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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스물다섯의 아침

Author: popona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6 20:21:29

2화. 스물다섯의 아침

눈이 떠졌다.

천장이 낯설었다. 병실의 삭막한 흰 천장이 아니라, 노란빛이 감도는 익숙한 몰딩이었다.

순정은 멍하니 그 몰딩의 무늬를 눈으로 좇았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천장이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을 보는 순간, 순정은 숨을 멈췄다.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손등. 마디마디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은 부드러운 손가락.

순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뒤집어 보고, 다시 뒤집어 보았다.

평생 고된 일로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던 그 손이 아니었다.

손톱 밑에 늘 박여 있던 마늘 물자국도, 세제에 갈라진 지문 틈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어디 하나 삐걱거리는 곳이 없었다.

삼십 년 넘게 순정을 괴롭히던 오십견도,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시큰거리던 무릎도, 마지막까지 순정의 숨통을 조여왔던 그 지긋지긋한 명치의 통증도 흔적조차 없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봐도 통증은커녕 몸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이렇게 가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낯설어서, 순정은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벽에 걸린 거울 앞으로 다가간 순정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울 속에는 스물다섯 살의 얼굴이 있었다.

잡티 하나 없이 뽀얗고 탱탱한 피부,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검은 머리칼, 화장 하나 하지 않았는데도 생기가 도는 볼.

눈가에는 주름 대신 촉촉한 물기만 어려 있었다. 목선은 매끈했고, 쇄골 아래로는 탄력이 살아 있었다.

순정은 떨리는 손끝으로 제 뺨을, 이마를, 목덜미를 하나하나 쓸어보았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튕겨내듯 탄탄했다. 스물다섯. 세상에서 가장 싱그럽고 눈부신 나이.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그 시절의 몸으로, 순정은 다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돌아온 거야?"

목소리마저 낯설었다. 갈라지고 탁했던 오십대의 음성이 아니라, 맑고 여문 젊은 목소리였다.

순정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달력, 손때 묻은 자개장, 창가에 놓인 화분.

할머니가 물려주신 이 낡은 이층집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이 집에서 강태오와 동거를 시작했던 바로 그 시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순정은 한동안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손등을 몇 번이나 꼬집어 봐도 아픔만 생생할 뿐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제야 순정은 가만히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살면서 절에 다닌 적도 몇 번 없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저절로 부처님이 떠올랐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렇게 다시 눈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생만큼은 절대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겠습니다.

순정은 눈을 감고 진심을 다해 몇 번이고 되뇌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감사함은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순정은 방 한쪽 벽에 걸린 작은 액자로 시선을 돌렸다.

대학 졸업식 날, 순정과 할머니가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할머니는 여전히 정정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순정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전생에서는 이 사진을 어딘가에 처박아 둔 채 몇 년이나 들여다보지도 못했었다.

이번엔 다르게 살고 싶었다.

침대에서 몇 걸음 걸어 보았다. 발목도, 무릎도, 허리도 어디 하나 시큰거리지 않았다.

순정은 저도 모르게 방 안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마치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통증 없이 걷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감격스러웠다.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자 어깨뼈가 시원하게 펴지는 느낌마저 낯설고 좋았다.

순정은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 감격하게 될 줄은, 예전엔 상상도 못 했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강태오. 지금은 그저 순정에게 얹혀사는 백수 애인일 뿐이지만, 순정은 안다.

저 남자가 앞으로 삼십 년 동안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갉아먹을지.

사업이랍시고 벌여놓을 사고들, 그때마다 순정의 명의로 지게 될 빚들.

그리고 끝내 병실 한 번 찾아오지 않던 그 무심한 얼굴까지. 순정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순정은 침대에서 내려와 맨발로 방바닥을 디뎠다. 장판의 서늘한 감촉이 발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었다.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젖히자, 아침 햇살이 얼굴 가득 쏟아졌다.

눈이 부셔서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 눈부심마저도 반가웠다.

마당의 감나무는 아직 어렸고, 담장 너머 골목에서는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가 나긋하게 번지고 있었다.

순정의 코끝에 익숙한 냄새가 스쳤다. 흙냄새, 풀냄새, 그리고 아직 오염되지 않은 아침 공기의 냄새.

병실 소독약 냄새에 절어 있던 코가, 이렇게 살아 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벅찼다.

어디선가 참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고, 골목 끝에서는 누군가 대문을 여는 삐걱 소리가 났다.

그 모든 사소한 소음이, 순정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생의 증거였다.

순정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시는 못 맡을 줄 알았던 냄새였다.

거울 속 스물다섯의 얼굴을 향해 순정은 조용히 웃어 보였다. 웃는 얼굴도 낯설었다.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웃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두고 봐."

순정은 다시 한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젊고 탱탱한 얼굴로, 이렇게 가벼운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직은 막막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번 생에는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

방문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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