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건넛방의 어둠은 유독 깊고 무거웠다.도경은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당겨 덮은 채, 불 꺼진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머릿속은 온통 낮에 마당에서 있었던 일로 하얗게 비어 있었다.쿵 소리와 함께 눈앞이 아찔해지던 찰나, 순정을 품에 확 끌어안았던 그 순간의 감각이 자꾸만 손끝에 되살아났다.꽉 감싸쥐었던 허리의 가녀린 라인, 귓가를 때리던 놀란 숨소리, 그리고 제 품에 불쑥 안겨오던 작은 몸집까지.쿵- 쿵- 쿵-.방 안의 고요를 깨울 듯 가슴 한구석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도경은 이불을 훽 걷어차고 일어나 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미쳤나 봐, 정말."누가 볼세라 겉으로는 평소처럼 덤덤한 척 굴었지만, 사실은 제 심장 소리가 순정에게 들릴까 봐 그게 제일 조마조마했다.그날 밤, 도경의 방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하숙집 식구들의 생활 리듬도 조금씩 달라졌다.민우는 매서운 시험이 끝났는데도 내년에 시작될 본과 3학년 실습 준비를 위해 의학 서적을 놓지 못했고, 태성은 훈련과 휴식을 병행하며 마루를 활보했다.이현은 드라마 의 첫 방송 성공 이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지만, 집에 돌아오면 여전히 어리광을 부리며 장난을 쳤다.그리고 도경은 설계 과제와 개인 작업을 핑계로 거실에 머무는 시간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문제는 순정이었다. 캣타워 사건 이후, 순정은 도경을 보면 자꾸만 머릿속이 하얘졌다.어째서인지 요즘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도면을 짚는 옆모습만 봐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왜? 뭐 할말있어?""아...아니, 할 말 없어."곁을 지나가던 도경이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순정의 손목을 툭 잡아끌었다."어? 왜……."영문도 모른 채 순정이 고개를 든 찰나, 도경은 순정의 손에 들려 있던 과자 조각을 그대로 자기 입에 쏙 가져가 씹었다. 손목을 잡힌 채 멍하니 올려다보는 순정의 코앞에서, 도경의 짙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접혔다."……?""음, 생각보다 별로네. 너가 먹을 땐
도경은 그 짧은 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허리에 닿은 손바닥으로 순정의 가녀린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어설프게 품에 갇힌 작은 몸집,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찔할 만큼 맑은 눈동자.이대로 조금만 더 안고 있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 치솟았다.하지만 그 마음이 얼굴에 드러날까 봐 도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목덜미로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긴장한 채, 도경은 최대한 천천히, 아무렇지 않은 척 팔에서 힘을 풀어 나갔다."……다친 데 없어?"낮고 아득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순정은 몽롱해진 정신을 뒤늦게 수습하며 멍하니 대답했다."어? 어. 괜찮아.""발목은?""괜찮아.""확실해?""괜찮다니까……."도경은 순정이 제대로 두 발로 중심을 잡고 서는 걸 확인하고서야 천천히 허리에서 손을 뗐다.순정도 그제야 주먹에 힘을 풀며 움켜쥐고 있던 도경의 셔츠를 놓았다. 구겨진 옷자락이 손바닥에서 풀려났다.하지만 손이 떨어진 뒤에도, 이상하게 도경의 단단한 팔이 감싸쥐었던 허리께와 닿았던 가슴팍의 온기가 여전히 화끈거리며 남아 있었다.순정은 멍해진 채 닿았던 허리를 손으로 가만히 가렸다.가슴 안쪽에서 유난히 요란하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도경은 곧바로 몸을 돌려 쓰러진 캣타워 쪽으로 걸어갔다.귀 끝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순정은 등 뒤라 볼 수 없었다."그러게 내가 무겁다고 했잖아.""…….""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안 다쳤잖아!"평소처럼 티격태격하는 대화였다.하지만 도경의 목소리 끝이 살짝 잠겨 있었고, 캣타워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기둥을 꽉 움켜쥔 도경의 손마디는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순정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도경의 이상징후를 알아채지 못했다."넌 가서 알밤이나 데리고 있어. 이건 내가 옮길 테니까."순정은 이번에는 군말 없이 얌전히 물러났다.조금 전까지는 오기로라도 들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지금은 도경의 얼굴을똑바로 쳐다보는 것조차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알밤이는 지금껏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 본 적이 없었다.얼마 전까지 문이 열리기만 하면 번개처럼 마당으로 튀어나가기 일쑤였다.순정이 안고 들어와 방석 위에 앉혀 놓아도, 문틈이 벌어지는 소리만 나면 어느새 마당 감나무 밑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실내생활을 시켜 보겠다고 몇 번이나 애를 썼지만 번번이 허사였다.그런데 날씨가 영하로 곤두박질친 며칠 전부터 알밤이의 태도가 달라졌다.마루 아랫목 장판 위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문을 열어 줘도 한 번 쳐다볼 뿐 나가지 않았다."드디어 알밤이도 집안에서 겨울을 나기로 했나 보네."순정이 알밤이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 소식을 들은 도경이 일요일 아침부터 마당에서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뭐해, 도경아?"순정이 빨래 바구니를 든 채 마당으로 나서다가 눈이 동그래졌다.도경이 마당 구석, 봄가을 내내 알밤이가 차지하고 놀던 대형 캣타워를 들어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키가 순정의 머리 위까지 오는 대형 캣타워였다.원목 기둥에 삼줄을 촘촘히 감았고, 여러 층의 선반과 둥근 숨숨집, 해먹에 전망대까지 달린 근사한 물건이었다."캣타워 옮기게?""어. 방 안에 들여놓으려고."도경이 캣타워 기둥을 슥 털어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알밤이가 이제 방 안에서 지낼 거라며. 마당에 그냥 두면 망가지기도 하고, 안에서 심심하지 않으려면 옮겨줘야지."도경은 캣타워 기둥을 몇 번 두드려 튼튼한지 확인하더니, 한쪽 끝을 두 손으로 잡고 허리를 숙였다."집 안으로 옮길 거야. 거실 창가 쪽에 놓으면 해가 잘 들겠지.""잠깐, 나도 도와줄게."순정이 빨래 바구니를 내려놓고 다가갔다. 도경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됐어. 무거워.""나도 그 정도는 들 수 있거든?""....아니, 가만있는게 도와주는 거라니까?"도경은 캣타워의 한쪽을 잡은 채 순정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몸으로 슬쩍 막아섰다.그 말투에 이상하게 오기가 발동한 순정이 미간을 찌푸렸다."나도 한쪽 들면
11월이 어느새 지나고 12월이 되었다.하숙집 식구들은 저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하숙집의 12월은 각자의 자리에서 숨 가쁘게 달리는 식구들로 늘 분주했다.본과 2학년의 매서운 과제와 기말고사 폭탄에 빠져 밤을 지새우는 민우, 건축학과 특유의 밤샘 마감과 기말 과제에 치여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도경, 그리고 자신이 각본 검토에 참여한 드라마 《재벌가의 유령》 첫 방송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에 여념이 없는 이현까지.그중에서도 가장 큰 빈자리는 태성이었다.세계대학유도대회 출전을 위해 진작에 선수촌으로 들어간 태성 때문에, 늘 시끌벅적하던 하숙집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 허전했다.순정은 평소처럼 청소를 하고 따뜻한 국을 끓여 식탁을 차리면서도, 밥을 몇 고비씩 고기째 쓸어 담던 태성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리워지곤 했다.그러는 사이 날씨는 부쩍 차가워졌고, 마당의 감나무는 마지막 잎까지 떨군 채 앙상한 가지만 남겼다.하숙집에도 겨울이 찾아와 있었다.태성이 돌아온 건 그 주 토요일 저녁이었다."다녀왔습니다!"현관문이 열리며 특유의 커다란 덩치와 함께 쌩쌩한 겨울 바람을 달고 태성이 들어왔다.그의 목에는 번쩍이는 금메달이 무겁게 걸려 있었다."어머, 태성아!"순정이 반가움에 달려 나가자, 태성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목에 걸린 메달을 내어 보였다.소란을 듣고 방에서 나온 이현과 도경, 민우도 마루에 모여들었다.도경은 팔짱을 낀 채 “……다치진 않았냐.”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고, 민우는 태성의 어깨와 손목을 살피며 "붕대 감은 데는 없네. 다행이다"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이현은 느긋하게 기둥에 기대 "와, 우리 막내 목에 뭐가 걸려 있네" 하며 능글맞게 웃었다.식구들의 진심 어린 축하에 신이 난 태성이 자랑스레 금메달을 어루만지더니, 때마침 마루 끝을 지나가던 알밤이를 덥석 안아 들었다."알밤아! 이것 봐라! 이 형아가 금메달 따왔다! 너도 한번 목에 걸어볼래?"묵직하고 번
세 남자의 서늘한 기운에 남학생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거리던 바로 그때였다."누나ㅡ! 저 다 옮겨드리고 왔습니다ㅡ!"저 멀리서 태성이 땀을 뻘뻘 흘리며 쿵쿵 달려오고 있었다.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 끝에 맺혀 뚝뚝 떨어지고,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는 쩍쩍 갈라진 팔 근육이 햇빛에 번들거렸다.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 모습은, 남학생들의 눈에는 영락없는 '조폭 등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남학생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한 걸음, 두 걸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번호고 뭐고 홱 돌아서서 도망치듯 부스 밖으로 뛰쳐나갔다.한 학생은 신발이 벗겨질 뻔한 것도 모른 채 내달렸다."어? 왜 저래요? 뭐 놓고 갔나?"태성이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순정은 멀어져 가는 남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태성아, 너 보더니 놀랐나 봐.""제가요? 제가 왜요?"태성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저 그냥 지나간 건데요?""그러니까 그게 더 문제야."순정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태성의 등을 철썩 때렸다.도경과 이현, 민우는 그제야 굳어 있던 어깨를 풀었다. 이현은 네임펜 뚜껑을 딸깍 닫으며 슬쩍 시선을 돌렸고, 민우는 휘어진 볼펜을 조용히 내려놓았다.도경은 헛기침을 하며 순정의 어깨 뒤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서늘한 기운이 사라진 자리에 평소의 시끌벅적한 부스가 돌아왔다.그런데 그때 순정의 눈이 태성의 손으로 향했다."어? 태성아, 그건 뭐야?"태성의 양손에는 종이 캐리어가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아이스아메리카노 다섯 잔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아, 이거요! 아까 박스 들어다 드린 어머님들이 고맙다고 사주셨어요! 다섯 잔이요! 우리 식구 몇 명이냐고 물으셔서 다섯이라고 했더니 딱 맞춰서 사다 주셨어요!""어머, 센스도 좋으셔라.""그런데 형, 누나, 이거 하나씩 드세요!"태성이 잔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시원한 커피가 손바닥에 닿자 순정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순정은 잔을 든 채 텅 빈 아주
플리마켓의 한낮은 점점 열기를 더해갔다. 순정네 부스에서 몇 걸음 떨어진 다른 매장 앞에서는 아주머니 서너 분이 커다란 박스를 둘러싸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묵직한 물걸레 청소기 박스였다. 둘이서 양쪽을 맞잡았다가 한 사람이 손을 놓자 박스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이고, 싸다고 덥석 샀더니 이게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네." "이거 주차장까지 어떻게 들고 가지? 저 끝에 세웠는데……." 아주머니들이 허리를 짚고 난감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마침 짐을 나르던 태성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머님들, 제가 들어다 드릴까요?" "어머, 총각이 이걸?" "네! 제가 번쩍 들어다 드리겠습니다!" 태성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스 한쪽을 잡아 휙 하고 어깨 위로 올렸다. 마치 솜이불이라도 드는 듯한 몸놀림이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팔뚝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고, 박스를 받친 어깨와 등의 근육이 티셔츠 위로 단단하게 솟았다. "세상에, 저 힘 좀 봐." "어머, 총각 힘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네! 운동하나 봐?" "네! 유도 합니다!" "유도? 어쩐지 어깨가 이만하더라. 어디 총각이야? 저 건너 아파트 사는 총각이야?" 한 분은 어디선가 챙겨온 귤을 태성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고, 다른 한 분은 "우리 딸이 대학생인데 한번 만나볼래?" 하고 대놓고 중매를 서기 시작했다. 태성은 영문도 모른 채 "저는 아직 운동이 우선입니다!" 하고 해맑게 대답해 아주머니들을 더 열광시켰다. "어머, 애가 어쩜 이렇게 순진해." "저기 저쪽 총각이었네! 우리 저기도 구경하고 가자!" 아주머니들은 태성을 앞세우고 순정네 부스로 우르르 몰려왔다. 순정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이 총각 말 잘 들었죠?" "아이고, 아주 야무진 일꾼이야. 아가씨네 집 막내야?" "네, 저희 집 리트리버예요." "하하하, 리트리버래!" 아주머니들은 박장대소하며 찻잔 세트와 놋주전자, 접시 몇 장을 척척 골라 담았다. 계산을 마친 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