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31 - Chapitre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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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이 고요해졌다. 그들이 돌아간 건지, 아니면 숨을 묵이고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도복희는 계속해서 창고에 웅크린 채 숨어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덜커덩거리며 거칠게 출입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내 창고 문이 벌컥 열렸다.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전히 겁을 먹은 상태인 도복희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창고 문을 열어젖힌 누군가가 도복희에게 손을 뻗었다.“시, 싫어….”도복희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서 마구 팔을 휘저으며 그 손을 뿌리쳤다. 입에서 끅끅대는 애처로운 울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아저씨야.” 침착한 낮은 음성. 도복희의 가녀린 팔이 다부진 손에 붙잡혔다. 그녀는 온통 눈물로 젖은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괜찮아?”강은택이었다.창고 앞 좁은 복도에 강은택이 그 큰 덩치를 구기고 도복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자세를 낮추고 눈을 마주친 그의 표정은 조금 찌푸린 채였으나 옅은 갈색의 눈동자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도복희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저 감싸는 모양새였다.도복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고 있던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억누르고 있던 가쁜 숨과 함께 안도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아, 아저씨…….”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강은택의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박고 꺽꺽 숨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강은택은 움직이지 못했다. 정확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멈춘 것에 가까웠다.서른넷. 결코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맞을 때 최대한 덜 아프게 맞는 요령을 열네 살에 배웠고, 스물쯤엔 동네에서 주먹질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게 됐다. 스물다섯에는 칼날 앞에서 눈을 깜빡이지 않는 요령을 터득했다. 사람을, 그것도 한참 어린 여자애를 달래는 방법은 누가 알려준 적도 스스로 깨우치려고 해 본 적도 없었다.허공에 떠 있던 오른손이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도복희의 등으로 내려앉았다. 어색했다. 강은택은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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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미 옆에 있잖아요.”강은택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하는 일.”“아.”한 집에 살면서도 도복희가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전혀 모를 거라고 여겼던 자신의 생각이 조금은 안일했다는 걸 강은택은 지금에서야 느꼈다. 그럼 이 아이는 흥신소 소장이 꽂아주는 아르바이트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냉큼 따라나섰단 말인가.“겁이 없는 건지.”아니면 세상이 온통 꽃밭인 건지. 강은택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삼켰다.“아저씨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저를 위험하게 만들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거짓말을 하는 눈은 아니었다. 도복희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야, 너.”강은택은 겨우 진정이 된 그녀를 다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너 세상이 만만하냐? 너랑 내가 얼마나 봤다고, 뭐 어떻게 굴러먹던 놈인 줄 알고 그렇게 덥썩 믿어?”확실히 도복희는 낯선 곳에서 눈을 떠 낯선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덥썩 받아먹던 여자애였다. 대책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런 아이를 다시 길바닥 헤매고 다니게 뒀다가 무슨 큰일이라도 당할까 싶어, 제 집에 머무르게 하는 중인 강은택이 할 말도 딱히 아니었다. 이미 식구로 스며들기 시작한 도복희가 이 집에 온 지 벌써 한 달이었다.“다른 누군가에게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저는 당연히 모르죠…. 그치만, 제게는 좋은 사람이에요.”“…뭐?”좋은 사람. 흔해 빠졌지만, 자신에게만은 생소한 그 단어에 강은택이 말을 잃었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삐뚤어진 그가 자라면서, 살아오면서 들어본 적 없던 말이었다.강은택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신의 차에 치였으니, 약과 밥을 먹였을 뿐이고, 회복해서 정상적인 직업활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잠시 거처를 내어 줬을 뿐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라니.강은택은 순진한 믿음으로 일렁이는 도복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마음이 들면서도 가슴 한구석에선 책임감과 함께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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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복희는 흥신소 사무소에서 있었던 일을 다른 남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사건을 알게 된 건 며칠이 지난 후였다.한가로운 주말의 낮 시간. 도복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영화 채널에서 방영해주는 오래된 코미디 영화에 빠져 있었다. 옆에 앉은 심우주는 이미 내용을 알고 있어 흥미를 두지 않았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두드리던 그의 손가락이 뚝 멈추었다. 심우주는 고개를 들어 도복희를 보았다. 한동안 그녀가 열심히 강은택을 따라 나가던 아르바이트를 더는 나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었다.“복희야.”“네에.”“그러고 보니까 너 며칠째 알바 안 나가는 것 같다? 짤렸냐?”도복희는 내내 집중하고 있던 TV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쩐지 그 웃음이 탐탁치 않게 느껴진 심우주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왜. 은택이 그놈이 나오지 말래?”“아, 아뇨?”그런 일을 겪었으니 자연스레 나가지 않게 된 것뿐이지, 딱히 강은택에게 직접적으로 아르바이트 관두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도복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내저었다.“그럼 왜 안 나가? 너 돈 벌어야 한다며.”단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었다. 심우주의 목소리에서는 분명하게 캐묻는 기색이 있었다. 도복희는 얼른 변명거리를 내놓지 못하고 머뭇거렸다.“…무슨 일 있었구나?”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심우주는 도복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당겨 앉으며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무슨 일인데. 오빠한테 살짝 말해봐.”심우주의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그는 도복희가 겪은 일이 그런 종류일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하고 그저 골때리는 에피소드쯤일 거라 여기는 듯했다.“그게요…….”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강은택이 자리를 비울 때면 1층의 미나 씨와 함께 있는 것이 보통인데, 그날은 어쩌다 보니 잠시 혼자 사무실을 지키게 된 일. 고작 그가 세 시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런 사건이 터졌고, 자신은 창고에 숨어 있었다는 이야기.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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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가 중천인데?”심우주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도복희가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큰 키 덕분에 어느 문이든 드나들 때마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최지호였다. 턱을 들자마자 도복희와 눈이 마주치니 조금 당황하는 듯 보였다.“일요일인데, 어디 다녀오세요?”도복희의 시선이 그의 비어 있는 손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눈을 마주쳤다.“마트 다녀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아, 응…. 잠깐 배달.”“배달요?”도복희는 전혀 감이 안 잡힌다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최지호는 어쩐지 부끄러워하며 손을 제 등 뒤로 숨겼다. 배달을 다녀왔다는 그의 손에는 거무스름하게 약간의 흙이 묻어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썩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나무 배달.”최지호는 마지못해 꺼내 놓는 사람처럼 짧게 대답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듣고서 흥미로워하는 여자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도복희의 또래와 이야기를 나눌 일 자체가 딱히 없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그 동그란 눈에 깃든 호기심 어린 빛이 금방 사그라들 거라고 여겼다.“우와. 그냥 꽃집 한다고만 들었는데!”도복희는 손뼉을 짝― 치더니, 신이 난 것처럼 생글생글 웃었다.“꽃집 운영하는 거 맞는데, 외곽 쪽에 온실 하우스도 있어.”“대박, 대박. 저 언제 한 번 구경 가면 안 돼요?”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최지호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구경?”“네!”최지호의 눈이 느리게 꿈뻑거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예의상 하는 말인지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러나 도복희의 표정에 뜬 신호는 분명한 흥미였다.“…그래. 그럼 너 쉬는 날 한번 같이 가자.”“쉬는 날요?”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최지호는 아직 그녀가 강은택의 사무실 아르바이트에 나가지 않게 된 사연을 모르고 있었다.“아아. 저 다시 백수예요.”“아…, 그래?” 최지호는 심우주와 다르게 덜컥 ‘왜’를 묻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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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평범하게 착한 사람 아니에요.”도복희의 대답을 듣고 최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떠오른 그대로 물었다.“네가 착한 사람이 아니면 뭔데?”적어도 최지호가 보기엔 그랬다. 도복희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 정도로 바보 같이 착하고 순해 빠졌다. 그래서 궁금했다. 대체 그녀는 왜 스스로를 그렇게 낮춰서 표현하는지. 그저 겸손을 떠는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그냥, 숨기는 게 좀 많은 사람이요.”도복희는 사실 숨기는 것보단 속이고 있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나 굳이 그대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이 집에 비밀 없는 사람 없어.”고작 숨기는 게 많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이 집에 머물 자격이 없는 건 아니야. 최지호의 말은 도복희에게 그렇게 들렸다.“저 그럼 조금만 더 여기 있어도 돼요?”“나가라고 한 말 아닌데….”도복희와 시선이 마주치자 최지호가 귓바퀴를 조금 붉혔다. 어쩐지 그녀가 조금 더 머물러 주길 바라는 제 마음이 들킨 것만 같아서였다.“그럼 염치 없지만, 조금만 더 잘 부탁드릴게요.”도복희는 구김살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웃었다.“아!”용건이 끝났으니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최지호가 그녀의 ‘아’하는 탄성에 옮기던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도복희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거처 알아보는 거 도와주신다고 한 거요.”최지호는 그녀가 갑자기 말을 바꿔 나가겠다고 할까봐 잠시 긴장했다. 저도 모르게 추리닝바지를 잠깐 쥐었다가 놓았다.“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오빠.”뿌듯해야 할 감사 인사를 듣고 그는 어쩐지 김이 빠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최지호는 ‘고마워요’란 말 뒤에 따라붙은 호칭을 한 박자 늦게 인지하고는 몸이 굳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목에서 기름칠하지 않은 로보트처럼 삐꺽대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방금 뭐라고 불렀어?”“네? 오빠요....”도복희는 자신이 무슨 말 실수라도 했나 싶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아저씨라고 부르기에는 나이 차이가 얼마 안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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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신소 사무실에서의 사건을 가장 늦게 알게 된 사람은 탁유환이었다. 그 주 토요일까지도 바빠서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던 그도 일요일에는 주말 낮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던 중이었다.거실의 커다란 1인용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던 탁유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작은 몸이 기다란 소파에 엎드려서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도복희는 두꺼운 판타지 소설책을 읽으며 다리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녀가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탁유환이 일부러 사 온 책인데, 도복희는 그것이 탁유환이 이미 소장하고 있던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큭.”탁유환은 허공에서 덜렁거리는 발목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짐승이 귀를 쫑긋 세우듯 도복희가 그 웃음소리에 홱 그를 돌아봤다.“저 보고 웃은 거죠?”“아니다.”“거짓말.”“그래, 거짓말이다.”도복희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왜요. 제가 책 읽는 모습이 웃겨요?”“네가 웃긴 게 아니라 이 집에 나 말고 글자 읽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게 어색해서 웃었어.”탁유환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이 집에 있는 다른 놈들은 머리통이 밥통이거든.”“…푸핫.”신랄한 뒷담화에 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헙’ 하고 갑자기 숨을 들이키며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그 말 듣고 제가 웃었다고 소문 내면 안 돼요.”괜한 걱정이었다. 스스로 입단속을 하느라 잠시 손에서 놓은 책이 파라락― 소리를 내며 접혔다. 읽던 구간을 놓친 도복희가 작게 ‘으앗’ 소리치며 허둥지둥 다시 책을 펼쳤다. 그때 엎드려 있는 도복희의 바지 밑단이 조금 걷히며 그녀의 하얀 다리에 남은 멍 자국이 드러났다. 푸르뎅뎅하던 것은 이제 노르스름한 빛을 띠며 옅어져 가는 중이었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충격의 흔적이라는 것은 분명했다.“다리는 어쩌다 그랬나.”탁유환의 얼굴에 떠 있던 미소가 희미해졌다.“아, 이거.”흥신소 사무실의 창고에 숨으면서 어딘가 부딪힌 것이었다. 그 순간에는 몰랐으나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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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이 집에서 내보낸다.”탁유환의 발언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처럼 지내는 네 명의 남자들 사이에서 큰형 노릇을 하는 탁유환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변덕스러운 성정도 아니었으므로 강은택은 그가 이미 뱉은 말을 쉽게 바꾸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탁유환은 흥신소에 들이닥친 양아치들이 도복희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와서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일은 없고 아마 급하게 숨다 다친 모양이다’라고 둘러댄다고 한들 좋은 수가 될까. 아마 그 정도로는 그의 마음을 쉽게 돌릴 수 없을 것이다.탁유환은 등을 돌려 제 뒤에 서 있던 도복희와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그 큰 몸을 접어서 마치 작은 아가씨 앞의 기사가 된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탁유환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상황이 도복희에게는 좀 낯설었지만,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아가.”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조금 전 강은택을 질책하던 그에게서 풍기던 싸늘한 기운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 없었다.“…네.”그래도 도복희는 바짝 긴장한 채였다. “이런 곳에 있지 마라. 응?”언제나처럼 명령조였지만 어쩐지 오늘 탁유환이 뱉는 말투는 마치 어르고 달래는 것 같았다. 도복희는 그런 그의 앞에서 차마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네…. 그런데 저 정말로 어디 맞거나 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정말루요.”도복희는 강은택 대신 해명이라도 하듯 늘어놓았다. 강은택에게는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는 그녀의 말이 꼭 ‘저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여기 조금 더 머물면 안 될까요?’하고 간절히 부탁하는 것처럼 들렸다.“다행이군.”탁유환은 커다란 손으로 도복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는 눈치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리한 편에 속했다. 단순함이 장점이자 단점인 강은택마저 읽었을 그녀의 속내를 탁유환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내 회사 근처에 빈 오피스텔이 있어. 혼자 지내기엔 괜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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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간다고 그래, 돈도 없는 게.”최지호는 꼭 그 말이 자신에게 한 말인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가로막듯 심우주와 도복희의 사이에 비집고 섰다. 심우주도 키가 상당히 큰 편에 속했지만, 호리호리한 편인 그와 다르게 최지호는 덩치까지 훨씬 컸으므로 도복희는 마치 자신의 앞에 커다란 바위산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런 그가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지,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비켜.”“형, 그만해.”“내가 뭘 했다고 그만하래. 너나 그만하고 비켜, 나 복희랑 얘기 중이잖아.”어느 쪽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남자가 대치 중인 거실의 공기가 변했다.도복희는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해졌다.남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돈독한 사이인지 티를 내는 것을 쑥스러워했다. 네 명 중 누구도 ‘우리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로 살기로 했다’ 같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서로의 일상에 자리 잡은 그들이기에 주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형제로 봐 주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 집에서 함께 지내며 도복희도 그걸 느꼈다.그런데 지금, 도복희의 거처 문제를 두고 남자들 사이에 충돌이 생겼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그들의 우애에 금이 가는 것만 같아 괴로워졌다. 누군가는 고작 여자 때문에 흔들릴 신의라면 애초에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여우가 사람을 홀린다.’‘구미호는 사람을 홀려서 간을 빼 먹는다.’그런 말들은 세상에 너무도 널리 퍼져 있었다. 진실은 도복희 그녀도, 그녀의 엄마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연구된 적 없는 숨은 존재였고 구미호족은 이미 절멸했으니까.‘그런 말들을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리는 사람을 해하는 존재가 아니야.’엄마는 언제나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도복희는 육류, 특히 육회나 선지만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게 되는 자신에게 인간의 피와 간을 탐하는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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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주의 외모를 표현하자면, 여자들은 보통 그를 ‘아, 그 키 크고 잘생긴 사람?’으로 기억했고, 남자들 중엔 가끔 ‘제비’라든지 ‘호스트바 선수’와 같은 단어로 공연히 비아냥거리는 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심우주가 객관적으로 잘생긴 편에 속한다는 걸 뜻하는 방증이었다.쌍꺼풀 없는 눈매가 날렵했다. 자칫하면 날카롭고 차가워 보일 수도 있는 생김새였다. 그러나 남성 평균보다 약간 밝은 피부톤에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심우주는 늘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여 그 분위기를 상당히 중화시킨 편이었다. 느긋하게 웃음을 머금은 입에서는 중간톤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난스러운 말들이 흘러나왔으니, 진중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완성된 심우주의 외적인 모습과 분위기는 가벼워 보인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것조차 의도한 것이었다.심우주는 심각하거나 진지한 분위기를 못 견뎌했다. 꽤 어릴 적부터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변에서 심우주가 당연히 그런 가벼운 사람이기를 기대했기에 그렇게 자라났는지도 모른다.엄마는 젊은 시절에 나름 인지도 있는 배우였다고 했다. 파파라치가 따라붙을 정도는 아닌 듯했고, 오전 늦게 주부를 타깃으로 한 드라마에 왕왕 출연하여 식당에 가면 사인 한 장을 부탁 받는 일이 많았다. 그마저도 심우주가 초등 저학년이 됐을 무렵엔 이른 저녁에 방영하는 작품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알아보는 이가 많아지는 바람에 함께 외식을 하는 일이 사라진 까닭에 그녀의 전성기엔 얼마나 위세를 떨 수 있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미혼의 여배우와 재벌가 사내에서 난 아이는 혹이나 다름없었다. 없느니만 못한 존재였으니 없는 것처럼 숨어서 살아야 했다. 대신 용돈이 부족해서 편의점 라면 코너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는 또래와는 다르게 심우주의 지갑은 늘 두터웠다. 친구 중 누구도, 심지어 선생조차도 심우주의 부모를 본 적이 없는데, 심우주는 그 미스터리한 부모에게서 늘 이상할 정도로 용돈을 많이 받는 애였다. 그 두둑한 지갑에서 나온 여유 덕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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