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시녀 주제에 적국의 황제를 죽여 버렸다. 그런데, 기억을 잃은 황태자가 죽어가는 날 살려주었다. 잔혹한 신은 왜 그가 날 사랑하게 만들었는가. 언젠가 그가 기억을 되찾는다면 날 죽이겠지. 좋아, 그때까지 어디 한번 운명을 시험해 보는 수밖에! 가장 높은 곳의 남자와, 가장 낮은 곳의 여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옥의 미궁 끝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 *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 - 두 번째 이야기
View More빛조차 미치지 못하는 미궁이라 불리는 이곳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콰아아앙-! 크르르릉!
천장이 잘게 갈라지며 엄청난 무게의 잔해들이 사방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날카로운 비명처럼 공기를 가르는 마력의 잔재와 눈을 찌르는 흙먼지가 잔인하게 내 피부를 자극했다. 당장이라도 온 미궁이 통째로 무너져 내려 모든 생명을 집어삼킬 듯한 절망의 심연 그 자체였다.
그 폐허의 중심, 차갑게 식어가는 돌바닥 위에 나는 시신처럼 쓰러져 있었다.
'······마리.'
내 이름 마리.
성도 없고, 제국의 평민조차 되지 못하는 멸망한 도르하르의 하층민.
레투니카 제국의 가장 부유한 캔돔 대공가 영지 지하에 숨어들어, 숨죽인 채 목숨을 연명하며 하녀로 살았던 비루하고도 잔혹한 인생.
특별할 것 하나 없던 내 삶의 유일한 이정표이자 소망은, 어린 시절부터 캔돔 대공가 하인의 아들인 줄 알았던 —도르하르 제국의 황족 핏줄을 지닌 ‘할 로드’ 의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어 망가졌다.
지독한 저주가 내 등을 잔인하게 찢고 들어가 심장까지 꿰뚫어 버렸다. 구멍 난 심장 너머로 남은 생명력이 붉은 피가 되어 쿨럭쿨럭 새어나갔다.
할 로드의 이모이자 도르하르 재건을 꿈꾸던 세실리에의 계력에 빠져, 결국 난 멍청하게 이렇게 죽어가는 중이다.
바닥을 적시는 피의 온도가 식어갈수록, 내 삶의 타오르던 열망도 함께 차갑게 꺼져갔다. 나는 천천히 사선 너머의 아득한 어둠 속으로 침전하고 있었다.
그래도 난 도르하르의 번영을 위해 레투니카 제국의 황제와 황태자를 이 지하에 가두는 위업은 달성했다.
그저 고통 없이 살그머니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특히 복수도 이뤘다. 나를 한평생 이용하고 짓밟던 황제의 정부였던 세실리에에게 저주를 뿌려주었고, 할 로드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던 황제마저 내 손으로 죽였으며, 어린 시절 지하의 어둠 속에서 함께 숨죽여 살던 소중한 친구 라이신을 살려 보냈으니까.
미련은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 살아나간다 한들, 적국인 레투니카 제국의 황제까지 얼마전 죽인 내게 기다리는 것은 오직 참혹한 처형대뿐일 테니까.
'그래도······ 만약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목적 없는 여행이라는 것도 떠나보고.
누군가의 따스한 품에 안겨 온전하고 지독할 만큼 깊은 사랑도 받아보고 싶었는데.
점점 의식이 가물거리며 극심했던 통증조차 아득해져 갔다.
고개를 들 힘조차 남지 않은, 스물한 살의 짧고 허무한 생.
모든 빛이 꺼지고 완벽한 침묵이 찾아오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굉음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그 발소리만큼은 유리창을 깨뜨리듯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죽어가는 몸의 감각이 사력을 다해 마지막 파동을 낚아채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와 내 처참한 시신이나 다름없는 몸 앞에 멈춰 섰다.
*** 붕괴하는 먼지와 진득한 피비린내를 단숨에 흩트려버리는, 지독하게 매혹적인 향기.단 한 번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영혼의 밑바닥을 미친 듯이 흔들어놓는 그 은은하고도 위험한 향에 미세하게 눈꺼풀이 떨렸다.
"······예쁜 여자가 죽어가고 있잖아?"
태어나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예쁘다는 칭찬을 죽을 때가 되어서야 듣게 되다니.
서늘하면서도 달콤하게 귓가를 간지럽히는 낯선 목소리가 그래도 반가웠다.
이 참혹하고 어두운 미궁 속에 살아있는 인간은 오직 나 하나뿐인 줄 알았는데.
저승길 길동무가 또 있다니. 이건 반가웠다.
고개를 돌릴 힘조차 없는 내게 커다랗고 단단한 손길이 다가왔다. 차가운 손가락이 내 턱 끝을 감아쥐더니, 거역할 수 없는 압도적인 악력으로 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초점이 흐려진 시선이 얽힌 그 순간, 나는 죽어가던 온몸의 피가 역류하듯 짓눌리는 오한을 느꼈다.
저승의 신 하데스가 지옥의 문을 열고 걸어 나온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까.
이곳 더 깊은 곳에 갇혀 있어야 할 레투니카 황태자······ 아처린이······ 왜?
나의 조국 도르하르의 제국민들을 개나 돼지처럼 잔혹하게 학살했던 악마.
레투니카 최고의 아름다운 쓰레기라 불리던 황태자 아처린이 왜 죽지도 않고 내 앞에 서 있는 것일까.
그는 피범벅이 된 나를 내려다보며, 이 잔인한 미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잔혹하도록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쁜아, 혹시 나 알아? 꼭 잘 아는 사람처럼 구네?"
이 철천지원수를 레투니카 제국과 도르하르 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있을까.
마력만 한 자락이라도 남아있었다면 내 흩어지는 영혼을 대가로 바쳐서라도 그의 목에 사악한 저주를 퍼부었을 터였다.
하지만 무너져 내리는 미궁의 붉은 마력이 그의 칠흑 같은 머리칼을 흔들고, 짙은 초록빛 눈동자가 몽환적인 환영처럼 빛나는 순간,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한 태도로 나를 향해 몸을 숙여왔다.
구멍 뚫린 내 심장이 아찔한 미열로 다시 요동칠 만큼 치명적인 미소였다.
"내가 기억을 잃었어. 예쁜아. 그런데······ 이상하게 넌 살려주고 싶네?"
장난 같은 운명의 실타래가 지독하게 엉켜드는 순간이었다.
나는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그의 탐욕스러운 초록빛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무릎을 꿇고 구걸할 목숨 따위는 없었다.
그저 원수의 얼굴을 영혼에 새긴 채 무겁게 눈을 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릎을 꿇은 그가 내 상체 위로 깊고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차갑게 식어가는 미궁의 잔해 속에서, 지독하게 뜨거운 온기와 날카로운 숨결이 내 얼굴에 닿았다.
읍······!
지체 없이 그의 입술이 피로 물든 내 입술을 거칠게 삼켜왔다. 반항할 겨를조차 없었다.
단단한 팔이 얇은 허리를 드세게 끌어안아 그에게 밀착시켰다.
"잠깐, 이거 먹여 줄게. 뭔지 몰라도, 꽤 몸에는 좋은 포션 같거든?"
그리고 그 순간,
닿아온 그의 입술 사이로 타는 듯한 생명의 정수라 여겨도 될 것 같은 짜릿하고 뜨거운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식사가 전부 도착하고, 럼주도 추가되었다.하지만 아처린은 식사를 멈추고 가만히 생각했다.저들은 분명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결코 유쾌하거나 평화로운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레이나······. 이토록 낯설지 않게 입술에 감기는 걸 보면 가까운 사이였겠지.'다들 자신을 '아린'이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그저 혀끝에서만 맴돌 뿐, 가슴 깊은 곳까지 단 한 번도 와닿지 않았다. 마치 타인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듯한 아찔한 위화감이라고나 할까.하지만 레이나라는 여자는 '아처린'이라는 본래의 이름이 뇌리에 박혀 있는지, 제멋대로 그 이름을 내뱉었다가 황급히 '아린'으로 고쳐 불렀다.심지어 마리조차 몽롱한 꿈결 속에서는 자신을 '아처린'이라 부르며 내밀하게 안겨 올 때도 있었다. 그 지독하고 오만한 이름이야말로 진짜 자신의 것임이 틀림없었다.지하 감옥에 사슬로 묶여 있던 순간에도 그가 입고 있던 옷은 최고급 제복이었다. 신분만큼은 제국의 최정상에 위치한 고위 귀족일 것이라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심지어 얼마 전 황태자비의 호위 기사 세이바로가 은근슬쩍 다가와 심증을 떠보려 했던 어설픈 수작도 그렇고, 공작 부부 역시 자신을 어렵게 여기다니.모두 아처린 자신이 특별한 인물이니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저잣거리 서민들에게 물어 자신의 정체를 밝혀낼 수도 있었지만, 감옥에 처박혀 있던 과거 따위에 연연하며 정체성을 찾으려 애쓰는 건 체면에 맞지 않았다. 마리가 불러주는 이름이 무엇이든 아무렴 상관없었다.과거를 캐내어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기억도 없는데 뭘 어쩌겠는가.기억은 소실되었을지언정 태생적인 통찰력까지 마비된 것은 아니었다. 제국 곳곳을 유유히 떠돌며 세상을 둘러보는 동안, 그
신조차 농락하는 지독한 우연.아처린과 함께 캔돔령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할 로드와 레이나를 마주치게 되다니.그저 입맛이 없어 저잣거리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이나 나누며 아처린과의 소소한 시간을 보내려 했을 뿐인데,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거대하게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마리? 오랜만이야!"할 로드는 나를 반기면서도 아처린을 의식하면서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아, 할 로드 님······. 반가워요."나 역시 그가 반갑지만, 이내 아처린의 팔짱을 조심스레 꼭 끼고는 혹시나 이곳에서 칼부림이 생길까 조심스러워 마른침만 삼켰다.어쩌다 이렇게 넷이서 만나게 되는 날이 오게 된 걸까."밥이나 같이 먹을까?"합석을 제안하는 그의 손은 허리춤의 검 자루에 올려놓고 있어 그 본능적인 경계심이 내 마음마저 서늘하게 차갑게 식혀놓았다.레이나는 놀라 나처럼 할 로드의 팔을 꼭 잡으며 떨고 있었다."그건 좀······, 저희가 같이 한 식탁에 앉아 식사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이만 일어날게요."내가 아처린의 소매 끝을 잡아당기며 돌아서려 할 때였다."······아린, 우리 그냥 가자. 기분이 바뀌었어."아처린은 턱을 괸 채 매혹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내 가녀린 팔목을 단단히 붙잡아 챘다.마치 나의 주저함을 진작부터 다 계산하고 있었다는 듯한 느긋한 움직임이었다."마리. 할 로드라는 이름은 들어봐서 그런지, 이리 보니 기분이 묘하군."순간 이 자리는 공
7월의 첫날.작렬하는 태양이 온 제국을 뜨겁게 달구는 바야흐로 한여름의 한복판이었다.레이나의 입덧은 날이 갈수록 하늘을 찔렀고, 결국 그녀는 예전에 먹던 저잣거리의 음식이 미치도록 생각나, 할 로드를 채근해 캔돔령으로 직접 나들이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안전상 공작 부부라는 신분을 그대로 드러내며 저잣거리를 활보할 수는 없었기에, 두 사람은 차림새를 간소하게 다듬었다.구 도르하르 제국의 황태자이자 이제는 도르하르 공작가의 주인인 할 로드는, 예전 캔돔가 기사 시절에 입던 소박하지만 날렵한 가죽 갑주 차림을 선택했다. 레이나 역시 화려한 드레스 대신 수수한 하위 귀족 여성의 차림을 갖추었다.하지만 타고난 기품과 수려한 이목구비까지 숨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저잣거리의 서민들이 보기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눈부신 미남미녀였기에, 두 사람이 발을 내딛는 곳마다 자연스럽게 이목이 쏠려들었다."각하, 아니지······. 여기서는 그냥 '할 로드'라고 불러도 되지?""그럼. 나 역시 이 편이 훨씬 달콤하고 좋아, 레이나. 그대와 이렇게 소박하게 손을 잡고 걸으니 예전이 떠오르는군."할 로드가 낮게 읊조리며 레이나의 가녀린 손가락 사이로 제 긴 손가락을 얽어매어 왔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저잣거리 데이트에 레이나의 가슴은 설렘으로 사정없이 두근거렸다.할 로드 역시 제 품 안에서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가는 레이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다정하게 말아 올렸다."아, 너무 좋아. 이렇게 푹푹 찌는 여름인데도 할 로드랑 걸으니 에너지가 치솟는 것 같아.""그래, 그대 이쪽으로 와. 내가 그늘을 만들어 줄 테니."할 로드가 듬직한 체구로 그녀의 곁에 밀착해 햇빛을 가려주며, 단단한 팔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꼭 감싸 안았다. 닿
유난히 무더위가 일찍 찾아온 6월의 끝자락.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임신한 레이나의 체온은 쉴 새 없이 치솟았고, 무거워진 몸과 사정없는 입덧 탓에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나날의 연속이었다."우욱, 읍······!""레이나!"레이나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구역질로 일그러질 때마다, 할 로드는 부서질 듯 여윈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은 채 깊게 패인 목덜미에 입술을 깊이 묻었다."부드러운 수프를 끓여 오고, 과일과 타르트도 종류별로 당장 준비해!"매일 불규칙하게 당기는 음식과 먹자마자 토해버리는 음식이 쉴 새 없이 바뀌니, 그녀의 식사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뭘 좀 삼켜야 기운을 차릴 텐데······."어느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세상을 하직할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니 도무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레이나, 오늘은 뭐가 좀 생각나?""음, 저기······. 작년에 미하엘 님과 데뷔탕트 때 먹었던 그 사과 셔벗이······."할 로드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아하, 하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레이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대는 참 대단하군. 그 아수라장 같던 난리통에 까마득히 잊혔던 음식을, 1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떠올리다니.""에효, 이제 라이신은 엄연한 황태자비 전하이신데 만들어 달라고 를 쓸 수도 없고."레이나는 침대에 털썩 앉아 식은땀을 닦아내며 골골거리더니, 이내 옆으로 힘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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