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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췌장암 4기. 의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통보했지만, 순정의 귀에는 그 말이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등 뒤에서부터 명치까지 지져지는 듯한 통증이 하루에도 몇 번씩 몰려왔고, 그때마다 순정은 이불깃을 움켜쥐고 소리 없이 신음을 삼켰다.
진통제로도 가라앉지 않는 밤이 늘어갈수록, 차라리 이대로 눈을 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병실 창밖으로 노을이 질 때마다 순정은 생각했다.
오늘 밤을 넘길 수 있을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평생 남편과 시댁 눈칫밥을 먹고 살았던 세월이었다. 남들처럼 병실에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줄 자식도 없었다.
서른 해가 넘도록 한 지붕 아래 살을 맞대고 산 남편은, 정작 순정이 죽어가는 마지막 몇 달 동안 병실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55년의 인생 중 그나마 숨통이 트였던 건, 시장 골목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차렸던 반찬가게였다.
새벽마다 손수 무친 콩나물무침과 며칠씩 정성으로 삭힌 갓김치, 뭉근하게 고아낸 장조림을 사러 오는 단골들이 하나둘 늘었다.
입소문을 타면서부터는 문 열기도 전에 줄을 서는 날도 있었다.
순정은 그 시절이 유일하게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피땀 흘려 번 돈조차 순정의 몫으로 남는 법은 없었다.
남편의 실패를 대신 메우다 보니, 어느새 흘러가 버린 세월이 삼십 년이었다.
언젠가 마트 진열대에서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내려놓았던 캐시미어 목도리가 떠올랐다.
옷 한 벌 마음 편히 사 입은 적이 없었다.
좋아하던 딸기가 제철에 나와도, 순정은 늘 상처 난 못난이 과일을 골라 담았다.
친구들이 계모임에서 온천 여행을 간다고 할 때도 순정은 집에 남았다.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그 흔한 욕심 한 번 제대로 부려본 적이 없었다.
순정의 인생에서 '나를 위해서'라는 문장은 단 한 번도 완성된 적이 없었다.
머리맡의 휴대전화는 며칠째 죽은 듯 조용했다.
끝내 안부 문자 한 통 보내지 않는 남편의 정적이 야속하다 못해 서글펐다.
이렇게 혼자 버려져 죽는구나 싶을 때마다, 순정은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리고 소리 죽여 울었다.
순정은 마지막 힘을 짜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억울했다. 단순히 아파서 억울한 게 아니었다.
평생을 남을 위해서만 갉아 먹히며 살았는데, 정작 나 자신으로는 단 하루도 살아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억울했다.
"……다시 산다면."
순정의 입술이 힘없이 달싹였다.
"다시 산다면, 나는……"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순정의 의식은 새하얀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눈이 떠졌다.
천장이 낯설었다. 병실의 삭막한 흰 천장이 아니라, 노란빛이 감도는 익숙한 몰딩이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순정은 숨을 멈췄다.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손등, 마디마디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은 부드러운 손가락이었다.
몸을 일으키는데도 어디 하나 삐걱거리는 곳이 없었다.
삼십 년 넘게 순정을 괴롭히던 오십견도,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시큰거리던 무릎도, 명치의 통증도 흔적조차 없었다.
벽에 걸린 거울 앞으로 다가간 순정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울 속에는 스물다섯 살의 자신이 서 있었다.
잡티 하나 없이 뽀얗고 탱탱한 피부,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칼. 눈가에는 주름 대신 촉촉한 물기만 어려 있었다.
"내가…… 돌아온 거야?"
목소리마저 낯설었다. 갈라지고 탁했던 오십대의 음성이 아니라, 맑고 여문 젊은 목소리였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손때 묻은 자개장, 창가의 화분, 그리고 벽에 걸린 작은 액자.
대학 졸업식 날 환하게 웃고 있는 할머니와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물려주신 낡은 이층집, 대학을 갓 졸업하고 강태오와 동거를 시작했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전생에서는 이 집도, 할머니와의 추억도 지켜내지 못한 채 흘려보냈었다.
순정은 침대에서 내려와 차분히 걸음을 옮겨보았다.
발목도, 무릎도, 허리도 어디 하나 시큰거리지 않았다.
순정은 저도 모르게 방 안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통증 없이 온전히 내 의지대로 걷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감격스러웠다.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젖히자 아침 햇살이 얼굴 가득 쏟아졌다.
마당의 감나무는 아직 어렸고, 담장 너머 골목에서는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가 나긋하게 번지고 있었다.
흙냄새, 풀냄새, 그리고 싱그러운 아침 공기. 병실 소독약 냄새에 절어 있던 코로 살아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벅차올랐다.
그러다 문득,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었다.
강태오. 지금은 그저 순정에게 얹혀사는 백수 애인일 뿐이지만, 순정은 안다.
그 남자가 앞으로 삼십 년 동안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갉아먹을지.
그리고 병실에 혼자 남겨졌을 때, 망가진 가전제품 버리듯 외면하던 그 차가운 무심함까지.
"두고 봐."
순정은 거울 속 자신의 눈동자를 또렷이 마주 보았다.
이렇게 젊고 건강한 몸으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아직은 막막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번 생에는 절대로, 나를 버려가며 남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것.
바로 그때, 방문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태성의 곡이 끝나자, 7호실 안에는 반주가 뚝 끊긴 특유의 조용한 적막이 밀물처럼 내려앉았다.태성이 테이블 위의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화면 상단에는 다음 예약곡이 없어 반짝이는 대기 문구만이 외롭게 껌벅이고 있었다.노래방 특유의 알록달록한 미등 조명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방 안을 천천히 순환하며 어두운 소파 구석구석을 몽환적으로 물들였다.소파 안쪽 구석에서는 벽에 머리를 푹 기댄 민우가 안경이 살짝 비뚤어진 줄도 모르고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도경은 그런 민우에게 자신의 외투를 덮어주었다.태성이가 마이크를 테이블 위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툭 올려놓으며 소파에 털썩 기댔을 때, 옆에 앉은 순정이 이현의 소매 끝을 살짝 잡으며 입을 열었다.“너 작업할 때 매일 틀어놓는 노래 있잖아. 그 노래 진짜 좋던데, 그거 불러라.”순정의 뜻밖의 제안에 이현의 긴 눈매가 둥그렇게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머금었다.이현은 기분 좋다는 듯 픽 웃으며 순정이의 시선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은 채 테이블 위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누나 내 작업용 음악까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영광인데.”이현의 길쭉한 손가락이 리모컨 버튼을 익숙하게 눌러 내려갔다.잠시 후, 어두운 방 안으로 감성적이고 세련된 R&B 스타일의 팝 반주가 은은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이현의 보컬은 단순히 '듣기 좋은 수준'이 아니었다. 가라앉으면서도 묘한 울림을 주는 허스키한 미성이 첫 마디부터 방 안의 공기를 압도했다.순정은 이현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한 압도적인 음악적 재능을 확인하고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이현은 노래를 부르는 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순정은 바라보며 짓는 미소는 가사 하나하나를 순정에게 건네는 은밀하고 완벽한 고백처럼 만들어 버렸다.맞은편에서 캔맥주를 들고 있던 도경의 눈빛이 그 꼴을 보며 살짝 가라앉았다.도경의 커다란 손마디에 슬쩍 힘이 들어갔고, 그의 깊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이현과 순정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1차 치맥집의 허물없는 열기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자, 가을 밤의 서늘하고 알싸한 공기가 볼 끝을 스쳤다.술기운에 달아오른 뺨에 시원한 밤바람이 더해지자 가슴속이 묘하게 몽글몽글해졌다.사거리 모퉁이에 위치한 지하 노래방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밤공기와 섞인 약간의 알코올 기운과 특유의 반짝이는 조명 빛이 훈훈하게 번져 있었다."손님, 지금 큰 방은 다 나가고 좀 좁은 방밖에 안 남았는데 괜찮으세요?"카운터 직원의 말대로 안내받아 들어간 7호실은 다섯 명이 들어서기엔 확연히 아담하고 아늑한 크기였다.키가 훌쩍 큰 하숙집 남자들의 커다란 덩치가 한꺼번에 밀려들자 금세 방 안의 밀도가 빽빽해졌다.가장 먼저 흥을 주체하지 못한 막내 태성이 다이빙하듯 소파 제일 안쪽 구석으로 훌쩍 뛰어들었고, 술이 취해 멍해진 민우가 그 옆으로 터덜터덜 따라 들어와 앉았다.두 장정이 소파 중앙 안쪽 상석을 큼직하게 차지해 버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좁은 소파 공간이 순식간에 꽉 들어찼다. 뒤따라 들어오던 순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태성의 등짝을 살짝 찰싹 때렸다."야, 윤태성 너 너무 커다래! 너 때문에 더 좁잖아!""최대한 구겨져 볼게요! 얼른 앉으세요!"태성이가 배시시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 바람에, 순정은 남은 소파 끄트머리 자리에 얼떨결에 먼저 앉게 되었다.“너 너무 밀린 거 아니냐?”순정이 자리를 고쳐 잡기도 전에, 왼쪽에서 묵직하고 따뜻한 체온과 함께 도경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과제로 사흘 밤을 새운 데다 술기운까지 올라와 도경의 긴장되었던 어깨 힘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지만, 그 커다란 골격이 주는 은근한 존재감은 좁은 소파 안에서 단숨에 순정의 왼쪽 감각을 채워버렸다.그리고 곧이어 오른쪽 공간으로 매끄럽고 유연한 동작의 이현이 슬며시 자리를 붙여 앉았다.“누나, 좁죠. 이쪽으로 조금만 붙어요.”이현이 나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순정의 어깨 쪽으로 자리를 바짝 당겨앉았다.결국 순정은 소파 위에서 왼쪽의 도경과 오른쪽의 이현 사이에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순정의 신경은 자꾸만 제 옆자리에 고요하게 앉아 있는 도경에게로 쏠렸다. 도경은 사흘 밤낮을 피 말리는 전공 설계 마감에 쏟아부은 탓에 겉보기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에 공복 맥주까지 들어간 탓인지, 도경의 하얀 볼과 귓바퀴가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속이 부대끼는지 도경은 정작 테이블 가득 차려진 치킨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무심한 표정으로 젖은 맥주 잔 겉면만 집게손가락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도경의 집게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으면서, 뼈 집게를 들고 바삭한 순살 치킨만을 골라 순정의 앞접시 위로 연신 무심하게 던져주고 있었다. 순정의 접시 위에는 살코기가 수북하게 쌓여 가는데, 도경의 앞접시는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야, 도경아. 너 아까부터 왜 치킨은 안 먹고 나한테만 다 줘? 너도 좀 먹어.” 순정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제 앞접시를 가리키며 말했지만, 도경은 그저 묵직한 눈빛으로 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속 부대껴서 그래. 너나 많이 먹어.” “밤새우고 바로 술 들어가서 그러지? 속 부대끼면 튀김옷 말고 살코기만 조금씩 씹어봐. 비워두면 더 속쓰려.” 순정은 결국 참지 못하고 제 집게로 잘 익은 순살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도경의 입 앞까지 살포시 가져다 대며 다정한 어조로 타일렀다. “자, 이것 봐. 기름기도 없고 촉촉한 부위야. 아 해봐.” 도경이 가만히 순정을 바라보았다. 술기운에 살짝 풀린 깊은 눈동자가 조명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도경은 순정이가 집어 준 치킨 조각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도경의 긴 손가락이 향한 곳은 치킨이 아니었다. 도경은 순정이가 집게를 쥐고 있는 손등과 손가락을 제 뜨거운 손으로 살짝 감싸 쥐었다. ‘어……?’ 갑작스럽게 닿아온 묵직하고 뜨거운 온기에 순정의 손끝이 나지막하게 떨렸다. 도경은 순정의 손을 쥔 채로 자연스럽게 치킨 조각을 입
테이블 위로 산처럼 쌓인 치킨 상자들과 시원하게 김이 서린 생맥주 잔이 쉴 새 없이 오가자, 온종일 찌푸려져 있던 얼굴에도 서서히 발그레한 피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간 몸과 마음을 극도로 갉아먹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던 터라, 빈속에 들어간 알싸한 첫 맥주 한 모금은 그야말로 독이자 달콤한 약이었다. “아…… 진짜 미쳤다. 튀김옷 바삭거리는 것 좀 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소리야…….” 태성은 젓가락이나 뼈 집게 따위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양손에 위생장갑을 척 착용하더니, 마른사막을 만난 것처럼 거침없는 먹방을 시작했다. 후라이드 닭다리 하나를 통째로 입안 깊숙이 밀어 넣고 몇 번 우물거리는가 싶더니, 불과 1초 만에 살코기 하나 남지 않은 뼈만 매끈하게 쏙 발라내어 접시에 툭 내려놓았다. “와, 윤태성. 너 방금 어떻게 한거야? 어떻게 씹지도 않고 뼈만 쏙 뱉어내?” 순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 섞인 탄성을 내뱉자, 태성은 닭다리 뼈를 무심하게 던져놓으며 발그레해진 볼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낮까지만 해도 피 말리는 실기 시험을 치르느라 온몸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쏟아부었던 막내였지만, 치킨이 들어가자 얼굴에는 다시금 아이 같은 천진함이 가득 차올랐다. “누나, 원래 체대는 뼈 발라낼 시간조차 아껴가면서 단백질을 쑤셔 넣어야 돼요! 저 오늘 실기 시험 컨디션 완전 좋았거든요? 교수님이 사람들 칭찬까지 해주셨어요!” “진짜? 아이구, 우리 태성이 너무 잘했다!” 순정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칭찬을 건네자, 태성이는 한층 신이 났는지 땀에 젖어 삐죽빼죽 까치집이 된 정수리를 순정의 손 밑으로 은근슬쩍 밀어 넣었다. “잘했죠? 그러니까 얼른 칭찬해 주세요, 누나.” 커다란 덩치의 체대생이 아기 곰처럼 굴며 정수리를 밀어붙이자, 순정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만져주었다. 태성이는 그 손길이 좋은지 헤헤 웃으며 생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대고는 곧바로 양념 닭날개를 다시 집어 들었
덜컥 겁이 날 만큼 커다란 다정함이었다. 한참 동안 침대 위에서 기절하듯 깊게 잠든 도경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순정은, 제 가슴께를 가만히 짓누르며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 낯설고 지독하게 간지러운 울림이 가슴속에 묵직하게 남은 채로, 몇 시간의 시간이 유난히 천천히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이 적막한 하숙집 식구 모두의 팽팽했던 긴장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저녁이 찾아왔다. 어쩌면 이렇게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시기가 딱 들어맞았을까. 막내 태성이의 피 말리는 실기 시험과, 민우의 가혹한 본과 전공 시험, 그리고 도경이의 사흘 밤낮을 갈아 넣은 전공 설계 과제 마감까지. 세 대학생 모두 우연히 같은 날 오후, 그것도 비슷한 시각에 딱 끝난 것이었다. 그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려버린 탓에 다들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제 방에서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태성이 방에서는 바닥에 떡실신해 코를 골며 골골대는 소리가 문밖까지 새어 나왔고, 민우의 방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채 좀비처럼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낮에 잠시 찾아갔을 때 기절하듯 잠들어 있던 도경이의 방 역시 깊고 침울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어휴, 진짜 다들 손하나 까딱할 힘도 없나 보네…….” 순정은 조용한 거실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대문 쪽에서 도어록이 도르륵 열리는 소리와 함께 경쾌하고 매끄러운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이현이었다. 최근 드라마 관련 미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이현은,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집 안을 가득 채운 죽은 듯한 정적을 감지하더니 고양잇과 동물처럼 눈을 짓궂게 반짝였다. “누나, 집이 왜 이렇게 고요해요? 무슨 집단 기절이라도 한 건가?”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선 이현이 특유의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순정에게 다가왔다. 순정은 난감한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이현아 왔어? 글쎄, 어쩌면 이렇게 셋이 똑같이 오늘 오후에 시험이랑 과제 마감이 다 끝났대. 너무 피곤했는지 저녁때가 됐는
도경이 도면통을 고쳐 메고 대문을 나서 멀어진 뒤에도, 순정은 정수기 옆에 서서 괜스레 제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약은 무슨…… 멀쩡한 얼굴로 싱거운 소릴 하고 가네.’순정은 덤덤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상하게도 도경이가 보온병을 챙겨 나가던 그 묵직한 뒷모습과 낮게 던지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그저 무뚝뚝한 동갑내기 녀석으로만 여겼건만, 어제 새벽 이후로 도경의 말 한마디나 스쳐 지나가는 시선에 자꾸만 간지럽고 어색한 결이 섞여드는 기분이었다.순정은 주방 테이블 위에 흩어진 티스푼과 유자청 병을 정돈하고는 서둘러 점심 준비를 시작했다.크리틱이 끝나자마자 돌아오겠다던 도경의 무심한 한마디가 신경 쓰여서만은 아니었다.밤새 도면을 그리느라 피곤함이 극에 달했을 녀석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차려주고 싶은, 익숙하고 온전한 식구로서의 마음이었다.오전 11시 반이 넘어가자, 대문 쪽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마감 제출과 크리틱을 무사히 끝내고 온 도경이었다.어깨에 멘 도판과 도면통을 내려놓은 도경은 순정이 차려놓은 따뜻한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로 휑했던 속을 채웠다.순정이 은근하게 피하는 시선 속에서도, 도경은 묵직하고 깊은 눈빛으로 순정을 담아내며 덤덤하게 밥을 먹었다."크리틱 잘 끝났으면 방에 올라가서 좀 자라. 밤새워서 피곤할 텐데.""어. 밥 먹었으니까 올라가서 좀 잘게."도경은 숟가락을 놓더니, 주방을 나서기 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따뜻한 유자차 보온병을 다시 챙겨 들었다.그리고는 무심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이고는 2층 제 방으로 올라갔다."저녁에 깨워라. 그때까지 기절해 있을 테니까."오후 2시가 지날 무렵, 하숙집은 조용했다.민우와 태성이는 여전히 학교에서 시험 치르느라 바빴고, 도경의 방이 있는 2층은 죽은 듯 고요했다.순정은 도경이 다 비운 찌개 냄비를 닦고 주방 정리를 마친 뒤, 문득 도경의 방이 떠올랐다.아침에 급하게 나가느라 과제용 아크릴 조각과 트레이싱지, 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