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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조차 미치지 못하는 미궁이라 불리는 이곳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콰아아앙-! 크르르릉!
천장이 잘게 갈라지며 엄청난 무게의 잔해들이 사방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날카로운 비명처럼 공기를 가르는 마력의 잔재와 눈을 찌르는 흙먼지가 잔인하게 내 피부를 자극했다. 당장이라도 온 미궁이 통째로 무너져 내려 모든 생명을 집어삼킬 듯한 절망의 심연 그 자체였다.
그 폐허의 중심, 차갑게 식어가는 돌바닥 위에 나는 시신처럼 쓰러져 있었다.
'······마리.'
내 이름 마리.
성도 없고, 제국의 평민조차 되지 못하는 멸망한 도르하르의 하층민.
레투니카 제국의 가장 부유한 캔돔 대공가 영지 지하에 숨어들어, 숨죽인 채 목숨을 연명하며 하녀로 살았던 비루하고도 잔혹한 인생.
특별할 것 하나 없던 내 삶의 유일한 이정표이자 소망은, 어린 시절부터 캔돔 대공가 하인의 아들인 줄 알았던 —도르하르 제국의 황족 핏줄을 지닌 ‘할 로드’ 의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어 망가졌다.
지독한 저주가 내 등을 잔인하게 찢고 들어가 심장까지 꿰뚫어 버렸다. 구멍 난 심장 너머로 남은 생명력이 붉은 피가 되어 쿨럭쿨럭 새어나갔다.
할 로드의 이모이자 도르하르 재건을 꿈꾸던 세실리에의 계력에 빠져, 결국 난 멍청하게 이렇게 죽어가는 중이다.
바닥을 적시는 피의 온도가 식어갈수록, 내 삶의 타오르던 열망도 함께 차갑게 꺼져갔다. 나는 천천히 사선 너머의 아득한 어둠 속으로 침전하고 있었다.
그래도 난 도르하르의 번영을 위해 레투니카 제국의 황제와 황태자를 이 지하에 가두는 위업은 달성했다.
그저 고통 없이 살그머니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특히 복수도 이뤘다. 나를 한평생 이용하고 짓밟던 황제의 정부였던 세실리에에게 저주를 뿌려주었고, 할 로드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던 황제마저 내 손으로 죽였으며, 어린 시절 지하의 어둠 속에서 함께 숨죽여 살던 소중한 친구 라이신을 살려 보냈으니까.
미련은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 살아나간다 한들, 적국인 레투니카 제국의 황제까지 얼마전 죽인 내게 기다리는 것은 오직 참혹한 처형대뿐일 테니까.
'그래도······ 만약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목적 없는 여행이라는 것도 떠나보고.
누군가의 따스한 품에 안겨 온전하고 지독할 만큼 깊은 사랑도 받아보고 싶었는데.
점점 의식이 가물거리며 극심했던 통증조차 아득해져 갔다.
고개를 들 힘조차 남지 않은, 스물한 살의 짧고 허무한 생.
모든 빛이 꺼지고 완벽한 침묵이 찾아오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굉음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그 발소리만큼은 유리창을 깨뜨리듯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죽어가는 몸의 감각이 사력을 다해 마지막 파동을 낚아채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와 내 처참한 시신이나 다름없는 몸 앞에 멈춰 섰다.
*** 붕괴하는 먼지와 진득한 피비린내를 단숨에 흩트려버리는, 지독하게 매혹적인 향기.단 한 번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영혼의 밑바닥을 미친 듯이 흔들어놓는 그 은은하고도 위험한 향에 미세하게 눈꺼풀이 떨렸다.
"······예쁜 여자가 죽어가고 있잖아?"
태어나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예쁘다는 칭찬을 죽을 때가 되어서야 듣게 되다니.
서늘하면서도 달콤하게 귓가를 간지럽히는 낯선 목소리가 그래도 반가웠다.
이 참혹하고 어두운 미궁 속에 살아있는 인간은 오직 나 하나뿐인 줄 알았는데.
저승길 길동무가 또 있다니. 이건 반가웠다.
고개를 돌릴 힘조차 없는 내게 커다랗고 단단한 손길이 다가왔다. 차가운 손가락이 내 턱 끝을 감아쥐더니, 거역할 수 없는 압도적인 악력으로 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초점이 흐려진 시선이 얽힌 그 순간, 나는 죽어가던 온몸의 피가 역류하듯 짓눌리는 오한을 느꼈다.
저승의 신 하데스가 지옥의 문을 열고 걸어 나온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까.
이곳 더 깊은 곳에 갇혀 있어야 할 레투니카 황태자······ 아처린이······ 왜?
나의 조국 도르하르의 제국민들을 개나 돼지처럼 잔혹하게 학살했던 악마.
레투니카 최고의 아름다운 쓰레기라 불리던 황태자 아처린이 왜 죽지도 않고 내 앞에 서 있는 것일까.
그는 피범벅이 된 나를 내려다보며, 이 잔인한 미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잔혹하도록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쁜아, 혹시 나 알아? 꼭 잘 아는 사람처럼 구네?"
이 철천지원수를 레투니카 제국과 도르하르 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있을까.
마력만 한 자락이라도 남아있었다면 내 흩어지는 영혼을 대가로 바쳐서라도 그의 목에 사악한 저주를 퍼부었을 터였다.
하지만 무너져 내리는 미궁의 붉은 마력이 그의 칠흑 같은 머리칼을 흔들고, 짙은 초록빛 눈동자가 몽환적인 환영처럼 빛나는 순간,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한 태도로 나를 향해 몸을 숙여왔다.
구멍 뚫린 내 심장이 아찔한 미열로 다시 요동칠 만큼 치명적인 미소였다.
"내가 기억을 잃었어. 예쁜아. 그런데······ 이상하게 넌 살려주고 싶네?"
장난 같은 운명의 실타래가 지독하게 엉켜드는 순간이었다.
나는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그의 탐욕스러운 초록빛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무릎을 꿇고 구걸할 목숨 따위는 없었다.
그저 원수의 얼굴을 영혼에 새긴 채 무겁게 눈을 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릎을 꿇은 그가 내 상체 위로 깊고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차갑게 식어가는 미궁의 잔해 속에서, 지독하게 뜨거운 온기와 날카로운 숨결이 내 얼굴에 닿았다.
읍······!
지체 없이 그의 입술이 피로 물든 내 입술을 거칠게 삼켜왔다. 반항할 겨를조차 없었다.
단단한 팔이 얇은 허리를 드세게 끌어안아 그에게 밀착시켰다.
"잠깐, 이거 먹여 줄게. 뭔지 몰라도, 꽤 몸에는 좋은 포션 같거든?"
그리고 그 순간,
닿아온 그의 입술 사이로 타는 듯한 생명의 정수라 여겨도 될 것 같은 짜릿하고 뜨거운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날이 푹푹 찌듯 더웠다. 어느덧 7월도 하순으로 접어들고 있었다.나는 아처린과 함께 제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매물로 나온 영지와 작위를 알아보러 다니는 중이었다.여기저기 발품을 팔아도 몰락한 준남작, 남작의 영지들은 너무 변방이라 좌표 잡기도 쉽지 않았고, 모두들 쉬쉬거려 찾는 것도 어려웠다.그러다 드디어 나름 황성과 멀지 않으면서도 산과 바다도 끼고 있는 자작 매물로 나온 영지를 어느 길드 상점 숙소를 찾다 운 좋게 만나게 되었다."아린, 여기 괜찮지 않아?"사실 내게는 작위의 높낮이나 영지의 형태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그와 함께 아늑하게 쉴 곳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하지만 아처린은 달랐다."비옥한 토지는 터무니없이 적군. 산에 둘러싸인 데다 영지로 향하는 길도 덜 닦여 불편해 보여."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영지의 지도와 문서를 훑어보는 아처린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예리했다.본래 제국에서 백작 이상의 고위 작위는 직접적인 황제의 칙령이 있어야 하거나 금화 수백 개를 준비해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반면, 몰락한 지방 가문이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작위와 영지를 암암리에 매물로 내놓는 한계선은 대충 '자작'까지였기에 이 핀도르령은 나쁘지가 않았다.남작이나 준남작보다 훨씬 번듯하여 독자적인 재판권과 영지민을 아우를 수 있는 지위인데.40대로 보이는 길드장과 20대 정도로 보이는 훈훈한 외모의 젊은 영주는 아처린에게 얼른 큰돈을 받고 제 영지를 넘기고 싶어 눈을 반짝거렸다."곧 인근 백작령에서 황성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닦는다는 소문도 있습니다.""조금만 더 들어가면 해안가와도 이어집니다. 절경이지요. 그런데 실례지만 기사님, 자금은 혹시 있으신 겁니까?"한숨을 쉬던 아처린은 제 주머니를
나는 아처린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린은 특별한 사람이야. 그에 비해 나는 옆에 서는 것조차 까마득할 정도로 비루한 여자고. 내 주변의 고귀한 사람들과 나는 달라.”진실을 선뜻 내뱉기 두려웠던 나는 차근차근 그가 다 알고 있는 겉도는 이야기부터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처린이 나른하게 눈꼬리를 접어 올리며 내 손목을 살짝 그러쥐었다.“어차피 그래 봤자, 지금 넌 내 옆에 있는 레이디야.”하지만 나는 거짓으로 진실을 포장할 재주가 없었다. 차라리 진실을 터뜨리는 편이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아린, 이 황금빛 망토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넌 단순한 귀족이 아니야. 황가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야.”이 정도는 알려주어야 했다. 그래야 그도 제 오만한 피와 신분을 자각할 테니까. 그러나 아처린의 맑고 초록빛으로 빛나는 눈동자에는 놀란 기색조차 스치지 않았다. 그저 나른하고 당당한 미소로 나를 관조할 뿐이었다.“마리, 그래도 거짓말은 안 하네?”떠보듯 나직하게 던지는 그의 음성에 마리는 피하지 않고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네 진짜 이름은 아처린이야. 난 도르하르 하층민이라, 레투니카 황족이 무서운 사람 중 하나야. 그래서 도르하르 사람들은 널 증오해.”“역시, 그렇군.”자신이 누구인지, 제 목을 노리는 가혹한 위협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저토록 오만하고 무심할 수 있다니.아처린은 여유로운 기색을 띤 채 나를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아린, 미안해. 과거를 덮자고 했을 때도 그래서 내심 반겼어.”거짓말은 한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아처린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의 온몸을 적신 검붉은 피는 이미 굳어 진득하게 얼룩져 있었고, 비릿한 혈향이 설원의 키요리타 산맥의 눈바람에 실려 코끝을 찌르고 들어왔다.그러나 정작 피칠갑을 한 아처린은 내 경악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순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마리, 이제 내가 좀 떳떳해진 느낌이야. 하하!"나는 황급히 은빛 마력을 활활 불러일으켜 그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살이 찢어져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려면 치유가 시급해 보였기 때문이었다."아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몸에 그 피는 대체······!"싸움에 휘말렸나? 누구를 죽이고 온 건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그의 눈빛이 너무나 해맑고 벅차 보였다.내가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터뜨리자, 아처린은 피로 얼룩진 커다란 손을 쫙 펼쳐 보이며 어린아이처럼 기쁨에 차 소리쳤다."키요리타 산맥에 가서 라이칸스로프를 잡았어. 하하!"그러고 보니 그의 손에는 반짝이는 순도 높은 마정석 2개가 양손에 들려 있었다.순간 내 몸이 굳어졌다. 허탈함과 황당함에 한숨부터 툭 뿜어져 나왔다. 도대체 내 아공간 안에 남아도는 라이칸스로프의 마정석만 해도 몇 개인데, 왜 목숨을 걸고 화산 폭발 직전인 키요리타까지 다녀온 걸까."키요리타 산맥······? 그 먼 곳을 이 짧은 시간 안에 심지어 마수까지 처치했다고?""하하, 드디어 내가 좀 성장한 느낌이야. 그래서 꽤 기분이 좋아. 그런데 마리 표정이 왜 그래?"피가 덕지덕지 묻은 옷을 훌훌 벗어 던지며,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 안색을 살폈다.나를 단 몇
그 뒤로 며칠이 더 흐른 한낮.햇살이 쨍하게 내리쬐는 커다란 들판 한복판, 나와 아처린 둘만의 아슬아슬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손끝으로 흘러나오는 마법력을 다듬으며 결계 연습을 이어가던 중, 문득 가슴 한구석에서 억누를 수 없는 기이한 호기심과 그리움이 솟구쳤다. 이전에 라이신을 구하러 갔었던 가르남의 아늑한 풍경이 뇌리에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나는 아처린 몰래 가르남의 좌표를 가만히 떠올리며 순간이동 마법을 시도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몸이 이동하려던 그 짧은 찰나.콰아앙—!"읏!"가르남령 전체를 견고하게 감싸고 있던 강력한 결계에 온몸이 무자비하게 부딪히며 거칠게 튕겨 나갔다. 전신을 찌르는 마력의 반동에 숨이 단번에 막혀왔다."하아, 헉!"바닥에 무릎을 굴리며 숨을 턱 끝까지 차오르게 헐떡였다. 라이신이 친 단단한 결계의 벽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그때였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고 서늘하고 진한 사향 향이 코끝을 확 풍겨왔다.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내 가느다란 목덜미를 틀어쥐며 잡아채듯 일으켜 세웠다."앗······."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압도적인 악력과 온기에 전율이 오소소 돋아났다. 살기가 시퍼렇게 벼려진 레이피어를 손에 쥔 채, 아처린이 미간을 좁히며 나를 가만히 내리꽂아 보고 있었다. 초록 눈동자 속에는 기이한 열기가 얽혀 이글거렸다."또 뭘 한 거야?"나를 다그치는 그의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입술 사이로 뜨겁게 번져왔다. 목덜미를 그러쥔 그의 손가락 끝에 힘이 툭 들어가며, 내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로 꺾였다. 눈을 피할 수조차 없는 압박감이었다."그냥····
여름이 깊어가는 7월의 중순.라이신은 무더운 날씨에도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기 싫어, 가르남 영지에서 자체 결계를 치는 연습에 집중하고 있었다.아직 제국에서는 남편이 있는 여성 귀족이 영지를 독립적으로 경영하는 전례가 없어, 관련 법률안은 황궁에서 심한 진통을 겪는 중이었다.원래는 바아르와 함께 결계를 연습하고 있었으나, 그가 급한 전갈을 받고 황궁으로 떠나버렸다. 아처린이 제국을 활보하고 있는 현재, 홀로 가르남에 남아 있는 것이 혹여나 위험할까 싶어 돌아가려는 그때, 마침 할 로드와 레이나가 영지를 찾아왔다."할 로드, 레이나 님도 오랜만이에요. 적적했었는데, 반갑네요."아마 캔돔 저택에 들렀다가 라이신이 없자 이곳 가르남까지 찾아온 듯했다. 사실 바아르가 세상이 흉흉하다며 라이신을 과잉보호하듯 감싸고 있던 통에, 요즘 그녀는 저잣거리로 발걸음 한번 내딛지 못하는 신세였다."라이신, 이렇게 반겨주니 고맙다. 오랜만에 편하게 얼굴 보니 정말 좋네. 그렇지?""그럼! 라이신, 우리 임산부끼리 나눠야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나 진짜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어."다른 귀족이나 가신들이 없어서인지 레이나 역시 한층 편안해진 표정으로 다가왔다. 라이신은 가르남 결계 안에 마련된 마도구 밭의 테이블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하하, 레이나 님. 더운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라이신은 얼른 사과에 꿀과 얼음을 넣고 갈아 만든 시원한 셰이크를 대접했다. 그리고는 머리 위에 다시 투명한 결계를 펼쳐 놓은 채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갔다."어머나! 정말 천상의 맛이네요!""그러고 보니 이 사과 셰이크, 예전에 에스메 님도 무척 좋아하셨는데."라이신은 에스메가 이 음료를 마실 때마다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녀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당장이라도 귓가에
도르하르 공작령으로 향하는 레이나의 머릿속은 안개 속에 갇힌 등대처럼 방향을 잃었다.오늘 한 입도 대지 못한 따뜻했던 소시지가 포장지에 싸인 채 들고만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손에서 미지근해졌다.가던 길에 친정인 공작저로 방향도 돌렸고, 마차에서 할 로드를 보며 발걸음을 멈추었다.“어휴, 그 황태자랑 하마터면 밥을 함께 먹을 뻔했네.”할 로드는 어두운 표정으로 레이나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는 마음이 복잡한지 한숨을 쉬며 말문을 열었다.“마리는 목숨을 걸고 라이신을 살리고 도르하르에 충성을 다한 내 사람이야. 그 와중에 아처린은 기억에도 없는데··· 저리 서슬 퍼렇게 군림하려 들다니. 태생은 못 속이는군.”레이나는 사실 할 로드의 생각에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마리는 도르하르의 시녀로 세실리에를 맞서다 저주를 입어 죽을 위기를 넘겼다고 들었다.캔돔가에도 배신하지 않고 할 로드에게 위해를 끼치려고 한 황제도 제 손으로 처리했다고 할 만큼 할 로드에게도 은인인 사람이다.그저 레이나는 아처린이 싫었고, 오늘 그리 마주친 자체가 기분이 나빴을 뿐이었다.“하지만 오늘 아처린의 상태를 봐 두길 잘한 것 같아. 기억은 안 돌아와 다행이고.”“그래. 다음에는 이런 일은 벌이지 말아야겠어.”할 로드는 옆으로 다가가 레이나의 허리를 감싸 주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마치 오래된 시계의 추처럼 규칙적으로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그의 품에서 나는 시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