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이영숙이 물었다.“말하기 싫어?”“할머니, 제 일은 제가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확실해?”“네.”이영숙은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그래. 네 엄마한테는 충분히 말했으니 앞으로 채림이를 끌어들여 귀찮게 하는 짓은 못 하겠지.”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다가 호건 곁을 지나며 오늘 옷차림을 한번 살폈다.입가에 재미있는 웃음이 번졌다.“괜찮네. 이제는 정면으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방법을 바꿀 줄도 알고.”이영숙은 손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얼굴 잘생긴 것도 쓸 때는 써야지. 그렇게 꾸미고 다니면 네 아내한테 좀 먹힐지도 모르겠구나.”호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거실.단미는 창가에서 돌아온 뒤 소파에 앉아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윤희가 옆으로 가까이 와 달랬다.“새언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할머니가 새언니 편인데 우리 집에서 새언니 자리 누가 건드리겠어요.”“오빠도 아까 말했잖아요. 새언니는 계속 자기 아내라고.”윤희가 자신 있게 말했다.“그러니까 채림 씨가 이 집 며느리 될 일은 절대 없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윤희가 보기에도 오늘 호건의 태도는 채림을 좋아하는 남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정말 마음이 있었다면 채림이 그렇게 창피한 얼굴로 집을 나가게 두었을 리 없다.채림이 앞으로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는지는 단미가 알 바 아니었다.단미가 확실히 아는 건 하나뿐이었다. 자신은 이미 이 집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러니 이 집안 일이 어떻게 되든 이제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그래도 자신을 위로하는 윤희에게는 웃어 보였다.“네. 알아요.”단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화장실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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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이영숙은 직접 집게를 들어 버터간장 새우 한 점을 집어서 단미의 그릇에 올려 줬다.단미는 바로 두 손으로 그릇을 받쳤다.“감사합니다, 할머니.”요즘 단미는 기름진 음식이 전혀 당기지 않았다.하지만 어른이 직접 덜어준 음식을 손도 대지 않는 건 예의에 맞지 않았다.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단미는 새우를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진한 간장 양념에 버터와 기름 향까지 입안 가득 퍼졌다.윤희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어때요, 새언니? 괜찮죠? 저 요즘 이거 제일 좋아해요.”좋은 걸 소개했다는 듯 눈이 반짝였다.단미는 억지로 삼켰다.곧바로 속이 뒤집힐 듯 울렁거렸다.하지만 여러 사람이 보고 있어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참고 윤희에게 웃었다.“네, 맛있어요.”호건은 단미의 그릇에 담백한 연근 초무침을 조금 덜어줬다.그러면서 남아 있던 새우는 자연스럽게 자기 그릇으로 가져갔다.윤희가 바로 물었다.“오빠, 왜 그래?”호건은 태연했다.“나도 먹으면 안 돼?”윤희가 어이없다는 듯 테이블을 가리켰다.“저기 접시에 많이 있잖아. 왜 꼭 새언니 그릇에서 가져가?”이영숙이 윤희를 나무라는 척 웃었다.“얘는 그런 것도 모르니.”“네 오빠랑 새언니가 서로 살갑게 챙기는 거잖아.”단미는 속이 더 심하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입술을 꽉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입을 열었다가는 그대로 토할 것 같았다.호건은 단미가 불편해하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젓가락을 내려놓고 몸을 받쳐 주며 낮게 물었다.“아직 배 안 고프면 조금 있다 먹을까?”그 말을 들은 이영숙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미간을 찌푸린 채 견디는 단미까지 확인하자 표정이 달라졌다.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이 밝아졌다.이영숙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김혜정이 불만스럽게 말했다.“밥상에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안 먹겠다는 거니? 어른 앞에서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지.”김혜정은 조금 전 채림 일 때문에 단미가 일부러 까다롭게 구는 거라고 생각했다.“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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