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혈향연화: 핏빛 운명의 낙인: Chapter 41 - Chapter 50

64 Chapters

제41화. 내밀한 체온, 애증의 침상

상처가 벌어지니 제발 입을 다물라는 그녀의 처절한 만류에도.쇼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핏기가 가셔가는 입술로 끊임없이 자신의 지독한 연모를 속삭였다.“삼 년 전 그 청사(靑蛇) 바닷가에서, 넌 결코 날 살려내면 안 되는 거였다. 내 배를 가르고 날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다시 붙잡아 두지 말았어야 했어.”“흐윽…… 흑…!”“날 평생 용서하지 않아도 좋다. 원망하고 증오해도 좋으니, 제발 내 곁을 떠나 죽으려고만 하지 마라. 그 하나만큼은 죽어도 허락할 수 없으니……”그의 어깨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생혈은 어느새 유진의 고운 두 손을 흥건하게 적시다 못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유진은 급하게 치맛자락을 뜯어냈다.두두둑—!그녀는 지체 없이 쇼의 어깨를 터질 듯이 꽉 묶었다.그때 그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시간이 없다.빨리 지혈해야만 한다.유진은 피가 묻은 발로 허겁지겁 별채 대문 밖으로 뛰쳐나왔다.그때 어둠 속에 대기하던 타카오가 그녀 앞에 귀신처럼 나타났다.“돼지 창자와 바늘, 그리고 가장 독한 소주(燒酒)를 당장 구해다 주세요. 빨리요.”다급하게 명령을 내리는 공주의 핏발 선 눈동자.타카오는 그 어떤 질문도 감히 던지지 못한 채 곧장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카오가 숨을 헐떡이며 별채 내실의 장막을 들추고 들어왔다.그때 눈 앞에 나타난 광경.쇼군이 검을 찔러 피칠갑을 하고 있는 참혹한 모습에, 타카오는 단숨에 바닥 위로 무릎을 꿇었다.“쇼군! 이게 대관절 무슨 일입니까! 침입자가 있었던 겁니까? 즉시 저택을 봉쇄하고 쥐새끼를 쫓겠습니다! 생김새를 소인에게……!”쇼는 사색이 된 심복을 향해 나직하고도 무심한 조소를 지어 보였다.“별거 아니다. 내 손이 미끄러져 일어난 단순한 사고일 뿐이니 진정해.”그때 유진은 급하게 준비를 마쳤다.그리고 묶어두었던 핏물 젖은 천을 조심스럽게 풀어 벌어진 살점 내부를 냉정하게 살폈다.“다행히 중요 혈들은 비껴갔습니다. 천운이 도왔어요. 대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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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자신을 향한 검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유진의 향기.들끓어 오르던 야수의 불안이 기적처럼 가라앉았다.그녀의 온기가 닿은 곳마다.지독하게 휘몰아치던 광기가 아늑한 침묵 속으로 잠식되어 갔다.그와 동시에.지난 3년 동안 몸에 축적되어 왔던 지독한 육체적 피로가 해일처럼 무겁게 덮쳐왔다.[위험하다.]무사로서 이토록 무방비하게 꺼져드는 의식은 명백한 자멸이자 죽음이었다.나른하게 감겼던 쇼의 붉은 안광이 번뜩 뜨였다.그는 비단 침상 위에서 기어이 상체를 꼿꼿하게 일으켜 앉았다.찰나의 휴식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그는 어김없이 차갑고 묵직한 흑색 장검을 품에 바짝 끌어안은 채,별채의 좁은 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언제든 검을 뽑아 피를 볼 준비가 되어 있는 처절한 자세.그 완강하리만치 기괴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진의 입술이 서글프게 파르르 떨렸다.“오늘은 안 돼요. 제발 누우셔요.”쇼는 돌아보지 않았다.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서늘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괜찮아. 난 이 자세가 가장 편해.”“안 된다고 했습니다.”유진은 사내의 칠흑 같은 옷자락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꽉 움켜잡았다.“제발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편하게 몸을 뉘어 쉬어야 합니다.”순간 사내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가 척 굳어졌다.쇼의 가슴속 깊은 곳을 여인의 다정한 다그침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들어왔다.삼 년 전처럼 자신을 향해 유일하게 잔소리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머뭇거렸다.수백 명의 목을 베면서도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던 사내가 여인의 손길과 목소리에 짓눌려 멈칫거렸다.결국 삼 년이라는 세월을 통틀어 처음으로.그는 이부자리 위에 자신의 무거운 등을 대고 길게 누웠다.스윽—.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조금 전처럼 자연스럽게 유진의 가녀린 허리를 낚아챘다.그의 억센 팔이 유진을 완벽하게 가두어 안았다.유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그의 손길에 그 어떤 반항이나 거친 저항도 하지 않았다.대신 가만히 눈을 감으며 그의 가슴에 이마를 묻은 채 온전히 안겨 들었다.하복부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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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망명(亡命)의 조건

바로 그 파국의 찰나.중검의 날카로운 끝단이 유진의 얇은 옷자락을 뚫고 그녀의 하얀 가슴을 찌르려던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쇼가 자신의 품에서 증발해 버린 그녀의 온기를 느껴버렸다.그의 커다란 손이 본능처럼 허공으로 다급하게 뻗어 나왔다."……유진!""……!"유진은 자신의 심장을 찌르지도 못한 채 숨을 헉 들이켰다.순간 그의 거친 악력이 그녀의 가녀린 골반을 그대로 낚아챘다.털썩ㅡ!유진의 몸이 그의 무지막지한 힘에 그대로 이끌려 기울어졌다.그녀는 제 손으로 자신의 숨을 끊어내지도 못한 채.다시금 그의 뜨겁고 단단한 하복부 위로 무참하게 밀착되며 무너져 내렸다.그의 거친 숨결이 피부를 타고 밀려들었다.잠결에도 그녀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쇼의 억센 팔이 유진의 가녀린 허리와 골반을 통째로 휘감아 가두어 버렸다.철장보다 견고한 그의 품.쇼의 탄탄한 가슴팍에 짓눌린 채.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는 자신의 비참한 심장을 손으로 부여잡았다.원수의 체온 속에서 흔들리는 심장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굴레였다.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날카로운 중검을 다시 베개 밑 깊숙한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잠든 사내에게 조금의 흔적도 들통 나지 않으려, 그녀는 애써 그의 품에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그 순간.흉터로 뒤덮힌 그의 가슴 위로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사랑하면서도 증오하고.증오하면서도 차마 벨 수도, 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잔인한 정념의 족쇄.유진은 조용히 떨리는 손바닥으로 멈추지 않는 눈물을 서럽게 훔쳐냈다.생사가 오가는 아슬아슬한 애증의 밤이 넘실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칠흑 같던 어둠은 사라지고.창살 너머로 이미 동이 터 오고 있었다.붉은 사선(死線) 같은 햇살이 침상 위를 붉게 물들였다.쇼는 순간 전신에 스며든 안온함과 노곤함에 번뜩 놀라며 눈을 떴다.대관절 얼마나 달콤한 단잠을 탐했던 것일까.[내가…… 누워서 아침을 맞았다고?]삼 년 동안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서슬 퍼런 무인의 경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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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파국(破局)의 경계

유독 끈적하고 포악했던 여름의 더위가 흔적도 없이 가셨다.제법 한기를 품은 밤바다 바람이 살갗에 서늘하게 스쳤다.유진은 가만히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요스케의 옆자리로 슬그머니 다가와 앉았다.밤공기를 뚫고 피어오르는 붉은 모닥불 너머로 여인의 달콤한 살구꽃 향기가 남자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서늘함과 뜨거움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두 사람 사이로, 피할 수 없는 붉은 정념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요스케는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히 장작더미에 불을 지폈다.오직 타오르는 붉은 불꽃만을 서늘한 안광으로 바라보는 사내.유진은 슬쩍 그의 선이 굵고 수려한 옆얼굴을 가만히 훔쳐봤다.그리고 이내 고개를 들어 가을 밤바다 위에 두둥실 떠오른 영롱한 보름달을 바라봤다.“벌써 하늘에 보름달이 떴네요. 이제 슬슬 밤바다의 기운이 제법 차갑습니다.”“그렇구나. 사방의 바람을 보니 벌써 가을이구나.”요스케는 자신의 가슴 상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낮게 읊조렸다.“그리고 이제 내 상처는…… 자네 덕에 깨끗하게 잘 아문 것 같은데.”유진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아련함이 가득 고인 황금빛 눈동자가 밤하늘의 은빛 달빛을 받아 슬프게 일렁였다.그녀가 해안가 한쪽 거친 몽돌 해변을 살며시 가리켰다.“저곳으로…… 떠내려 오셨었습니다. 맥도, 호흡도 완전히 멎어 있으셨는데, 이리 아무렇지 않게 회복하실 줄은 감히 상상도 못 했었습니다.”“너를 만나서…… 비로소 다시 살아 숨 쉴 수 있었다. 오롯이 네 덕분이다, 유진.”요스케는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는 것을 잘 압니다. 지금의 몸 상태라면 상선에 몸을 실으셔도 괜찮습니다.”그는 더더욱 냉정한 어조를 유지하려 애를 썼다.“다행이군. 그렇다면 이번 주 중으로 사츠마로 향하는 배편을 알아보러 가봐야겠구나.”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요스케의 확고한 대답이 떨어졌다.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잔인하게 이별을 고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이제 이 못 말리는 꼴통 의원의 잔소리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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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이별의 유예(猶豫)

위태롭게 일렁이는 유진의 황금빛 시선.밤바다 바람에 그녀의 하얀 목덜미로 작게 흐트러지는 한 가닥의 머리카락.얇은 옷자락 너머로 드러난 가느다란 어깨의 떨림.요스케는 필사적으로 피했다.그리고 가차 없이 얼음처럼 차가운 단어를 내리꽂았다.“…… 나를 간절히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순간 유진의 숨통이 턱 하고 막혀왔다.목구멍을 찌르는 뜨거운 열기에, 그녀의 긴 속눈썹이 경련하듯 떨렸다.시야가 흐리게 아른거리는 와중에도,그녀는 그의 단단한 턱선과 차갑게 다물린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새어 나왔다.“…… 바다 너머, 기다리는 부인이 있으셨던 건가요?”요스케의 어깨가 묵직하게 경직되었다.그는 유진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비겁한 얼굴을 직시하지 못한 채, 잔인한 쐐기를 박았다.“맞아.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카나이(아내)가 있다.”순간 유진의 황금빛 눈동자가 산산조각 깨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그의 입안에 씁쓸하고 핏빛 어린 자조가 가득 고였다.카나이(아내).갑작스럽고도 잔인한 그 단어가 고막을 뚫고 들어온 순간.유진의 정신은 온통 하얗게 멍해져 버렸다.머릿속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왜…… 단 한 번도 그 당연한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사부님의 나이를 생각하면, 가정이 있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인데……’간신히 바스러지는 정신의 끈을 붙잡았다.차오르려는 눈물.그녀는 가슴을 쥐어짜며 가냘픈 목구멍 속으로 핏물 같은 눈물을 삼켜냈다.유진은 요스케의 거친 손마디를 바라보았다.그 손으로 무수한 검을 잡았을 테고, 자신을 위기에서 구했으며, 상처를 치료할 때마다 아찔한 체온을 전해주었던 손이었다.그 단단한 손이 다른 여인을 붙잡고 안았으리라 상상하자, 가슴이 비틀려 나가는 것 같았다.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이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그렇다면 더더욱…… 완쾌되신 몸으로 돌아가셔요. 돌아가자마자 또다시 다친 모습을 보여주어 그분의 여린 마음을 상처를 입히실 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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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사흘 간의 부재(不在)

“검을 조금만 더 짧게 쥐어 보게. 그럼 손목에 들어가는 하중이 훨씬 덜할 터이니. 이렇게…….”유진은 검을 쥔 채, 마당 허공에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그때 요스케는 그녀의 자세를 교정해 주려고 한 걸음 다가섰다.늘 하던 대로 그녀의 가녀린 등 뒤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손목을 겹쳐 쥐려 했다.바로 그 찰나였다.스으윽――.평소와는 다르게, 그의 손길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내며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녀에게 닿지 못한 그의 커다란 손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유진의 차가운 경계 앞에, 요스케는 자신도 모르게 턱근육을 단단하게 악물었다.그녀는 다급하게 검자루를 고쳐 잡으며 시선을 흙바닥으로 뚝 떨어뜨렸다.“이렇게…… 선을 그리라는 말씀이시지요.”“……음, 그래.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주 잘하는군.”그 순간.단둘만 존재하는 마당 위로 서늘한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유진은 붉어진 귓불을 감추려, 검을 가슴으로 바짝 끌어당겼다.“저…… 오늘은 사부님 도움 없이 혼자서 연습해 볼게요.”그 밤바다 모닥불 앞에서 나눈 고백 이후.그를 대하는 유진의 모든 행동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겨났다.여인의 알 수 없는 조심스러움과 죄책감.매일 마주하던 두 사람 사이를 결코 메울 수 없는 거리감으로 거칠게 갈라놓았다.처음에 그는 지극히 잘된 일이라 여겼다.폭주하려는 자신의 본성과 무관하게.이 고결한 여인이 자신을 이토록 가차 없이 경계해 주기만 한다면.사정없이 들끓는 정념을 누르고, 아무런 파국도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앞으로의 남은 시간을 무사히 보낸 뒤.그녀를 온전히 이 곳에 남겨둔 채, 홀로 떠날 수 있을 거라 자만했다.하지만 한낱 어리석은 오만이자 착각이었다.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의 경계가 점점 더 숨통을 조여오며 다가올수록.유진을 향한 채우지 못한 갈증과 굶주린 허기가 사내의 골수까지 잔인하게 파고들어 그를 고문했다.결코 소유할 수 없는 여인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그리고 자신을 향해 단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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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찢겨진 진실, 정명공주

요스케는 자신의 두터운 손을 뻗어 가슴의 흉터 부위를 강하게 짓눌렀다.순간 떠오른 자신의 낯선 모습.가슴을 가득 채웠던 살의와 명분을 전부 내려놓은 채.그녀의 곁에서 소년처럼 무방비하게 웃고 있던 자신이 떠오르자.자상으로 가득한 흉곽 아래로 참지 못할 지독한 통증이 해일처럼 그를 집어 삼켰다.위험을 알리는 이성의 경종이 미친 듯이 울렸다.짐승 같은 본능을 이대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장차 맞이할 것은 오직 파멸뿐이었다.요스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급하게 흑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채.검푸른 새벽, 초가집을 박차고 나와 항구로 향했다.“사츠마의 대죽도로 향하는 배편은…… 언제쯤 있습니까?”요스케는 항구에서 마주친 사츠마의 상인으로 보이는 늙은 사내에게 나직하게 물었다.늙은 사내의 시선이 힐끔 그를 쳐다봤다.삿갓 아래 어둠의 맹수처럼 서늘하게 번뜩이는 사내의 안광.그의 범상치 않은 기운에 늙은 사내는 순간 말을 더듬었다.“겨, 겨울철에는 남쪽 바다가 워낙 험하고 사나워서 내년 정월이 되어야 상선이 다시 운행되오니 그때 다시 오시오.”“그럼 배편 말고, 사츠마로 서신이나 연락을 취할 방도는 있습니까?”“정 급하시다면 저기 절벽 아래로 샛길로 가보시오. 고기잡이 밀무역 배들이 모여 있으니, 돈만 쥐여주면 서신 정도는 나를 수 있을 거요.”늙은 사내가 알려준 항구의 외진 구석.그곳으로 다가가자, 작은 어선 옆에 어망을 손질하는 눈매가 송곳처럼 매서운 사내가 보였다.요스케는 사방을 예리하게 경계하며 남자에게 다가갔다.“혹시, 사츠마 말을 할 줄 아는가?”선장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흠칫 놀라며 본능적으로 손에 무기를 쥐었다.분명 떳떳치 않은 일을 하는 게 확실했다.“무슨… 용건이시오?”그는 어색한 사츠마의 어투로 요스케에게 반문했다.“본국에 급히 연통을 보낼 서신이 있는데, 자네가 조용히 전달해 줄 수 있겠는가?”“어느 지역으로 보낼 은밀한 서신이오?”“시마즈.”요스케는 품 안에서 서신 한 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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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국혼(國婚)이라는 무덤

청사(靑蛇) 유배지 고택.부안대군은 한층 다소곳해진 누이를 발견하곤 이내 혼비백산한 표정을 지었다.“어라? 정명,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그토록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네가 왜 이리 얌전해진 게야? 유모가 드디어 널 사람으로 가르쳐 놓은 게냐?”“선소에서 이곳 청사(靑蛇)까지 배편으로 오시는 동안 고되지 않으셨어요, 오라버니?”“진짜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이젠 정말 시집을 보내도 되겠는데?”오라버니의 장난스러운 농담에도, 유진은 어색한 미소만을 입가에 띄울 뿐이었다.그날 저녁.고요한 달빛이 대청마루를 시리게 비추는 깊은 밤.마주 앉아 따스한 다과를 나누던 부안대군은 짐짓 누이의 눈치를 살폈다.“이제…… 슬슬 낙성으로 올라올 때가 된 것 같구나, 정명.”유진은 서늘하게 식어가는 차를 조금 들이켰다.“폐하께서 체통과 조정의 시선에 겉으로 직접 말씀은 안 하셔도, 내심 널 하루빨리 곁에 두고 싶어 하신다.”“아바마마께선 여전히 강건하시지요?”“아주 강건하시다. 그리고 폐하께서 네 국혼(國婚)을 추진할까 하시더구나.”국혼.그녀의 가녀린 손끝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그때 부안대군이 정적을 깨고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태학 시절부터 아끼고 신뢰하던 이가 하나 있다. 대사헌 대감의 장남 박재우. 명일 이곳 청사(靑蛇)에서 만나기로 약조가 되어 있다. 참으로 굉장한 놈이다. 성품도, 학식도, 용모조차 아주 비범해. 너의 부마로 그자가 좋을 듯 한데.”“대사헌 가문의 장남이 여민국에서 부마 자리가 도대체 어떤 자리인지 정녕 모른답니까. 혹시 무슨 약조라도 건네신 겁니까.”“아니다. 도리어 그 놈이 먼저 나를 찾아와 너와의 혼인 의사를 간곡히 밝혔다. 널 오래도록 마음에 품어왔다 하더구나.”“전 전혀 모르는 사내입니다. 그저 얼굴 하나 흘끗 보고. 어디 정신이 나간 자가 아닙니까.”“재우가 그리 이상한 놈이었다면, 내 너에게 말도 꺼내지 않았을 게다.”왕실과 혈통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파도가 그녀를 집어삼킬 듯 다가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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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정혼자와의 첫 만남

다음 날 점심.유진은 화려한 꽃단장과 비단 당의를 차려입고 부안대군을 따라 나섰다.청사 저잣거리의 찻집.그곳에 유진과 부안대군이 들어서자, 한 사내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다.“이쪽이 내가 말한 대사헌 장남 박재우다. 여기는 자네가 더 잘 알 터이니.”오라버니의 말처럼, 그는 단정하고 지적인 용모에 차분하고 정결한 사내였다.“이 먼 청사까지 오느라 고생 좀 했겠구나, 재우.”“아닙니다. 이렇게 두 분을 만나뵐 생각에 힘든 줄 모르고 기쁘게 왔습니다.”“우리 정명을 본 적이 있다고…”“네. 궁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근데…… 왜 그때 인사라도 건네지 않았나.”“제가 운이 없었는지 항상 어디를 바삐 걸음 하시는 도중에만 뵙게 되어, 미처 기회가 없었습니다.”“하하하. 그건 자네가 운이 없는게 아니라, 우리 정명이 원래 걸음이 빠르네. 워낙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라 잠시도 몸을 쉬이 두지를 못하지.”“워낙 마마께서 총명하시니 배움에 재미를 아시는 것 아니겠습니까.”“그래서 자네와 네 누이가 결이 맞지 않나 싶네. 자네도 학문의 깊이가 남다르니.”“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공주마마와 배움의 길을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한 기쁨이 없을 것이옵니다.”유진은 내내 그저 인형처럼 남자의 말들을 귀로 흘려들을 뿐이었다.눈앞의 정혼자에 대해 그 어떤 사소한 것도 궁금하지 않았다.아무 것도 묻지도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유진을 바라보는 사내는 잠시 뜸을 들이다 그녀에게 물었다.“혹시 제가…… 맘에 들지 않으신겁니까.”그제야 유진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순간, 박재우는 유진의 미모에 영혼이라도 빼앗긴 듯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다.“귀하는…… 제가 진정 맘에 드십니까.”유진의 질문에 그는 목울대를 울리며 침을 삼켰다.“네? 그, 그것은 당연한 것을 물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공주 마마의 고결함을 마주하고 연모하지 않을 사내가 도대체 어디 존재하겠나이까.”“그렇지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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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이별 통보

눈 폭풍이 대지를 삼킨 닷새째가 되던 시린 아침.국혼의 부담과 요스케를 향한 그리움에 지쳐버린 유진은 결국 참아왔던 마음살을 지독하게 앓아누웠다.넘나드는 고열로 뼈마디가 바스라져 내리는 듯 했다.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 등줄기는 오한으로 파르르 떨렸다.이부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앉아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하지만 유진의 시선은 담을 넘어 고개를 향하고 있었다.이미 그와 약조한 사흘을 넘겼다.그를 보아야만 했다.오직 그를 눈에 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유진은 숨 가쁘게 고개를 넘었다.초가집 마당 눈길 위로.마침내 유진의 가녀린 자태가 그의 충혈된 시야에 들어왔다.약조한 날짜를 이틀이나 넘기고 나타난 그녀.순간, 통제가 불가능한 서운함과 원망의 파도가 격렬하게 밀려들었다.[이게 무슨 덧없는 감정이란 말이냐. 겨우 이틀을 더 못 보았다고 이리 감정이 날뛸 일이더냐.]그는 애끓는 감정을 애써 감추려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냉정하게 돌렸다.그의 굳은 입술이 열렸다.그의 낮은 목소리에 연정을 강제로 베어내려는 무심한 칼날이 실렸다.“정월 초하루. 본국으로 향하는 상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순간 유진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떨고만 있었다.사무치게 그리웠던 남자가 자신을 보자마자, 이별의 축객령부터 통보했다.“이제 겨우 열흘 남짓 남았으니, 그동안의 수업은 오늘부로 여기서 끝내지. 더는 배움을 청해봐야 자네에게 하등 쓸모도 없고, 별다른 의미도 없으니.”그가 차갑게 내뱉은 의미 없다는 그 한 마디에 유진의 가슴이 무너졌다.“저에게 주신 가르침이 별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하십니까.”유진의 뼈아픈 물음에, 요스케는 짐짓 모른 척했다.“의미를 떠나, 본국으로 떠나기 전 최대한 푹 쉬다가 떠날 생각이다. 그러니 남은 기간 귀찮게 매일같이 걸음할 필요는 없다.”지난 아홉 달.단 하루도 빠짐없이 의사와 환자 그리고 사부와 제자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였거늘.그는 지나치리만큼 가차 없이 냉정했다.함께 한 시간의 아쉬움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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