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장군님이나 잘하세요: Chapter 21 - Chapter 30

30 Chapters

제21화

그 시각, 송청아는 여전히 불당에 머물러 있었다.만자무늬가 새겨진 검은 옻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은 그녀는 한 손에 붓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흘러내리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고운 얼굴을 살짝 숙인 채 경전을 옮겨 적는 모습은 한없이 차분하고 고요했다.지난밤 배윤호가 떠난 뒤, 송청아는 아무런 항변도 없이 순순히 벌을 받으러 불당으로 향했다. 봉 어멈도 홀로 보낼 수 없다며 따라와 밤새 그녀의 곁을 지켰다.초봄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문틈으로 스며든 냉기가 텅 빈 불당을 서늘하게 맴돌았고, 희미한 촛불마저 찬바람을 맞을 때마다 가늘게 흔들렸다.추위에 오래 노출된 송청아의 가느다란 손가락과 소매 밖으로 드러난 흰 손목은 어느새 자줏빛으로 얼어 있었다. 하지만 손에 쥔 붓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먹을 머금은 붓끝이 종이 위를 사각사각 스칠 때마다, 정갈한 글자가 한 자 한 자 흐트러짐 없이 새겨졌다.버들가지처럼 가녀린 허리도 꼿꼿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눈보라 속에서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소나무처럼 단단하고 꿋꿋했다.송청아는 그렇게 꼬박 하룻밤 동안 경전을 베껴 썼다. 날이 밝은 뒤로도 쉬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마친 것은 채 쉰 번도 되지 않았다.곁에서 밤을 지새운 봉 어멈은 그런 송청아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큰부인은 어젯밤부터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한 채 한숨도 자지 않았다. 밤새 추위에 시달린 몸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으니,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이대로는 버텨 낼 수 없을 터였다.큰도련님은 대체 어찌 이토록 모질 수 있단 말인가.송 아가씨는 가여우면서, 억울한 누명을 쓴 채 밤새 벌을 받고 있는 우리 큰부인은 어찌 가엾지 않단 말인가.반면, 송청아 자신은 아직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잠시 붓끝을 세운 채 창밖으로 번지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아침의 희뿌연 빛은 사라지고, 따스한 봄볕이 창호지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시간을 헤아려 보니 귀환 연회가 시작된 지도 거의 한 시진이 되어 가는 듯했
Read more

제22화

술기운이 오른 배진성은 흥이 더욱 치솟았다. 급기야 황제가 제 아들 배윤호를 정사품 효기장군에 봉하려 한다는 이야기까지 꺼내 놓고 자랑하기 시작했다.배윤호는 겉으로는 시종 겸손하고 온화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수많은 손님 앞에서 아버지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 참석자들이 앞다투어 술을 권하며 치켜세우자 마음속에는 감출 수 없는 자부심이 부풀어 올랐다.또 한 사람이 건넨 술잔을 기분 좋게 비우던 그때, 영안이 다급한 얼굴로 종종걸음을 쳐 다가왔다. 영안이 곁에 바짝 붙어 귓가에 몇 마디 속삭이자, 배윤호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그는 곧바로 배진성에게 사정을 알리고 자리를 벗어나 불당으로 향했다.빠른 걸음으로 불당 앞에 도착하니 송청아는 과연 아직 그곳에 있었다. 이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앉아 경전을 베껴 쓰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배윤호의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경전을 거칠게 움켜쥐더니 단숨에 찢어 버렸다.좁은 불당 안에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밤새 송청아가 정성 들여 써 내려간 종잇장이 그의 손아귀에서 속절없이 구겨져 바닥으로 흩어졌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경전이나 베끼고 있는 것이냐!”송청아는 갑작스러운 고함에 놀란 듯 어깨를 움츠렸다. 억울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을 꾸며 낸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머뭇거리며 말했다.“이곳에서 경전을 베끼라고 벌을 내리신 분은 서방님이 아니십니까?”“이제 그만 베끼거라! 당장 나와 함께 가자!”배윤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송청아의 팔을 잡으려 했다.그러나 송청아가 재빨리 뒤로 몸을 피하는 바람에 그의 손에는 소매 끝만 붙잡혔다. 이어 비단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옷소매가 길게 뜯겨 나가며, 눈처럼 흰 가느다란 팔이 그대로 드러났다.소매 아래의 살결은 본래 눈이 부실 만큼 희었다. 하지만 밤새 추위에 시달린 지금은 핏기마저 사라져 손목과 팔 곳곳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돌았다.그 모습이
Read more

제23화

송청아는 심설화의 날카로운 추궁에도 여전히 태연하고 침착했다.“화신 향 일습을 만든 사람은 분명 접니다. 그리고 이 향을 사용하면 피부에 발진이 돋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낙영원 곳곳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겨우 가라앉았던 소란이 다시 거센 물결처럼 번졌다.“뭐라고요? 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는 겁니까?”“그렇다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우리를 해치려 했다는 말이잖아요!”“대체 장군부는 무슨 속셈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겁니까?”고씨는 송청아의 대답을 듣자 다급해졌다. 황급히 그녀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춰 사납게 꾸짖었다.“허튼소리 하지 말거라! 대체 이 향에 무엇을 섞었느냐? 어서 말하거라!”송청아는 초조함과 원망으로 일그러진 얼굴들이 자신을 에워싼 상황에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시간을 가늠하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송청아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고,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또렷한 목소리로 설명했다.“귀빈 여러분, 부디 진정하십시오. 화신 향 일습에는 목련 봉오리를 말려 만든 ‘신이’라는 약재가 들어 있습니다.”여인들의 소란이 조금씩 잦아들자 송청아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신이는 몸속 독소가 피부 아래 쌓인 사람에게 작용하여, 살결 깊숙이 숨어 있던 독소를 밖으로 끌어냅니다. 그 독소가 피부를 통해 빠져나오는 동안 일시적으로 붉은 발진이 돋는 것이지요.”송청아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이 없었다.“독소가 모두 빠져나가면 한 시진 정도 뒤에 발진도 자연히 가라앉습니다. 그 뒤에는 전보다 살결이 한층 부드럽고 촉촉해질 뿐만 아니라, 피부가 붉어지거나 작은 돌기가 돋는 증상도 사라집니다.”전문적인 설명이 이어지자 여인들은 선뜻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그러나 견문이 넓은 심설화는 송청아의 말뜻을 알아들었다.“그러니까 이 향이 우리의 얼굴을 상하게
Read more

제24화

송채리는 조금 전부터 사람들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혼란을 틈타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갈 생각이었지만, 뜻밖에도 심설화가 다시 그녀를 입에 올리면서 여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송채리에게 쏠렸다.송채리 곁에 있던 여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양옆으로 물러섰다.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던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모두의 눈앞에 훤히 드러났다.송채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송청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송청아는 온기 하나 없는 눈으로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송채리는 굳은 몸을 간신히 움직여 심설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불과 한 시진 전만 해도 다정히 손을 잡고 자매처럼 지내자던 심설화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빛은 예리한 칼날처럼 송채리가 둘러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있었다.그 시선 앞에서는 송채리의 위선도 탐욕도, 그 속에 감춘 악독한 마음도 더는 숨을 곳이 없었다.그때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던 한 귀족 규수가 갑자기 송채리를 가리켰다.“이제 생각났어요. 저 아가씨가 배 소장군과 함께 도성으로 돌아왔다는 송씨 가문의 친딸 아닙니까?”그 말 한마디가 잔잔한 물에 던져진 돌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여인들의 호기심이 삽시간에 들끓었다.“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장군부의 큰부인인 송청아가 송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고, 저 아가씨가 친딸이라는 겁니까?”송채리는 이때다 싶어 다급히 입을 열었다.“맞아요! 제가 바로 송씨 가문의 진짜 딸이에요. 송청아는 변방에서 데려온 천한 핏줄에 불과해요!”예상치 못한 말에 사람들은 순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심설화는 송채리가 이끄는 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는 송청아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이제야 알겠네. 장군부와 송씨 가문은 친딸을 송청아 자리에 앉히고 싶었던 모양이네. 그러니 이토록 서둘러 연극까지 벌인 것이겠지.”심설화가 핵심을 짚어 주자 그 자리에 있던 여인들도 단번
Read more

제25화

“청아야, 조금 전에는 내가 하마터면 너를 오해할 뻔했구나. 부디 마음에 담아 두지 말거라.”심설화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송청아의 눈이 순간 환하게 빛났다.합의현주가 먼저 자매로 지내자고 손을 내민 것은 더없이 큰 영광이었다. 송청아도 심설화의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개며,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온화하게 웃었다.“언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히려 조금 전 제 누명을 벗겨 주셨으니, 제가 언니께 감사드려야지요.”고씨는 송청아 때문에 장군부와 송씨 가문의 계책이 어그러진 것이 못내 분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도 없는 데다, 송청아가 심설화의 눈에 든 이상 계속 미워하는 기색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행여 심설화의 분노가 소용장군부에까지 미칠까 두려웠던 고씨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오늘 일은 모두 제가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입니다. 이 향을 송씨 가문의 아가씨가 만들었다는 말만 듣고, 당연히 조금 전 그 송 아가씨가 만든 줄 알았습니다. 청아가 조향한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요. 그 때문에 이처럼 큰 오해가 생겼으니, 현주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그 말을 들은 송청아는 당장이라도 냉소를 터뜨리고 싶었다.화신 향 일습을 누가 만들었는지 고씨가 모를 리 있는가. 설마 심설화를 바보로 아는 것인가?아니나 다를까, 심설화는 놀랍고도 한심하다는 눈으로 고씨를 바라보았다. 듣는 순간부터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다만 지금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연회 자리였다. 심설화는 장군부의 체면을 생각해 고씨의 거짓말을 대놓고 들추지 않고, 최소한의 낯만 세워 주기로 했다.“그런 사정이었군. 그렇다면 배씨 부인은 앞으로 더욱 주의해야겠네.”심설화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말끝에는 은근한 가시가 서려 있었다.“조금 전 그 송 아가씨는 품성도 재주도 청아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더군. 다시는 가짜를 진주로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게.”고씨는 속으로 송청아가
Read more

제26화

춘행은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현주,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오늘 부저를 나설 때 너무 서두른 나머지 약을 채워 넣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지금 당장 돌아가 가져오겠습니다!”“이미 늦었습니다.”송청아의 단호한 한마디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도일이에게로 쏠렸다.아이의 경련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입술은 검푸르게 질렸고, 입에서는 토사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누가 보아도 조금 전보다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모습이었다.이를 본 심설화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장군부에는 뇌전증에 쓰는 약이 없는가?”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약을 지닌 사람은 없습니까?”심설화는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닥치는 대로 약을 구했다. 고씨도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만 연신 흘렸다.장군부에는 뇌전증을 앓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관련된 약을 비치해 두었을 리 없었다.고씨는 애써 당황한 기색을 억누르며 심설화를 달랬다.“현주, 부디 진정하십시오. 지금 당장 사람을 의원으로 보내 공자께 필요한 약을 사 오게 하겠습니다!”그때 한 여인이 도일이를 가리키며 겁에 질려 외쳤다.“어머나, 공자께서 기침을 하기 시작했어요! 토사물이 기도로 들어간 것 아닙니까?”사람들이 놀라 도일이를 바라보았다.아이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고, 목구멍에서는 숨이 막힌 듯 거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토사물이 기도를 막은 것이 분명했다.이대로 기도에 걸린 것을 제때 빼내지 못하고 폐까지 흘러 들어간다면, 아이는 숨을 쉬지 못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이…… 이를 어찌해야…….”심설화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몸은 돌처럼 굳어 버렸고, 가늘게 떨리는 손끝조차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주위의 여인들도 이런 광경은 난생처음이었다.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발만 동동 구를 뿐, 누구 하나
Read more

제27화

한 차례 맞절을 마치고 나서야 심설화는 송청아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던 심설화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송청아를 바라보았다.“혹시 내 의동생이 되어 주겠느냐?”심설화는 송청아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으며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오늘 네게 입은 큰 은혜를 나와 내 부군이 평생 갚아 나가고 싶구나.”뜻밖의 제안에 사방이 고요해졌다.고씨와 그 자리에 있던 여인들뿐 아니라, 송청아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심설화를 바라보았다.고귀한 신분을 지닌 창국공부의 합의현주가 출신조차 분명하지 않은 고아를 의동생으로 삼겠다고 나선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벌어졌더라도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일이었다.그러나 오늘 송청아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해냈다. 더러운 토사물을 조금도 꺼리지 않고 직접 입으로 빨아내 어린 공자의 목숨을 구했으니, 그녀가 합의현주의 의동생이 된다 한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여인들은 앞다투어 송청아를 칭찬하며 감탄과 부러움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오직 고씨만이 어두운 곳에서 독을 머금은 듯한 눈으로 송청아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몸을 꿰뚫을 듯 흉흉했다.심설화의 진실하고 간절한 눈빛을 마주한 송청아의 마음에도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눈동자 안에서 햇빛을 머금은 듯 잘게 부서진 빛이 반짝였다.“언니와 자매의 연을 맺을 수 있다면 저야 더 바랄 것이 없지요.”그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송청아가 오늘 치른 싸움은 마침내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문득 전생의 오늘이 떠올랐다.전생의 오늘, 배씨 가문은 온갖 핑계를 대며 송청아가 귀환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녀가 밤낮없이 공들여 만든 화신 향 일습마저 송채리의 이름으로 내놓았다. 게다가 송채리는 연회 도중 우연히 심설화의 아들을 구한 덕분에 그녀의 의동생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그날 이
Read more

제28화

“네 잘못이 아니면 대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이냐!”침상 곁에 서 있던 배윤호가 허리를 숙여 송청아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두 사람의 숨결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평온함 속에 희미한 조소가 어린 그녀의 눈을 한 치도 놓치지 않고 노려보았다.“채리는 그저 잠시 그릇된 생각을 했을 뿐이다. 결국 네 공을 빼앗지도 못했는데, 굳이 사람들 앞에서 그 일을 들춰내야 했느냐? 그 아이의 체면은 생각지도 않고 귀부인과 귀족 규수들에게 온갖 모욕과 조롱을 받게 만들다니, 어쩌면 그리도 심보가 고약하단 말이냐!”송청아의 입가에 쓰고 허탈한 웃음이 번졌다.“서방님 말씀대로라면, 저는 밤낮없이 공들여 만든 향을 송채리가 빼앗아 가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아야 했겠군요. 제가 받아야 할 칭찬과 선망을 그 아이가 대신 누리는 동안 불당에 틀어박혀 연회가 끝날 때까지 경전이나 베끼고, 앞으로 제가 만드는 모든 향에도 송채리의 이름을 붙여 내놓아야 옳다는 말씀이시지요?”“그게 뭐가 안 된다는 것이냐?”배윤호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당연하게 내뱉었다.“너는 그 아이의 언니다. 공을 조금 나누어 준다고 해서 네게 무슨 손해가 있겠느냐?”“그렇군요.”송청아가 천천히 긴 속눈썹을 들어 올려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는 여전히 옅은 웃음이 걸려 있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서늘할 정도로 맑았다.“그럼 저도 서방님께 하나 여쭙겠습니다. 서방님께서는 자신의 군공을 도련님과 나눌 수 있으십니까? 아니, 아예 전부 넘겨주고 도련님이 대신 효기장군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까?”배윤호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그건 당연히 안 되지! 그 군공은 내가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세운 것이다. 어찌 명천에게 넘겨줄 수 있겠느냐? 더구나 명천은 전장에 나가 본 적조차 없고 군사를 이끄는 법도 전혀 모르는데, 무슨 자격으로 효기장군의 자리에 오른단 말이냐?”그 대답을 들은 송청아는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서방님도 싫으신 모양이군요. 헌데 무슨 자격으
Read more

제29화

송씨 가문에서 내놓은 혼수가 넉넉한 데다, 혼인한 뒤에도 송청아가 배씨 가문의 향을 만들고 향료점을 돌보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면 배진성은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적장자가 상인 집안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종삼품 소용장군인 그는 송씨 가문의 큰도련님이 무관의 길에 오를 수 있도록 무예를 가르치고 앞날까지 이끌어 줘야 했으니, 송청아는 두 가문이 남몰래 또 다른 조건을 주고받았기에 배진성이 이 혼인을 받아들였으리라 짐작했다.그러나 무슨 약속이 오갔든 배진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송청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전생에도 그녀를 별채로 내쫓고 배윤호에게 송채리를 새 부인으로 맞으라고 한 사람이 바로 그였으며, 사소한 일만 생겨도 걸핏하면 가법을 들먹이며 매질했으니 송청아를 사람으로조차 여기지 않은 셈이었다.그렇다면 이번 생에는 배진성의 약점을 한번 찾아봐야겠구나.그 치명적인 약점 하나만 손에 넣는다면, 배씨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을 터였다.배진성은 한참을 기다려도 송청아가 입을 열지 않자 다시금 노기가 치밀어 탁자 위를 거칠게 내리쳤다.“왜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것이냐? 아직도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가법으로 다스려야 그제야 입을 열겠느냐!”배진성이 말한 가법은 채찍으로 다스리는 형벌이었다. 배씨 가문의 채찍은 질긴 코뿔소 가죽으로 만든 데다 채찍 곳곳에 살을 파고드는 가시까지 돋아 있어, 단 한 번만 내리쳐도 피부와 살점이 통째로 뜯겨 나갈 만큼 무시무시했다. 그런 채찍을 한 번 벌할 때마다 열 대씩 맞아야 했으니, 형벌을 모두 받고 나면 온몸에 성한 살이 남지 않아 적어도 한 달은 꼼짝없이 누워 지내야 했다.송청아는 그 열 대를 고스란히 맞아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차분히 숨을 가다듬은 뒤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버님, 새 향의 효능을 미리 어머님께 상세히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분명 제 잘못입니다. 헌데 다행히 이번 일로 큰 화가 빚어지지
Read more

제30화

송청아는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숨을 꾹 삼켰다.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갖춘 뒤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안순당 안채를 나섰다.송청아가 떠난 뒤에도 고씨는 배진성의 곁에서 불평을 늘어놓았다.“저 아이가 갈수록 기고만장해져 이제는 어른 무서운 줄도 모르는군요. 윤호야, 앞으로는 네가 단단히 가르쳐서…….”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진성이 다시 한번 탁자를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당신이 지금 윤호를 나무랄 처지오! 오늘 여인들의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월이에게 모두 들었소. 며느리 하나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그런 빈틈을 내주더니, 기어이 창국공부와 연줄까지 맺게 하지 않았소! 이제는 그 아이를 우리 뜻대로 휘두르기가 더 어려워졌단 말이오!”고씨는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맞은편에 앉은 설추월을 수백 번도 더 저주했다. 설 소실 역시 오늘 낙영원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는데, 연회가 끝나자마자 그곳에서 보고 들은 일을 제 입맛에 맞게 부풀려 배진성에게 고해바쳤고, 그 내용이 하나같이 고씨에게 불리한 것들이었기에 배진성의 불만이 그녀에게까지 향한 것이었다.한동안 분노를 쏟아 낸 배진성은 차츰 숨을 고르더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눈썹을 찌푸린 채 다시 입을 열었다.“안 되겠소. 역시 송씨 가문의 그 아가씨를 하루빨리 우리 장군부에 들여야겠소. 며칠 안으로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송 아가씨를 이곳에 머물게 하시오. 그래야 그 아이를 앞세워 저 가짜 송씨를 눌러 놓을 수 있을 테니.”고씨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배윤호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아버님,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제가 도성으로 돌아온 지도 이제 겨우 열흘밖에…….”“무엇이 너무 이르다는 말이냐!”배진성이 사납게 호통치며 그의 말을 끊었다.“어차피 너는 조만간 송채리를 부인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그 아이를 하루라도 빨리 들여 송청아를 단속하게 하지 않으면, 이대로 제멋대로 날뛰게 두자는
Read more
PREV
12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