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나의 떠남이 너의 평온이 된다면: Chapter 1 - Chapter 10

18 Chapters

제1화

홀로 촛불을 밝히고 생일 소원을 빌었다.“한 살 더 먹은 해에는 나 심이슬이 행복해지길.”결혼 4년 만에 처음으로 주찬휘와 상관없는 소원을 빌었다.그동안 나의 소원은 늘 한결같이 주찬휘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 스스로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랐다.촛불을 끄고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냈다. 주찬휘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맛이었다.나의 생일임에도 모든 것을 주찬휘의 취향에 맞춰 준비했다. 케이크를 입에 넣자마자 여전히 견디기 힘든 신맛이 퍼졌다.역시 싫어하는 건 아무리 애를 써도 끝내 좋아질 수 없나 보다. 케이크도, 사람도 억지로 익숙해지려 노력해 보았으나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나는 친정으로 가는 오늘 밤 마지막 기차표를 예매했다.결혼한 뒤로 한 번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다. 가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주찬휘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시간이 나면 함께 가주겠다고만 했다.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그가 말한 다음은 영원히 오지 않았다.오늘에야 나는 드디어 주찬휘를 기다리는 일을 그만두고 홀로 고향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캐리어를 끌고 내려올 때 거실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한 기자가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은 걸 보고는 유리창 너머로 과감하게 인터뷰를 시도했다.“대표님, 오늘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도 퇴근하는 첫사랑을 데리러 오셨네요. 사모님이 아시면 화내지 않을까요?”“그럴 리가요. 그저 오래된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뿐입니다.”평소 이런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않던 주찬휘였으나 오늘은 웬일인지 여유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게다가 제 아내는 워낙 온순한 편이라 화낼 줄도 몰라요. 지금도 집에서 저와 저녁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주찬휘의 마지막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캐리어를 끌고 현관문에 다다랐다. 그 대답을 명확히 들은 후 미소를 지으면서 문을 닫았다.주찬휘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이제 내가 그를 기다리는 일은 없으리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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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내가 주찬휘의 전화를 받았을 땐 이미 기차에 오른 뒤였다.한밤중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데 벨 소리에 결국 잠에서 깼다.“여보세요?”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휴대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집에 없어?”몽롱하던 정신이 이 한마디에 번쩍 들었다.화면을 보니 새벽 두 시였다. 주찬휘가 이 시간까지 허지안을 집에 데려다준 모양이었다.이 순간 나는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 바보처럼 그를 계속 기다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응. 집 가는 기차 안이야.”“기차? 어느 집...”말을 하던 주찬휘가 그제야 내가 말한 집이 그 차가운 별장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남쪽 작은 도시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왜 갑자기 내려가는 거야? 지난번에 다 얘기했잖아.”주찬휘의 낮은 목소리에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그가 말한 지난번이 바로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와 올해 나의 생일엔 주찬휘와 함께 내려올 수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었다.부모님은 딸의 생일을 축하해준 지 너무 오래됐다며 함께 보내고 싶다고 했다.혹여 내가 곤란할까 봐 주찬휘가 바쁘면 안 와도 괜찮다며 서둘러 덧붙였지만 말끝에 묻어나는 쓸쓸함까지는 숨기지 못했다.코끝이 찡해진 나는 주찬휘에게 시간을 내어 함께 내려가 줄 수 있느냐고 물었었다.주찬휘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대답했다.“이슬아, 요즘 일이 너무 바빠. 바쁜 일만 끝내면 그때 장인 장모님 뵈러 같이 가자, 응?”그의 눈가에 어린 피로를 본 나는 더는 고집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후 우연히 허지안의 SNS를 보게 되었다.[바쁜 와중에 시간 쪼개서 같이 등산 와준 그 사람 덕분에 기분 전환 완료!]사진 속 밝고 화사하게 웃고 있는 허지안의 오른쪽 아래에 누군가의 손목이 살짝 찍혀 있었다.4년을 함께 산 나는 그것이 주찬휘의 손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그때 나는 깨달았다. 허지안이 필요로 할 때면 주찬휘는 48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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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말을 마친 뒤 주찬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전화를 끊었다.말을 내뱉은 순간 오랫동안 가슴을 짓눌러온 커다란 돌덩이가 비로소 사라진 듯했다.나는 휴대폰 전원을 끄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기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무리 뒤척여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언니, 죄송한데요.”그때 어디선가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 보니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아까 이혼하신다는 말을 들어서요.”내가 오해할까 봐 소녀가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에요. 그냥 잠이 안 와서 가만히 있다가 들어버렸어요.”소녀의 두 눈에 서린 당황스러움이 거짓이 아니었고 심지어 깊은 곳에 안타까움마저 담겨 있었다.“저 대학생인데요. 마침 과제가 결혼에 관한 거라서요. 괜찮으시다면 짧게 인터뷰를 좀 해도 될까요?”소녀가 가방에서 학생증을 꺼내 나에게 보여줬다. 안하람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다.주변에 다른 승객이 없어 안하람은 아예 나의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내가 끼고 있던 반지를 본 안하람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언니, 이거 4년 전에 소더비 경매에서 어떤 구매자가 사 간 그 반지 맞죠? 그분이 언니 남편분이었다니. 이렇게 큰돈을 들여 반지를 낙찰받아 선물할 정도면 언니를 엄청 사랑한다는 뜻일 텐데 왜 이혼하자고 하신 거예요?”의아해하는 안하람의 시선 속에서 나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어 덤덤하게 말했다.“이 반지의 주인이 내가 아니거든요.”나와 주찬휘는 본래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대학교 시절 주찬휘는 모두가 아는 주씨 가문의 후계자이자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귀한 사람이었고 학교에서도 소문난 수재였다.게다가 수려한 외모까지 갖추고 있어 수많은 여학생의 마음을 흔들어 놓곤 했다.반면 나는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오직 본인의 노력으로 운경대학교에 합격한 더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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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믿을 수 없다는 감정보다 주찬휘가 나라는 존재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지난번 주찬휘가 나를 도와준 이후로 학교에서 가끔 마주치긴 했지만 그저 가볍게 인사만 나누는 정도였다.그가 해외로 떠난 뒤로는 아예 소식이 끊겼기에 주찬휘가 나를 진작 잊었을 거라 짐작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주찬휘의 아내가 된다는 건 내가 감히 바라본 적도 없는 꿈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았다.“좋아.”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화장해줄 때에야 나는 주찬휘의 여자친구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너무 일찍 결혼이라는 굴레에 갇히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외국으로 떠난다는 쪽지 한 장을 주찬휘에게 남겼다고 했다.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명망 높은 재벌가인 주씨 가문 입장에서 신부가 도망쳤다는 소식은 집안 망신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나는 그저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급히 투입됐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기어이 결혼식 무대 위에 올라섰다.결혼반지를 교환할 때 신부용 반지가 내 손가락보다 확연히 컸다. 주찬휘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나에게 약속했다.“미안하게 됐어. 결혼식 끝나고 다시 맞춰줄게.”나는 낮은 목소리로 괜찮다고 답했다.그렇게 나는 내 것이 아닌 반지를 끼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하지만 그 후 4년 이어진 결혼 생활 동안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주찬휘의 아내라는 신분에 걸맞은 화려한 보석들, 파티에 입고 나갈 드레스, 고가의 명품 가방들은 끊임없이 배달되었지만 내 손가락에 꼭 맞는 반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뭐라고요? 남편분을 그렇게 오랫동안 짝사랑하셨어요? 게다가 도망간 신부를 대신해서 기꺼이 결혼하다니.”결혼하게 된 전후 사정을 다 들은 안하람이 분통을 터뜨리며 목소리를 높였다.“남편분이 너무했네요. 새 반지를 사준다고 약속까지 해놓고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어요? 언니가 체면까지 다 살려줬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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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허지안이 귀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지극히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그날 주찬휘와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오후에 별다른 일정이 없었던 나는 조금 일찍 회사로 가서 주찬휘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난 밤 8시가 되었는데도 주찬휘의 사무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비서에게 물어보니 오후부터 중요한 손님을 만나는 중이라고 했다.주산 그룹의 실권자인 그에게 사업차 찾아오는 손님이 부지기수였기에 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계속 휴게실에서 주찬휘를 기다렸다.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던 비서의 시선은 미처 보지 못한 채.밤 9시가 되어서야 드디어 사무실 문이 열렸다. 안에서 걸어 나오는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의 마음이 서서히 절망감에 잠겼다.허지안, 그녀가 돌아왔다.주찬휘가 손목시계를 슬쩍 확인하더니 평소와 다름없는 미안한 기색으로 나에게 말했다.“미안. 오래 기다렸지?”그러고는 몸을 살짝 옆으로 틀어 허지안을 소개했다.“이쪽은 허지안이고 나의...”주찬휘가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덧붙였다.“친구야.”허지안이 풍성한 웨이브 머리를 뒤로 넘기고 화사하게 웃으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심이슬 씨죠? 찬휘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오늘 정말 미안해요. 찬휘랑 2년 만에 만난 거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네요. 밖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어쩌죠?”주찬휘의 곁에서 밝은 미소로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여자를 보며 나는 난생처음으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견디기 힘든 것임을 깨달았다.결혼하고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퇴근하는 남편을 데리러 회사로 자주 왔다.하지만 항상 휴게실에서만 기다릴 뿐 그의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허지안처럼 사무실에서 수다를 떤 적은 더더욱 없었다.주찬휘는 자신이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에게 사무실은 오직 업무만을 처리하는 공간이었다.하지만 그날에야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어떤 엄격한 규칙에도 예외가 존재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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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1년 넘게 부부로 산 시간 동안 주찬휘와 나의 사이에도 가끔은 온기 어린 순간들이 있었다.메뉴를 고르다 동시에 같은 음식을 말하며 마주 보고 웃던 일, 연회장에서 내 어깨에 무심하게 양복 재킷을 걸쳐주던 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마에 내려앉던 가벼운 입맞춤 같은 것들...이런 사소한 조각들 때문에 주찬휘도 나에게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 식당에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주찬휘가 허지안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묻지도 않고 능숙하게 일고여덟 가지의 음식을 주문했다. 마지막에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아주 맵게 해주세요.”허지안이 턱을 괸 채 주찬휘의 앞에 앉아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종업원이 나간 후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내 입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네?”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던 주찬휘가 멈칫하더니 이내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이슬이랑도 왔었어. 여기 대표적인 메뉴들이라 맛이 괜찮아서 기억해둔 것뿐이야.”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나와 이곳에 온 적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때 오늘과 같은 메뉴를 주문했었다. 하지만 그날 밤 주찬휘는 위장염에 걸려 무척이나 고생했다. 매운 음식을 전혀 못 먹는 사람이었다.“그래?”허지안이 말꼬리를 길게 빼며 눈을 가늘게 떴다.“너 예전에 매운 거 입에도 못 대서 내가 먹는 거 구경만 했잖아. 1년 넘는 사이에 입맛이 참 많이 변했구나.”아니, 주찬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도, 입맛도 그대로였다.식사하는 내내 나는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허지안이 주찬휘와 함께했던 유학 시절의 추억을 흥미진진하게 늘어놓았다.옆에 있던 나는 존재감 없는 방관자가 된 기분으로 그들의 뜨겁고 찬란했던 청춘 얘기를 묵묵히 들었다. 지금 주찬휘의 아내는 나인데도 말이다.식사를 마친 뒤 운전기사가 나와 주찬휘를 데리러 왔다.주찬휘가 허지안을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자 허지안이 혼자 택시를 타고 가겠다며 거절했다.주찬휘도 더는 고집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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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수술실에서 나온 뒤 주찬휘는 내 병상 곁을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다.늘 흐트러짐이 없던 그의 넥타이가 비뚤어져 있었고 하얀 셔츠에 핏자국이 배어 있었다.언제나 덤덤했던 그의 눈에도 지울 수 없는 고통이 가득했다.주찬휘가 눈을 감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이슬아, 미안해. 너인 줄 몰랐어.”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처음으로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 동안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주찬휘가 원망스럽냐고?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그가 아니었다면 내 아이를 잃지 않았을 테니까.하지만 더 원망스러운 건 나 자신이었다. 임신한 걸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주찬휘를 말리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주찬휘 역시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남자가 매일같이 병원에 와서 내 곁을 지켰다. 하지만 나는 일주일 내내 침묵을 지켰다.그러던 어느 깊은 밤, 꿈속에서 양 갈래 머리를 한 여자애가 아장아장 달려와 내 다리를 껴안았다.“엄마, 슬퍼하지 마세요. 내가 다시 올게요.”잠에서 깨어났을 때 베개가 이미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다음 날 주찬휘가 병원에 왔을 때 나는 일주일 만에 입을 열었다.“집에 가고 싶어.”그날 이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나 또한 주찬휘와 허지안의 관계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는 척 굴었다.유일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주찬휘가 바쁜 시간이 눈에 띄게 줄었고 다음을 기약하는 횟수도 적어졌다는 것이었다.다만 주찬휘가 가끔 업무가 바빠 다음으로 미루자고 할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허지안의 SNS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하곤 했다.나는 청춘을 다 바쳐 그를 사랑했던 마음과 꿈속에서 만난 그 아이에 대한 기다림 하나로 한 해 한 해를 버텼다.그리고 오늘, 여느 때와 다름없었던 그 한 번의 약속 어김이 내 안에 남은 마지막 애정마저 남김없이 사라지게 했다.내 아이도 이런 아빠는 원치 않아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 믿고 떠나기로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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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주찬휘는 높은 연봉을 주고 채용한 엘리트 비서 임재형에게 처음으로 불만을 느꼈다. 감히 이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그에게 하다니.주찬휘가 규칙적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참을성을 잃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임 비서, 여긴 회사야.”임재형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서류 봉투 안에 든 게 정말로 이혼 합의서였다. 침을 꿀꺽 삼키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다시 한번 보고했다.“압니다. 하지만... 정말로 이혼 합의서예요.”주찬휘가 멈칫했다. 얼굴에 보기 드문 당혹감이 서렸다.‘이혼 합의서라고? 이슬이가 소양에서 보낸 게 이혼 합의서란 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이슬이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데. 별다른 갈등도 없었고 겨우 하룻밤 늦게 들어갔을 뿐이잖아. 그런 사소한 일로 이혼을 요구할 리가 없어.’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찬휘가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면서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택배를 잘못 가져온 거 아니야? 이건 내 게 아니야.”임재형이 서류 봉투에 적힌 주소를 확인했는데 소양시라고 적혀 있었다. 그가 기억하기로 심이슬의 고향이 소양시였다.조심스럽게 이혼 합의서를 봉투에서 조금 꺼내 아래쪽 아내 서명란을 살폈다. 심이슬이라는 석 자가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임재형이 속으로 주찬휘가 그에게 화를 내지 않기를 빌었다.그저 주찬휘의 택배를 대신 받아왔을 뿐인데 심이슬이 주찬휘와 이혼하려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주찬휘의 반응을 보니 아직 전혀 모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유능한 비서로서 이 사실을 확실히 알릴 책임이 있었다.임재형이 이혼 합의서를 꺼내 주찬휘의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대표님,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순간 주찬휘의 마음속에 원인 모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그가 책상 위에 놓인 얇은 종이 한 장을 힐끗 쳐다봤다. 원래는 오늘 임재형이 왜 이런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지 확인하려 했다.그런데 시선이 이혼 합의서의 하단으로 향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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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주찬휘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왼쪽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결혼반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하지만 심이슬의 반지는 이제 주인을 잃었다.반지를 이혼 합의서 위에 내려놓고 멍한 표정으로 쳐다봤다.주찬휘의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의아함과 망연자실함, 짜증... 그러나 이 모든 감정을 압도하는 것은 당황함이었다.두 사람이 어쩌다가 이혼할 지경에 이르렀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지난 4년간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이 평온했다.그런데 심이슬은 이혼하자는 말조차 주찬휘에게 직접 하지 않은 채 이토록 매정하게 그를 떠났다.밤을 새워 소양시로 내려가 버리고 고작 종이 한 장과 차가운 반지 하나만을 남겼다.어려서부터 주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 자란 주찬휘는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었다.눈빛 하나면 원하는 걸 얻었고 주산 그룹을 물려받은 뒤로는 모든 상황이 철저히 그의 통제 하에 움직였다.그런 주찬휘가 통제 불능의 순간을 두 번 맞닥뜨렸는데 모두 심이슬과 관련된 일이었다.첫 번째는 4년 전 결혼식 날, 허지안이 도망친 뒤 심이슬에게 결혼하겠냐고 물었던 순간이었고 두 번째는 바로 오늘, 심이슬이 그에게 이혼을 통보한 순간이었다.똑똑똑.노크 소리가 주찬휘의 엉킨 생각을 끊어놓았다.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허지안이 들어왔다.그녀는 귀국한 뒤 종종 주찬휘를 찾아오곤 했다.임재형의 안내를 받았던 첫 방문 이후부터는 노크만 하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제 집인 양 들어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예전엔 이런 행동이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허지안이 자주 오는 것도 아니었고 업무를 방해하지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불쾌감을 느꼈다.주찬휘의 머릿속에 문득 심이슬이 떠올랐다.회사에 올 때마다 늘 휴게실에 조용히 앉아 남편의 퇴근을 기다렸다. 주찬휘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방해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허지안은 그를 배려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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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결혼할 당시 주찬휘가 심이슬에게 물었었다. 그와 결혼할 거냐고.그때 심이슬이 결혼하겠다고 본인 입으로 대답했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주찬휘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서운함에 휩싸였다.허지안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혼할 생각 없다고? 설마 심이슬을 사랑하게 된 거야? 아니, 그럴 리 없어.’지난 2년 동안 허지안이 문자 한 통만 보내면 주찬휘는 아무리 늦은 시간이더라도,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그녀의 곁으로 달려왔다.심지어 2년 전 허지안이 귀국한 첫날, 주찬휘의 마음속 순위를 확인하고 싶어 취객들을 매수해 자신을 괴롭히도록 꾸미기까지 했다.결과는 대만족이었다.주찬휘가 예전 연애 시절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그녀를 보호했고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심이슬을 유산하게 했다.모든 정황이 주찬휘의 마음에 여전히 허지안뿐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그가 심이슬을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어쩌면 심이슬이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혼 합의서에 서명해 보내서 주찬휘가 적응되지 않아 이러는 것일 수도 있었다.4년이나 함께했는데 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허지안은 그제야 마음이 안정되었다.더 이상 이혼을 권하지 않았다. 심이슬이 이미 이혼 합의서에 서명까지 마친 이상 주찬휘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게 해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그때 허지안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눈부신 반지에 머물렀다. 주찬휘가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받았던 그 결혼반지였다.“찬휘야, 이 반지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허지안이 반가운 목소리로 반지를 집어 들어 자신의 약지에 끼워 넣었다.반지가 주인을 찾은 듯 허지안의 손가락에 빈틈없이 들어맞았다. 그녀가 오른손을 들고 흥미진진하게 반지를 감상했다.“너무 예뻐. 그때 이걸 못 끼고 떠나서 참 아쉬웠는데 그대로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허지안이 반지를 함부로 끼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주찬휘가 다시 빼앗아 오려는데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렸다.‘이슬이가 지난 4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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