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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쁜이를 지켜준다니. 설마, 나?]

Penulis: silver구슬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9-05 10:34:09

한참을 내달린 끝에, 미궁의 붕괴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어스름한 통로에 다다랐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거친 숨을 내쉬며 단단한 암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쉬어 갔다.

나는 전신으로 천천히 회복되는 마력을 느끼며, 과거 세실리에에게 어깨너머로 배웠던 아공간 마법을 떠올렸다. 

사실 세실리에보다 내가 이 지하 미궁에 훨씬 오래 갇혀 있었고, 홀로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도르하르의 마법서를 읽으며 실력을 쌓았기에 그녀를 훌쩍 넘어섰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손끝에 은빛 마력을 그러모아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지지직-.

차가운 공기가 파열음을 내며 아주 작은 공간의 균열이 일어났다.

"예쁜아, 너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대꾸할 기력조차 없어, 나는 그 균열 속으로 손을 넣어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시원한 물을 담아 아처린에게 내밀었다.

"······이거 마셔요."

아처린은 입꼬리를 부드러운 호선으로 올리며 기분 좋게 가죽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벌컥벌컥 물을 삼켰다.

얼마나 목이 탔을까. 

샘 하나 솟지 않는 차가운 지옥 속에서, 제 생명의 정수를 퍼주어가며 나를 안고 내달렸으니.

원수라도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라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왔다.

"살려준 건 고마워요. 하지만 살아나간다고 해도, 대단한 꿈이나 행복 같은 건······ 나한테 허락된 적 없는 인생이에요. 그러니까······ 이 물 주머니 채워줄 테니까 혼자 도망쳐요."

이게 맞았다. 이 미궁은 마력의 덫이 도사리는 지옥이다. 

곧 잔여 마력이 몰아쳐 우리 둘의 의식을 잠식할 터였다. 짐덩이인 나를 품에 안고 가다간 이 괴물 같은 황태자조차 체력이 바닥나 매장당할 게 분명했다.

그 순간, 물을 마시던 그의 짙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자꾸 거슬리게 구네. 겨우 살려 줬더니."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럼······ 그냥 여기서 끝내요. 지금 날 죽이든 살리든······ 좋을 대로 해요. 나한테는 가족도 없고, 사랑받았던 기억 따위도 없으니까. 훗날 벌하지도 못할 거예요."

정말이었다. 

날 위해 울어줄 가족도, 온기 한 조각 내어줄 연인도 없었다.

훗날 아처린이 기억을 되찾는다면, 제 아비인 황제에게 저주를 뿌린 나를 가장 처참하게 찢어 죽일 것이다. 

도르하르의 혈통인 할 로드 님을 사냥하려 들 것이고, 내 동족들을 노예로 삼아 짓밟을 것이며, 친구인 라이신과 캔돔 가문마저 피의 바다로 만들 위인이 바로 이 남자가 아닌가.

"그러니까 아무 미련 없어요. 지금 죽어도······."

말을 내뱉고 나니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죽음을 앞둔 자의 무모한 오기였을까, 아니면 이 포악한 아름다움 앞에서도 더는 잃을 것이 없다는 해탈이었을까.

서늘한 정적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하하!"

아처린이 터뜨린 맑은 웃음소리가 무너지는 미궁 전체를 흔들었다. 눈이 부실 만큼 환하고, 오싹할 정도로 미쳐있는 웃음이었다.

"아, 진짜 완전 마음에 들어!"

그는 눈꼬리를 접으며 아이처럼 웃었다. 

방금 전까지 전신을 감싸던 서늘한 기운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냥 내가 먼저 사라지든 그를 멀리 보내든 나는 마력부터 끌어 올려 보았다.

아처린이랑 언제까지 같이 이곳에서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마법이 발동될 리가 없었다.

"순간이동은 실패네요."

생경한 감각이었다. 눈을 감고 좌표를 떠올리면 그대로 몸이 스며들듯 사라졌다가 그 장소에 나타나는 것이 당연했는데.

미궁에 갇힌 사람들을 다 벗어나게 하느라 소진하고 마력이 뒤틀린 공간이라 그런지, 정상적인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도르하르 대마법사이자 날 죽이려 한 세실리에가 그래도 인정했던 게 내 마법 능력이었는데.

아무리 마력을 쏟아부어도 허공만 헛되이 일렁일 뿐, 몸은 그자리에 그대로 붙박여 있었다.

"순간이동? 그딴 게 뭐야?"

옆에서 아처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정말로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아까 물을 떠올려 가죽 주머니를 채웠듯이 내 몸도 어딘가로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지는 기술이에요."

"나도 마력 좀 부리고 싶군. 그럼 널 지켜줄텐데."

낯선 말이었다. 지켜준다는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마치 오늘 저녁 메뉴를 말하듯 뱉어내는 남자라니.

설마, 천하의 황태자가 누굴 지키다니. 없애는 건 또 몰라도.

그때 그가 문득 제 허리춤을 더듬더니, 낡은 천 사이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일단 머리 위에 흙더미든 마물이든 나타나면 이것으로 베어 줄게."

칼집에서 뽑아 든 검신이 붉은 마력의 빛을 반사하며 서늘하게 번뜩였다. 역시 황태자의 검은 보검이겠지.

그나저나 이 미궁에서 마수가 안 나타나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앞장서서 나아갈 테니, 너는 날 따라와."

***

진짜 나를 지켜줄 건가?

심지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작은 돌조각도 그가 검기를 휘두르자 거짓말처럼 휙! 휙! 날아가 버려 내 앞길은 안전했다.

그는 앞뒤 잴 것도 없이 그대로 무너지는 잔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어머!"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좀 큰 돌덩이도 조각조각 갈라져 나갔다. 

나는 얼떨결에 그의 등에 이끌리듯 뒤를 따라 뛰었다.

한참을 그렇게 헤치고 나아갔을까.

 바로 그때였다.

암벽 아래, 무너진 잔해 사이에서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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