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모님의 입술을 적시는 셰프: Chapter 11 - Chapter 20

33 Chapters

11화. VVIP 만찬의 서막

토요일 저녁 7시, 펜트하우스 다이닝룸은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황금빛 조명으로 눈부시게 타올랐다.프랑스 대형 유통 그룹 ‘루미에르’의 아시아 총괄 부사장 장뤽(Jean-Luc)을 비롯한 해외 귀빈 여섯 명이 웅장한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상석에 앉은 서태우는 최고급 맞춤 수트에 샴페인 글라스를 높이 치켜들고 특유의 오만하고 과시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장뤽 부사장님, 오늘 귀빈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파리 미슐랭 3스타 출신의 수셰프를 어렵게 모셨습니다. 오늘 밤 서울 한복판에서 파리 최고의 미식을 경험하시게 될 겁니다.”“오, 서 상무님. 기대가 아주 큽니다. 파리의 유서 깊은 맛을 서울에서 만난다니 참으로 대단하군요.”태우는 우쭐한 표정으로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때, 다이닝룸의 육중한 문이 열리며 안주인 백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테이블에 둘러앉은 손님들의 시선이 채린에게 모였다. 감청색 이브닝드레스는 그녀가 직접 고른 것이었다. 드레스 안쪽에는 오후에 변호사와 함께 확인한 소형 녹음 핀이 달려 있었다. 채린은 태우의 위협이 나오면 남기겠다고 직접 작동 버튼을 눌렀다.안색은 여전히 옅었지만 시선은 달랐다. 채린은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상석 옆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장뤽 부사장이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미소 지었다.“마담 백, 직접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프랑스어가 아주 자연스러우시군요.”“감사합니다, 부사장님. 음식과 대화 모두 편하게 즐겨주세요.”채린은 막힘없는 프랑스어로 화답했다. 장뤽이 최근 파리 물류 파업 이야기를 꺼내자 현지 항만 사정까지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태우의 눈매가 불쾌하게 가늘어졌다. 집에서는 말끝마다 사과하던 아내가 손님 앞에서는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채린의 얼굴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그때, 다이닝룸의 문이 열리고 블랙 셰프 코트를 입은 강도혁이 은빛 카트를 밀고 들어섰다. 손님들 앞에서는 표정도 보폭도 흐트러짐이 없었다.“첫 번째 아뮤즈 부쉬 서빙하겠습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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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거실의 건배, 주방의 침묵

철컥.팬트리 문이 닫히며 다이닝룸의 조명과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잘렸다. 벽을 채운 와인 병, 올리브유, 건조 하몽의 향이 서늘한 공기 속에 뒤섞였다.“왜 여기로 불렀어요?”채린이 목소리를 낮췄다. 도혁은 문에서 한 걸음 물러난 채 작은 도자기 접시를 들어 보였다. 포도주에 졸인 무화과와 따뜻한 푸아그라 테린 한 점이 놓여 있었다.“손님들께 내기 전 마지막 페어링입니다. 지금은 채린 씨 혀가 제일 정확하니까요.”“밖에서 남편이 와인을 기다려요.”“그럼 와인만 들고 나가셔도 됩니다.”도혁은 길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비켜섰다.“문은 잠그지 마요.”“잠그지 않았습니다.”도혁은 손잡이를 한 번 내려 보여주었다. 언제든 열고 나갈 수 있다는 확인이었다. 채린은 그제야 어깨의 힘을 조금 풀었다. 불과 3미터 밖에서는 잔이 부딪히고 서태우의 과장된 웃음이 터졌다.“하하하! 오늘 계약은 문제없습니다, 부사장님!”“서 상무의 환대에 건배를.”채린은 문고리를 바라보다 다시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고소한 지방 향 뒤로 무화과의 달콤한 산미가 올라왔다. 며칠 전이었다면 냄새만으로도 속이 뒤집혔을 텐데, 지금은 맛을 구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한 입만요. 그리고 빨리 끝내요.”“알겠습니다.”“맛만 볼 겁니다.”“맛만 묻겠습니다.”도혁은 약속하듯 접시를 채린 쪽으로 밀고 자신은 반걸음 물러섰다. 도혁은 포크를 건네주었다. 채린은 제 손으로 푸아그라를 입에 넣었다. 부드럽게 녹는 지방 뒤에 무화과의 산미가 번지자 미간이 조금 펴졌다.“어떻습니까?”“잼이 조금 달아요. 와인과 먹으면 더 무거울 것 같아요.”도혁의 눈에 짧은 만족이 스쳤다.“그럼 산미를 올리겠습니다. 정확하군요.”“내 혀가 정확한지 어떻게 알아요?”“단맛에 눌린 지방 맛을 바로 짚었습니다. 훈련받은 사람도 자주 놓칩니다.”채린은 포크 끝을 내려다봤다. 태우에게는 ‘맛도 모르는 여자’였는데, 도혁은 그녀의 한마디로 접시를 바꾸고 있었다.“내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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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팬트리 안에서 숨죽인 숨결

삐이익—.팬트리 문이 열리며 다이닝룸의 소음과 바깥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채린의 심장이 발밑으로 꺼지는 듯했다. 남편에게 들키면 친정 회사도 자신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었다. 문과 와인 랙 사이 거리를 재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도혁이 즉시 채린의 허리를 받쳐 와인 랙 뒤편의 좁은 틈으로 이끌었다. 천장까지 이어진 참나무 선반과 식자재 박스가 시야를 가려주었다. 도혁이 채린의 뒤를 가리고 섰다. 손바닥이 입술 위에 닿기 전, 그가 눈으로 허락을 구했다. 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이 조심스럽게 입을 덮었다. 다른 팔은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허리만 받쳤다.차가운 선반 모서리가 팔에 닿았고 와인 병 하나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도혁은 병이 더 움직이지 않도록 손등으로 받치면서도 채린을 누르지는 않았다.“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이 여편네가?”서태우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팬트리 안을 울렸다. 무거운 구두 발소리가 안쪽으로 다가왔고, 술과 독한 애프터셰이브 향이 좁은 공간에 번졌다. 채린의 무릎이 작게 떨렸다. 바로 앞 선반 너머로 서태우의 양복 소매가 스쳤다. 고개만 돌려도 두 사람을 볼 수 있는 거리였다.도혁은 그녀의 귀 뒤에 이마를 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드레스 너머로 전해지는 심장 박동과 목덜미에 닿는 숨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채린은 공포 때문에 떨면서도, 자신을 받친 남자의 체온까지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숨을 더 얕게 쉬었다.손등에 닿은 셰프 코트의 단추 하나까지 느껴졌다. 채린은 그 감각을 붙잡고 속으로 호흡을 셌다. 남편의 구두가 한 걸음씩 옮겨갈 때마다 도혁의 팔은 흔들리지 않았고, 채린이 먼저 손목을 붙잡기 전까지 더 가까이 당기지도 않았다. 태우가 투덜거리며 선반 위를 거칠게 뒤적였다.“와인 하나 제 손으로 못 챙겨서 손님들 앞에서 개망신을 줘? 살림도 못 하는 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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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귓가에 쏟아지는 뜨거운 속삭임

채린은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눌렀다.“싫어서 뛰는 건 아니에요. 들킬까 봐 무서운 거예요.”도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쥔 손부터 풀었다.“그럼 여기서 멈춥니다.”그가 한 걸음 물러서자 오히려 찬 공기가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채린은 숨을 고르다 그의 셰프 코트 소매를 다시 붙잡았다.“멈추라는 말은 안 했어요.”“채린 씨.”“오래 끌지 말라는 뜻이에요. 밖에서 또 찾을 테니까.”도혁의 눈매가 짙어졌지만, 대답은 여전히 짧았다.“알겠습니다.”그는 품 안에서 작은 보온 케이스를 꺼냈다. 주방에서 미리 그을려 둔 무화과와 블루치즈 한 조각이 미지근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달콤한 과즙과 알싸한 치즈 향이 서늘한 공기에 번졌다.“아까 푸아그라보다 산미를 높였습니다. 한 입만 확인해 주세요.”“이 와중에도 맛부터 묻네요.”“그게 제 일이니까요.”“사람이 이런데도요?”“이럴수록 맛은 정확해야 합니다. 단맛이 지나치면 금방 질리고, 향이 세면 다른 감각을 덮습니다.”“사람도 그래요?”도혁은 잠깐 그녀를 봤다.“사람은 제가 함부로 간하지 않습니다.”채린의 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이 스쳤다. 도혁이 포크를 내밀자 그녀가 손목을 잡아 방향을 바꿨다.“이번에도 제가 정할게요.”“네. 손은 어디에 둘까요?”“허리만.&rd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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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벽 너머 들려오는 남편의 발소리

채린이 자리에 앉자 서태우가 웃는 얼굴로 목소리만 낮췄다.“사모님,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온 겁니까?”태우는 이를 악문 채 채린의 붉은 입술과 드레스 깃에 밴 허브 향을 번갈아 살폈다. 손님들 앞이라 목소리를 낮췄을 뿐, 의심은 감추지 못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손님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모였다. 드레스 안쪽의 녹음 핀이 피부에 닿아 있었다. 채린은 장치를 확인하려 손을 대는 대신, 태우가 내뱉는 말을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다.잠깐의 침묵 끝에 채린은 태우를 똑바로 보며 차분한 미소로 받아쳤다.“주방에서 셰프님이 만찬용 블루치즈 페어링 소스를 테스트 중이더군요. 풍미가 워낙 짙고 강렬해 옷깃에 향이 밴 모양입니다.”채린은 끝까지 말투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장뤽 부사장이 웃으며 와인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하하, 안주인께서 직접 페어링까지 확인하셨군요. 덕분에 와인이 더 인상적입니다.”손님들의 호응이 이어지자 태우는 억지로 웃었다. 아내를 더 추궁하지는 못했지만 턱 근육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식사가 이어지며 도혁이 준비한 한우 안심 로스트와 트러플 주(Jus) 소스가 테이블 위에 올랐다. 익힘과 육즙에 손님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도혁은 채린 앞에만 양을 절반으로 줄인 접시를 놓고 소스는 옆에 따로 담았다.“향이 강하면 소스는 남기십시오.”“단맛은 아까보다 줄였어요?”“무화과는 빼고 육즙만 졸였습니다.”채린은 작은 한 점을 잘라 충분히 씹었다. 태우가 보는 앞에서도 삼키는 속도를 서두르지 않았다. 고기를 넘긴 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포크를 내려놓자 도혁도 더 권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태우가 냅킨을 내려놓고 채린의 귓가에 말했다.&ldquo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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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붉게 물든 이브닝드레스

암막 커튼 뒤의 좁은 틈에서 두 사람은 숨을 죽였다. 서태우의 구두 굽이 불과 30cm 앞에서 멈췄고, 옷깃 스치는 소리까지 들렸다.“어디로 샌 거야, 이 여편네가…… 귀찮게 진짜.”태우가 담배를 꺼내 무는 소리가 났다. 채린의 무릎이 흔들리자 도혁이 허리 옆에서 손을 멈췄다. 채린이 뒤로 기대자 그제야 체중을 받아냈다. 그의 턱은 어깨 가까이에 머물렀고 숨결만 목덜미에 닿았다.‘제발…… 그냥 돌아가…….’채린의 간절한 기도 속에서, 태우는 라이터 불을 켜다 말고 거실 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혀를 찼다.“서 상무! 장뤽 부사장이 추가 브리핑을 원합니다!”“아, 예! 지금 바로 들어갑니다!”태우가 테라스 문을 열고 다이닝룸으로 돌아가자 구두 소리도 멀어졌다.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팽팽했던 공기가 풀렸다.“후우…… 하아…….”채린이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도혁이 옷깃을 정리해도 되겠느냐는 듯 손을 들자 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는 흐트러진 드레스를 여며주고 멍든 손목을 살폈다.“이제 나갈 시간입니다, 마에스트로.”도혁은 채린이 호흡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부사장에게 선우물산의 콜드체인부터 말씀하십시오. 서태우가 끼어들면 자료를 보여달라고 하세요. 숫자와 특허는 거짓말을 못 합니다.”“내가 말할게요. 도혁 씨는 대신 설명하지 마요.”“알겠습니다. 질문을 받으면 자료만 넘기겠습니다.”채린은 드레스 안쪽의 녹음 핀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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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남편의 수상한 눈초리

띵동—.스마트 인터폰 차임벨이 거실을 울렸다. 화면에는 블랙 셔츠를 입고 1층 로비에 서 있는 강도혁이 보였다. 채린의 멱살을 잡으려던 서태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남자의 눈동자에 사나운 핏발이 서며 턱 근육이 불거져 나왔다.“저 새끼가…… 아직도 안 가고 이 야심한 시간에 왜?”태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인터폰 통화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내리눌렀다.“야! 네놈이 이 시간에 무슨 볼일이야? 파티 끝났으면 곱게 꺼질 것이지!”[상무님, 주방에 개인 가죽 칼가방과 프랑스산 트러플 오일 박스를 두고 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고가 특수 장비라 즉시 회수해야 해서 잠시 올라가겠습니다.]스피커 너머 도혁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절제돼 있었다. 태우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장뤽 부사장이 극찬한 셰프의 장비를 억류해 분란을 일으킬 명분은 없었다. 철컥. 태우가 현관문 잠금을 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도혁이 긴 다리로 복도를 가로질러 들어섰다. 남자의 보폭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도혁은 현관에 선 두 사람을 훑었다. 채린의 흐트러진 옷깃과 태우의 굳은 주먹을 본 순간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아무 말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태우는 팔짱을 낀 채 도혁의 뒤를 집요하게 쫓아갔다. 주방 아일랜드 식탁 위, 묵직한 가죽 칼가방을 지퍼로 잠그는 도혁의 손길을 노려보던 태우가 코를 킁킁거렸다.‘……!’태우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도혁의 손목과 셔츠 깃에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쌉싸름한 시더우드 향. 조금 전 테라스에서 채린의 드레스에 밴 것과 같은 향이었다. 주방에서 흔히 날 법한 버터 향과 달리, 시더우드 향은 두 사람의 옷깃에 비슷하게 남아 있었다. 확실한 증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의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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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은밀한 도발과 깊어지는 덫

어둠이 짙게 깔린 펜트하우스 45층. 채린이 발코니 창의 잠금을 풀자, 옆쪽 공용 점검 테라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채린 씨, 접니다.”루미에르 경호팀이 관리실 협조를 받아 확보한 서비스 통로였다. 블랙 재킷 차림의 도혁이 난간 안쪽 연결 데크를 건너 방으로 들어왔다. 옷깃에는 가을밤의 찬 공기가 묻어 있었다.“……도혁 씨!”도혁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문과 복도를 확인했다.“지금 나갈 수 있습니다. 아래에 경호팀이 있고, 경찰에 바로 신고할 수도 있습니다.”채린이 한 걸음 다가와 그의 재킷을 붙잡았다.“먼저 안아줘요.”그제야 도혁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여기 있습니다.”남자의 굵은 중저음이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렸다. 도혁은 주머니에서 작은 보온병을 꺼내 은빛 뚜껑에 허브차를 따랐다. 레몬그라스와 생강, 야생 꿀을 넣은 따뜻한 차였다.“한 모금 괜찮겠습니까?”채린이 손을 내밀자 도혁이 뚜껑을 건넸다. 달콤하고 알싸한 온기가 메마른 식도를 적시며 위장을 따뜻하게 달래주었다. 채린은 남자의 품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단단한 흉통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남편의 폭력으로 남은 공포를 조금씩 밀어냈다.“서태우가…… 거실과 주방에 전부 카메라를 달았어요. 폰도 부수고 날 가뒀어요.”“관리 서버 구조는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먼저 채린 씨가 동의해야 움직입니다. 영상 확보와 신고, 둘 다요.”“둘 다 해요. 이번에는 남겨야 해요.”“그럼 지금 나가시겠습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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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차가운 대리석 위의 열기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안방, 굳게 닫혀 있던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도혁이 살얼음 맺힌 샴페인 글라스와 은빛 돔을 덮은 플레이트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침대 모서리에 잔뜩 웅크려 있던 채린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낮에 서태우가 거실과 주방 곳곳에 설치해 둔 CCTV 카메라들의 붉은 감시 렌즈가 번뜩 떠올랐기 때문이었다.“도혁 씨…… 거실의 카메라가…….”“걱정하지 마십시오.”도혁은 침대 앞에 멈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홈캠에는 30분 전의 빈 거실 영상만 반복됩니다. 녹화에도 남지 않습니다.”도혁이 은빛 돔을 열었다. 얇게 저민 한우 채끝에 생와사비와 올리브유, 검은 송로버섯을 얹은 비프 카르파초였다. 고기의 담백한 향 뒤로 트러플 향이 올라왔다.“기름기는 적고 온도는 차갑게 맞췄습니다. 오늘은 한 점만 확인하죠.”“와사비는 얼마나 넣었어요?”“평소의 절반입니다. 더 덜어낼까요?”“조금만 더 빼줘요. 포크는 도혁 씨가 들어요.”도혁은 와사비를 덜어낸 뒤 다시 눈으로 물었다. 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얇은 고기 한 점을 입술 앞으로 가져왔다. 채린은 주저하지 않고 입술을 벌렸다. 차갑고 매끄러운 고기의 식감 뒤로 트러플 향과 올리브유의 산미가 또렷하게 느껴졌다.꿀꺽. 채린이 고기를 삼키자, 도혁이 차가운 샴페인 잔을 그녀의 붉어진 입술에 기울여주었다. 스파클링 와인의 탄산과 시트러스 향이 목을 지나자 채린의 어깨가 움찔했다.“와인은 내가 들게요.”채린이 잔을 받아 한 모금만 마셨다.“고기는 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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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셰프의 고백과 선을 넘은 관계

알림음은 멈추지 않고 어두운 주방을 울렸다. 거실 소파 아래, 서태우의 태블릿 화면에 [발신: 평택 물류본부 서태우 상무]라는 붉은 글자가 번쩍였다. 채린의 호흡이 덜컥 멎었다. 차가운 대리석 위에 누워 있던 그녀의 전신에 다시금 공포의 한기가 엄습하려 했다.도혁의 눈이 한 번 좁아졌지만 손은 먼저 움직였다. 그는 채린의 뺨을 감싸 시선을 돌려놓았다.“화면 보지 마세요. 제가 끊겠습니다.”도혁은 셰프 코트를 걸치고 거실로 나가 태블릿 전원을 껐다. 이어 홈캠 서버 연결까지 차단했다. 요란했던 경보음이 뚝 끊기고 주방에는 다시 깊은 고요가 찾아왔다. 채린이 팔을 내밀자 도혁이 안아 올려 차가운 식탁에서 침대로 옮겼다. 이불을 쇄골까지 덮어준 뒤 주방에서 따뜻한 음료를 준비해 왔다.따뜻하게 데운 우유에 은은한 넛맥 파우더와 바닐라빈 추출액을 넣은 온음료였다. 달콤하고 포근한 향기가 방 안을 부드럽게 채웠다.“따뜻할 때 마셔요. 놀란 심장을 가라앉혀 줄 겁니다.”도혁이 컵을 쥐여주며 채린의 곁에 앉았다. 채린은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모금 넘겼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자, 굳어 있던 어깨가 스르륵 풀려내렸다.“도혁 씨…… 왜 이렇게까지 날 도와주는 거예요?”채린은 도혁이 동정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도혁은 컵을 내려놓았다.“어젯밤 이 집에 들어온 이유는 말씀드렸습니다. 서태우를 추적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왜 채린 씨 곁에 남았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그 이유가 달라요?”“네.”“10년 전, 마포에서 한식당을 하던 제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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