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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14일간의 계약 연애: Chapter 91 - Chapter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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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크림색 봉투의 은빛 문장을 확인한 순간, 차도현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벨루아 그룹이네."도현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낮아졌다.프랑스 대표 명품 브랜드인 메종 벨루아를 중심으로 패션과 뷰티, 유통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 태성그룹과 직접적인 경쟁 관계는 아니었지만, 최근 아시아 시장과 디지털 유통망 확장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는 소식은 소율도 익히 알고 있었다.그런 회사가 왜 자신에게 극비 문서를 보냈을까.소율은 봉투를 빛에 비춰보았다. 두꺼운 종이 안쪽으로 여러 장의 문서가 겹쳐진 윤곽만 보일 뿐, 내용은 짐작할 수 없었다."열어봐."도현이 말했다."도현 씨도 궁금하죠?""궁금하지. 그래도 네 앞으로 온 문서니까 네가 먼저 봐."예전의 차도현이었다면 발신 부서부터 확인하고 비서실에 연락해 문서가 온 경위를 파악했을 것이다. 소율의 일을 자신의 통제 범위 안에 넣어야 안심하던 남자였으니까.하지만 지금 그는 팔짱을 낀 채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어젯밤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겠다고 했던 약속을, 고작 봉투 하나 앞에서부터 지키고 있는 모습이었다.소율은 괜히 가슴이 간질거려 봉투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그때 도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뜬 서울 본사 전략실이라는 표시를 확인한 그의 미간이 곧바로 찌푸려졌다. 사흘간 모든 업무 연락을 끊겠다던 사람이었지만, 파업 후속 대응과 관련된 본사 전화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잠깐 통화하고 올게.""천천히 하세요."도현은 서재로 향하다가 다시 돌아봤다."나 없을 때 열어도 돼. 기다릴 필요 없어.""알겠어요."그가 문을 닫고 들어간 뒤에도 소율은 한동안 봉투를 내려다봤다.뜯지 않은 문서인데도 손끝이 묘하게 뜨거웠다.소율은 조심스럽게 봉인을 잘랐다.가장 먼저 나온 것은 벨루아 그룹 인재전략본부 명의의 공식 서한이었다. 그 아래에는 직무 기술서와 보상 조건표, 그룹이 새로 추진하는 유럽 통합 사업 계획서의 일부가 붙어 있었다.소율의 시선이 첫 장의 굵은 글씨에 멈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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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소율은 봉투를 개인 수첩 사이에 끼워 넣었다.잠시 후 서재 문이 열렸다."무슨 내용이야?"도현이 물었다.소율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 솔직하게 답했다."아직 제대로 못 봤어요. 생각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도현의 시선이 수첩 사이로 사라진 봉투에 잠시 닿았다."그래."그게 전부였다.왜 자신에게 바로 보여주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았고, 벨루아 그룹에 연락해 보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도현은 주방으로 향해 커피 머신의 전원부터 켰다."아침 못 먹었잖아. 뭐 먹을래?"평소와 같은 목소리였다.소율은 안도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남은 휴가 동안 도현은 단 한 번도 봉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소율이 창가에서 수첩을 펼쳐놓고 생각에 잠겨 있어도 방해하지 않았고, 벨루아 그룹의 최근 사업 기사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못 본 척 지나갔다.대신 끼니마다 음식을 챙겼고, 업무용 메일에 손을 대려 하면 약속 위반이라며 태블릿을 빼앗았다. 밤에는 소율이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그 침묵이 무관심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것을 알기에 소율은 더 오래 고민했다.제안받은 직책은 매력적이었다. 지금보다 큰 조직과 예산을 움직일 수 있었고, 누구의 연인이라는 설명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자리였다.하지만 소율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새 명함이 아니었다.태성에서 자신이 시작한 유럽 사업을 끝까지 키워보고 싶었다. 차도현의 보호 아래가 아니라 자신이 세운 성과를 발판으로 더 큰 권한을 얻고 싶었다. 다른 회사가 인정해 준 가치를 들고 떠나는 대신, 지금 있는 자리의 한계를 직접 바꿔보고 싶었다.사흘째 밤이 되어서야 마음의 모양이 분명해졌다.소율은 빈 노트 첫 장에 제목을 적었다.[유럽 전략 기능 확대 및 기획팀 독립 권한 제안]그리고 그 아래에 지금까지 태성 지사에서 느꼈던 구조적 한계와 필요한 권한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대체 휴가가 끝난 월요일 아침.소율은 평소보다 일찍 지사에 도착했다.며칠 비웠을 뿐인데 책상 위에는 결재 대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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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잠금 화면 위로 프랑스어 메시지 일부가 떠올랐다.[Lucien Marceau: 한 팀장님께서 제안서를 확인하셨기를 바랍니다. 직접 만나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전적으로 팀장님께 맞추겠습니다.]소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하필이면 지금이었다.도현은 메시지를 읽은 기색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명함을 소율의 책상 위에 정갈하게 내려놓고, 펼쳐진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비용 절감 예상치는 확인했습니다.""본부장님, 이건….""지금은... 업무 시간입니다, 한 팀장."건조한 존댓말이 소율의 말을 막았다."외부 기업과의 접촉은 본인의 권리입니다. 다만 현 직무와 관련된 이해 충돌 가능성이 있으니 정식 면담이 잡히면 인사 담당자에게 알리십시오.""네, 알겠습니다.""보고서는 오늘 안으로 승인하겠습니다."도현은 그 말만 남기고 기획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문이 닫히자 참았던 숨소리가 곳곳에서 터졌다.쥘리앙이 조심스럽게 소율의 책상 가까이 다가왔다."한 팀장님.""왜요?""본부장님, 화나신 것 아닙니까?""표정은 평소와 같았잖아요.""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내려오실 때 들고 계시던 커피를 한 모금도 안 드시고 그대로 가져가셨습니다. 본부장님께서 카페인을 포기하신 건 심각한 시스템 오류가 생긴겁니다."소율은 웃어야 할지 한숨을 쉬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회사에서는 단 한마디도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은 도현이었다. 소율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완벽하게 지킨 셈이었다.하지만 그 무표정 아래에서 무엇이 끓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퇴근 시간이 되자 도현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차도현 본부장: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겠습니다.]평소처럼 함께 퇴근하자는 말이었다.소율은 벨루아의 제안서와 밤새 작성한 기획안을 가방에 넣었다.지하 주차장에 내려가자 검은 세단의 뒷문이 열려 있었다. 도현은 안쪽 좌석에 앉아 태블릿으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소율이 옆에 타도 그는 한동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차가 주차장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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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그 말을 듣고 싶었나 봐요.""떠나고 싶다는 뜻이야?"곧바로 긴장하는 목소리에 소율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제가 원하는 건 다른 회사가 아니에요."도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태성에서 더 큰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시작한 유럽 사업을 끝까지 키우고, 현지 전략을 본사의 승인만 기다리지 않고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얻고 싶어요. 차도현의 연인이어서 받는 자리가 아니라, 한소율의 성과로 만든 자리요."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불안해질 때쯤 그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그래서 사흘 동안 뭘 썼어?"소율은 가방에서 두꺼운 기획안을 꺼냈다."유럽 전략 기능 확대안이에요. 기획팀 독립 결재권과 프로젝트별 인력 선발권, 현지 예산 조정 범위를 정리했어요."도현은 문서를 받아 첫 장을 훑었다."연인으로서는 당장 승인하고 싶네.""본부장으로서는요?""근거가 부족해."소율이 그의 어깨에서 바로 몸을 뗐다."아직 제대로 읽지도 않으셨잖아요.""첫 장의 목표는 좋은데, 권한 확대에 따른 책임 구조가 빠졌어. 기존 지역 책임자들과의 충돌을 어떻게 조정할지도 모호하고.""그건 뒤에 있습니다.""뒤에 있으면 안 되지. 승인권자가 첫 장에서 필요성을 이해해야 해."조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게 선택권을 내주던 남자는 순식간에 냉정한 본부장으로 돌아가 있었다.소율은 어이가 없어 그를 노려봤다."다음 주 월요일까지 수정해서 정식으로 제출해.""오늘 월요일이에요.""일주일이면 충분하잖아.""휴가 내내 작성한 사람한테 너무하시네요.""좋은 자리를 원한다며. 그럼 누구도 특혜라고 말하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가져와."그 말에 소율은 입술을 다물었다.까다롭고 얄미웠지만 옳은 말이었다.도현은 연인으로서 붙잡되, 본부장으로서는 길을 쉽게 깔아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소율이 가장 원했던 방식이기도 했다."좋아요. 완벽하게 수정해서 제출할게요.""기대하지."소율은 기획안을 다시 빼앗듯 받아 가방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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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목요일 오후 세 시.파리 브리스톨 호텔의 라운지는 한낮의 햇빛을 머금은 채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크림색 대리석 기둥과 금빛 장식, 낮게 흐르는 피아노 선율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우아해 목소리를 조금만 높여도 실례가 될 것 같은 공간이었다.한소율은 창가 쪽 예약석에 앉아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했다.맞은편에는 태성그룹 유럽 지사의 인사 책임자 클레르가 동석해 있었다. 외부 기업의 영입 제안이라는 민감한 자리였지만, 소율은 도현이 지시한 이해 충돌 절차를 그대로 따랐다. 오늘 대화의 목적도 명확했다.벨루아 그룹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절하는 것.그럼에도 소율의 손끝에는 미세한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은 없었으나, 자신을 높은 자리까지 끌어올려 평가한 사람에게 얼굴을 마주하고 거절 의사를 밝히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긴장되십니까?"클레르가 물었다."조금요. 조건이 부족해서 거절하는 게 아니니까 더 어렵네요.""그래도 직접 만나 설명하는 선택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벨루아와 태성은 앞으로 협력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소율이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 라운지 입구에서 짙은 회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사진으로 봤던 루시앙 마르소였다.단정하게 넘긴 짙은 갈색 머리와 부드러운 인상,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정확하게 사람의 시선을 끄는 외모였다. 그는 소율을 발견하자 곧장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한소율 팀장님,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루시앙 마르소입니다."유창한 한국어였다."반갑습니다. 이쪽은 태성그룹 유럽 지사의 인사 책임자 클레르입니다."세 사람은 차례로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루시앙은 준비해 온 서류를 바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직원이 차를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린 뒤 소율을 바라봤다."먼저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부담을 드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파업 직후라 휴식이 필요하실 시기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솔직히 놀라기는 했습니다. 제 경력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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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다크 네이비 슈트 위에 얇은 코트를 걸친 그는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뒤에는 처음 보는 프랑스인 컨설턴트 두 명과 비서가 따라오고 있었다. 정말로 업무 미팅을 마치고 나온 사람처럼 완벽한 구성이었다.문제는 브리스톨 호텔 주변 지도를 미리 검색해 둔 남자의 등장이 조금도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도현은 놀란 기색조차 없이 소율의 자리로 다가왔다."한 팀장, 여기서 보는군요.""...그러게요, 본부장님. 정말 놀라운 우.연.이네요."소율이 마지막 단어에 힘을 주었지만 도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근처에서 물류 컨설팅 미팅이 있었습니다.""브리스톨 호텔 안에서요?""마침 상대 측이 이곳을 원했습니다."도현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그 뒤에 선 컨설턴트들이 미묘하게 시선을 피하는 모습만 아니었다면 소율도 믿을 뻔했다.루시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차도현 본부장님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루시앙 마르소 씨군요. 저도 이력은 확인했습니다."두 남자가 악수를 나눴다.표면적으로는 완벽하게 예의 바른 인사였다. 그러나 악수가 예상보다 반 박자 길어지자, 클레르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차를 마셨다.루시앙이 먼저 손을 놓으며 미소 지었다."이력을 확인하셨다니 영광이군요. 업계가 좁기는 한 모양입니다.""유능한 인재 주변에 접근하는 사람은 확인하는 편입니다.""접근이라기보다 정식 영입 제안이었습니다. 물론 방금 거절당했지만요."도현의 굳어 있던 눈빛이 아주 조금 풀렸다.소율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본부장님께서는 다음 일정이 있으시지 않습니까?"그녀가 공적인 존댓말로 퇴장을 권했지만, 도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다음 일정까지 이십 분 정도 남았습니다.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질문의 형식을 갖췄으나 이미 비서가 옆 테이블에서 의자를 가져오고 있었다.소율은 어이가 없었지만 루시앙이 먼저 자리를 권했다."물론입니다. 저도 궁금한 점이 있었습니다. 태성은 한소율 팀장님처럼 뛰어난 인재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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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호텔을 나온 두 사람은 같은 차에 올랐다.차가 움직이자 소율은 도현에게 받은 브뤼셀 파견서를 다시 펼쳐봤다. 기쁘고 벅찬 마음과 별개로, 옆자리의 남자를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도현 씨.""왜?""질투 오류 보고서를 작성해야겠어요.""무슨 보고서?""차도현이라는 완벽한 시스템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치명적인 오류에 관한 보고서요."도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소율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첫 번째. 남궁혁 대리 사건. 제가 입사 동기랑 웃었다는 이유로 회식 자리에서 끌어내고, 비 오는 날 벽으로 몰아붙였죠.""그건 남궁혁이 불필요하게 네 어깨를 만졌기 때문이야.""보세요. 아직도 이름과 행동을 정확히 기억하잖아요.""위험 요인은 기록하는 편이야."소율은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두 번째. 레옹 브랑슈 사건. 회의실에서 손등 인사를 막겠다고 제 허리를 낚아채고, 만찬 자리에서 갑자기 미래의 아내라고 공개했죠.""그놈, 흠. 그자는 처음부터 의도가 불순했어.""...그 결과 사내 비밀 연애가 하루 만에 공개 연애가 됐고요.""결과적으로 잘됐잖아."반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대답이었다.소율은 세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세 번째. 이자벨 사건. 그 여자가 도현 씨에게 접근할 때 제가 질투하니까, 싫기는커녕 입꼬리를 관리하지 못하셨죠.""그건 네가 처음으로 공개적인 소유권을 주장한 역사적인 사건이었어.""다른 여자가 도현 씨 넥타이에 손을 대려는데 웃음이 나왔어요?""이자벨을 보고 웃은 게 아니라 널 보고 웃은 거야. 구분해야지.""네 번째. 오늘 루시앙 마르소 사건. 안 온다고 해놓고 호텔 안에 급조한 미팅을 잡아서 나타났어요.""급조한 게 아니라 긴급 편성이야.""그게 그거예요.""전부 질투가 아니라 주변 인물의 의도를 정확히 평가하고 대응한 거야."도현은 끝까지 항변했다.소율은 진지한 얼굴로 결론을 내렸다."오류를 오류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중증이네요.""한소율.""네, 환자분.""나 놀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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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브뤼셀 출장을 떠나는 아침.한소율은 현관 앞에 세워둔 작은 캐리어와 식탁 위의 서류철을 번갈아 바라봤다.사흘치 옷과 노트북, 회의 자료를 전부 넣은 캐리어보다 차도현이 내민 서류철이 훨씬 두꺼웠다. 표지에는 단정한 글씨로 브뤼셀 출장 지원 계획이라고 적혀 있었다.소율이 첫 장을 넘겼다.파리 북역까지의 이동 경로, 열차 좌석 번호, 브뤼셀 도착 후 이용할 차량과 운전기사의 신원, 호텔 보안 담당자 연락처, 가장 가까운 병원과 약국, 여권 분실 시 대사관 연락 절차까지 빠짐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비상 연락망은 중요도에 따라 세 가지 색으로 구분됐고, 마지막 장에는 객실 화재 대피로까지 인쇄되어 있었다."...도현 씨.""왜?""저 혼자 보내는 것 맞아요?"소율이 서류철을 들어 보였다."이 정도면 브뤼셀에 지사를 하나 따라 보내는 것 같은데요."도현은 셔츠 소매의 단추를 채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대표 권한을 혼자 주는 거지, 불편까지 혼자 감당하라는 뜻은 아니야.""객실 온도 권장 범위는 왜 있어요?""당신 추위 많이 타잖아.""근처 약국 영업시간은요?""지난번에 진통제 없어서 고생했으니까.""호텔 조식 메뉴에 알레르기 표시까지 붙인 건요?""그건 기본이고."소율은 서류철을 덮었다. 반박하려 했지만, 도현의 얼굴을 보자 말끝이 흐려졌다. 평소보다 십 분이나 일찍 넥타이를 맨 남자는 식탁 옆을 서성이는 동안 벌써 세 번째로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사흘.파리에서 브뤼셀까지 열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닿을 거리였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는 것도 아니고, 회의가 끝나면 정확히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데도 함께 살기 시작한 뒤 처음 맞는 떨어진 밤이라 그런지 두 사람 모두 지나치게 침착한 척하고 있었다.소율은 서류철을 캐리어 위에 올려놓고 도현 앞으로 다가갔다."정말 안 따라올 거예요?"도현의 손이 멈췄다."따라오지 말라며.""확인하는 거예요. 호텔처럼 우연히 나타날까 봐.""회의장 근처에 급한 일정은 없어.""근처가 아니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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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한소율 팀장][현재 정상 운행 중입니다. 도착 후 현지 차량 탑승 시 보고드리겠습니다.]답장을 보낸 뒤 노트북을 펼치려는데 새로운 알림이 떴다. 이번에는 두 사람만 쓰는 개인 메신저였다.[차도현][아침 거의 안 먹었잖아. 열차에서 뭐라도 먹어.]소율은 창가에 놓인 작은 샌드위치를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한소율][출장 관리 대상의 성실한 식사 보고입니다.][차도현][커피만 마시지 말고 전부 먹어.][한소율][업무 중에는 업무만 하기로 했는데요.]한동안 답이 없었다.소율은 이제 포기했나 싶어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도착한 사진에는 파리 지사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규정집이 찍혀 있었다. 그 아래 도현의 짧은 문장이 붙었다.[출장자의 식사 확인을 금지하는 조항을 찾는 중이야.]소율은 결국 소리 내 웃었다. 옆자리 승객이 힐끗 바라보자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웃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브뤼셀 도착 후 일정은 빠르게 흘러갔다.현지 담당자가 준비한 차량으로 호텔에 짐을 맡긴 소율은 곧장 유럽 유통망 공동회의가 열리는 행사장으로 이동했다. 첫날은 각 기업 대표들이 본회의 의제를 조정하는 실무 회의였다. 총파업으로 멈췄던 물류를 정상화한 뒤, 같은 사태가 반복될 경우 어떤 기준으로 인력과 재고를 배분할지가 핵심이었다.등록대 앞에서 출입증을 받던 소율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한 팀장님. 무사히 도착하셨군요."루시앙 마르소였다.그는 벨루아 그룹의 짙은 자주색 명찰을 목에 걸고 있었다. 호텔 라운지에서의 스카우트 제안은 이미 공식적으로 끝난 만큼,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업 파트너의 거리에서 악수했다."네. 루시앙 씨도 대표단과 함께 오셨군요.""인력 운용 의제가 포함됐으니 제가 빠질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경쟁사가 아니라 같은 문제를 해결할 동료로 대해주시겠습니까?""의견이 같을 때만요."소율의 단호한 대답에 루시앙이 기분 좋게 웃었다."역시 쉽지 않군요."실무 회의가 시작되자 그의 말은 곧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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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태성의 제안을 내일 본회의 초안으로 올리겠습니다. 오늘 안으로 지표 산식과 위원회 구성을 정리해 주실 수 있습니까?""네. 각 기업의 의견을 받아 수정안을 제출하겠습니다."소율은 짧게 답했지만 테이블 아래의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차도현의 이름도, 그의 직책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태성을 대표해 앉은 사람은 한소율이었고, 방금 막힌 회의를 움직인 사람도 한소율이었다.그 사실이 벅차오르는 순간, 테이블 위의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차도현 본부장][실무 회의 종료 예정 시간이 지났습니다. 일정 변경 여부만 회신 바랍니다.]소율은 화면을 내려다보다 일부러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정확히 칠 분 뒤, 수정안 작성에 필요한 자료를 모두 받은 다음에야 답장을 보냈다.[한소율 팀장][합의안 작성으로 일정이 한 시간 연장됐습니다. 업무 종료 후 결과 보고드리겠습니다.]같은 시각, 파리 지사 대회의실.도현은 화면에 띄운 월간 실적표를 설명하다가 책상 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알림은 없었다.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북유럽 권역의 운송 단가 상승분은 다음 분기 예산에 반영하십시오. 단, 기존 계약의 자동 연장 조항부터 재검토해야 합니다."쥘리앙이 진지한 얼굴로 메모했다. 그러나 도현이 다음 장을 띄우는 순간, 휴대전화가 진동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화면을 확인하자 그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회의가 끝난 뒤 직원들이 빠져나가고 쥘리앙만 자료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도현이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브뤼셀 쪽에서 연락 온 것 있습니까?""공식 연락은 없습니다.""한 팀장이 따로 요청한 자료도 없고요?""네. 아직은요."쥘리앙은 잠깐 망설이다가 덧붙였다."본부장님.""말하세요.""휴대전화를 너무 자주 뒤집으시면... 배터리보다 책상이 먼저 닳을 것 같습니다."도현의 눈빛이 좀 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쥘리앙 씨.""죄송합니다."쥘리앙은 즉시 노트북을 끌어안고 물러났다. 문을 닫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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