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혼 4년 동안 주찬휘는 기다리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다.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하면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고 결혼기념일을 함께 보내자고 하면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친정 부모님을 보러 가는 것조차 다음에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내 생일인 오늘조차 그랬다. 나는 보름 전부터 주찬휘에게 오늘 저녁 시간이 괜찮은지 물어봤었고 확답까지 받았다. 그렇게 오후 내내 정성을 다해 주찬휘가 좋아하는 요리들을 준비했고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저녁 6시부터 시작된 기다림은 밤 9시가 지나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거실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주산 그룹 대표가 비가 오는 오늘 첫사랑을 마중 나온 장면이 포착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재결합설이 제기되고 있는데요.” 익숙한 이름에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화면 속에 한 남자가 우산을 든 채 얇은 옷차림의 여자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오피스텔 입구에서 차까지 이르는 그 짧은 거리 동안 주찬휘는 여자가 비에 젖을세라 우산을 여자 쪽으로 기울였다. 그의 한쪽 어깨가 이미 흠뻑 젖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때 휴대폰이 울려 확인해 보니 주찬휘가 보낸 메시지였다. [일이 생겼어. 좀 있다가 들어갈게.] 나는 내가 기다림에 아주 익숙해진 줄 알았다. 평소처럼 식탁 앞에 앉아 그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TV 속 흠뻑 젖은 주찬휘의 정장을 본 순간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View More한 달 후 두 사람의 이혼이 정식으로 수리되었다.심이슬은 끝내 운경시로 돌아가지 않았고 이혼 증명서를 소양시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주찬휘는 이혼 증명서를 금고 안에 넣었다.그날 이후 주찬휘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회사에만 쏟아부었다. 심이슬의 소식을 따로 수소문하지는 않았다.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감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다른 누군가와 재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까 봐 너무나 두려웠다.그렇게 3년이 흘렀다.미림시에서의 출장을 마친 뒤 임재형이 주찬휘에게 운경시로 돌아갈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주찬휘가 무언가에 홀린 듯 소양시로 가자고 답했다.그 대답에 임재형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주찬휘가 관자놀이를 누를 뿐 다시 번복하진 않았다. 감정의 둑이 무너져내려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했다.소양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3년 만에 오는데도 주찬휘가 심이슬의 집 위치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기사에게 심이슬이 사는 아파트 단지 맞은편에 차를 세워달라고 일렀다.차에서 내린 주찬휘가 커다란 나무 뒤에 서서 아파트 정문에 시선을 고정했다.밤 8시가 넘을 때까지 기다렸지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한 남자가 돌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를 품에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입구 주변을 서성이고 있을 뿐이었다.결국 허탕인가 싶어 포기하려던 찰나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베이지색 롱 원피스를 입은 심이슬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지난 3년간 못 본 걸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주찬휘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심이슬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의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그녀 앞에 나서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그런데 그때 심이슬이 부녀를 향해 두 팔을 벌린 모습을 목격했다.남자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자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가 심이슬의 품에 안겼다.심이슬이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아이의 코끝을 가볍게 톡 건드렸다. 남자도 다가
말하던 허지안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심이슬을 유산시키려던 생각은 없었다.그날 핏발이 선 눈으로 심이슬을 안아 들던 주찬휘의 모습을 허지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와 연애하던 시절에도 그토록 이성을 잃은 주찬휘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때 어렴풋이 짐작했었다. 혹시 주찬휘가 심이슬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그 의구심 때문에 허지안은 한동안 불안에 떨어야 했다. 결국 그녀를 구하려다 심이슬이 아이를 잃게 된 것이었으니 만약 주찬휘가 정말로 심이슬을 사랑한다면 그 화살이 그녀에게 돌아올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그 후로도 주찬휘는 허지안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게 그의 잘못이라며 그녀를 위로하기까지 했다.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내면서도 허지안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예전과 다름없었다.그래서 그냥 심이슬의 뱃속에 있던 아이가 그의 첫 아이였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라 생각했다.주씨 가문 같은 재벌가에서 장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에 아이를 잃어서 상심한 것이지, 결코 심이슬을 사랑해서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하지만 만약 주찬휘의 말대로 이미 오래전부터 심이슬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라면, 그리고 그 취객들이 사실은 허지안이 고용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된다면...허지안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방금 한 말을 주찬휘가 듣지 못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주찬휘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허지안을 뚫어져라 보면서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허지안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가방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쥐어짰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이슬 씨라는 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헛소리가...”주찬휘가 이런 조잡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리 없었다. 곧장 휴대폰을 꺼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2년 전 지안이한테 몹쓸 짓을 하려 했던 취객들을 다시 조사해. 그
그때 아래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주찬휘가 소양시에서 홀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었는지 허지안이 주씨 가문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문이 열리자 허지안이 짐짓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물었다.“찬휘야, 이슬 씨가 여전히 이혼하겠대?”주찬휘가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의 기색을 살핀 허지안은 이미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었다. 입가에 미소가 소리 없이 번졌다.심이슬이 이혼을 고집하고 있는 이상 설령 주찬휘의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가 생겼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녀가 떠나고 나면 결국 주찬휘의 곁에 남을 유일한 여자는 자연스럽게 허지안이 될 터.과거에 나누었던 사랑을 생각하면 머지않아 주찬휘가 다시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 허지안은 확신했다.“이슬 씨가 끝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냥 그렇게 해줘. 걱정하지 마. 내가 계속 곁에 있어 줄게.”주찬휘가 곧 자유의 몸이 될 거라는 생각에 취했는지, 허지안은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흥분을 더는 감추지 못했다.그런 허지안을 보는 주찬휘의 눈빛에 더 이상 예전 같은 다정함이 없었다. 오직 서늘할 정도의 평온함만 감돌았다.“허지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슬이야. 설령 이슬이랑 이혼하게 된다 해도 너랑 다시 만날 일은 없어.”주찬휘의 매정한 말에 허지안이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내가 귀국하고 나서 나한테 연애할 때처럼 잘해줬잖아. 슬퍼하면 곁을 지켜주고 여행 가고 싶다니까 일까지 미뤄두고 같이 가줬으면서. 그게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아니면 뭔데?”허지안이 다급하게 다가가 주찬휘의 손목을 잡았다. 예전 연애 시절 싸웠을 때처럼 애교를 부리며 상황을 무마해 보려는 심산이었다.“내가 또 떠날까 봐 겁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거지? 걱정하지 마. 이번에 돌아오면서 다시는 널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니까. 이제 이슬 씨도 이혼하겠다고 하니 우린 다시 시작하면 돼. 모든 걸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뿐이야.”주찬휘가 허지안의 손을
심이슬이 떠난 뒤에도 주찬휘는 카페에 홀로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카페가 문을 닫을 시간이 다 될 때까지.주인장이 정중하게 커피 리필 여부를 묻고 나서야 그는 꿈에서 깬 듯 정신을 차렸다.카페를 나선 주찬휘는 저도 모르게 심이슬의 집 밑으로 걸어왔다.불이 켜진 집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 속에는 주찬휘에게 익숙한 그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문득 지난 4년 동안 심이슬이 이토록 편안하게 웃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눈을 감고 가슴 깊이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른 뒤 발길을 돌렸다.소양시에서의 일정이 하루도 채 걸리지 않고 끝이 났다.그리워하던 그 사람을 끝내 붙잡지 못한 채 주찬휘는 홀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운경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다만 문을 열었을 때 늘 소파 위에서 그를 기다리던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주찬휘가 영혼을 잃은 인형처럼 멍하니 침실로 걸어 들어갔다.침실에 심이슬의 물건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드레스룸의 옷가지들, 욕실의 세면도구, 화장대의 화장품들까지... 그녀가 떠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하지만 주찬휘는 잘 알고 있었다. 심이슬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평소 심이슬이 앉던 자리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 일기장 한 권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일기장을 꺼내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4년 전 결혼한 날부터 유산 후 퇴원한 날까지 심이슬이 띄엄띄엄 쓴 일기였다.[2022년 5월 17일. 오늘 찬휘와 결혼했다. 그와 함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한 번 노력해 보고 싶다.][2022년 8월 20일. 찬휘와 처음으로 단둘이 외식을 했다. 이걸 데이트라고 해도 될까? 너무 행복했다.][2023년 9월 25일. 소양에 계신 부모님을 뵙고 싶었지만 찬휘가 일이 바쁘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를 이해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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