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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뒤늦게 찾아온 나의 봄: Chapter 1 - Chapter 10

19 Chapters

제1장

임서아가 차도진을 위해 명예마저 버리고 삼 년을 견뎌왔다는 사실은 경성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감히 보잘것없는 계집종 하나가 제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하는데, 그녀가 이 수모를 순순히 참아낼 리 없다고 다들 믿곤 했다.그렇기에 차도진이 중매쟁이를 이끌고 임서아의 처소 문 앞에 나타난 날,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모두가 임서아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그를 책망하며 난동을 부리길 기다렸다.차도진조차 어두운 안색으로 연희를 제 뒤로 감쌌다."서아야, 네가 나를 삼 년 동안 돌봐 준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의 일이다. 은혜를 입었다고 내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할 수는 없는 법. 그러니 부디 연희를 괴롭히지 말아다오."하지만 임서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혼수 목록이 적힌 서찰을 꺼내 내밀었다."세자 저하께서 오해하신 듯합니다. 이것은 제가 연희를 위해 준비한 혼수입니다. 어릴 때부터 제 곁을 지켜온 아이라 자매나 다름없지요. 제 작은 성의라 생각하시고, 부디 앞으로 연희를 진심으로 대해 주십시오."차도진은 두툼한 혼수 목록을 내려다보았다.눈길에 한순간 경악한 기색이 스쳤다.그때, 그의 뒤에 선 구경꾼들 사이에서 요란한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저 임서아, 이번엔 무슨 꿍꿍이지? 예전에 참판 댁 아가씨가 세자 저하와 말 몇 마디 나누었다고 그 자리에서 머리 장식을 낚아채 버리지 않았나.""내 말이! 예전 등불 축제 때도 어떤 귀족 가문 아가씨가 세자 저하께 유등을 건넸을 때, 모든 유등을 전부 호수에 던져 버렸던 사람이라고. 그런데 저하께서 맞아들이려는 몸종에게 혼수를 준비해 준다고?"귀를 찌르는 험담에도 임서아의 낮빛은 일절 변함이 없었다."어멈."곁에 서 있던 송씨 어멈이 정교하게 조각된 목함을 정성스레 받쳐 들고 다가왔다.임서아가 손을 뻗어 그것을 열었다.그 안에는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혼약서가 놓여 있었다.이윽고, 차도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것은 제 할아버지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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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송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아가씨, 정말로 그 정략혼을 받아들이시려는 겁니까? 심씨 가문의 큰도련님과는 어릴 적 잠시 알던 사이일 뿐, 보지 못하신 지 수십 년입니다! 들리는 소문에는 성품이 지독히 포악하고 수단 또한 잔혹하기 그지없다고 합니다. 숙부님께서 아가씨를 보내시려는 것 역시 그저 조정에서 임씨 가문의 입지를 굳히려는 타산일 뿐입니다. 그런 곳으로 시집을 가시면 모진 고초를 겪으실 게 눈에 선합니다."임서아는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어멈, 더는 말하지 마세요.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송씨는 차마 더 말리지 못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정중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방을 나섰다.한편, 홀로 남은 임서아는 창가에 앉아 일렁이는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세상 사람들은 심씨 가문의 큰도련님, 심태건을 두고 피도 눈물도 없는 자라 했다.그에게 노여움을 산 자는 하나같이 가문이 풍비박산 났다고...하지만 임서아는 알고 있었다.그것은 쇠락해 가는 심씨 가문을 홀로 지켜내기 위해, 그가 어쩔 수 없이 쓴 가면일 뿐이라는 것을.전생의 그녀 역시 소문을 철석같이 믿었었다.훗날 차도진에 의해 냉궁이나 다름없는 후원에 갇히기 전까지는.하인들조차 임서아가 총애를 잃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들여오는 반상에 손을 대는가 하면 다달이 지급되던 생활비마저 야박하게 깎아 버렸다. 그렇게 몇 년을 모진 곤욕 속에 보내며, 그녀는 온갖 고초와 서러움을 모조리 삼켜 내야만 했다.어디서 소식을 들은 것일까.심태건은 조정에서 번번이 차도진을 집요하게 몰아붙였다.숨통을 조여 오는 그의 매서운 압박 끝에, 마침내 그녀를 반평생 가두었던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하지만 그가 찾아냈을 때, 임서아는 이미 기름이 다한 등불처럼 스러져 가고 있었다.의식이 아득해지던 순간, 그녀는 그가 괴로운 듯 뱉어내는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이리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용기를 내보는 것이었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도진에게서 너를 빼앗아 왔을 텐데. 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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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차디찬 물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싸 안았다.임서아는 본능적으로 숨을 참아내며, 뭍을 향해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하지만 연희가 그녀의 손목을 죽기 살기로 움켜쥐고 있어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 엉킨 채 연못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차디찬 물이 코 안으로 들어차자 매캐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까마득해졌다.물 밖에서 튀어나오는 비명과 웅성거림이 물속을 뚫고 먹먹하게 전해졌다."거기 누구 없소! 사람이 물에 빠졌소!"그때, 한 사내가 사람들을 헤치고 망설임 없이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첨벙!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차도진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연희의 허리를 낚아채 품에 안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물가로 헤엄쳐 갔다.순간 멍하니 굳어 버린 탓에, 차가운 물이 왈칵 밀려들어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몇 번을 허우적거린 뒤에야 겨우 몸을 추스른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차도진의 서슬 퍼런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에 꽂혀 들었다."임서아! 네 정녕 이토록 질투에 눈이 멀어 연희 하나 품어주지 못하는 것이냐? 내가 이미 너에게 평처의 자리를 내주겠다고 했거늘, 대체 왜 연희를 이토록 몰아세워 물에 빠뜨린 거냐? 연희가 물을 두려워하는 걸 알면서!"차가운 물에 떠 있는 임서아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입술을 달싹였다.하지만 연희가 먼저 붉어진 눈시울로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아가씨 탓이 아닙니다... 제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아가씨까지 물에 빠지시게 한 것입니다..."차도진이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너는 어찌 아직도 저 여자를 두둔하는 것이냐? 지금도 너를 이따위로 대하는데, 나중에 한집에 들어살게 되면 아예 네 머리꼭대기에 앉으려 들지 않겠느냐?"그가 다시 임서아를 차갑게 노려보았다."연희를 물에 빠뜨리는 게 그리도 좋더냐? 그렇다면 너도 그 안에서 어디 실컷 버텨 보아라.""여봐라! 저 여자를 똑똑히 감시해라! 내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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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임서아가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차도진은 사람을 시켜 끊임없이 귀한 물품들을 보내왔다.지난날 임서아가 서운해할 때마다 그는 늘 이런 방식으로 마음을 달래주곤 했었다.하지만 상자에 가득 담긴 보석 장신구들을 바라보는 임서아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무심하게 손짓하며 지시했다."어멈, 전부 창고에 넣어 두세요."임서아는 침상에서 일주일을 더 누워 지낸 뒤에야 비로소 기력을 회복했다.그 며칠 동안 송씨의 입을 통해 바깥 소문을 적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상춘연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야기꾼들의 입을 타고 퍼져 나가 경성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상전의 혼약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주인을 물에 빠뜨리기까지 한, 은혜도 모르는 계집.온 경성 사람들이 연희를 향해 비난을 쏟아냈다.차도진이 즉각 입단속에 나섰지만, 이미 퍼진 소문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송씨는 바깥 소식을 전할 때마다 분을 참지 못했다."아가씨께서 저 천한 계집에게 얼마나 잘해주셨습니까! 먹을 것, 입을 것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챙겨주셨는데, 다른 집 몸종 중에 그 아이만큼 편하게 지낸 년이 어디 있다고요!""지금 바깥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도 다 제 업보입니다!"투덜거리는 송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임서아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며칠 후, 화창한 날씨에 송씨는 뜰 안에 안락의자를 놓아주고 임서아를 부축해 햇볕을 쬐게 했다.두 사람이 뜰에서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던 그때.쿵! 쿵! 쿵!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송씨가 문을 열러 가기도 전에, 거센 힘에 눌린 대문이 덜컥 열렸다.차도진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채 임서아의 앞까지 저벅저벅 걸어와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바깥에 퍼진 그 해괴한 소문들, 네가 사람을 시켜 퍼뜨린 것이냐! 연희가 그 소문 때문에 자책하며 보름 내내 눈물로 지샜다! 오늘 너에게 사죄할 선물을 사겠다며 밖으로 나섰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져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너는 한가롭게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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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매가 중하게 내리꽂혔다.순간, 등 뒤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터져 나왔다.임서아는 이를 악물며 신음을 억눌렀다.그 순간, 송씨가 몸을 날렸다.온몸으로 임서아를 덮쳐 누르며 매질을 대신 맞은 것이다.곧이어 둔탁한 굉음과 함께 매질이 연이어 떨어졌다.매가 떨어질 때마다 임서아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꺼져 내렸다.눈물이 순식간에 시야를 가렸다."어멈, 어서 일어나세요! 연세도 있으신데 이러다 정말 큰일 납니다!"송씨는 임서아를 죽기 살기로 감싸 안은 채, 가빠지는 숨을 헐떡였다."아가씨, 괜찮습니다... 이 늙은 몸뚱이는 살집이 두꺼워 이 정도 매쯤은 견딜 수 있습니다..."곤장 스무 대가 모두 끝나자 호위들이 다가와 임서아의 밧줄을 풀었다.차도진은 진작에 연희를 끌어안고 처소를 벗어난 뒤였다.이윽고 임서아는 손발을 버둥거리며 기어 올라가 송씨를 끌어안았다.송씨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희미해져 가는 숨길 속에서도 그녀는 도리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가씨, 울지 마십시오... 저는 하나도 안 아픕니다...""말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 의원을 모셔 올 테니까..."임서아의 눈물이 뺨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황급히 고개를 돌린 순간, 약상을 든 어의 몇 명이 다급한 걸음으로 뜰을 들어서고 있었다.잠시 멍해졌던 임서아는 이내 어의들과 함께 송씨를 방 안으로 옮겼다.어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그녀는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한참 뒤, 어의가 침을 거두고 약상을 정돈하며 일어섰다."하반신의 상처가 매우 엄중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임서아는 물속에서 겨우 건져 올려진 사람처럼 턱 가빠진 숨을 내뱉었다."...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갈라터진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어의는 손사래를 쳤다."서아 아가씨, 당치 않으십니다. 사실 세자 저하께서 저희를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 벌어진 일은 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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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임서아의 답을 들은 차도진은 미련 없이 수하들을 데리고 돌아섰다.한편, 임서아는 뜰 안에 가득 쌓인 상자들을 바라보다 하인들을 불러 그것들을 모두 곳간으로 옮기라 지시했다.요 며칠 사이 차도진이 사람을 보내 거처를 단장하게 한 덕에, 처소 곳곳에 드리워진 붉은 비단이 혼례의 기운을 풍기며 넘실대고 있었다.그러나 임서아는 그 까닭을 묻지도 않은 채 그저 떠날 채비만을 서둘렀다.곳간에 있던 물건 중 차도진이 보내온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가김없이 집안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그녀는 자신을 수발들던 몸종 둘만을 곁에 남긴 채, 나머지 하인들에게는 모두 노비 문서를 돌려주며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사흘째 되던 날, 차도진이 연희를 데리고 처소를 찾아왔다.그는 적막하리만치 쓸쓸한 뜰 안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네 처소의 하인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임서아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어차피 며칠 더 머물지도 못할 듯하여 돌려보냈습니다."차도진은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깊이 따져 묻지 않았다.이윽고, 그의 시선이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안채로 향했다."내일 연희가 이곳에서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갈 것이다. 저 아이는 아직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으니 안채에 머물게 하거라. 너는 몸이 성하니 건너편 문간방으로 거처를 옮겨도 별 탈 없을 테지."임서아는 잠시 멈칫했다."어멈이 안채에서 요양하는 중이라 거처를 옮기기가 어렵습니다."그때, 연희가 때맞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저하, 굳이 이러실 것 없습니다... 저는 문간방에 머물러도 좋습니다."차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해했다.“너는 정실이다. 정실이 안채가 아닌 문간방에서 가마를 타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 게다가 송씨 어멈은 그저 하인일 뿐인데, 어찌 하인이 안채를 차지하고 주인이 문간방에 머문단 말이냐?"그는 당장이라도 사람을 불러 송씨를 옮기려 손을 휘둘렀다.그때, 임서아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세자 저하, 저하께서 수고스럽게 직접 움직이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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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거리 한복판, 붉은 혼례복을 입은 차도진이 말 위에서 위풍당당하게 행렬을 이끌었다. 여덟 명의 하인이 짊어진 거대한 혼례 가마가 뒤를 잇는 가운데, 길 양옆은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마침내 가마 행렬이 저택 문 앞에 멈춰 섰다.차도진은 말에서 번쩍 내려 성큼성큼 안채로 향했다.잠시 후, 문이 열리자 화려한 붉은 혼례복을 입은 연희가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왔다.금실로 새겨진 봉황 문양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순간, 차도진의 입꼬리가 한껏 말려 올라갔다.그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연희를 단번에 번쩍 안아 들었다.몸을 돌리는 순간, 차도진의 시선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문간방에 닿았다.자신이 배정한 하인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만족스럽게 시선을 거두었다.차도진은 웃음을 지으며 연희를 꽃가마에 태웠다.이윽고 요란한 풍악 소리와 함께 행렬이 세자부로 향했다.세자부에 도착한 차도진은 연희를 조심스레 부축해 화로를 넘게 한 뒤 정전으로 이끌었다.예관의 드높은 목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천지신명께 절, 부모님께 절, 부부 맞절!"의식이 차례로 진행되는 동안, 너울 아래 숨겨진 연희의 얼굴이 불그스레 물들어 갔다.그러나 평처가 들어와 폐백을 드릴 순서가 되었음에도, 임서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시간이 흐를수록 빈객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번져 나갔다."아니, 서아 아가씨는 왜 아직도 안 나오시는 건가?""아무래도 원치 않으시는 거겠지. 명색이 태부의 하나뿐인 적손녀이신데, 몸종 출신과 동급인 평처로 들어와 폐백까지 올리라니. 어느 누가 받아들이겠나?""내 말이! 세자 저하를 위해 삼 년이나 병시중을 드셨는데, 결국 제 몸종한테 자리를 빼앗긴 꼴이 아닌가. 쯧쯧..."수군거리는 비아냥이 차도진의 귓가에 토씨 하나 빠짐없이 꽂혔다.상좌에 앉아 있던 차도진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 갔다.그가 매서운 눈빛으로 좌중을 훑어내리자, 사람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그때, 임서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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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차도진은 인내심을 갖고 연희를 다정히 다독여 잠에 들게 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그 역시 겨우 눈꺼풀을 내렸으나, 이내 기이한 꿈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꿈속의 임서아는 그가 의식을 되찾고 연희를 아내로 맞아들이겠노라 선언했을 때, 지금처럼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도리어 지난날의 은혜를 앞세워 그를 옥죄며 혼례를 강행했던 것이다.그녀는 흐드러진 붉은 혼례복을 입은 채 그와 맞절을 올리고 있었다.자태가 어찌나 고운지 그 혼례복은 오직 그녀만을 위해 존재하듯 했다.허나 그녀가 홱 돌아서는 순간, 그 아리따운 얼굴은 순식간에 연희의 모습으로 바뀌고 말았다.임서아는 문턱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차도진을 바라보더니, 미련조차 없다는 듯 돌아서 멀어졌다.이윽고 차도진은 헉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 고였다.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숨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그는 곁에서 깊이 잠든 연희를 슬쩍 바라본 뒤 다시 몸을 뉘였지만, 도무지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눈만 감으면 꿈속에서 떠나가던 임서아의 뒷모습이 자꾸만 맴돌아 가슴이 옥죄어 왔다.이튿날.날이 밝자 차도진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결국 곁에 있던 연희를 깨우고 말았다.그녀가 가볍게 눈을 비비며 그에게 안겨 왔다."세자 저하, 오늘은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날인데... 무서워서 그러니 저와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차도진은 연희의 손등을 다정하게 다독였다."어머님은 자애로운 분이시니 너를 난처하게 하지 않으실 게다. 궁에 급한 일이 있으니 다녀와서 함께 있어 주마."말을 마친 그는 서둘러 방을 나와 수하들을 데리고 임서아의 거처로 향했다.거처의 문을 열자, 어제 올린 혼례의 흔적들이 두 눈에 안겨왔다.처마 아래 걸린 붉은 비단, 바닥에 흐트러진 폭죽 잔해... 하지만 이를 치우는 이 하나 없었다.그가 발걸음을 옮겨 문간방 문을 밀어젖혔다. 텅 빈 방 안. 침상 위 이불만 정갈하게 개어져 있을 뿐 사람의 온기라곤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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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차도진은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어 손을 뻗어 문을 쾅 밀어젖혔다.갑작스러운 소란에 연희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차도진의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짙은 당혹감이 스쳤다. 하지만 연희는 이내 연약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싹 바꾸며 입을 열었다."세자 저하? 입궐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어찌 이리 일찍 돌아오셨습니까..."차도진은 차갑게 얼어붙은 눈으로 그녀의 손길을 홱 피해 버렸다.연희의 연기가 얼마나 어설펐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이런 뻔한 가식에 이제껏 속아 넘어갔다니.'그는 연희의 얼굴에 어색하게 굳어가는 미소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방금 문밖에서 네가 한 말,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들었다."순간, 연희의 몸이 돌처럼 굳어져 버렸다.낯빛에서 핏기가 싹 가시더니,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저하... 소인은 그저 저하를 너무도 연모하여 저하를 잃을까 두려운 마음에 그만…”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채 애처롭게 울먹였다.예전이었더라면 차도진은 진작 애가 타 그녀를 품에 안고 달랬을 터였다.하지만 지금 그의 가슴속은 서늘할 정도로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차도진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이 계집을 끌고 가서 냉궁에 가두어라. 내 명 없이는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차도진은 뒤에서 울부짖는 연희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발길을 돌렸다.그리고 집사를 불러 명령했다."말을 준비하거라. 강남으로 갈 것이다."차도진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쉬지 않고 달려 강남에 도착했다. 그러곤 지체없이 임서아의 숙부, 임정철의 저택으로 향했다.대문 앞에서 청첩을 전달하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그를 안으로 안내하는 하인이 나왔다.같은 시각, 임정철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그때, 차도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숙부님, 서아를 데리러 왔습니다."그 말에 임정철은 눈꺼풀을 스르르 들어 올리더니 실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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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차도진이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했다."숙부님, 제발 서아를 한 번만 만나게 해주십시오..."임정철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저하, 서아는 이곳에 없으니 이만 돌아가시지요.”차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울부짖었다."제게 거짓을 고하려 하지 마십시오! 서아는 분명 강남으로 내려왔는데, 이곳이 아니면 대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한편, 임정철은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이윽고 곁에 서 있던 집사가 앞으로 다가와 얌전히 허리를 숙였다."세자 저하,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차도진은 눈을 감아 버린 임정철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하지만 끝내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경성으로 돌아온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냉궁으로 향했다.그때, 그를 발견하자마자 연희가 눈물을 쏟으며 와락 달려들었다."저하! 드디어 저를 보러 와 주셨군요! 저하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너무 가혹하옵니다, 다시는 여기 머물고 싶지 않사옵니다!”차도진은 달려드는 그녀를 차갑게 발로 쳐내었다. 이윽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찔렀다."내 오늘 이곳에 걸음한 것은, 확실히 너를 데리고 나가기 위함이다."연희의 눈동자에 막 기쁨이 차오르던 그 순간이었다.차도진이 손을 휘두르자 뒤따라온 수하들이 다가가 그녀의 양팔을 다짜고짜 옭아매었다.이윽고, 그가 차갑게 명령했다."이 자를 교방사로 보내거라."교방사.죄인을 처벌하는 곳으로 온갖 가혹한 형벌이 난무해 한번 발을 들인 자는 성한 몸으로 살아 나올 수 없었다.연희의 얼굴에 떠올랐던 기쁨이 순식간에 싹 가셨다.그녀는 죽기 살기로 몸부림치며 차도진의 다리를 꽉 껴안았다. 그러곤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댔다."싫사옵니다! 제발 그곳만은 안 됩니다! 그곳으로 가면 소인은 정녕 죽고 말 것입니다!”차도진은 발치에 엎드린 그녀를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손 치워라. 그렇지 않으면 네 손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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