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는 적막했다.불도 켜지 않은 채, 유재원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손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어린 유봄이 그의 넥타이를 붙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아직 앞니가 다 나지 않은 채, 아빠를 세상 전부처럼 바라보던 눈.그 눈을, 그는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퇴근하면 현관까지 달려 나오던 작은 발소리.“아빠!” 하고 매달리며 하루 있었던 일을 숨도 안 쉬고 떠들던 목소리.그때 옆에서 웃으며 말하던 여자.최진희.수술복을 입고 나란히 서서 환자 차트를 들여다보던 아내.어려운 케이스를 두고 밤늦도록 의논하던 동료.수술이 성공하면 누구보다 먼저 그의 어깨를 안아주며 “수고했어요” 하고 웃어주던 사람.그 여자가, 어느 날 그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그 여자… 어떻게 할 거예요.”김지숙을 만나고 돌아온 날이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최진희는 끝내 말했다.“당신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 말은 원망이 아니었다.체념이었다.자신을 붙잡지 않는, 그저 남편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지막 배려였다.그런데 그는 그 배려를 짓밟고 돌아섰다.김지숙의 말만 믿고.눈물과 연기를 진심으로 착각하고.자신의 딸도 아니었던 아이를 위해 자기 피로 태어난 딸을 밀어냈다.사진 속 유봄이 웃고 있었다.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 아이는 웃지 않았다.조용해졌고, 묻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다.“아버지에겐… 아무 기대도 없어요.”차갑게 말하던 딸의 목소리가 서재 안을 가득 채웠다.
Huling Na-update : 2026-11-03 Magbasa 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