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짐승 황태자의 집착을 받은 사연: Chapter 1 - Chapter 10

74 Chapters

#1. [구원된 심장에 악마가 키스할 때]

도르하르 지하 황궁의 마력이 뒤틀려 대역 죄인을 가두는 깊은 곳.빛조차 미치지 못하는 미궁이라 불리는 이곳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콰아아앙-! 크르르릉!천장이 잘게 갈라지며 엄청난 무게의 잔해들이 사방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날카로운 비명처럼 공기를 가르는 마력의 잔재와 눈을 찌르는 흙먼지가 잔인하게 내 피부를 자극했다. 당장이라도 온 미궁이 통째로 무너져 내려 모든 생명을 집어삼킬 듯한 절망의 심연 그 자체였다.그 폐허의 중심, 차갑게 식어가는 돌바닥 위에 나는 시신처럼 쓰러져 있었다.'······마리.'내 이름 마리.성도 없고, 제국의 평민조차 되지 못하는 멸망한 도르하르의 하층민. 레투니카 제국의 가장 부유한 캔돔 대공가 영지 지하에 숨어들어, 숨죽인 채 목숨을 연명하며 하녀로 살았던 비루하고도 잔혹한 인생.특별할 것 하나 없던 내 삶의 유일한 이정표이자 소망은, 어린 시절부터 캔돔 대공가 하인의 아들인 줄 알았던 —도르하르 제국의 황족 핏줄을 지닌 ‘할 로드’ 의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하지만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어 망가졌다.지독한 저주가 내 등을 잔인하게 찢고 들어가 심장까지 꿰뚫어 버렸다. 구멍 난 심장 너머로 남은 생명력이 붉은 피가 되어 쿨럭쿨럭 새어나갔다. 할 로드의 이모이자 도르하르 재건을 꿈꾸던 세실리에의 계력에 빠져, 결국 난 멍청하게 이렇게 죽어가는 중이다.바닥을 적시는 피의 온도가 식어갈수록, 내 삶의 타오르던 열망도 함께 차갑게 꺼져갔다. 나는 천천히 사선 너머의 아득한 어둠 속으로 침전하고 있었다.그래도 난 도르하르의 번영을 위해 레투니카 제국의 황제와 황태자를 이 지하에 가두는 위업은 달성했다.그저 고통 없이 살그머니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특히 복수도 이뤘다. 나를 한평생 이용하고 짓밟던 황제의 정부였던 세실리에에게 저주를 뿌려주었고, 할 로드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던 황제마저 내 손으로 죽였으며, 어린 시절 지하의 어둠 속에서 함께 숨죽여 살던 소중한 친구 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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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친, 원수의 품에 안기기까지 하다니]

우르르 쾅쾅!부스스- 스르륵!미궁은 지금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색마라고 소문난 황태자는 내게 맞춘 입을 뗄 여지가 없어 보였다.그는 숨을 들이쉬듯 깊숙하게 혀를 얽어매며 진득하게 액체를 내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었다. 참으로 집요하고도 탐욕스러운 키스였다. 입 안 전체를 빈틈없이 매만지는 것처럼 온몸을 간질거리게 하는 기묘한 행위였다.태어나 처음 하는 입맞춤이 이렇게 거창할 줄이야. 깊은 목구멍까지 탐해 들어오는 그의 숨결에 온몸이 감전된 듯 부들부들 떨렸다.지하 미궁이 무너져 내리는 엄청난 굉음도, 머리 위로 떨어지는 암석의 충격도 모두 아득한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를 헤집는 그의 뜨거운 입술과, 뇌리를 마비시키는 달콤한 향기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기적이 일어났다. 그와 입을 맞추는 동안, 찢어지고 구멍 났던 내 심장이 서서히 열기를 띠며 소생하기 시작했다. 잘려 나갔던 혈관들이 다시 이어지고, 차갑게 식었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며 심장이 힘차게 뛰었다. 쿵. 쿵. 쿵.원수와 나누는 짓눌릴 듯 길고 뜨거운 키스는 숭고한 의식처럼 무너져가는 잔해가 주변에 쌓여도 멈출 줄을 몰랐다.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살려내는 것이 가장 미워해야 할 악마의 자비가 내 심장에 생명력을 채워 주다니.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는 저주받아 심장이 뚫려 죽는 게 아니라, 돌무더기에 깔려 죽게 될 확률이 더 커진 시점이었다.입술이 떨어지자 아쉬운 듯 그가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떨어졌다. 은빛 실타래가 길게 이어졌다 사라졌다."아, 여인이 익숙한 몸 같기도 하고, 너 같은 좋은 향기는 처음인 것 같은데. 기분 최고다."이 원수가 지금 뭐라는 건지.나는 점점 기력이 돌아왔고, 조금 전까지 바람 소리만 나던 내 입에서는 그래도 이제 말을 뱉을 준비가 끝난 듯 보였다."······난 살려 달라고 한 적 없어요. ······가세요."그냥 꺼지라는 말이었다.나름 이것도 내가 그에게 해주는 자비였다. 그런데 황태자 이놈은 여전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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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성을 상실한 짐승 같은 황태자]

나는 아처린의 품에 안긴 채 무너져 내리는 미궁을 가로질렀다.한 번도 보지 못한 통로였다. 세실리에의 심부름으로 이 미궁의 입구와 지하 감옥 언저리는 손금 보듯 알고 있었지만,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길은 난생처음이었다.저주로 심장이 뚫렸다가 그의 생명력으로 겨우 소생한 탓일까. 사지 끝까지 온기가 다 돌지 않아 체력은 아직 아득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붕괴하는 벽이 새로운 길을 틀어쥐고 있는 건지, 아니면 미궁 자체가 살아 숨 쉬며 우리를 어딘가 깊은 심연으로 몰아가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물론 나를 안아 든 아처린은 잔인하도록 흥분해 있었다. 쏟아지는 돌더미를 본능적인 감각으로 유연하게 피하면서도, 그의 입가에는 소름 끼치도록 유려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를 꼭 끌어안은 그의 팔에 어찌나 힘이 들어가 있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힘들잖아요. 내려놓아 주세요." "싫어. 그럼 나 버리고 갈 거잖아?"대체 어떻게 안 걸까. 그는 마치 주인을 잃은 강아지처럼,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피에 굶주린 맹수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오롯이 내게 의지하고 있었다.나는 자꾸만 떨려 오는 손끝이 입술로 향하는 것을 제어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혀가 얽히고, 타는 듯한 생명의 정수가 넘어왔던 그 자리. 손끝에 닿는 촉감이 아직도 델 듯이 뜨거웠다.······미쳤지.철천지원수와 입을 맞췄다. 그것도 짓이겨지듯 깊게 두 번이나. 심지어 그의 품에 안겨 붕괴하는 잔해 사이를 달리고 있다니.현실감이 아득해질 만큼 낯설고 지독한 부끄러움이 몰려와, 나는 애꿎은 입술만 자꾸만 문질렀다."어? 예쁜아."달리던 아처린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짙은 초록빛 눈동자가 무너지는 벽 사이로 흘러나오는 붉은 마나를 받아 기묘하고도 관능적으로 일렁였다."자꾸 입술 만지네? 아쉬워? 더 해줄까?" "······아뇨!"이 끔찍한 재앙 속에서도 농담을 던질 만큼 여유로운 그는 정말 이해 불가였다.그런데 헛숨을 내쉬며 내 얼굴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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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쁜이를 지켜준다니. 설마, 나?]

한참을 내달린 끝에, 미궁의 붕괴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어스름한 통로에 다다랐다.그 역시 사람인지라 거친 숨을 내쉬며 단단한 암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쉬어 갔다.나는 전신으로 천천히 회복되는 마력을 느끼며, 과거 세실리에에게 어깨너머로 배웠던 아공간 마법을 떠올렸다. 사실 세실리에보다 내가 이 지하 미궁에 훨씬 오래 갇혀 있었고, 홀로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도르하르의 마법서를 읽으며 실력을 쌓았기에 그녀를 훌쩍 넘어섰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손끝에 은빛 마력을 그러모아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지지직-.차가운 공기가 파열음을 내며 아주 작은 공간의 균열이 일어났다."예쁜아, 너 이런 것도 할 줄 알아?"대꾸할 기력조차 없어, 나는 그 균열 속으로 손을 넣어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시원한 물을 담아 아처린에게 내밀었다."······이거 마셔요."아처린은 입꼬리를 부드러운 호선으로 올리며 기분 좋게 가죽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벌컥벌컥 물을 삼켰다.얼마나 목이 탔을까. 샘 하나 솟지 않는 차가운 지옥 속에서, 제 생명의 정수를 퍼주어가며 나를 안고 내달렸으니.원수라도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라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왔다."살려준 건 고마워요. 하지만 살아나간다고 해도, 대단한 꿈이나 행복 같은 건······ 나한테 허락된 적 없는 인생이에요. 그러니까······ 이 물 주머니 채워줄 테니까 혼자 도망쳐요."이게 맞았다. 이 미궁은 마력의 덫이 도사리는 지옥이다. 곧 잔여 마력이 몰아쳐 우리 둘의 의식을 잠식할 터였다. 짐덩이인 나를 품에 안고 가다간 이 괴물 같은 황태자조차 체력이 바닥나 매장당할 게 분명했다.그 순간, 물을 마시던 그의 짙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자꾸 거슬리게 구네. 겨우 살려 줬더니."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그럼······ 그냥 여기서 끝내요. 지금 날 죽이든 살리든······ 좋을 대로 해요. 나한테는 가족도 없고, 사랑받았던 기억 따위도 없으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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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잔혹한 자비를 베풀려 하는 황태자]

사방을 둘러본 나는 순간 눈을 의심할 만큼 막막한 절망에 사로잡혔다.잔해가 무너지며 돌더미가 산처럼 쌓인 것도 모자라, 사면이 온통 단단한 암벽으로 막혀 있었다. 방금전까지 우리가 걸어왔던 통로마저 등 뒤에서 스르륵 아물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어쩌지. 정말 어쩌지.'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차갑게 흘러내렸다. 이대로 고립된다면 완벽한 매장이다.그런데 아처린은 그 절망적인 폐허 한가운데에서 초록빛 눈동자를 크게 반짝이더니, 이내 낮고 맑은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와, 제대로 몸을 풀었네. 하하! 이 지옥에 사람이 또 있었나?"이 남자는 정말 미쳤다. 사방이 막혀 당장 매장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유희라도 즐기는 것처럼 기뻐하다니.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호쾌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황당하다 못해 감각이 아득해졌다. 절망의 기로 앞에서도 단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는—아니, 애초에 절망이라는 두려움 자체를 학습해 본 적 없는 황족 특유의 오만함 때문이었다."잠깐만요. 누군가 쓰러져 있어요."아처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던 걸까. 마법으로 예민해진 내 감각에 서늘한 신음이 얽혀들었다."······으윽, ······윽."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귓전을 때리는 그 신음은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잔해를 허겁지겁 헤치고 나아간 그곳에,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제크 기사님!"무너진 바위에 하반신이 깔린 채, 심장 부근을 칼에 뚫린 듯 짓눌려 피를 흘리고 있는 사내.도르하르의 가혹한 땅에 끌려와 절망하던 시절, 캔돔 대공가에서 나를 유일하게 한 인간으로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중급 기사 제크였다.그의 몰골은 처참했다. 절대 살아 나갈 수 없을 만큼 이미 생명의 불씨가 사그라들고 있었다."마리······? 너, 무사했구나······."이 아비규환 속에서마저 나를 먼저 걱정하는 눈빛에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아린! 이 돌덩이 좀 빨리 치워줘요!"내가 황급히 부르자, 뒤따라온 아처린의 표정이 일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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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방식대로의 행복할게요.]

"아린!"그는 이미 장검을 높게 들어 올린 상태였다.그 유려한 얼굴에는 어떤 악의도, 핏빛 살기도 없었다. 그저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바라보는 듯한 순수한 호기심만이 남아있었다."왜 그래? 분명 저러다 하루, 이틀, 열흘 동안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썩어 죽어갈 텐데. 난 나름대로 자비를 베풀어주려는 거야."아처린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사람은 고통을 싫어하잖아. 사지가 부서진 채 죽어가는 것보다, 단번에 숨을 끊어주는 게 훨씬 숭고한 구원 아닌가?"그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멸망한 도르하르의 백성들이 레투니카 귀족들의 저택에서 짐승보다 못한 노예로 부려지다 처참하게 죽어가던 현실. 저 남자는 어쩌면 제 눈앞에 보이던 내 동족들의 숨통을 끊어놓으며, 그걸 '구원'이자 '자비'라고 믿어왔던 걸까.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피 칠갑을 한 채 나를 내려다보는 그 아름다운 악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선택해, 마리. 이자가 편하게 숨을 거두게 해줄지, 아니면 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썩어가도록 방치할지."이 남자는 진심이었다. 고통을 끝내주는 핏빛 단죄만이 유일한 자비라고 믿는 오만하고 비틀린 절대자.그리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어느 쪽을 택해도 잔인하기 그지없는 선택지 앞에 놓이게 되었다.일생일대의 선택.하지만 나는 둘 중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지금 목을 베지도 않을 거고, 그저 고통스럽게 죽어가도록 놔두지도 않을 거예요."그래도 명줄은 오롯이 하늘에 달린 법이었다.내 손으로 아처린의 아비인 황제에게 잔혹한 저주를 쏘았고, 할 로드를 해하려던 수많은 기사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파괴 마법을 퍼부어대던 나였다.하지만 악인이 아닌 제크를 내 손으로 버리거나 끊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 역시 죽음의 문턱에서 생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이 지옥 속에서도 아처린을 만나 살아나지 않았던가.훗날 기억을 되찾은 아처린이 언제든 내 명줄을 끊으려 든다면, 그때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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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못난이 하녀지만 웃고 싶어]

물론 아처린의 삶 속에는 수많은 귀족 영애와 화려한 레이디들이 차고 넘쳤을 것이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하녀로 살아온 내 평생에 '레이디'라는 고귀한 호칭으로 불려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하녀에서 겨우 할 로드의 시녀가 되었을 때도 세상을 다 가진 듯 감사했었다. 지하 4층의 퀴퀴한 골방에서 반지하 땅과 맞닿은 창문 있는 방으로 옮겨갔을 때도 신에게 기도를 올렸었다.아처린이 무심하게 내뱉은 그 한 마디에 내면이 온통 어지럽게 뒤흔들렸다.얼마나 걸었을까. 서늘한 정적 속에서 아처린이 불쑥 손을 내밀어 내 손가락을 얽어쥐었다."마리, 넌 아직 기력이 없으니 내가 이끌어줄게. 어디로 가고 싶어?"지독하게 다정한 목소리였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태연하게 사람의 목을 베어주겠다고 선언하던 그 입술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아처린이 나를 제 품 가까이 끌어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난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한 채, 제크가 남긴 말을 다시금 가슴에 새겼다. 막힌 것처럼 보여도,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걸어가면 벽은 멀어질 것이라고.서늘하고 차가운 바람이 미세하게 맴도는 곳. 어수선하지만 생생한 소음이 아득하게 감지되는 곳.머리 위에서는 잔해와 흙먼지가 계속해서 우수수 쏟아져 내렸지만, 발밑의 바닥만큼은 견고하게 받쳐주는 곳. 나는 눈을 감고 온 마음을 다해 오직 하나의 풍경만을 그렸다.그러자 앞이 아니라 뒤에 벽으로 발길이 절로 옮겨졌다. "아린, 저기로 갈래요."걷고 또 걷고.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아처린은 성큼성큼 걸었다.조금씩 아처린의 황금빛 금사가 빛나기 시작했다.일렁일 때마다 그의 옷도 여러방향에 빛을 머금었다. 그렇게 손을 잡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거짓말처럼,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아득한 암벽이 아주 조금씩, 기적처럼 멀어지기 시작했다.분명 사방이 막힌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시야 끄트머리로 스며드는 어둠의 결이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텁텁한 돌가루 냄새 대신, 축축하고 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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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미친 짐승과 거짓말쟁이지만]

뚫린 천장 너머의 동그란 하늘을 바라보며, 나와 아처린은 단단한 암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숨을 고르게 되었다.여전히 심장 주변에서는 마력이 겉돌고 있을 뿐, 공간을 비틀어 이동할 만큼의 힘은 발현되지 않았다."아린, 왜 아까 내게 그런 말을 했어요?"그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은 걸까. 아니면 내가 나도 모르게 무슨 실수를 저지른 걸까.하지만 돌이켜보면 난 거짓말쟁이가 맞았다. 물론 아처린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내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이성 따위 마비된 지독하게 위험한 맹수라는 사실 역시 명백했다."아까는 죽어도 미련 없다더니."아처린이 눈꼬리를 예쁘게 접으며 쇄골 근처까지 얼굴을 바짝 들이대었다. 나직하게 터뜨리는 그의 더운 숨결이 서늘한 밤바람과 어우러져 목덜미를 간질였다."아-그러게요." "이렇게 살고 싶어서 안달이었으면서. 그리고 이 향기는 뭐야? 온몸이 즐겁다고 난리잖아."갑작스럽게 그가 내 목덜미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이내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내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깊게 틀어막았다.내가 너무 신이 난 나머지 그를 먼저 부둥켜안은 것이 깊은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죽어도 아무 아쉬움이 없다고 말해 놓고, 탈출구를 발견하니 이렇게 아이처럼 기뻐한 자신이 그제야 민망했다.살며시 입술이 떨어졌다. 생에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키스를 오늘 하루 동안만 연거푸 세 번이나 한 바람에 내 심장은 이미 허용치를 넘어 가쁘게 요동쳤다."그러네요. 나 거짓말쟁이 맞아요. 세상 구경도 제대로 못 해봤고, 맛있는 것도 별로 못 먹어보고······ 이대로 죽으려니······ 너무 억울했어요."그러자 아처린은 귓불에 입술을 대고 속살대듯 낮은 목소리로 낭랑하게 속삭였다."솔직하네. 하지만 거짓말쟁이라도 내게는 어여쁜 마리야."대체 뭘 보고 자꾸 나더러 예쁘다는 건지.나는 두 손으로 붉어진 볼을 푹 가려버렸다. 타오르는 듯한 열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화려한 머리색도 아니고······ 얼굴도 평범해서 사람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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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 여인이 나아가야 하는 길]

캔돔 제국력 1년 4월 중순.라이신 황태자비는 이제 제법 몸이 무거워진 상태로 대공저 이곳저곳을 다니며 살림을 정비하고 있었다."도르하르 제국민들이 임시로 묵고 있는 숙소 근처 우물에 물이라도 채워놔야겠어요."뒤따라오던 세이바로 기사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말렸다."전하, 무리하지 마십시오."도르하르를 핍박하던 레투니카 황가 일족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황제는 갑자기 저주를 받아 몸이 타오른 채 숨을 거두었고, 황녀 에스메는 흔적도 없이 몸을 숨긴 채 소식이 두절되었으며, 아처린마저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였다.본래대로라면 캔돔 대공 바아르가 황위를 계승해야 했으나, 다행히 키요리타의 영험한 지하 미궁에 갇혀 있던 카이우스 선대 캔돔 대공을 마리가 구해낸 덕분에 현재 제국의 황제 자리는 카이우스가 지키게 되었다.화산 폭발로 이어질 뻔했던 그 끔찍한 참극을 모두가 힘을 합쳐 마력으로 겨우 잠재운 뒤 각자의 자리로 돌아온 요즘, 제국은 레투니카 시절보다 훨씬 더 활력이 넘치고 살기 좋은 국가로 거듭나 있었다."그때 남아 있던 기사분들이나 도르하르 주민들 모두 탈출한 거 맞겠지요?"라이신은 요즘 들어 왜 자꾸 꿈속에서 누군지도 모를 이가 살려달라 울부짖는 악몽을 꾸는지 알 수 없었다.불안과 근심이 어린 표정으로 저 멀리 험준하게 솟아 있는 파르교 산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까마득한 키요리타 산맥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늘 그 차가운 땅에 닿아 있었다.세이바로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하게 답했다."그곳은 이제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라이신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모두를 순간이동 마법으로 탈출시켰건만, 왜 이리 마음은 개운치 않고 죄인처럼 무겁기만 한지 모를 일이었다."그래도 이상하게 왜 이리 마음이 무거울까요." "하하, 그저 기분 탓입니다, 전하.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이러시다간 바아르 전하께 저만 혼납니다."안 그래도 요즘 바아르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긴 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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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운명에 맡겨 보는 수밖에]

"마리, 이거 눈이라는 건가?"바닥에 하얗게 쌓여가는 서리를 발끝으로 서걱서걱 건드리며, 아처린이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라는 듯 초록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포악한 황태자의 얼굴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천진난만한 호기심이었다.'눈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하긴 레투니카는 눈이 잘 내리지 않는 제국이었다. 한겨울에도 따스한 비가 내릴 만큼 온화하고 풍요로운 땅이었으니 말이다."키요리타는 항상 겨울이래. 하지만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공기가 따뜻하네. 눈은 아무리 더운 결계 밖이라도 늘 쌓여 있거든." "흥미롭군."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아처린의 눈빛이 순간 기이한 이채를 띠었다. 그가 본능적으로 위험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주변을 날카롭게 둘러보다가, 긴 손가락으로 한 곳을 짚었다."저건 뭐야?"아처린이 손짓한 곳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우뚝 멈춰 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이 턱 막혀왔다.'아······.'지상 10층, 지하 10층에 달하던 그 거대하고 웅장했던 도르하르의 황궁이—마치 거대한 거인의 발에 짓밟힌 것처럼 완전한 폐허가 되어 폭삭 무너져 내려 있었다.높게 솟아 있던 화려한 첨탑도, 단단하던 외벽도 온통 참혹한 돌더미로 변해 퀴퀴한 냄새만 풍기고 있었다.'어떻게 이럴 수가······ 혹시 나 때문인가?'가슴속으로 걷잡을 수 없는 절망과 거대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정말 도르하르 제국은 이제 완전히 끝장난 것일까.내가 아픈 라이신 대공비를 이곳 지하에서 치유하려 했던 탓에 분노한 캔돔 대공가가 군대를 끌고 와 황궁을 쓸어버린 걸까. 아니면 황제가 저주를 받아 불에 타 죽는 바람에 잔혹한 전쟁이 터져 이 지옥도가 펼쳐진 걸까.'설마 라이신은 무사히 캔돔가로 돌아가지 못한 걸까?'황궁의 군대라면 에스메 황녀, 그리고 뛰어난 무력을 지닌 샤를 후작가가 황군과 손을 잡고 군대를 일으킨 것일까. 수많은 기억과 추측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엉키며 나를 참담한 절망의 늪으로 끌어내렸다.내가 자책감에 짓눌려 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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