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혈향연화: 핏빛 운명의 낙인: Chapter 21 - Chapter 30

63 Chapters

제21화. 피로 채운 그릇

별채의 나무 대문이 열렸다.쇼가 차가운 정적이 흐르는 마당으로 들어서자.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타카오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쇼의 묵빛 옷자락 끝에서 자비 없는 살의가 뚝뚝 떨어졌다.그는 타카오를 내려다보며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명을 내리꽂았다.“내 처소의 수발을 들던 식모를 이 앞으로 즉시 호출하라.”타카오의 검은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흔들렸다.그러나 감정을 눌러 담은 채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얼마 지나지 않아.별채 앞 마당의 서늘한 흙바닥 위로 젊은 여민국 아낙이 무사들에게 끌려 나왔다.아낙은 불길한 예감과 압도적인 공포에 질려 온몸을 떨며 무릎을 꿇었다.헐떡이는 숨소리만이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쇼는 어떠한 사소한 설명도 자비 어린 경고도 건네지 않았다.그저 별채 내실의 미닫이문 옆에서 얼어붙은 유진의 황금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서늘하게 응시할 뿐이었다.그때 그의 커다란 손이 허리춤으로 내려갔다.망설임 없는 번뜩임, 서늘하게 허공을 가른 흑색 장검찰나의 순간.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아낙의 머리가 검은 머리카락과 함께 바닥으로 참혹하게 굴러떨어졌다.투둑ㅡ. 푸화학ㅡ!뜨거운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순식간에 아낙의 피가 별채 마당의 흙바닥을 붉게 물들였다.눈앞에서 일어난 처참한 살육.그 광경을 목도하자마자, 유진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전신을 얼려버리는 사내의 무시무시한 살기.지독한 혈향에 숨통이 턱 막혀왔다.온 세상이 피비린내 나는 붉은 빛으로 물드는 환각이 그녀의 시야를 덮쳤다.검 날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그의 서슬 퍼런 흑색 장검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고 잔인하게 옭아맸다.이윽고 쇼가 잔인하도록 냉정하게 명령을 하달했다.“상을 다시 준비하지, 타카오. 그녀의 입맛에 영 맞지 않는 모양이니.”“네.”쇼는 품 안에서 무명천을 꺼내 아낙의 피가 흥건히 묻은 검 날을 천천히 닦아냈다.피를 지워내는 사내의 손길은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고 정갈했다.검을 칼집에 집어넣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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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핏빛 오해

그 참혹했던 낮의 살육이 한바탕 휩쓸고 간 지독한 밤.별채의 공기는 피비린내와 매캐한 연기가 한데 섞여 들어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후끈거리는 화로와 지독한 약초의 향내.유진은 결국 극심한 고열의 장막에 갇히고 말았다.새하얀 비단 이부자리 위에서.가쁜 숨을 몰아쉬며 붉게 달아오른 가녀린 몸을 벌벌 떨며 끙끙 앓아누웠다.뼈마디 하나하나가 화염 속에서 타들어 가는 듯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쇼는 대본영의 중차대한 군무마저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그는 직접 차가운 물에 천을 적셔 유진의 불덩이 같은 이마와 목덜미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쇄골을 정성스레 닦아내며 극진히 간호했다.그녀는 열에 겨워 의식이 흐릿했다.그 와중에도 그의 뜨거운 시선과 부딪힐 때마다 심장이 조여들었다.단칼에 무고한 아낙의 목을 베어 냈던 사내의 잔혹함이 눈앞에 선명하게 겹쳐졌다.그러다 어느 순간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와 잠시 아주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창살 너머로 스며드는 검푸른 새벽 달빛.문틈을 타고 들어오는 싸늘한 새벽바람에 유진은 흠칫 놀라며 파르르 눈을 떴다.순간 눈에 들어온 방 안의 정경은 너무도 기이했다.또다시 검은 장검을 쥔 채 웅크려 앉아 선잠을 자고 있는 쇼.어제 새벽과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언제 도륙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짓눌린 괴물.그 고독하고도 무시무시한 사내의 단단한 어깨가 기어이 그녀의 시선을 옭아맸다.유진은 비단 이불을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움켜쥐었다.순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컥울컥 밀려 드는 서글픈 의문들.목구멍을 죄어와 숨이 가빠졌다.[바닥에 누워 쉬지도 못할 만큼 이토록 무섭게 사방을 경계하면서까지…… 당신이 그토록 얻고자 소망했던 것이 결국 이 나라 여민국의 침략이었나요?]가슴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통증.순간 삼 년 전 그와의 다정했던 대화가 떠올랐다.[삼 년 전 청사(靑蛇)의 그 초가집에서, 세상 그 누구도 믿지 말라 그토록 단단하고 서늘하게 경고하셨던 이유가 이거였습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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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형벌이 된 정사

붉은 화로 불빛 아래.유진은 눈을 감은 채, 다가오는 그의 거대한 그림자를 받아들였다.쇼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새하얀 뺨을 강하게 감싸 쥐었다.“제발 나를 봐. 나를 보란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쇼는 침상 위에 웅크린 유진의 가녀린 허리를 커다란 손으로 다시 한번 난폭하게 꺾어 쥐며 자신의 거대한 몸으로 짓눌렀다.그의 간절한 숨결은 그녀의 연모를 갈구하며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헤매었다.풀어헤쳐진 비단 자락 사이로 닿아오는 그의 손길은 데일 듯 뜨거웠고, 귓가를 짓눌러오는 거친 숨결에는 열병과 광기가 서려 있었다.유진의 가녀린 새하얀 허벅지가 사내의 억센 손아귀에 잡혀 끌려 올려졌다.그리고 사정없이 사내의 넓은 어깨 위에 얹혀졌다.그 순간.남자의 터질듯 부풀어 오른 거대한 존재가 그녀의 몸 안에 완벽하게 물려들었다.완전히 꺾여진 여인의 허리가 사내의 육중한 체구에 짓이겨지고 또 짓이겨졌다.“윽…… 아아악ㅡ. 아…”거친 정욕의 파고가 사정없이 들이쳤다.사정없이 조여진 좁은 내벽에서 사내의 존재가 점점 더 부풀어올라 그녀를 부숴버릴 듯 압박해왔다.“……하아, 하아! 유진……! 나의 유진……!”야수 같은 거친 신음이 사내의 목구멍을 찢고 터져 나왔다.유진은 이제 사내의 억센 어깨를 밀어내지 않았다.저항을 포기한 채 무력하게 늘어진 몸으로, 정복자의 가학적이고 집요한 탐닉을 고스란히 받아냈다.살결과 살결이 마찰할 때마다 밀려드는 끔찍한 전율.온몸의 마디마디가 잘게 떨리며 억눌린 신음을 토해낼 뿐이었다.오직 살과 살이 부딪히는 질식할 듯한 애증만이 농밀하고 위태롭게 일렁였다.서글픈 그의 몸짓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으윽…… 윽…!”광기 어린 맹목적인 결착의 파고가 거세지자, 마침내 그녀의 샘이 터져 맞닿은 살결로 주르르 흘러내렸다.그의 간절한 손길이 유진의 뺨을 감싸안았다.“제발…… 아… 유진…… 나를 불러다오. 원망도 저주도 좋으니…… 제발.”그는 더 깊고 강렬하게 중심을 그녀의 가장 깊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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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두 사내의 서약(誓約)

어느덧 꼬박 아흐레째가 되던 늦은 오후.집채만 한 차가운 파도가 몽돌 해변에 부딪혀 무수히 부서지며 하얀 포말을 흩뿌렸다.나흘 전까지만 해도 송장처럼 누워 거친 숨만 헐떡이던 사내.이제는 제법 단단해진 두 다리로 딛고 서서 초가집 앞 몽돌 해변을 천천히 거닐며 외출을 즐기고 있었다.툇마루 끝에 서서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부안대군이 나직한 목소리로 누이에게 물었다.“얼마나 더 치료해야 저자를 사츠마의 상선에 태워 보낼 수 있겠느냐?”“이 정도의 빠른 회복 속도라면, 앞으로 한 달이면 충분할 겁니다.”순간 유진의 눈동자에 지난 며칠간의 아찔하고 처절했던 사투가 스쳐 지나갔다.“사실 손이 떨릴 만큼 겁이 났었습니다. 혹시라도 제 미숙한 손길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부안대군은 누이의 가녀린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네 손길이 아니었다면, 저자는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을 게다.”수평선 너머로 검붉은 먹구름이 나지막하게 드리워져 있었다.요스케의 시선이 어느새 저만치 툇마루 끝으로 향했다.나비처럼 가녀린 자태로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그 곁에서 지극히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를 다독이는 남자의 존재.수수한 낡은 무명 옷을 입은 여인과 달리.남자의 의복은 한눈에 보아도 고귀한 옥색 비단이었다.두 사람 주위로 흐르는 완벽한 유대감과 기품.그리고 스스럼없는 다정한 손길.순간 요스케의 가슴 한구석이 묘한 불편함으로 뒤틀리며 두 사람의 정체와 관계에 의문이 솟구쳤다.그때 부안대군의 눈빛이 남쪽 바다 건너 아득한 사츠마국을 향해 무겁게 가라앉았다.“난 당장 내일 새벽, 낙성으로 돌아가야 할 듯싶다. 청사(靑蛇)에 내려와 한참 깜깜무소식이었으니, 전하께서도 네 안위가 무척이나 궁금하셨겠지.”“그럼 빨리 돌아갈 채비를 하세요.”“근데…… 저 정체 모를 이국의 사내와 너를 이곳에 두고 떠나려니,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구나. 차라리 돈을 쥐여주고 다른 곳에 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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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무언의 어색함 뒤 은밀한 언어(言語)의 시간

생사의 갈림길을 넘어 대지를 딛고 서 있었다.그는 낯선 바닷가를 천천히 둘러보며 깊은 숨을 들이켰다.차가운 바닷바람이 허물어진 옷깃 틈새로 스며들 때마다.가슴팍을 촘촘하게 메운 꿰맨 자국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만들어냈다.그때.저 멀리 홀로 말을 타고 해안가 숲길을 거침없이 뚫고 들어오는 여인이 보였다.가녀린 소녀는 보기와 달리 숙련된 손길로 말에서 가볍게 내렸다.요스케는 처음으로 한 걸음 떨어진 시선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주 집요하게 뜯어보았다.[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계집이군.]초라하고 수수한 옷차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위풍당당한 명마.그리고 매일같이 어디선가 공수해 오는 최고급 식재료와 약재들.나이는 대체 얼마나 되었을까.열다섯? 많아야 열일곱 즈음이나 되었을까.아직 뺨에 앳된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어린 계집이거늘.살을 찢고 장기를 도려내는 그 기괴하고도 잔혹한 의술을 어찌 이리 능숙하게 부린단 말인가.도무지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존재였다.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선과 소매 아래 드러난 흰 손목을 훑고 지나갔다.빤히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이 너무도 묵직하고 뜨거웠던 탓이었을까.묵묵히 찬상을 차려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바로 그 순간이었다.먹구름을 뚫고 동쪽 하늘에서 쏟아진 눈부신 아침 햇살이 정면으로 거칠게 부딪쳤다.햇살 아래 드러난 황금빛 눈동자가 신비로운 금빛 아지랑이를 뿜어내었다.쿵ㅡㅡ!순간 하복부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전율이 솟구치며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가슴팍이 터질 것처럼 빨라지는 사내의 심장 박동 소리.뜨거운 혈류가 온몸을 타고 하복부로 무겁게 쏠렸다.요스케는 황급히 자신의 단단한 가슴을 억세게 움켜쥐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부상이 심해 심장에 고장이라도 난 것인가.]태어나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파괴적이고도 강렬한 충격이었다.툇마루에 앉아 유진은 사내와 나란히 거리를 둔 채 조용히 점심 식사를 마쳤다.정체 모를 이국의 남자와 단둘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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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탐해서는 안될 꽃

몸의 움직임이 현저히 적다 보니 꼭두새벽부터 눈이 번뜩 떠졌다.요스케는 초가집 뒷숲의 마른 대나무를 꺾어다 투박한 낚싯대를 만들었다.그러고는 해안가 돌무더기 앞에 홀로 앉아 거친 파도 속에 낚싯대를 길게 드리웠다.[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망중한인 건가.]지난 십삼 년의 세월 동안.그는 단 하루도 쉬지 못한 채, 매 순간 죽음의 문턱에서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다.그런 피폐한 삶 끝에 기적처럼 주어진 평온이었다.요스케는 붉게 타오르는 새벽 일출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헛헛했던 가슴 전부를 채워갔다.오랜만의 낚시질이었으나, 몸에 밴 손재주는 녹슬지 않았는지 생각보다 큼지막한 생선들이 줄줄이 낚여 올라왔다.요스케는 칼을 빼 들어 능숙하게 생선들의 배를 갈랐다.내장을 도려내고 속을 바닷물에 깨끗이 씻어낸 뒤, 해초 줄기에 단단히 엮어서 초가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유진의 눈에 저 멀리 은빛 해무를 뚫고 걸어오는 거대한 사내의 자태가 들어왔다.그의 드넓은 어깨 선과 통나무처럼 굵직한 골격은 멀리서 보아도 위압적이고 독보적으로 도드라졌다.그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가늘게 눈살을 찌푸리며 짐짓 엄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퍼부었다.“휴식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어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그때 그의 커다란 손에 들린 십여 마리의 생선들이 보였다.유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녀는 생선들을 쳐다보다 이내 사내를 매섭게 째려보았다.속이 상했는지 모국어와 서툰 사츠마의 언어가 뒤섞여 터져 나왔다.“도대체 왜 이리 体 (몸)을 가만두지를 못하시는 겁니까. 진짜 이러다 봉합한 부위가 다시 터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大事 (큰일)인데, 진짜 미치겠네.”「夜を明かしたのですか?」“밤을 새우신 건가요?”그녀의 추궁에, 순간 머쓱해진 그가 핑계를 대듯 중얼거렸다.“아닙니다. 아침 몇 시간을 했을 뿐입니다. 제 말 이해했습니까?”“대충 이해했습니다. 어떻게 이 짧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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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유예의 끝, 서유진

약속했던 한 달.그 유예의 기한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외딴 해안가 초가집에서.서로의 숨결을 나누던 시간은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기운을 잃고 종말을 향해 달려갔다.유진은 반쯤 벌어진 사내의 저고리 깃 사이로 드러난 요스케의 상처를 소독하다 슬그머니 손길을 늦추며 머뭇거렸다.그녀는 차마 사내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서툰 사츠마의 단어로 머뭇머뭇 핑계를 늘어놓았다.“아직…… 겉살에서 미세하게 진물이 나옵니다. 지금 배에 탔다간 상처가 덧나기 십상이니, 경과를 보고 일주일쯤 뒤에 출발하시는 게 안전할 듯싶습니다.”사내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그렇게 다시 눈 깜짝할 사이 일주일이 흔적도 없이 지나갔다.유진은 먼바다를 가득 메운 검은 비구름과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를 가리키며, 또다시 핑계를 만들어냈다.“날씨가 몹시 좋지 못하네요. 폭풍우 속에 항해를 나섰다간 바다 한복판에서 변을 당할 수도 있을 터이니, 차주로 출발 일정을 미루시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그렇게 겹겹이 핑계를 치며, 유진은 그를 곁에 붙잡아 두었다.그 역시 매일 아침마다 자신의 상처를 매만지는 그녀의 손길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상처가 빨리 아무는 것이 속상할 정도였다.하지만 하늘이 허락한 기적 같은 유예는 영원할 수 없었다.밀려드는 죄책감 그리고 매일 곁을 지키는 여인을 향한 위험한 갈증.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폐를 끼치며 제 안의 정념을 키워갈 수 없었다.결국 그는 청사(靑蛇) 항구에서 출발하는 상선의 일정을 유진에게 통보했다.“내일모레. 사츠마로 향하는 상선이 이곳 청사(靑蛇) 항구로 들어옵니다. 난 그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요스케는 담담하고도 서늘한 음성으로 이별을 통보했다.순간 유진의 눈빛이 흔들렸으나 이내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건강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려 보내는 길.의원으로서 보람과 기쁨만 가득한 순간이거늘.이상하게도 가슴 한편이 잘려 나간 것처럼 텅 비어버렸다.그와 헤어지기 바로 전날.유진은 그의 가슴 흉터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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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칠월칠석의 폭풍우

다음 날 아침.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의복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방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사방에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 대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긴 했으나, 당장 비를 쏟아낼 것 같은 먹구름은 아니었다.유진은 가만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배를 타셨겠구나.]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의 침소에서 점심 식사를 받았다.넋을 놓은 채 숟가락만 만지작거리는 공주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유모 최 상궁이 고개를 기우뚱하며 물었다.“웬일이십니까, 마마? 이리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도 주무시고, 식사도 처소에서 다 하시고 말입니다. 급한 환자가 있다 하시더니 어찌 이리 맥을 못 추십니까?”“그동안 많이 아팠던 사람이 이제 다 나았어.”“아이고, 그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매일 새벽같이 나돌아 다니시느라 피골이 상접해 보였는데, 차라리 잘되었습니다.”하지만 쉬이 줄어들지 않은 밥상.최상궁은 걱정 어린 목소리를 높였다.“헌데, 왜 이리 한 숟갈도 제대로 뜨지 못하십니까? 혹 어디 편찮으신 곳이라도 있는 겝니까? 안색이 백지장 같사옵니다, 마마.”유진은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왠지 모르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도무지 나질 않았다.그때 그녀의 밥상 시중을 들던 시종 아이가 그녀가 손도 대지 않은 고기조림 반찬에 침을 삼켰다.꾸울꺽ㅡ.침 삼키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유진의 이목을 붙잡았다.“혜선아. 이걸 먹고 싶은 모양이구나. 잘 됐다. 이쪽으로 어서 오거라.”몸집이 아주 작은 아이. 유난히 큰 눈이 강아지 같이 귀여웠다.그리고 유진보다 네 살이 어린, 아직 소녀라고 부르기도 앳된 꼬맹이였다.유진은 그녀를 향해 음식을 밀어주며 그녀를 불렀다.순간 최상궁이 혜선을 째려보았다.하지만 혜선은 자신에게 내려꽂힌 사나운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공주의 보료 위에 덥석 앉아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여전히 날개가 꺾인 새처럼 의기소침하게 축 처진 유진.최 상궁이 이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제안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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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숲속의 도륙, 야성(野性)의 열기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집어삼킨 숲속.몽돌 해변으로 이어지는 절벽과 유배지 처소로 향하는 어두운 산길의 갈림길.순식간에 사방에서 파고든 다섯 명의 불한당들이 유진을 완전히 에워쌌다.“이히히, 대단한 집안의 아기씨로구나! 몸값 하나는 두둑이 받겠어.”그녀를 향한 시퍼런 칼날들이 굶주린 늑대의 이빨처럼 차갑게 번뜩였다.그때 침을 튀기며 기괴한 괴성을 지르던 사내 중 하나가 유진의 코앞으로 칼을 맹렬히 휘두르며 위협해 왔다.갑작스러운 살기에 극도로 놀란 말이 앞발을 높게 쳐들며 날뛰기 시작했다.순간 유진은 중심을 잃었다.고삐마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며 사정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는 바로 그 찰나.칼을 들고 있던 사내 하나가 모가지가 완전히 뒤로 꺾인 채 바닥으로 푹 쓰러졌다.그리고 쓰러진 사내의 등 뒤에서, 마치 지옥의 심연을 뚫고 나온 유령처럼 요스케가 서늘하게 솟아올랐다.그의 검은 안광이 달빛 아래서 마귀처럼 빛났다.그는 순식간에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의 손에서 칼자루를 거칠게 빼앗아 들었다.이내 유진이 탄 말의 고삐를 한 손으로 단단하게 움켜잡더니 단숨에 제압했다.가차 없는 사내의 단단한 팔이 유진의 가느다란 허리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또 다른 사내가 살기를 뿜으며 칼을 휘둘렀다.“앗……! 뒤에!”“죽어라!”유진이 소스라치게 비명을 지르자.요스케는 그녀의 하얀 손목을 한 손으로 강하게 틀어쥐고 그녀를 등 뒤로 거칠게 밀어 숨겼다.서걱, 서거억――! 푸화학――!그 후 이어진 장면은 인간의 탈을 쓴 절대 포식자의 잔혹한 독무(獨舞)였다.요스케의 거구와 검의 궤적이 어둠 속에서 허공을 갈랐다.뜨거운 핏물이 하얀 억새풀과 나무 기둥 위로 무차별하게 흩뿌려졌다.단 일 격이었다.그의 자비 없는 검날에 목과 가슴이 난도질당한 사내들은 단 한 마디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유진의 발치에 허망하게 고꾸라졌다.사지가 잘려 나간 시신들.눈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무시무시한 살육을 목도하자마자, 유진은 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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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폭풍우 속 봉합, 소멸한 거리

바람이 초가집 지붕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 사납게 몰아쳤다.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유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둘러 여러 개의 초롱불을 밝혔다.사방을 가득 채웠던 어둠이 쫓겨나듯 물러갔으나, 방 안의 공기는 되려 가혹하게 가라앉았다.유진의 가느다란 손끝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검붉은 핏물로 얼룩진 사내의 흑색 저고리의 고름을 가차 없이 풀어내렸다.스르륵ㅡ.상태는 유진의 예상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상처 중앙부의 대여섯 바늘 자국이 시뻘겋게 벌어진 채 핏물을 뿜어내고 있었다.유진의 하얀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자신의 무모함으로 인해 이토록 또다시 그의 상처가 무참히 찢겨 나갔다는 죄책감이 몰려왔다.유진은 깨끗한 무명천에 독한 소주를 왈칵 부어 생살이 벌어진 상처 위로 묵직하게 꾹 내리눌렀다.벌건 생살에 날카로운 소주의 독기가 그대로 닿아 비명 같은 쓰라림을 주었다.하지만 요스케는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도리어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괴물처럼 숨을 낮게 몰아쉴 뿐이었다.그녀를 더는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그의 심장을 지배했다.“고작 조금 벌어진 것뿐입니다. 며칠 쉬면 금세 괜찮아질 터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그때 유진이 소주병을 요스케의 눈 앞에 단호히 밀어 넣으며 권했다.“벌어진 곳이 상처 끝자락의 겉피부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움직임의 중심이 되는 내부 장벽의 중간 부분이 완전히 벌어졌어요. 이대로 두면 살점이 걷잡을 수 없이 찢어질 겁니다. 이거 다 마셔요.”“……예?”당혹감이 서린 요스케의 시선에, 유진은 매섭게 그를 다그쳤다.“술에 많이 약하신 편인가요? 아니면 이 한 병으로는 모자랄까요? 술에 취해 차라리 감각을 잃고 잠드시는 게 가장 좋은데.”“……”“많이 아플 겁니다. 그러니까 빨리 들이켜세요. 시간 없으니까. 상처가 더 벌어지기 전에 꿰매야 한단 말입니다.”유진의 절박한 다그침.요스케는 소주병을 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묵직하게 읊조렸다.“그 이유 때문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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