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그는 이미 장검을 높게 들어 올린 상태였다.그 유려한 얼굴에는 어떤 악의도, 핏빛 살기도 없었다. 그저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바라보는 듯한 순수한 호기심만이 남아있었다."왜 그래? 분명 저러다 하루, 이틀, 열흘 동안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썩어 죽어갈 텐데. 난 나름대로 자비를 베풀어주려는 거야."아처린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사람은 고통을 싫어하잖아. 사지가 부서진 채 죽어가는 것보다, 단번에 숨을 끊어주는 게 훨씬 숭고한 구원 아닌가?"그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멸망한 도르하르의 백성들이 레투니카 귀족들의 저택에서 짐승보다 못한 노예로 부려지다 처참하게 죽어가던 현실. 저 남자는 어쩌면 제 눈앞에 보이던 내 동족들의 숨통을 끊어놓으며, 그걸 '구원'이자 '자비'라고 믿어왔던 걸까.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피 칠갑을 한 채 나를 내려다보는 그 아름다운 악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선택해, 마리. 이자가 편하게 숨을 거두게 해줄지, 아니면 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썩어가도록 방치할지."이 남자는 진심이었다. 고통을 끝내주는 핏빛 단죄만이 유일한 자비라고 믿는 오만하고 비틀린 절대자.그리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어느 쪽을 택해도 잔인하기 그지없는 선택지 앞에 놓이게 되었다.일생일대의 선택.하지만 나는 둘 중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지금 목을 베지도 않을 거고, 그저 고통스럽게 죽어가도록 놔두지도 않을 거예요."그래도 명줄은 오롯이 하늘에 달린 법이었다.내 손으로 아처린의 아비인 황제에게 잔혹한 저주를 쏘았고, 할 로드를 해하려던 수많은 기사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파괴 마법을 퍼부어대던 나였다.하지만 악인이 아닌 제크를 내 손으로 버리거나 끊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 역시 죽음의 문턱에서 생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이 지옥 속에서도 아처린을 만나 살아나지 않았던가.훗날 기억을 되찾은 아처린이 언제든 내 명줄을 끊으려 든다면, 그때는
Last Updated : 2026-09-09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