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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14일간의 계약 연애: Chapter 111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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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도현 씨가 주말에 받은 소원 쿠폰 중에 일요일 늦잠 보장권 있었죠?""오늘은 월요일이야.""긴급 확대 적용할게요.""발행자가 마음대로 조건을 바꾸면 어떡해.""환자가 계약서 검토할 정신은 있네요.""그리고 난, 지금 쓸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노트북 돌려줘.""안 돼요."소율은 두 기기를 들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서재의 작은 금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도현은 이불 속에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봤다.인간 AI의 업무 시스템은 오전 여섯 시 사십 분, 한소율이라는 강제 종료 프로그램에 의해 완전히 차단됐다.한 시간 뒤, 펜트하우스를 방문한 의사는 도현의 상태를 살핀 뒤 충분한 수분과 휴식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고열이 지속되거나 상태가 악화되면 곧바로 추가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주의도 덧붙였다.의사가 돌아간 뒤에도 도현은 처방받은 해열제를 한참 내려다봤다."먹어요."소율이 물컵을 내밀었다."빈속이야.""그래서 죽 만들었어요.""당신 오늘 출근해야 하잖아.""오전 반차 냈어요. 오후에는 집에서 처리할 거고요.""나 때문에 일정 바꾸지 마.""도현 씨가 제 브뤼셀 출장 때문에 일정표를 책 한 권처럼 만들어줬던 것 기억 안 나요?""그건 필요한 지원이었어.""저한테도 이게 필요한 지원이에요."소율은 그의 무릎 위에 작은 쟁반을 올렸다. 부드럽게 끓인 흰죽과 물, 약이 놓여 있었다.도현은 숟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입맛 없어.""세 숟갈만 먹어요.""두 숟갈.""...다섯 숟갈로 올릴까요?"도현은 말없이 죽을 한 숟갈 떠먹었다.평소의 차도현이라면 아픈 기색을 숨긴 채 혼자 해결했을 것이다. 누군가 자신 때문에 일정을 바꾸거나 걱정하는 상황 자체를 비효율이라 여겼을 테니까.하지만 오늘은 도망칠 노트북도 없고, 자신보다 고집 센 간병인이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겨우 반 그릇을 먹고 약까지 삼킨 뒤, 도현은 다시 베개에 기대었다. 소율은 그의 이마에 미지근한 수건을 올리고 쟁반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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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한소율 없으면...""네?""본부장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도현이 낮게 중얼거렸다."태성 지분도, 지금 자리도, 아무것도 필요 없어. 당신 없으면 다 쓸모없어."소율은 눈을 크게 떴다.이 정도면 단순한 잠꼬대가 아니었다. 평소라면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을 문장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도현 씨, 방금 한 말 기억해요?""난... 당신만 있으면 돼."대답이 완전히 엇나갔다.소율은 잠시 망설이다 침대 옆에 놓인 자신의 휴대전화를 집었다. 훗날 아픈 것을 숨기지 못하게 할 증거가 하나쯤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녹음 버튼을 누르자 붉은 표시가 켜졌다."자~ 환자분, 현재 상태를 말씀해 보세요.""더워.""또요?""머리 아파.""그런데도 출근하려 했어요?""보고 받아야 하니까.""앞으로도 열이 39도인데 출근할 거예요?"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안 해.""왜요?""당신이 화내."소율은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제가 안 화내면요?""그래도 안 해. 당신이... 걱정하니까."열에 취한 상태에서도 답의 중심은 소율이었다."한소율은 어떤 사람이에요?""내 사람.""그게 다예요?""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도현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내가 삼 년이나 기다리게 해서, 평생 갚아도 부족한 사람."소율은 더 묻지 못했다.장난으로 시작한 녹음에 예상보다 깊은 진심이 담겼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도현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이제 그만 말하고 자요.""가지 마.""안 가요.""약속해.""약속할게요."도현은 그 말을 들은 뒤에야 천천히 잠들었다.소율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비어있는 물컵. 먹다 남은 식은 죽. 그외 정리할 것들이 있었지만 괜찮았다. 그의 손에 힘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맞잡은 채 곁을 지켰다.오후가 되자 해열제가 듣기 시작했다.열은 조금씩 내려갔고, 도현은 몇 시간 깊이 잠들었다. 소율은 침실 한쪽에 작은 업무 공간을 만들어 조용히 메일을 처리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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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환자분, 협상은 침대에서 하세요.""그 파일부터 삭제해.""조건이 있어요.""말해.""앞으로 아프면 숨기지 않기. 열이 나거나 평소와 다르게 몸이 안 좋으면 저와 회사에 먼저 알리기. 의사가 쉬라고 하면 노트북부터 찾지 않기."도현이 인상을 썼다."범위가 너무 넓어. 단순 피로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어.""그 단순 피로가 어제 39.1도였어요.""이번에는 예외적으로..."소율이 재생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휴대전화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꺼. 약속할게.""정말요?""아프면 숨기지 않고 먼저 말하겠어. 의사가 쉬라고 하면 따르고. 됐지?""회사에도요?""업무에 지장이 있는 상태면 비서실에 알릴게."소율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삭제..."그녀가 화면을 누르려는 순간 도현이 손목을 잡았다."자, 잠깐.""왜요?""정말 삭제할 거야?"이번에는 소율이 의아해졌다."도현 씨가 해달라면서요."도현은 시선을 피했다. 귓바퀴가 서서히 붉어졌다."당신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좋아하죠. 평소에는 마음속에만 넣어두는 말을 전부 들었으니까요."소율은 휴대전화를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놀리려고만 녹음한 것 아니에요. 도현 씨가 아직도 그날을 무서워하는지 몰랐어요. 이걸 들으면 다음에는 혼자 불안을 참게 두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도현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결국 낮게 말했다."외부에만 안 나가면 돼.""보관해도 돼요?""당신만 듣는 조건으로.""쥘리앙에게도 안 들려줄게요.""당연하지.""회장님께도요.""절.대. 안 돼."도현은 지나치게 진지했다."유럽 총괄 본부장이 연인 없이는 직책도 지분도 필요 없다고 한 음성이 유출되면 태성그룹 주가가 흔들릴 수 있어."소율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회사 주가까지 책임지는 흑역사네요.""웃을 일이 아니야. 경영진의 판단 능력을 의심받을 수 있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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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파리의 가을비는 사람의 계획을 존중하지 않았다.오후부터 가늘게 내리던 비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유리창을 두드릴 만큼 굵어졌다. 빗물에 젖은 도로 위로 자동차 불빛이 길게 번졌고, 센강 너머의 건물들은 회색 장막 뒤로 흐릿하게 잠겼다.한소율은 펜트하우스 거실 창가에 서서 휴대전화의 날씨 화면을 노려봤다.시간대별 예보에는 자정까지 비구름 표시가 빼곡했다."야외 상영은 취소됐대요."소파에 앉아 있던 차도현이 태블릿에서 시선을 들었다. 환절기 고열로 쓰러진 지 며칠이 지났지만, 목소리 끝에는 아직 희미한 잠김이 남아 있었다."실내 일정으로 바꾸면 돼. 근처에 예약 가능한 레스토랑을 확인해 볼게.""안 돼요.""왜?""의사가 이번 주까지는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비 맞으면서 돌아다니는 것도 무리예요.""차로 이동하면 비 안 맞아.""차에서 레스토랑 입구까지 순간 이동할 거예요?"도현은 반박할 말을 찾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소율은 곧장 그의 손에서 태블릿을 빼앗았다."또 압수야?""이번에는 업무 기기도 아니잖아요.""데이트 대안을 찾는 중이었어.""집에서 놀면 되죠.""그건 데이트가 아니라 일상이잖아.""저랑 보내는 일상은 데이트로 인정 안 해요?"말이 끝나자마자 도현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대체 일정을 계산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그런 뜻은 아니야.""그럼요?""당신이 기대한 일정이 취소됐으니까 보상해야 한다는 뜻이지.""보상은 이미 받았는데요."소율이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화면에는 며칠 전 새로 이름을 붙인 음성 파일이 떠 있었다.[보물 1호_외부 유출 금지]도현이 즉시 손을 뻗었다. 소율은 웃으며 휴대전화를 등 뒤로 감췄다."그건 보상이 아니라 비공개 의료 기록이야.""환자가 자발적으로 보관에 동의했어요.""열이 완전히 안 내린 상태에서 한 동의는 재검토할 필요가 있어.""그럼 지금 다시 물어볼게요. 삭제할까요?"도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낮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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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다음 사진에는 시장에서 산 앞치마를 두른 도현이 담겨 있었다. 검은 셔츠 위에 연한 노란색 앞치마를 걸친 모습이 지나치게 진지해서, 오히려 우스웠다."이건 외부 유출 금지야.""태성그룹 주가가 떨어져요?""경영진의 이미지 관리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저는 반대인데요. 인간적인 면모가 공개되면 오를 것 같아요.""내 발열 고백 때도 같은 말을 했지.""기억력 완전히 돌아왔네요.""당신이 매일 놀리니까 잊을 수가 없어."소율은 사진을 두 묶음으로 나눴다.하나는 평범한 추억, 다른 하나는 외부 유출 금지였다. 두 번째 묶음이 훨씬 두꺼웠다."이상하네요. 도현 씨 사진은 대부분 기밀이에요.""내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분류야.""기밀 보유자는 저예요.""보안 감사가 필요하겠군.""감사하려면 영장이 있어야죠.""우리 집인데 무슨 영장이 필요해?""제 추억 구역에는 필요해요. 흥."소율은 나무 상자를 끌어안았다. 도현이 상자를 가져가려 다가오자 그녀는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소파에 등이 닿으면서 더는 피할 곳이 없어졌다.도현은 한 손으로 소파 등받이를 짚고, 다른 손으로 상자 가장자리를 잡았다. 가까워진 얼굴에 소율의 웃음이 잠깐 멎었다."압수한 기기를 금고에 넣는 사람한테 보안을 가르치려고?""그건 환자 보호 조치였어요.""이건 명예 보호 조치야.""싫어요.""그럼 협상해야겠네."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소율은 상자를 더 꼭 안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조건이 뭔데요?""내가 삭제하라고 한 사진은 절대 외부에 보여주지 않기.""이미 약속했잖아요.""그리고 나한테도 사본 주기."뜻밖의 조건이었다."도현 씨도 갖고 싶어요?""당신만 과거를 독점하는 건 불공평하니까."소율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좋아요. 대신 이 사진도 보물 1호로 지정해요.""당신이 찍힌 사진은 전부 그래."도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며칠 전과 똑같은 말이었는데도 이번에는 녹음할 틈조차 없었다. 소율은 얼굴에 번지는 열을 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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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당신이 매년 같은 계절을 함께 보내자고 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어. 일 년 뒤를 확인하고 나면 그다음은?""또 쓰면 되죠.""그다음 해에도?""네. 우리가 원하는 만큼 계속.""만료일 없이?""그 표현 참 좋아하네요."소율이 웃으며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편지는 계약서가 아니에요. 미래를 한 가지 모양으로 묶어두는 것도 아니고요. 그때 우리가 다른 꿈을 꾸고 있으면, 같이 읽고 다시 이야기하면 돼요.""당신이 원하는 미래가 나와 다른 방향이면?""혼자 결론 내리고 떠나지 않을게요. 도현 씨도 저 대신 결정하지 말고 먼저 물어봐요."도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소율은 그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을 끼웠다."기다리는 게 무서울 수 있다는 것, 이제 알아요. 그러니까 다음에는 혼자 견디게 두지 않을게요.""다음 같은 건 없어야지.""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한 번도 불안하지 않겠어요.""당신이 떠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뜻이야.""저도 도현 씨가 아프지 않은 척하며 혼자 버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아픈 척을 안 한 게 아니라 아픈 걸 숨긴 거야.""그게 더 나빠요."도현은 반박하지 못했다.소율은 거실 수납장 안에서 편지지 두 장과 봉투를 꺼냈다. 펜은 그녀가 삼 년 동안 간직해 온 낡은 만년필이었다. 주말에 도현이 선물한 딥블루 잉크가 그 안에 채워져 있었다."한 자루뿐인데 어떻게 써?""번갈아 쓰면 되죠.""그러면 기다리는 사람이 보게 돼.""서재하고 거실에서 따로 써요. 먼저 쓰고 싶은 사람?"도현이 손을 내밀었다."내가 먼저 쓸게.""왜요?""당신이 먼저 쓰면 기다리면서 내용 추측할 것 같으니까.""도현 씨가 더 궁금해할 것 같은데요.""나는 안 봐.""자신 있어요?""계약 종료 때도 당신 서류를 끝까지 읽고 나서 찾아갔어.""그건 자랑이 아닌 것 같은데.""이번에는 봉투를 뜯지 않겠다는 뜻이야."소율은 펜을 건넸다.도현은 편지지와 봉투를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소율은 거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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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안쪽에는 아직 아무것도 넣지 않은 얕은 서랍이 하나 있었다."여기 보관하자.""왜 비어 있어요?""중요한 걸 넣으려고 남겨둔 곳이야.""뭘 넣으려고 했는데요?"도현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아직... 정하지 않았어."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물건은 정해졌지만, 그 물건이 소율에게 받아들여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까.소율은 의심 없이 자신의 봉투를 먼저 넣었다. 도현도 그 옆에 편지를 나란히 놓았다."자물쇠는요?""필요 없어.""제가 몰래 보면 어떡하려고요?""당신은 안 봐.""어떻게 확신해요?""내가 준비한 답을 먼저 확인할 수 있었는데도 기다린 사람이니까."소율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도현은 더 설명하지 않고 서랍을 닫았다."그럼 도현 씨도 절대 보면 안 돼요.""안 봐.""궁금해도요?""그래. 당신이 직접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게."소율은 닫힌 서랍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며칠 전까지 기다림은 도현에게 공포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제 그는 같은 말을 전보다 편안한 얼굴로 하고 있었다.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두려움을 이유로 그녀의 선택을 빼앗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 안에 있었다."잘 기다리면 포상 있어요.""무슨 포상?""편지를 봉인했으니까 입맞춤 한 번.""소원 쿠폰 쓰는 거야?""이런 건 기본 계약 사항이에요.""그런 조항은 없었는데.""지금 추가할게요."소율이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도현은 순순히 고개를 숙이면서도 입술이 닿기 직전에 멈췄다."조항 추가는 쌍방 합의가 필요해.""동의 안 해요?""횟수가 부족해.""한 번이면 충분하죠.""누가 결정했지?""제 입술인데 제가... 읍!"말이 끝나기 전에 도현의 입술이 닿았다.처음에는 짧게 약속을 확인하듯 머물렀다. 그러나 소율이 그의 목 뒤로 팔을 두르자 입맞춤은 천천히 깊어졌다. 도현의 손이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고,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던 작은 거리마저 사라졌다.창밖에서는 빗소리가 조금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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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차도현에게 비밀은 어울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숨기는 일에 서툴렀다. 업무상 기밀이라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수천억 원짜리 협상안을 감출 수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그 비밀이 한소율과 관련되는 순간, 인간 AI의 정교한 보안 체계에는 이상할 만큼 많은 틈이 생겼다. 소율은 그 사실을 계약서에 서명한 날짜가 열흘 남짓 앞으로 다가온 월요일 저녁에 처음 확인했다. 오후 7시 40분. 라데팡스 사옥 20층, 유럽 총괄 본부장실. "연말 성과 보상안은 수정한 기준으로 인사위원회에 올리겠습니다. 파업 당시 현장 대응 인력에게는 별도 특별 수당을 책정했고, 법무팀과 노무 담당자도 추가 포상 대상에 포함했습니다." 소율이 태블릿 화면을 넘기며 마지막 보고를 마쳤다. 평소라면 도현은 숫자 하나, 문장 한 줄까지 다시 확인한 뒤 결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의 시선은 보고서보다 책상 위에 뒤집어 놓은 개인 휴대전화로 자꾸만 향했다.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 도현의 손이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화면을 확인한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놀람도 불쾌함도 아니었다. 오래 기다리던 답을 마침내 받은 사람의 눈빛이었다. "한 팀장." 도현이 태블릿 화면을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보고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결재본은 내일 오전에 전달하죠." 소율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지금 퇴근하십니까?" "개인 일정이 생겼습니다." "예정표에는 없던 일정인데요?" "방금... 확정됐습니다." 도현은 재킷을 걸쳐 입고 책상 서랍에서 검은 가죽 서류 봉투를 꺼냈다. 봉투가 완전히 닫혔는지 확인하는 손길이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소율은 태블릿을 가슴에 안은 채 그를 바라봤다. "귀가 차량은 따로 준비할까요?" "그렇게 하죠. 한 팀장은 먼저 들어가십시오. 저녁도 기다리지 말고요." "복귀 예정 시각은요?" "늦어도 열한 시 전에는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정확했다. 문제는 그 정확함 안에 행선지와 목적만 깨끗하게 빠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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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어디 다녀왔어요?"소율이 손끝으로 가루를 떼어내며 물었다.도현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공방.""공방이요?""유럽 지사 성과 감사패 견본을 확인했어."준비된 대답처럼 매끄러웠다.소율은 그 가루를 손가락 끝에 올려놓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감사패 제작은 총무팀 소관 아닌가요?""이번 건은 내가 직접 확인해야 했어.""본부장님이 밤늦게 공방까지 찾아가 금속 가루를 묻혀 와야 할 만큼 중요한 감사패고요?""그래.""누구한테 줄 건데요?""아직 미정이야."감사패를 먼저 만들면서 수상자는 미정이라니.도현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소율에게 거짓말할 때만 논리의 접합부가 눈에 띄게 벌어졌다.그녀는 웃음이 나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완벽주의도 병이네요.""아픈 사람 업무 기기를 금고에 넣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그건 생명 보호였어요.""이건 품질 관리야.""감사패의 생명도 보호했군요."도현은 더 캐묻지 못하게 하려는 듯 상체를 숙여 소율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당신, 지금 나 취조하는 거야?""취조받을 짓을 했어요?""...아니."웃음 섞인 숨이 피부를 스쳤다. 그의 팔이 허리를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하지만 오늘은 더 물어도 대답 안 할 거야.""왜요?""비밀이니까."마침내 도현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왔다.비밀.소율의 심장이 이상하게 한 번 크게 뛰었다.도현은 그녀의 턱을 들어 입술을 맞췄다. 길고 다정한 입맞춤 사이에도 그의 손은 소율의 왼손을 찾아 손가락 마디를 천천히 쓸고 있었다.특히 네 번째 손가락을.얼마 전, 열이 내린 도현은 그 손가락에 자신의 손을 포갠 채 소율의 약속을 녹음했다. 그보다 앞선 주말에는 그녀가 잠든 사이 몰래 치수까지 확인했다.소율은 그 두 장면을 한꺼번에 떠올리지 못했다. 다만 반복되는 손길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느꼈다.입술이 떨어진 뒤에도 도현의 엄지는 네 번째 손가락 밑동에 오래 머물렀다."도현 씨.""왜.""감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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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금요일 밤에는 도현이 서재에서 두 시간 가까이 나오지 않았다.문틈으로 낮은 통화음이 간간이 새어 나왔다."같은 크기로 해야 합니다."잠시 침묵이 이어졌다."누구의 이니셜이 앞서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됩니다. 두 글자의 비중도, 간격도 동일하게 맞추십시오."소율은 거실에서 책을 읽다 말고 서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감사패에 새길 이니셜을 저렇게까지 까다롭게 맞추는 사람이 있을까.통화는 계속됐다."딥블루는 유지합니다. 검은색에 가까워 보이면 의미가 없습니다. 빛 아래에서만 푸르게 드러나는 색이어야 합니다."소율의 시선이 탁자 위 작은 가죽 노트로 향했다.지난 주말 도현이 선물한 딥블루 잉크. 자신이 가장 오래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을 색이라고 고른 바로 그 색이었다.기대가 가슴 안에서 천천히 부풀었다.도현이 서재에서 나오기 전에 소율은 다시 책으로 눈을 내렸다. 같은 줄을 다섯 번째 읽고 있었지만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잠시 뒤 문이 열렸다."안 자고 뭐 해?""책 읽어요."도현은 책 표지를 확인하더니 눈썹을 조금 올렸다."그 책, 거꾸로 들었어."소율이 손을 내려다봤다.책 표지의 인물들이 정말로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새로운 독서법이에요.""내용은 들어와?""피가 머리로 쏠리는 느낌은 잘 전달되네요."도현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뭘 들었어?""아무것도요.""그런 얼굴이 아닌데.""감사패가 딥블루색이고, 이니셜 두 개가 아주 공평하게 들어간다는 것 정도요."도현의 미소가 사라졌다."문이 닫혀 있었는데.""도현 씨 목소리가 낮아도 집은 조용하거든요.""서재 방음 공사를 해야겠군.""감사패 하나 때문에 집 공사까지 하려고요?""필요하면.""그럼 더 수상해지는데요."도현은 소율 앞까지 다가와 책을 바로 돌려주었다."잊어.""뭘요? 같은 크기의 이니셜? 딥블루?""전부.""비밀 유지 비용은요?""원하는 게 뭐야?"소율은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가리켰다."선불로 받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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