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혈향연화: 핏빛 운명의 낙인: Chapter 51 - Chapter 60

64 Chapters

제51화. 서리 내린 고백, 낙화

그날 저녁.처소로 돌아온 유진은 다시금 극심한 열꽃에 시달리며 밤새도록 신음했다.하지만 동이 트기도 전 온 세상이 검푸른 장막에 갇혀 있는 이른 새벽녘.유진은 불덩이처럼 들끓는 몸을 이끌고 다시 말에 올라탔다.그때 아픈 유진의 자리끼를 살피러 혜선이 마당으로 나왔다.혜선은 말 위에 오르는 유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를 붙잡았다.“마마. 이 몸으로……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금방 오마. 급히 봐야 할 이가 있다.”창백함을 넘어 파리한 안색의 공주.혜선은 그녀의 고집에 발을 동동 굴렀다.“안됩니다. 큰일 나십니다.”유진은 자신을 잡는 혜선을 뿌리치고 말의 허리를 발로 차며 뒷 산으로 향했다.새벽의 정적 속.요스케는 심장을 찌르는 기묘한 통증에 번뜩 눈이 떠졌다.끔찍한 악몽이었다.마치 현실인 것처럼 꿈에서의 고통이 여전히 몸에서 느껴졌다.밖은 여전히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으나 더는 잠을 청하기가 힘들었다.바로 그 순간이었다.두두두두――! 달각!고요한 마당의 자갈밭 위로, 거친 말발굽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그가 급하게 방문을 열어젖히자, 말등에서 내려오는 유진이 그의 시야에 걸렸다.미칠 것 같은 걱정이 그의 가슴에 밀려들었다.그제야 왜 자신이 예전 그 산속에서 불한당을 만났던 그 순간을 악몽으로 꾸었는지 알았다.그때 자신이 조금만 늦었다면 아니 조금만 빨랐다면, 그래서 그녀와 마주치지 않았다면.이제 곁에 있어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이리 밖의 세상이 무서운 줄도 모르는 그녀를 보자, 그는 이성을 잃었다.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정녕 미쳤느냐?! 지금 이 엄동설한의 칠흑 같은 새벽에 고개를 홀로 넘은 것이냐? 내게 검술 동작 몇 개 배웠다고 이리 오만을 떠느냐. 이러라고 내가 검술을 가르친 줄 아느냐.”유진은 분노를 쏟아내는 요스케를 힘겹게 올려다보았다.“계속 사부님의 얼굴을 뵙기가 힘들어서……”“수업은 진작에 끝났고 내 가슴의 상처 역시 자네 덕에 치료가 끝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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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가장 잔인한 배려

“유진――!!!”요스케의 안면이 순간 참혹하게 무너져 내렸다.놀란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된 채, 흙바닥으로 쓰러지는 그녀의 가녀린 몸을 두 팔로 급히 감싸 안았다.품에 안은 유진의 몸이 화로에 달궈진 불덩이처럼 지독하게 들끓고 있었다.어찌 이 몸으로 이 밤에 여길 온 것인지.화가 났다.그 화가 자신을 향한 분노였는지 그녀를 향한 것이었는지 알수 없었다.요스케는 급하게 그녀의 작은 몸을 안아 들고 방 안으로 데려갔다.그리고 물을 묻힌 무명천으로 그녀의 이마와 목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 주었다.하지만 숨을 가늘게 몰아쉬는 유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그녀의 힘든 숨결마다 제 심장은 으스러졌다.그는 빨갛게 달아오를 그녀의 뺨과 목덜미를 연신 손으로 대어보았다.그녀를 어루만지는 그의 커다란 손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당장 의원에게 보여야 했다.잘못하다간 목숨이 끊어질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고열이었다.요스케는 땀과 눈물에 젖은 유진의 하얀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짓이겼다.[네가 이리 힘들 줄도 모르고 나를 보러 오지 않는 너를 원망했다. 한심하게……]잠시 생각을 정리했다.그는 이내 자신이 덮던 두꺼운 무명 솜이불로 유진의 몸을 바람 한 자락 통하지 않게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그리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말 위에 올렸다.청사의 파도가 휘몰아치는 검은 바다를 뒤로한 채.검푸른 새벽 장막을 뚫고 그는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좀 더 빨리 어서 가야한다. 그녀를 살려야 한다.말발굽이 산길을 거칠게 짓밟았다.불덩이처럼 들끓는 여인을 품에 안은 그의 손끝이 사정없이 떨려왔다청사(靑蛇) 공주의 자택.가장 후미지고 은밀한 담벼락을 요스케는 가볍게 넘었다.그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불이 꺼진 공주의 침소 안으로 소리없이 들어갔다.품 안의 유진은 여전히 뜨거운 숨을 힘겹게 내뱉고 있었다.그의 가슴이 미어왔다.그녀가 가엽고 안쓰러워 미칠 것 같았다.품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제 품에 이렇게 안고 보살피고 싶었다.잠시 그녀의 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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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청사의 낙원을 떠나다

홀로 초가집으로 돌아왔다.그녀의 국혼 소식.아무 소용없는 미련이거늘. 그녀를 놔주는 것이 최선이거늘.이미 떠나기로 굳게 먹은 마음에도,그녀가 다른 사내의 여인이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요스케는 미칠 것 같았다.심장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에 난도질당했다.온 몸에서 기가 빠져나갔다.초가집으로 이어진 재를 넘는 동안, 그는 몇 번이고 말에서 휘청거렸다.그의 의식은 이미 텅빈 채 어떤 생각도 의지도 담지 못했다.겨우 당도한 그들만의 작은 낙원, 청사의 초가집에 들어서자, 비로소 팽팽했던 이성의 맥이 그대로 풀려버렸다.요스케는 지친 거구를 끌다시피 방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참 동안 차가운 방바닥 위에 쓰러져 있었다.이미 정신과 육체가 완전히 탈진해 있었다.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평생을 사방이 시퍼런 적들로 가득 찬 수많은 전장에서 보냈다.그럼에도 단 한 번도 체력과 기력이 쇠해 본 적 없었다.심지어 대죽도에서 치명상을 입고 바다에 떨어졌던 순간에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그런 최고의 철혈 무사였던 그가 ‘유진’이라는 가녀린 여인 하나에 무력하게 쓰러졌다.순간 암전이 왔다.그렇게 한동안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던 걸까.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마자 후회했다.이대로 정신을 놓은 채 눈 뜨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왜 하필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와 이 참혹한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지.그리고 다시 그녀의 환영이 떠올랐다.제발 곁에 남아달라며 눈물로 오열하던 공주의 환영.그 잔인한 기억이 머릿속을 잔인하게 어지럽히며 그를 괴롭혔다.순간, 유진이 살린 자신의 심장에서 날카롭고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고문이었다. 지독한 영겁의 고통.“으으아아아악ㅡㅡㅡ!”그는 죽어가는 짐승의 신음을 뱉어냈다.그녀가 다시 선사해 준 이 고귀한 삶이 도리어 살수가 되었다.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를 잃고 장차 어떻게 홀로 살아가야 할지 너무도 두려웠다.그녀를 잃은 슬픔과 갈증을 견뎌내지 못하고 스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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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선(線)을 넘어선 파멸

정신이 들자마자 눈물로 번진 희미한 시야.유진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경상 위 책력이었다.그가 예고한 잔인한 운명의 날인 정월 초하루.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제 겨우 일주일 남짓밖에 남았다.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절망이 왈칵 쏟아졌다.이미 비참하고 처절하게 짓밟히고 거절당한 마음이었다.하지만 그를 눈에 담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이대로 허망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알량한 자존심이나 비참함 따위는 가혹한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옷자락을 휘날리며 말 위에 올라탔다.다급히 재를 넘어, 자신들의 작은 초가집으로 달려들어갔다.하지만 이미 그곳은 모든 온기를 잃어버린 채 텅 비어 있었다.심장이 그대로 툭 멎는 것 같았다.“아아…… 안 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유진은 다시금 거칠게 말등 위에 올라타 고삐를 사정없이 낚아챘다.그녀는 거친 갯벌과 서리가 칼날처럼 낀 모래사장을 한참 동안 미친 듯이 달렸다.그리고 저 멀리 해안가 절벽 끝자락.그를 마침내 붙잡았다.보랏빛 치맛자락이 젖은 모래에 끌여 더럽혀지는 것도 모른 채.그녀는 단단하게 멈춰 선 요스케의 뒷모습을 향해 달려갔다.그리고 남은 영혼을 전부 쥐어짜 마지막으로 애원했다.“잠시만요……! 잠깐만…… 제발 멈춰 주세요……!”요스케는 끝내 유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눈물 맺힌 고운 얼굴을 단 한 자락이라도 바라보게 된다면.더는 그 어떤 힘으로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이제 떠나지 말아 달라고, 제 곁에 남아달라고 더는 떼쓰며 붙잡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약속하셨던 날짜까지만이라도, 제발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저에게 당신과 온전히 작별할 수 있는 시간만 허락해 주셔요. 제발…… 제가 당신을 웃으며 보내줄 수 있게, 그것만이라도…… 제게 허락해 주세요.”그녀의 처절한 애원이 겨울 바다의 사나운 파도 소리를 뚫고 그의 고막에 박혔다.그 순간.사내의 이성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스러져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야성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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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야반도주(夜半逃走)의 밤

스산하게 썰물로 열린 새벽 아침 바닷길.“영원히 나의 곁에 있어다오. 나의 전부가 되어 주겠느냐.”“당신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제 전부를 기꺼이 드리겠습니다.”유진은 요스케의 넓은 품에 단단히 안긴 채 애절하게 속삭였다.마침내 둘은 하나가 되기로 맹세했다.그리고 자신들의 낙원인 외딴 초가집으로 돌아왔다.“……저도 집에 잠시 다녀올게요.”짐 꾸러미를 묶던 요스케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유진을 보았다.그의 심장이 불안에 떨렸다.그녀를 조금도 떼어 놓고 싶지 않았다.그의 검은 눈동자에 지독한 연모가 가득 차 있었다.“그럼 밤에 처소 근처로 데리러 갈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네. 이경쯤 오셔요.”“알았다.”유진은 숨 가쁘게 처소로 귀가했다.그녀가 저택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불안한 기색으로 마당을 서성거리던 최 상궁이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를 맞이했다.“마마…… 이리 성치 않는 몸으로 어딜 다녀오십니까.”“좀 소화가 안되는 것 같이 답답해서…… 근처 산보를 다녀왔네. 이제 좀 속이 편해졌어. 난 피곤해서 들어가 좀 쉬어야겠으니 방해하지 마.”그녀는 냉큼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빗장을 걸어 잠그고 평생 모아둔 값비싼 패물들을 모조리 챙겼다.오후가 되자 그녀는 몰래 찬방으로 들어가 음식들을 단단히 싸서 마구간으로 향했다.그리고 경호대원들이 방심한 틈을 타 튼튼한 말 한 필을 더 이끌고 나와 은밀히 짐을 싣고는 혜민서 마구간 구석에 조용히 묶어두었다.저녁상이 들어오자, 몹시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일찍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불을 끄고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다.이윽고 약속된 밤 이경.고요한 어둠을 뚫고 자택 담벼락 너머로 요스케의 묵직한 그림자가 드리웠다.평생을 옭아매던 공주의 신분을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담을 넘은 순간.어둠 속에서 뻗어온 그의 단단한 손길이 유진을 붙잡았다.그것은 구원이자 결코 돌아갈 수 없는 핏빛 벼랑 끝이었다.유진은 미련 없이 그를 따라 청사(靑蛇)를 탈출했다.검푸른 새벽 한기가 살을 베어낼 듯 매섭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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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첫 애무

요스케는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그는 오한으로 떨고 있는 유진의 가녀린 어깨를 자신의 커다란 품 안으로 바짝 끌어당겨 안고 누웠다.살구꽃.코끝을 스치며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은말하고 달콤한 그녀의 체취.그의 심장이 순간 아늑한 평온함으로 이끌려 들어갔다.무사로 길러져 평생 칼날 위에 서 있던 긴장감에만 익숙했던 사내.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평온함에.그는 그 어떤 전장보다 더 깊은 두려움에 떨었다.자신의 죽음조차 두려워해 본 적 없던 그가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그녀를 만나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났고.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감정의 파도를 배웠다.육체의 아픔, 가슴 저린 두려움, 미칠 것 같은 그리움과 애절함, 불행과 서글픔.이 우주를 가득 메울 듯한 평온과 행복.그리고 마침내 연모(戀慕).그 낯선 감정들이 이젠 그에게 있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버렸다.그 가치의 가장 내밀한 중심에 오직 서유진, 그녀만이 서 있었다.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다.그녀를 집어 삼키지 않으면 그는 견딜 수 없었다.정녕 미치도록 그녀를 원했다.그녀의 존재가 너무도 애틋하고 소중해서 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녀의 곁을 온전히 지켜내고 그녀가 자신의 여인이 될 수만 있다면.무사로서의 명예든, 가문이든, 단 하나뿐인 목숨마저도 단 한자락도 아깝지 않았다.그동안 힘겹게 억눌러왔던 연모가 마침내 이 작은 방 안에서 쏟아져 내렸다.그는 제 안의 야성을 해방하듯 그녀를 더 깊게 품에 안았다.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서로를 더욱 갈망했다.요스케의 커다란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유진의 뺨을 쓸어내리다 가녀린 목덜미를 감싸쥐었다.그의 손길이 살갛에 닿는 순간 몸이 너무 뜨거워졌다.하지만 몸을 괴롭히는 미열과는 다른 열기.숨이 가빠왔다.몸의 열기를 내뱉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그의 부드럽게 목덜미를 감싸안자 저도 모르게 입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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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영주 태산(太山)의 초가

모든 것이 불안한 도피 행로.하지만 서로의 품에서 서로의 연모를 확인한 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그렇게 주막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의 품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이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었다.아침 해가 떠오를 쯤.두 사람은 다시금 북을 향해 거칠게 말을 달렸다.그렇게 하루를 꼬박 달렸다.그리고 다음 날 새벽.계곡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무렵.숲속에 덩그러니 버려진 외딴 초가 한 채를 발견했다.살을 에는 산바람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영주 태산의 외딴 초가.사방을 짓누르는 고요함 너머로, 서늘한 폐가의 지붕 위로 붉은 아침 햇살이 핏빛처럼 흘러 내렸다.둘은 비로소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어 세웠다.“여기서 잠시 쉬다 가지.”요스케가 먼저 말에서 내려 장검을 쥔 채 안으로 들어갔다.혹여 숨어있을 도적이나 맹수가 있는지 구석구석을 철저히 확인했다.다행히 얼마 전까지 심마니나 화전민이 사용한 듯.생각보다 기울어지거나 무너진 곳도 없이 내부는 꽤나 깨끗했다.유진은 말에서 내려 가장 먼저 온기가 시급한 부엌으로 향했다.구석에 정갈하게 쌓여 있는 마른 장작들을 아궁이 깊숙이 집어넣고 불을 지폈다.이내 매캐하고도 따스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그사이 요스케는 가파른 계곡으로 내려가 살얼음이 낀 차가운 물을 양동이 가득 퍼 왔다.유진은 아궁이 위에 걸린 무쇠솥을 볏짚으로 거칠게 비벼 녹을 말끔히 없앴다.그리고 바지런히 물을 끓였다.방 안의 가구와 바닥을 구석구석 쓸고 닦아내자, 폐가에 제법 사람 사는 훈기가 돌았다.어느 정도 집안 정돈을 끝마치자.어느새 겨울 상공의 해가 머리 꼭대기에 둥실 떠올라 있었다.유진은 차를 우려내고 자택에서부터 소중히 챙겨온 달콤한 약밥을 상에 올려 그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나눴다.“여기…… 겨울이라 잠시 방치해 둔 심마니 집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봄이 오면 나물이나 산삼을 캐는 분들이 임시로 쓰는 곳이겠지요. 심지어 마당 장독대를 열어보니 장까지 담겨 있는 것이 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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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첫 연모. 지아비이자 운명

한참 동안 유진의 숨결을 남김없이 훔쳐내던 그가, 지난 밤 겨우 참았던 자신의 진심을 모조리 쏟아내었다.“자네를 미치도록 연모한다, 유진. 사내로 태어나 처음으로…… 청사의 해안가에서 널 만나기 전까지, 무엇도 나를 흔든 적이 없었다. 이토록 간절하게 원한 적도 없었다.”요스케의 거친 더운 숨결이 유진의 하얀 이마와 뺨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그렇게 살아가던 나를,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던 내가…… 너를 만나고 너를 보지 못할까 조바심을 내다 못해 기어이 두려움이라는 형벌을 알게 되었다. 널 내 아래 누이고 싶어서, 매일 밤 지옥 같은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네 품이…… 너무도 안온하고 행복해서 되려 무서울 만큼 난 널 미치도록 원한다.”그의 온 영혼이 담긴 고백.유진의 황금빛 눈동자에 순식간에 뜨거운 눈물이 고여 흘러내렸다.“지난 아홉 달 동안, 널 바라보는 것조차 죄스러워 힘들 만큼, 처음 마주한 그 순간부터 넌 내게 유일한 여인이었다.”그녀의 심장이 터져나갈 것처럼 세차게 두근거렸다.그녀는 그의 품에 더 깊게 파고 들며 애절하게 속삭였다.“당신은 내 삶에 찾아와 준 기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완전한 행복이었고, 동시에 가장 거대한 아픔이었습니다, 요스케…….”유진이 요스케의 가슴 위로 얼굴을 묻으며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당신은 하늘이 제게 점지해 준 단 하나뿐인 운명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날 내 본래 이름인 유진으로 불러주는 유일한 지아비이십니다.”그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이 가녀린 공주, 아니 자신의 유일한 구원인 유진을 당장 온전히 정복해 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미쳐서 파멸할 것만 같았다.야수 같은 소유욕이 사내의 하복부를 무시무시하게 옥죄어왔다.요스케는 허벅지 근육을 단단히 긴장시키며 그녀의 골반을 제 하복부 위로 바짝 밀착시켰다.그는 유진의 허리춤에 단단히 묶여 있던 저고리의 옷고름을 거친 손가락으로 가차 없이 풀어내렸다.단숨에 비단 옷자락이 양옆으로 벌어지며, 유진의 탐스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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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혈서(血書)에 깨진 돌아오겠다는 약조

아랫동네 저잣거리로 내려왔다.별다른 이상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평화롭고 한적한 시골의 소박한 상점들이 작게 늘어져 있었다.요스케는 서둘러 주변을 살피다 쌀과 기력을 보할 약간의 고기, 두꺼운 이불 한 채를 사서 말등에 실었다.바로 그 순간.저잣거리 한복판에 다급하게 방(榜)이 붙었다.이내 포도청 관군들이 사방으로 분주하게 대형을 짜며 움직이는 광경이 포착되었다.군사들의 틈새를 뚫고 벽보에 그려진 인상착의를 확인한 요스케의 검은 눈동자가 순간 거칠게 흔들렸다.벽보 위로 정갈하게 그려진 공주의 초상화.군사들의 포위망이 태산을 향해 사정없이 좁혀들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피가 바싹 말라붙어 온 몸이 타들어 가는듯 했다.생각보다 추적과 수색의 속도가 너무도 빨랐다.요스케는 급하게 말을 달려 태산 계곡을 향해 질주했다.하지만 이미 관군 무리가 숲의 초입과 계곡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요스케는 이를 악물며 다시 말머리를 돌려 반대쪽 험준한 산고개 샛길로 내달렸다.하지만 잔인하게도 그곳마저 붉은 융복을 입은 왕실 경호대가 산길 입구를 촘촘하게 포위한 상태였다.사방이 거대한 인간의 덫으로 가득 차 있었다.요스케는 삿갓을 깊숙이 고쳐 쓰며 일단 다시 저잣거리 구석으로 후퇴했다.괜히 섣부르게 칼을 휘두르거나 깊은 산길에 말발굽 자국이라도 남겼다간 외딴 곳에 숨어있는 유진의 위치가 단숨에 발각될 터였다.요스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아득한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제발, 제발.이 가혹한 흔적들을 지워줄 거친 눈발이 다시금 쏟아지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야속하게도 차가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투명하고 맑기만 했다.요스케는 다른 통로를 찾기 위해,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짐승처럼 주변의 절벽과 산세를 미친 듯이 겉돌았다.나흘째 되던 날까지.초가집 안에서 홀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유진을 향한 그리움에 피가 바싹 말라갔다.그리고 그는 이 태산 전체가 관군들에 의해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포위당했음을 직감했다.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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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결국 붙잡힌 유진

유진이 홀로 숨어있는 외딴 초가집의 상세한 위치가 담긴 혈서 한 장.부안대군은 마침내 초가집 구석에서 탈진해 가던 유진을 무사히 산 아래로 안전하게 데리고 내려왔다.그리고 그날 저녁.임시 처소 안으로 날아든 투서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부안대군은 종이 위에 거칠고 힘 있게 휘둘러진 특유의 서체를 확인하곤 단숨에 안면을 서늘하게 굳혔다.그는 곧장 유진의 침소로 가 장막을 걷어 올렸다.하지만 정작 여동생에게 산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왜 사츠마의 그자와 도망쳤는지 그 어떤 사소한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유진 역시 찻잔만을 바라볼 뿐이었다.어떤 구차한 변명도, 이유도 먼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그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부안대군은 유진의 속내를 모른 척 했다.대신 즉시 공주의 처소 주변 경호를 궐의 최정예 군사들로 삼엄하게 강화한 뒤, 그녀를 압송하듯 강제로 낙성궁으로 데려왔다.유진이 궁에 당도하기가 무섭게, 그는 폐하를 뵙고 대사헌 가문과의 국혼 일정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폐하의 승인이 떨어진 공식적인 첩지를 하달받아 직접 유진에게 전달하였다.“일주일 후, 너의 국혼이 진행될 것이다.”그제서야 완강하게 닫혀 있던 유진의 붉은 입술이 마침내 서늘하게 열렸다.황금빛 눈동자에 서글픈 슬픔이 서려 있었다.“제발……… 국혼을 막아주셔요.”부안대군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이유가 무엇이냐, 정명. 왜 도망까지 치며 이리 완강하게 거부하는 게야?”“그저……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내 발로 걸어 들어가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정녕 그뿐이냐? 아니면 내게 말하지 못할…… 다른 은밀한 이유라도 가슴속에 있는 것이냐?”다그치는 오라버니의 시선을 그녀는 똑바로 받아치며 애써 냉정하게 대꾸했다.“없습니다. 헌데 국혼을 깨기 위해 거창한 이유라도 찾아내야 이 국혼을 막을 수 있는 건가요? 정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이유를 만들테니, 막아 주세요.”“정명. 만약 네게 오라비인 내 정치적 입지에 이 국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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