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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찾아온 나의 봄
뒤늦게 찾아온 나의 봄
Author: 강남

제1장

Author: 강남
임서아가 차도진을 위해 명예마저 버리고 삼 년을 견뎌왔다는 사실은 경성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감히 보잘것없는 계집종 하나가 제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하는데, 그녀가 이 수모를 순순히 참아낼 리 없다고 다들 믿곤 했다.

그렇기에 차도진이 중매쟁이를 이끌고 임서아의 처소 문 앞에 나타난 날,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모두가 임서아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그를 책망하며 난동을 부리길 기다렸다.

차도진조차 어두운 안색으로 연희를 제 뒤로 감쌌다.

"서아야, 네가 나를 삼 년 동안 돌봐 준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의 일이다. 은혜를 입었다고 내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할 수는 없는 법. 그러니 부디 연희를 괴롭히지 말아다오."

하지만 임서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혼수 목록이 적힌 서찰을 꺼내 내밀었다.

"세자 저하께서 오해하신 듯합니다. 이것은 제가 연희를 위해 준비한 혼수입니다. 어릴 때부터 제 곁을 지켜온 아이라 자매나 다름없지요. 제 작은 성의라 생각하시고, 부디 앞으로 연희를 진심으로 대해 주십시오."

차도진은 두툼한 혼수 목록을 내려다보았다.

눈길에 한순간 경악한 기색이 스쳤다.

그때, 그의 뒤에 선 구경꾼들 사이에서 요란한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저 임서아, 이번엔 무슨 꿍꿍이지? 예전에 참판 댁 아가씨가 세자 저하와 말 몇 마디 나누었다고 그 자리에서 머리 장식을 낚아채 버리지 않았나."

"내 말이! 예전 등불 축제 때도 어떤 귀족 가문 아가씨가 세자 저하께 유등을 건넸을 때, 모든 유등을 전부 호수에 던져 버렸던 사람이라고. 그런데 저하께서 맞아들이려는 몸종에게 혼수를 준비해 준다고?"

귀를 찌르는 험담에도 임서아의 낮빛은 일절 변함이 없었다.

"어멈."

곁에 서 있던 송씨 어멈이 정교하게 조각된 목함을 정성스레 받쳐 들고 다가왔다.

임서아가 손을 뻗어 그것을 열었다.

그 안에는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혼약서가 놓여 있었다.

이윽고, 차도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것은 제 할아버지께서 살아생전 저와 저하를 위해 맺어 두신 혼약서입니다. 오늘, 이곳에 계신 모든 분 앞에서 이것을 태워 버리고자 합니다. 이로써 우리의 혼약은 파기되었습니다. 이제 각자 다른 이와 혼인을 하든 상관할 바 아니니, 서로 남남으로 살아가시지요."

송씨에게서 화놋불을 받아 든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 귀퉁이에 불을 붙였다.

붉은 불꽃이 종이 끝을 갉아먹기 시작한 그 순간.

"아가씨, 안 됩니다!"

연희가 펄쩍 뛰어올라 맨손으로 불꽃을 짓눌러 껐다.

손바닥이 붉게 데어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연희는 임서아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 감히 세자 저하를 탐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소인은 그저 아가씨와 세자 저하 곁에서 평생 시중을 들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말을 마친 연희는 이마를 바닥에 내찧으며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쿵, 쿵, 소리가 처절하게 울려퍼졌다.

순식간에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보기에 섬뜩할 정도였다.

이윽고 구경꾼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차도진의 얼굴 역시 바로 굳어졌다. 그가 성큼 다가가 연희를 일으켜 세웠다. 붉게 짓물러 수포가 잡힌 손을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여봐라! 당장 약을 가져오너라!"

그리고는 임서아를 노려보았다.

애통함은 이내 서슬 퍼런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연희와 혼인하려는 것도 나고, 파혼하려는 것도 나다! 화가 나면 나한테 화풀이 할 것이지 어찌 혼약서를 빌미로 이따위 위선을 떠는 것이냐!"

임서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예법을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세자 저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녀는 송씨에게서 종이 한 장을 넘겨받아 차도진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연희의 노비 문서입니다. 오늘 이것마저 넘겨드렸으니 이제 연희는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차도진은 멍하니 굳어버렸다.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인 임서아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짙은 당혹감이 스쳤다.

울고불고 떼를 쓸 줄 알았다. 지난 삼 년간의 은혜를 들먹이며 자신을 압박하고, 혼약서로 발목을 잡을 거라 확신했다.

단 한 번도 임서아가 이토록 차분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서운함과 이질감이 피어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네 명예는 이미 바닥을 쳤다! 여기서 혼약마저 파기하면 앞으로 경성 명망가 중 어느 누가 너에게 구혼하려 들겠느냐! 나 역시 배은망덕한 사람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삼 년 동안 나를 보살펴 준 공이 있으니 연희를 정실로 맞아들이더라도 결코 너를 홀대하진 않겠다. 걱정마라. 한 달 뒤 연희가 시집오면, 내 직접 네 집으로 가 납폐를 올리고 평처(平妻) 자리를 내어줄 터이니."

임서아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차도진은 연희를 조심스레 마차에 태우고는 중매쟁이와 함께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내 구경꾼들도 하나둘 산산이 흐트러졌다.

임서아는 돌아서서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문턱을 넘어선 순간, 애써 지탱하던 냉정함이 한순간에 무너지며 온몸의 맥이 풀려 버렸다.

그때, 송씨가 급히 달려와 임서아를 의자에 앉히며 붉어진 눈시울로 물었다.

"아가씨, 정말로 세자 저하의 평처가 되실 생각이십니까?"

임서아는 고개를 저었다.

"제 혼사는 따로 정해진 바가 있습니다."

송씨가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세자 저하께서 삼 년 동안 의식을 잃고 누워 계실 때, 수발을 든 것은 바로 아가씨이십니다. 체통도 모른다고 손가락질당하고, 허황된 꿈을 꾼다며 비웃음을 살 때 아가씨께서 견뎌낸 서러움이 얼마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물러나시면 그 천한 몸종 좋은 일만 시키는 것 아닙니다!"

임서아는 대답 대신 그저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생의 일들이 썰물처럼 뇌리를 스쳤다.

지난 삶에서 그녀는 차도진과의 소꿉친구 정분에 기대어, 삼 년의 은혜로 그를 압박해 혼례를 올렸다.

하지만 혼인 후 깨달았다.

차도진의 마음속에 있던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 몸종인 연희였다는 사실을.

그가 안부를 묻는다는 핑계로 매일같이 처소로 찾아온 것도, 그저 연희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함이었다.

훗날 하인들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차도진이 어릴 적 물에 빠졌을 때 한 여인에게 구출되었다는 것을.

연희가 당시 그가 잃어버렸던 옥패를 지니고 있었기에, 차도진은 연희를 자신의 목숨을 건져준 은인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목숨을 걸고 물에 뛰어들어 차도진을 건져 올린 것은 임서아 그녀였다. 그 여파로 보름 동안이나 고열에 시달리며 죽을 고비를 넘기기까지 했었는데...

전생에 그 진실을 알게 된 임서아는 질투에 미쳐 버렸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연희를 저택의 마부에게 억지로 시집보내기까지 했던 것이다.

결국 마부의 가혹한 학대를 견디지 못한 연희는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날 이후, 차도진은 임서아를 뼛속 깊이 증오하게 되었다.

그녀가 아이 셋을 낳았음에도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태어난 아이들은 채 피어나기도 전에 빼앗겨 어디론가 보내졌고, 차가운 처소에 갇힌 임서아는 제 핏줄을 만나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원망과 한이 서린 빈방에 홀로 남겨진 채, 그렇게 스러져 죽어 갔던 것이다.

다시 얻은 삶.

연희를 제 뒤로 감싸며 비호하는 차도진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이제는 그 무엇도 다투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임서아는 소매 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송씨에게 내밀었다.

"숙부님께 전달해 주세요. 강남 심씨 가문과의 혼사를 받아들이겠노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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