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은 언니의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 Chapter 71 - Chapter 80

310 Chapters

71. 엄마가 숨겨준 이유

“아직 얘기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엄마의 말이 떨어진 뒤.송유지는 바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모가 의아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봤다.“뭘 그렇게까지 숨겨?”“숨기는 게 아니라.”엄마가 짧게 말했다.“오늘은 제사 때문에 모인 거잖아.”“그래도 남자친구 있다는데 궁금하지.”“나중에 들으면 되지.”말투는 평범했다.하지만 유지는 알았다.엄마가 일부러 대화를 끊었다는 걸.고모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그래, 뭐. 나중에 제대로 소개해.”유지는 억지로 웃었다.“네.”대화는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그런데 유지의 심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도하를 봤다.그도 조금 전 상황을 전부 보고 있었다.시선이 잠깐 마주쳤다.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엄마가 왜 저랬을까.제사가 끝난 뒤에도 친척들은 한동안 거실에 남아 이야기했다.유지는 주방과 거실을 오가며 정리를 도왔다.도하는 아버지와 큰아버지 쪽에 앉아 있었다.둘은 일부러 가까이 가지 않았다.그런데 이상하게.예전처럼 숨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조금 전 유지가 분명하게 말했다.남자친구가 있다고.엄마도 그 말을 없던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차이가 자꾸 마음에 남았다.마지막 친척들이 돌아가고 현관문이 닫혔다.집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유지는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엄마가 남은 음식을 정리하고 있었다.“엄마.”엄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응.”“아까 왜 그랬어?”손이 잠깐 멈췄다.“뭘.”“고모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엄마는 다시 반찬통 뚜껑을 닫았다.“그냥 오늘 말할 필요 없으니까.”유지가 가만히 바라봤다.“내가 말하려고 했는데.”“알아.”“도하 씨라고.”엄마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하지만 이번에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것도 알아.”유지의 눈이 조금 커졌다.“그런데 왜 막았어?”엄마가 한숨을 내쉬었다.“막은 거 아니야.”“그럼.”한동안 대답이 없었다.유지는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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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조금 달라진 식탁

그날 이후.송유지는 엄마의 말을 자꾸 떠올렸다.—흰색 금방 더러워지겠다.별것 아닌 말이었다.커플 키링이라는 걸 알면서도.빼라고 하지 않았던 것.화를 내지도 않았던 것.유지는 그것만으로 의미를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엄마가 갑자기 둘을 받아들였다고 착각하고 싶지도 않았다.그래도.전보다 아주 조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그 정도면 됐다.월요일 저녁.채도하와 통화하던 중 유지가 말했다.“엄마 요즘 좀 이상하죠.”—뭐가.“조금 덜 화난 것 같기도 하고.”도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럴 수도 있고.“또 아닐 수도 있고?”—응.유지가 피식 웃었다.“되게 조심스럽게 말하네요.”—괜히 기대하게 만들기 싫어서.유지의 손이 잠깐 멈췄다.“저 기대하는 것 같아요?”—조금.유지는 부정하지 못했다.맞았다.엄마의 작은 반응 하나에도 자꾸 기대하게 됐다.“그래도.”유지가 말했다.“전보다 낫긴 하잖아요.”—응.“도하 씨도 그렇게 느끼죠?”—느껴.그 대답에 유지가 조금 안심했다.자신만 그렇게 보는 건 아닌 것 같아서.수요일 오후.엄마에게 전화가 왔다.“응, 엄마.”—금요일 저녁 시간 돼?유지의 손이 멈췄다.“왜?”—밥 먹게.“우리 둘이?”잠깐 침묵.—도하도.유지는 순간 말이 없었다.“도하 씨도?”—응.심장이 조금 빨라졌다.엄마가 먼저 도하까지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유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갑자기?”엄마가 바로 말했다.—그냥 밥 먹는 거야.유지는 그 말에 웃음이 날 뻔했다.“그냥 금지인데.”—뭐?“아니야.”엄마는 별말 없이 말했다.—올 거면 일곱 시까지 와.“응.”전화가 끊겼다.유지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바로 도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금요일 저녁 엄마가 오래요.답장은 금방 왔다.—나도 연락 왔어.유지의 눈이 조금 커졌다.—직접요?—응.—뭐라고 했어요?—금요일 저녁 시간 되냐고.유지는 한참 화면을 봤다.정말 처음이었다.엄마가 유지의 입을 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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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데이트다운 데이트

다음 날 오후.송유지는 옷장 앞에 서서 한참 고민했다.영화.채도하와 영화관에 가는 것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 평소보다 옷 하나 고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어제 엄마가 말했다.—너 영화 좋아하잖아. —그럼 영화도 보러 가고 그래.그 말을 듣고 바로 약속을 잡은 것도 웃겼지만.막상 진짜 영화관에 가려니 기분이 묘했다.유지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한 번 정리했다.“그냥 영화 보러 가는 건데.”혼잣말을 해놓고도 웃음이 났다.그냥이 아니었다.사귀고 나서.처음으로 정말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도하는 이미 와 있었다.유지가 가까이 가자 도하가 위아래로 한 번 봤다.유지는 바로 눈을 가늘게 떴다.“왜 그렇게 봐요?”“예뻐서.”걸음이 멈췄다.너무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다.“뭐라고요?”도하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예쁘다고.”유지는 괜히 주변을 봤다.“오늘 왜 이렇게 시작부터 그래요.”“말하면 안 돼?”“아니요.”유지는 입술을 눌러 웃었다.“해도 돼요.”도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그럼 됐네.”영화관에 들어가자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다.도하가 예매해둔 표를 확인했다.유지가 화면을 힐끗 봤다.“로맨스네요?”“응.”“도하 씨 이런 거 봐요?”“오늘은.”“왜 오늘은?”도하가 유지 쪽을 봤다.“데이트니까.”유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진짜 적응 안 된다.”“뭐가.”“도하 씨가 데이트라고 하는 거.”“어제 너도 했잖아.”“저는 원래 말 잘하잖아요.”“그건 인정.”둘은 매점으로 갔다.유지가 팝콘을 고르는데 도하가 물었다.“카라멜?”“반반.”“단 거 좋아하잖아.”“그래도 영화관에서는 반반.”“이건 몰랐네.”유지가 웃었다.“드디어 도하 씨가 모르는 거 하나 찾았다.”“앞으로 더 알면 되지.”유지의 손이 멈췄다.도하는 이미 주문하고 있었다.유지는 그 옆얼굴을 잠깐 바라봤다.앞으로.그 단어가 요즘 자꾸 자연스럽게 들어왔다.당장 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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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아무도 시키지 않은 약속

월요일 오후.송유지는 업무를 마무리하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채도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토요일 비워.유지는 화면을 보고 바로 웃었다.—왜요?답장은 금방 왔다.—데이트.유지의 손이 멈췄다.지난번 자신이 말했다.다음에는 엄마가 시켜서 말고.도하 씨가 직접 정하라고.그걸 기억하고 있었다.—어디 가는데요?잠시 뒤.—비밀.유지는 피식 웃었다.—또요?—응.—저 비밀 싫어하는데.—이번엔 좋아할 거야.유지는 한참 화면을 봤다.요즘의 도하는 자꾸 이런 식이었다.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고.그걸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예전에는 작은 것까지 기억하는 이유가 궁금했다.이제는 굳이 묻지 않았다.좋아하니까.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알겠어요.잠깐 고민하다 한 줄을 더 보냈다.—기대할게요.읽음.그리고.—해도 돼.유지는 그대로 입꼬리를 올렸다.토요일 오전.도하는 약속한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했다.유지가 차에 타자마자 물었다.“그래서 어디 가요?”“출발하면.”“말한다고요?”“아니.”유지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끝까지 안 알려줄 거예요?”“응.”“진짜 성격 이상해.”도하가 시동을 걸었다.“싫으면 지금 내려도 돼.”유지가 안전벨트를 맸다.“누가 내린대요.”도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차는 도심을 벗어났다.유지는 내비게이션을 힐끗거리다 포기했다.“멀어요?”“한 시간 정도.”“설마 산?”“아니.”“바다?”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유지가 그를 빤히 봤다.“바다네.”“말 안 했는데.”“표정이 그랬어요.”“내 표정이 뭔데.”“들킨 표정.”도하가 피식 웃었다.유지는 창밖을 바라봤다.날씨가 좋았다.맑고.바람도 많지 않았다.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어디로 가는지 몰라도.도하와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착한 곳은 바닷가 근처의 작은 산책로였다.유지는 차에서 내려 한동안 앞을 바라봤다.“여기 처음 와요.”“알아.”유지가 바로 돌아봤다.“그것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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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다시 들어간 집

일요일 오후.송유지는 채도하의 집 앞에 서 있었다.초인종을 누르기 전.이상하게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수없이 와본 집이었다.언니가 살아 있을 때도.언니가 없어진 뒤에도.물건을 정리하러.반찬을 가져다주러.도하가 걱정돼서.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도하가 보고 싶어서.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오늘 처음으로.채도하의 여자친구가 되어 이 집에 들어가는 날이었다.휴대전화가 울렸다.—왜 안 들어와.유지는 눈을 크게 떴다.주변을 둘러본 뒤 답했다.—어떻게 알아요?곧바로.—현관 카메라.유지는 입술을 삐죽였다.—그럼 문이나 열어요.몇 초 뒤.현관문이 열렸다.도하가 안쪽에 서 있었다.“왜 밖에서 그러고 있어.”“마음의 준비.”도하가 눈썹을 조금 올렸다.“우리 집 들어오는데?”유지는 신발을 벗으며 중얼거렸다.“예전이랑 다르니까 그렇죠.”도하가 잠깐 그녀를 바라봤다.그도 무슨 뜻인지 이해한 것 같았다.하지만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들어와.”유지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거실에 발을 들인 순간.유지는 걸음을 멈췄다.뭔가 달랐다.처음에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소파도 그대로.테이블도 그대로.창가에 놓인 화분도 익숙했다.그런데.“어?”도하가 물었다.“왜.”유지는 벽 쪽을 바라봤다.예전에 있던 큰 액자가 사라져 있었다.도하와 유리의 결혼사진.이 집에 올 때마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 했던 사진이었다.그 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다.대신 작은 그림 하나가 걸려 있었다.유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진.”도하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유지가 그를 봤다.“없네요.”“응.”“언제 치웠어요?”“조금 됐어.”“왜요?”도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유지의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혹시 자신 때문일까.자신이 불편해할까 봐.사귀기 시작했으니까.언니의 흔적을 없애려는 걸까.“저 때문에요?”도하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진짜요?”“응.”도하는 잠깐 벽을 바라봤다.“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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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남겨두는 물건

월요일 퇴근 후.송유지는 생활용품점 안에서 한참 칫솔 코너를 바라보고 있었다.분홍색.흰색.연보라색.손에 하나씩 들어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어제 자신이 장난처럼 말했다.—그럼 다음에는 칫솔 놔도 돼요?그리고 채도하는 너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놔.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정말 가져다 놔도 되나.별것 아닌 칫솔 하나인데.막상 사려니 괜히 의미가 커졌다.유지는 결국 흰색 칫솔 하나를 골랐다.그리고 잠깐 고민하다 작은 파우치도 함께 샀다.칫솔.립밤.머리끈.핸드크림 정도를 넣을 수 있는 작은 크기였다.계산을 마친 뒤 쇼핑백을 내려다보다 혼자 웃었다.“이게 뭐라고.”그런데도 기분이 좋았다.채도하에게는 미리 말하지 않았다.저녁 약속도 없었다.유지는 집에 돌아와 쇼핑백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한참 바라봤다.휴대전화가 울렸다.도하였다.—퇴근했어?—네.—집?유지는 잠깐 망설였다.—네.몇 초 뒤.—오늘 안 볼 거야?유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보고 싶어요?답장이 조금 늦었다.—응.유지는 화면을 보고 웃었다.이제는 이런 말을 듣고도 예전처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그래도 기분은 좋았다.—그럼 제가 갈까요?읽음.곧바로.—와.유지는 쇼핑백을 들었다.도하의 집 앞.유지는 이번에는 초인종을 누르기 전 오래 서 있지 않았다.바로 눌렀다.곧 문이 열렸다.도하는 편한 셔츠 차림이었다.유지가 들어가며 말했다.“오늘은 안 기다렸죠?”“뭘.”“현관 앞에서.”도하가 피식 웃었다.“응.”유지는 신발을 벗었다.한 손에 든 쇼핑백을 본 도하가 물었다.“그건 뭐야.”“비밀.”“또?”“네.”도하가 쇼핑백을 한번 봤지만 더 묻지 않았다.유지는 괜히 웃으며 거실로 들어갔다.주방에는 어제 자신이 썼던 흰색 머그가 그대로 있었다.깨끗하게 씻긴 채.도하의 검은 머그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유지는 그 앞에서 잠깐 멈췄다.“안 치웠네.”도하가 냉장고를 열며 말했다.“왜 치워.”“그냥.”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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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하룻밤을 남긴다는 것

다음 날 아침.송유지는 출근 준비를 하다가 옷장을 열었다.그리고 괜히 한쪽을 오래 바라봤다.어제 채도하가 말했다.—옷도 한 벌 놔.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한 이야기였다.컵 하나.칫솔 하나.작은 파우치.그런데 이제는 옷까지.유지는 셔츠 한 장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진짜 갖다 놓으라고?”혼잣말을 하고 나니 괜히 웃음이 났다.휴대전화가 울렸다.도하였다.—출근 준비?—네.—오늘 늦어?유지는 시계를 봤다.—아니요. 왜요?답장은 금방 왔다.—저녁 먹자.유지는 잠깐 웃었다.—또 집에서요?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싫어?—아니요.유지는 몇 초 고민하다가 한 줄을 더 보냈다.—옷 가져갈까요?읽음.잠시 답이 없었다.유지는 괜히 긴장됐다.그리고.—응.짧았다.그런데 심장이 이상하게 빨라졌다.퇴근 후.유지는 집에 잠깐 들렀다.작은 가방을 꺼냈다.편한 티셔츠.바지.속옷까지 넣으려다가 손이 멈췄다.“아니, 왜 속옷까지.”혼자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런데 갈아입을 옷을 가져가는 거라면 당연한 일이었다.유지는 한숨을 쉬며 넣었다.그리고 잠깐 생각하다 화장품 몇 개도 챙겼다.가방이 생각보다 묵직해졌다.들고 보니 더 이상 ‘옷 한 벌’ 같지 않았다.어딘가에서 자고 올 때 드는 가방 같았다.유지는 그대로 멈췄다.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긴장됐다.오늘 자고 올 생각은 없었다.도하도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그저 옷을 하나 놔두자는 것뿐이었다.유지는 괜히 가방 지퍼를 다시 열었다가 닫았다.“아니야. 그냥 가져다 놓는 거야.”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도하의 집에 도착하자 문이 바로 열렸다.유지가 가방을 들고 들어가자 도하의 시선이 거기에 머물렀다.“많이 가져왔네.”유지가 바로 방어적으로 말했다.“많이 아니거든요.”“그 가방 크기면 며칠은 되겠는데.”“티셔츠 하나랑 바지 하나예요.”도하가 웃었다.“알겠어.”유지는 가방을 꼭 잡았다.“왜 웃어요.”“아니.”“또 그 말.”“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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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아침이 된 뒤

송유지가 눈을 떴을 때.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낯선 천장.익숙하지 않은 베개.그리고.손끝에 닿아 있는 따뜻한 온기.유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채도하가 바로 옆에 누워 있었다.순간.어젯밤 기억이 한꺼번에 돌아왔다.늦어진 시간.자고 가도 되냐고 먼저 물었던 것.같은 침대에 누웠던 것.그리고 손을 잡은 채 잠들었던 것까지.유지는 아주 천천히 아래를 봤다.손은 아직도 잡혀 있었다.밤새 한 번도 놓지 않은 건지.자다가 다시 잡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유지는 괜히 입술을 꾹 눌렀다.이상했다.아무 일도 없었다.정말 잠만 잤다.그런데 어젯밤보다 지금이 더 부끄러웠다.자는 얼굴까지 보고 있으니까.유지는 손을 조심스럽게 빼려고 했다.그 순간.도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유지가 멈췄다.“……자요?”도하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응.”유지가 어이없는 듯 웃었다.“자는 사람이 대답해요?”그제야 도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깼어.”“언제부터요?”“조금 전.”“그럼 왜 가만히 있었어요.”도하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먼저 깰 때까지.”유지의 심장이 괜히 조금 빨라졌다.“왜요?”“놀랄까 봐.”유지는 피식 웃었다.“제가 여기 있는 걸요?”“응.”“제가 자고 간다 했는데.”“아침에는 또 다를 수 있잖아.”유지는 도하를 가만히 바라봤다.이 사람은 이런 데서 이상하게 조심스러웠다.“안 놀랐어요.”“다행이네.”“근데.”유지가 맞잡힌 손을 들어 보였다.“이건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예요?”도하가 내려다봤다.“싫어?”“아니요.”대답이 너무 빨랐다.도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그럼 조금 더.”유지는 결국 웃었다.몇 분 뒤.유지는 침대에서 먼저 일어났다.발을 바닥에 내리다가 자신의 옷차림을 보고 다시 실감했다.도하의 집.도하의 침실.그리고 아침.그동안 자신의 물건을 하나씩 놓아둘 때와는 전혀 달랐다.욕실에 들어가자 흰색 칫솔이 보였다.어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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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잠만 잤다는 말

하루 종일.송유지는 엄마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오늘 저녁에 얘기하자.업무를 하는 동안에도.점심을 먹는 동안에도.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더 신경 쓰였다.엄마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은 됐다.왜 도하 집에서 잤는지.왜 굳이 거기서 자야 했는지.둘 사이에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지.그리고.앞으로도 계속 그럴 건지.유지는 결국 휴대전화를 들었다.채도하와의 채팅창.—저녁에 엄마 만나러 가요.답장은 바로 왔다.—응.—긴장돼요.잠시 뒤.—알아.유지는 화면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도하 씨는 너무 태평한 거 아니에요?—나도 긴장돼.—안 그래 보이는데.—네가 안 보고 있어서 그래.그 말에 유지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잠깐 고민하다가 썼다.—엄마가 뭐라고 해도 오늘은 제가 말해볼게요.읽음.조금 뒤.—그래.그리고 한 줄이 더 왔다.—근데 혼자 다 책임지려고 하지는 마.유지의 손이 멈췄다.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잡아줬다.저녁 일곱 시.유지는 부모님 집에 도착했다.아버지는 아직 퇴근하지 않은 상태였다.엄마만 거실에 앉아 있었다.평소처럼 TV가 켜져 있었지만.소리는 아주 작았다.“왔어?”“응.”“앉아.”유지는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엄마는 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그 침묵이 더 부담스러웠다.결국 유지가 먼저 말했다.“엄마.”“응.”“아침에 말한 거.”엄마가 그제야 유지 쪽을 봤다.“도하 집에서 잤다는 거?”유지의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응.”“왜 잤어.”예상했던 질문이었다.유지는 잠깐 숨을 골랐다.“늦었고.”엄마 표정이 바로 굳었다.유지는 곧바로 고쳤다.“그것 때문만은 아니야.”“그럼.”“제가 있고 싶었어.”엄마의 눈빛이 달라졌다.유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도하 씨가 자고 가라고 한 것도 아니고.”“…….”“제가 먼저 말했어.”엄마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네가?”“응.”“왜.”유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왜였을까.그날.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던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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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같이 산다는 생각

송유지는 한동안 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수화기 너머로 채도하의 목소리가 아직 남아 있었다.—응. —있어.같이 사는 생각을 해본 적 있냐고 물었고.도하는 있다고 했다.장난도 아니었다.가볍게 흘린 말도 아니었다.유지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언제부터요?”도하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정확히는 모르겠어.“또 모르겠어요?”평소 같으면 웃었을 말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도하가 낮게 말했다.—네 물건 하나씩 생길 때부터였을 수도 있고.유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네가 자고 간 다음일 수도 있고.“…….”—아침에 네가 있는 게 생각보다 자연스러웠어.유지는 천천히 걸음을 다시 옮겼다.심장이 괜히 빨라졌다.“그래서 같이 살고 싶었어요?”도하는 한동안 침묵했다.—생각은 해봤다고.“그게 그 말 아닌가.”—다르지.“어떻게요?”도하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생각해봤다고 바로 하자는 건 아니니까.유지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그러면서도.아주 조금은 아쉬웠다.그 감정을 알아차린 순간 스스로 당황했다.“맞아요.”—왜 아쉬운 목소리야.유지의 걸음이 멈칫했다.“제가 언제요.”—방금.“아닌데요.”—맞는데.유지는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그냥.”말하다가 바로 고쳤다.“도하 씨가 그렇게까지 생각해봤다는 게 신기해서요.”—왜.“우리 사귄 지 얼마 안 됐잖아요.”—응.“그런데 같이 사는 생각까지 했다고 하니까.”잠깐.“조금 빠른 것 같기도 하고.”도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다 말했다.—사귄 기간만 보면 그렇지.유지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맞는 말이었다.둘이 연인이 된 시간은 짧았다.하지만.서로 알고 지낸 시간은 훨씬 길었다.그 안에 언니도 있었고.가족도 있었다.너무 많은 시간이 이미 겹쳐 있었다.“그렇네요.”—그래도 서두를 생각은 없어.“왜요?”—네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까.유지는 대답하지 않았다.부담스럽냐고 묻는다면.아니라고도.그렇다고 바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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