بيت /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 / Chapter 11 -الفص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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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이건은 침상에 누운 채 화려한 단청이 얹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천하를 손에 쥔 듯 기세등등하던 젊은 황제는 이제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다.‘소은하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걱정했을까?’그 생각이 들자 이건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아니. 지금의 소은하라면 자신을 걱정하기는커녕, 뼛속 깊이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지.’그의 앞에는 서찰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모두 북방 변경의 전세가 급박하던 때, 소은하가 전황와 함께 도성으로 보내 온 서찰이었다.예전의 이건은 그것들을 펼쳐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그런데 소은하가 죽고 난 뒤, 텅 빈 듯한 가슴을 견디지 못하다 문득 그 서찰들이 떠올랐다.사람을 시켜 한참을 뒤진 끝에야 먼지가 수북이 내려앉은 서책 더미 속에서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문밖에서는 그토록 연모하던 나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달래고 있었다.하지만 이건은 좀처럼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책상 위에 놓인 소은하의 반듯한 글씨를 오래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현진아.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나현진은 속이 상했지만 감히 더 말하지 못했다.입술을 꾹 다문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소은하는 짧은 생을 살아오며 칼과 창을 다루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하지만 붓을 들고 글을 익히는 일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어릴 적 황자의 배동으로 궁에 들어왔지만, 정작 자주 한 일이라곤 이건 대신 스승에게 매를 맞는 것이었다.그때의 이건은 총애받지 못하는 황자였다.그를 모시는 궁인들마저 두 사람을 업신여기기 일쑤였다.비가 새는 처소를 고쳐 달라 아뢰어도 한 달이 지나도록 사람 하나 오지 않았고, 한여름이면 다른 전각에 내려지는 얼음조차 그들에게는 몫이 돌아오지 않았다.어느 날 스승이 이건에게 시를 지어 보라 했지만, 그에게는 먹도 종이도 없었다.준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승이 매를 들었다.하지만 아무리 홀대받는다 해도 이건은 황자였다.그러니 결국 매를 맞는 사람은 늘 배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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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국혼는 그렇게 기약 없이 미뤄졌다.이건은 소은하의 관이 땅에 묻히고, 흙이 덮여 봉분이 세워지는 모습까지 말없이 지켜보았다.그런데도 소은하가 정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아무리 정무에 파묻혀 지내도 가슴 한구석에 뻥 뚫린 듯한 허전함은 조금도 메워지지 않았다.나현진이 날마다 손수 음식을 만들어 가져와도 좀처럼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그렇게 소은하가 죽은 지도 어느덧 보름이 훌쩍 지났다.이건은 책상을 가득 메운 상소문 사이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들었다.그리고 또다시 소은하를 떠올렸다.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붓을 내려놓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옥궁으로 향했다.곁에서 시중들던 태감은 넋이 반쯤 나간 듯한 그의 모습을 보고 차마 혼자 보내지 못했다.결국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그런데 걷던 이건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그는 고개를 들어 길가에 선 나무를 바라보았다.봄바람이 스칠 때마다 연둣빛 새순이 살랑이고 있었다.이건이 어딘가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성, 저것은 무슨 나무냐?”정대성은 궁에서 오래 지낸 만큼 아는 것도 많았다.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살펴본 뒤 허리를 숙였다.“폐하께 아뢰옵니다. 밤나무이옵니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사옵니다.”“밤나무라...”이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밤떡이 제법 달고 맛있지.”좀처럼 잡담을 하지 않는 그가 먼저 말을 꺼내자 정대성은 얼른 웃으며 받았다.“폐하, 궁에는 온갖 다과가 다 있사옵니다. 지금은 아직 밤이 날 철이 아니니, 다른 것을 좀 올릴까요?”“그러지.”이건이 말했다.“경옥궁에 차려 두라. 짐도 그리로 갈 것이다.”어렴풋이 무언가가 떠오를 듯했다.하지만 생각을 붙잡으려 할수록 머리만 더 지끈거렸다.이건은 밤나무 앞에 잠시 더 서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경옥궁은 소은하가 스스로 청해 머물던 곳이었다.이름은 아름다웠으나 궁에서도 꽤 외진 곳에 자리해 있었다.이건은 평소 이곳에 거의 발을 들이지 않았다.지난번에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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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궁의 법도대로라면 모시던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 아래 있던 궁인들의 거취도 함께 정리해야 했다.하지만 이건은 소월이가 소은하가 아끼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직접 좋은 앞날을 마련해 줄 생각이었다.그러나 소월이는 크게 당황한 듯 황급히 무릎을 꿇고 연거푸 머리를 조아렸다.“폐하, 소인은 이곳에 남으면 아니 되겠사옵니까? 아침저녁으로 경옥궁을 살피고 전각을 쓸고 닦으며 지내겠사옵니다. 무엇 하나 손상되는 일은 결코 없도록 하겠사옵니다!”몇 번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마가 벌겋게 부어올랐다.이건은 소월이가 단순한 시녀가 아니라 소은하와 각별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결국 그녀의 뜻대로 두기로 했다.이윽고 이건은 다과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하지만 속은 너무 퍽퍽했고, 어떤 것은 지나치게 달았으며, 또 어떤 것은 고소한 맛이 부족했다.열 가지가 넘는 다과를 하나씩 맛보았지만, 조금 전 떠올렸던 밤떡만큼 입에 당기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헌데... 자신이 대체 언제 밤떡을 먹었던가?’순간 이건의 눈빛이 굳었다.아.그제야 기억이 났다.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찻잔이 엎어져 옷자락이 흠뻑 젖었다.십칠 년 전의 어느 눈 내리던 밤이었다.이건은 바로 이 마당에서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벌을 받았다.먹과 종이가 없어 글을 짓지 못했다는 이유였다.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한 채였다.배동이던 소은하도 당연히 함께 벌을 받았다.하지만 소은하는 성현의 말씀만 곧이곧대로 배우던 어린 이건보다 훨씬 대담했다.한참 함께 무릎을 꿇고 있던 소은하는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다.그리고 얼마 뒤 품속에 밤떡 한 조각을 숨겨 돌아왔다.수라간에서 몰래 가져온 것이었다.이미 차갑게 식은 데다 어느 후궁이 먹다 남긴 것이었다.그래도 어린 두 사람은 어깨를 맞대고 무릎을 붙인 채 한입씩 나누어 먹었다.그날의 밤떡보다 맛있는 것은 그 뒤로 단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다.소월이는 이건이 찻잔을 엎은 것을 보고 겁에 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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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하지만 나현진은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 이토록 빨리 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건이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사나운 맹수처럼 잔뜩 날이 선 모습이었다.본래 빼어나게 준수한 얼굴에는 흉흉한 분노가 서려 있었고, 낯빛은 금세라도 먹구름이 쏟아질 듯 어두웠다.나현진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온몸을 떨며 바닥에 엎드렸다.머리 위로 이건의 서늘한 목소리가 떨어졌다.“정녕 짐에게 해명할 말이 없느냐?”“폐하... 폐하!”나현진이 애처롭게 울부짖었다.“신첩은 정말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사옵니다. 부디 말씀해 주시옵소서!”‘황후의 자리를 거짓으로 차지한 죄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었다. 허나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떼면 어찌 되지 않을까?’그런 나현진의 마지막 기대는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졌다.이건이 무언가를 그녀 앞으로 거칠게 집어 던졌다.새하얀 털이 뺨을 세게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여우털 갖옷이었다.나현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끝이구나.’하지만 자신을 제국의 지옥 같은 삶에서 구해 낸 것도 이건이었다.지아비를 죽인 것도 이건이었고. 연모한다고 말하며 다시 살아갈 희망을 준 사람도 이건이었다.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이상할 만큼 마음이 차분해졌다.나현진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조금 전까지 얼굴에 어려 있던 가련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싸늘한 무표정뿐이었다.이건의 목소리에는 짙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현진아. 짐에게 설명해 보거라.”나현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설명드릴 것 없사옵니다, 폐하.”“폐하께서 저를 연모한다 하셨고, 저는 그 말이 기뻤습니다. 온 조정의 손가락질을 감수하고서라도 폐하의 황후가 되려 했을 뿐이옵니다.”“헌데 어째서 네가 그 사람이라고 인정했느냐!”이건이 돌연 분노를 터뜨렸다.“어째서 그날 짐을 구한 사람이 네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그은 손에 닿는 대로 탁자 위의 화병과 벼루를 쓸어 내렸다.요란한 소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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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병환을 핑계 삼아 조정을 비운 이건은 홀로 난인사로 향하는 산길에 올랐다.이번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기에, 절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정처 없이 걷던 그는 문득 생각했다. ‘예전에 소은하가 이곳에 왔을 때도, 이런 풍경을 보았을까?’서로 기대어 붉은 비단에 백년해로를 비는 젊은 부부, 아이를 안고 스님에게 복을 청하는 이들, 과거 급제를 바라며 소원을 적는 선비들.그곳에는 세상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제야 이건은 소은하가 어찌 전쟁을 원치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전쟁이 나면 징병을 피할 수 없었고, 징병은 그들이 누군가의 부군이자 아비이고 자식이라는 사실을 헤아리지 않았다. 모두에게 가족이 있었고, 살아갈 앞날이 있었다.하지만 전쟁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는 순간, 저들 역시 생사를 달리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 몰랐다.그러나 전장을 누벼 온 소은하는 한 장수의 공이 수많은 목숨의 대가로 세워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았다.그래서 그녀는 명예나 부귀를 탐하지 않았고, 매번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려 애썼다. 그들이 흘리는 피와 아픔을 보았기에 밤마다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이건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불전 앞에 무릎을 꿇고 향안 위 불경에 이마를 댄 채 몇 번이고 빌었다.‘소은하가 지은 살생의 업을 모두 제게 내리시옵소서.’‘그녀는 저를 위해 칼을 들었습니다. 허니 그 업은 마땅히 제가 짊어져야 합니다.’법당으로 스며든 바람에 촛불이 아른거렸다. 이건이 고개를 들자, 흔들리는 불빛 너머로 허공대사가 서 있었다.예전과 달리, 이건은 허공대사를 향해 공손히 예를 갖췄다. 허공대사는 그 절을 묵묵히 받았다. 부처를 닮은 얼굴에는 평온한 자비가 어려 있었다.시종 하나 없이 찾아온 이건을 보고도, 그는 그의 신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한 달 만에 오셨군요. 그간 평안하셨는지요?”이건은 눈을 내리깔았다. 표정에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 고통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대사님, 짐은 평안하지 못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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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이건은 소원을 적은 붉은 비단 하나를 남겼다.[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만나기를.]궁으로 향하는 산길에는 큰비가 쏟아졌다. 젖은 돌길을 비틀대며 내려가던 이건의 귓가에 천둥소리가 잇달아 울렸다.번개만 치면 제 이불 속으로 기어들던 소은하가 문득 떠올라,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천둥이 무서웠던 것은 실은 자신이었다.그날 이건은 침상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 써도 귀를 파고드는 소리에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었었다. 그러다 번개가 방 안을 밝히는 순간, 곁에 선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혼비백산한 그가 소리를 내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손바닥은 따스했고 굳은살이 배어 있었다.소은하의 손이었다.그녀는 싱글싱글 웃으며 신발과 버선을 벗고 침상 위로 올라오더니, 이건을 안쪽으로 밀어 자리를 만들었다.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오늘은 천둥이 너무 크니, 자가 곁에서 자겠사옵니다.”그때 두 사람은 이미 남녀의 구별을 모를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남녀가 함부로 한 이부자리에 눕는 법이 아니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천둥에 놀라 하얗게 질려 있던 이건의 얼굴에 어느새 붉은 기가 번졌다.그 모습을 본 소은하는 그의 뺨을 힘껏 꼬집었다.“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자가께서도 참 엉큼하시옵니다!”그날 이건은 더없이 깊이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고, 가을비에 씻긴 하늘은 푸르게 빛났다. 그날 이후로 그는 다시는 천둥을 무서워하지 않았다.이건의 젖은 옷자락과 머리칼에서는 물이 뚝뚝 흘렀다. 비바람이 너무 사나워,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험한 산길 한가운데에 장신의 여인이 보였다. 검은 옷을 걸치고 머리를 높이 묶은 그녀는 산 아래를 향해 급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그 여인이 소은하임을 알아본 순간, 이건은 비틀대며 뒤를 쫓았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이름은 거센 빗소리와 바람에 묻혀 버렸다.그녀가 어찌 이곳에 있는지 따질 겨를은 없었다. 그는 그저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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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이건이 손을 놓았을 때, 얼굴에는 눈물 자국 대신 붉게 부은 눈만 남아 있었다.약관을 넘긴 황제였지만, 소은하에게 그는 아직도 가엾고 사랑스러운 사내였다.사랑하는 여인을 곧 궁으로 맞이한다는 것 말고는, 그가 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쓰린 속을 감추고 억지로 웃었다.“혹 소신을 믿지 못하십니까? 현진 아씨는 반드시 무사히 데려오겠습니다.”그러나 이건은 몸을 일으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은하야, 북방 변경은 더는 치지 않겠다.”순간 소은하는 그대로 굳었다.군은 이미 집결했고 군량도 넉넉히 갖춰진 뒤였다. 그녀 역시 이번 출정을 바라지 않았으나, 황제의 변덕이 지나치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폐하, 허럼 조정 대신들에게는 무어라 하시겠습니까?”“치지 않겠다.”이건은 한 글자씩 힘주어 말했다.“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죽이면 된다. 은하야,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짐은 상관없다. 짐이 마음에 두는 것은 오직 너뿐이다.”이건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그는 놀란 소은하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따스한 그녀의 살결을 손끝으로 쓸며 정말 그녀가 출정하기 전으로 되돌아온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난인사에서 다시 살 기회를 얻은 이상, 그는 더는 소은하를 위험한 곳으로 내몰 수 없었다.속내를 모르는 소은하는 황제의 변덕스러운 결정이 문신들의 비난을 부를까 걱정스러웠다.“허나 현진 아씨께서는 아직 제국에 계십니다. 그곳에서 몹시 고초를 겪고 계신다 하지 않습니까.”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폐하께서는 그분을 구해 오실 뜻도 거두시는 것입니까?”그 말을 하는 내내 무딘 칼이 속을 헤집는 듯했다. 이건이 나현진을 말할 때마다 짓던 편안하고 기쁜 미소, 그리고 제국을 치라는 명을 받고 맞은 군곤 서른 대가 차례로 떠올랐다.가슴이 너무 아파, 더는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나현진은 이건에게 몹시 중요한 여인이었다.한참 생각하던 이건이 나직이 말했다.“나현진은 구해야 한다.”소은하의 가슴이 저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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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소은하는 군을 해산하지 않고 언제든 출정할 수 있도록 대기시켰다. 이건은 전쟁을 연후로 미루고 우선 조정부터 안정시킨 뒤 다시 결정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변덕스러운 군주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소은하는 좀처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이건도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해 온 일이 있는데, 이제 와 소은하에게 경계를 풀라고 할 낯이 없었다.하지만 두 사람 모두 미처 알지 못했다.조정에는 여전히 소은하와 그녀가 쥔 병권을 예의 주시하는 눈이 적지 않았다.십만 대군은 도성 밖에 진을 친 채 명을 기다리고 있었고, 금란전에 선 소은하의 눈빛 또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강단이 넘쳤다.대신들이 그나마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당장이라도 누군가 나서 소은하가 역심을 품었다고 외칠 판이었다.그러나 이건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소은하에게는 자신을 죽일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고, 이제 그녀가 제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기꺼이 목을 내놓을 생각이었다.소은하에게 진 목숨이 몇인데, 그녀가 거두어 간들 무엇이 아쉽겠는가. 더구나 소은하는 충직하고 다정하며,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훌륭한 장군이었다.그날 조참을 마친 이건은 정사에 관한 보고조차 들을 마음이 나지 않아 곧장 소은하를 따라 경옥궁으로 향했다.열매가 든 밤나무 곁을 지날 때, 이건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은하야, 밤떡이 먹고 싶으냐?”소은하는 그의 호칭을 바로잡을 겨를도 없이 눈을 빛냈다.“폐하께서 진작에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이건의 무예는 소은하와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세상 물정에는 어두워, 맛있는 밤알이 가시 돋친 밤송이 속에 든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이건은 가볍게 나무 위로 뛰어올라 밤을 따려다 밤송이 가시에 손가락을 찔려 피를 보았다. 풀이 죽어 내려온 그는 소은하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 절로 기분이 풀려 아픔도 잊은 채 손을 내밀며 나직히 말했다.“은하야, 아프다.”처음 보는 이건의 연약한 모습은 가엾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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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은하 누님.”이건은 한층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나직히 속삭였다.“침상에서 그리 불러도 되겠느냐?”그는 짐이라는 말조차 쓰지 않았다. 소은하는 귓불까지 붉힌 채 그에게 떠밀리듯 한 걸음 물러섰다.행복에 아찔해진 소은하는 밀어 내려던 이건의 손가락 대신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뒤로 물러난 자리에는 소월과 차를 마시던 돌탁자가 있었는데, 이건은 그곳에 그녀를 기대게 한 채 한참 입을 맞췄다. 욕망을 풀기 위해 다급히 몰아붙이던 예전과 달리, 그의 입맞춤은 한없이 느리고 다정했다. 이건이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머금을 때마다 소은하는 그 다정함에 숨이 막힐 듯했다. 가쁜 숨을 고르던 그녀는 가까이 있는 이건의 눈을 바라보다,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습니까?”이건이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은하야,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아직 저녁도 들지 않았다.”소은하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붉어졌다.경옥궁은 본래 외진 데다 옛 냉궁의 이름만 바꾼 곳이었다. 그곳에서 지내는 소은하는 자유로웠으나, 살림은 가난하고 초라했다. 이건은 바로 사람을 시켜 살림을 더 들이라 명하려 했으나 소은하가 그를 막았다.그녀는 엄격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폐하, 신이 조정 신하의 몸으로 궁 안에 오래 머무는 것부터가 이미 법도에 어긋납니다. 폐하께서 저를 각별히 대하신다면, 신이 조정에서 어찌 제 명예를 지키겠습니까?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 더는 크게 소란을 벌이지 마십시오.”말투는 담담했으나 그 안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서운함이 배어 있었다. 다만 소은하는 이건을 조금이라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토록 오랜 세월을 바치며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도 소은하는 큰 저택이나 황금을 얻지 못했다. 이건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에도 그녀는 그저 궁 안에 머물 곳 하나를 청했을 뿐이었다. 이건이 즉위한 날에도 소은하는 마치 그와 아무런 연도 없는 평범한 백성처럼 사람들 틈에 서서 곤용포를 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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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때는 늦가을이었다.하룻밤 사이 산과 들에는 향긋한 버섯이 지천으로 돋아났다.소은하는 행군 중에도 종종 산에서 버섯을 따 먹곤 했기에, 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려내는 일쯤은 어렵지 않았다.게다가 음식을 만드는 솜씨는 평범했으나 갓 딴 버섯이 워낙 싱싱해 음식 맛은 제법 좋았다. 이건이 부엌에서 연신 훼방을 놓는 통에 달이 중천에 떠서야 저녁을 들게 되자 소은하는 나직한 목소리로 투덜댔다.“폐하께서 자꾸 저를 붙들고 늘어지지만 않으셨어도 진작에 쉬고 있었을 겁니다.”이건이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눈빛에 짓궂은 기색이 스치자, 소은하는 아까 방으로 돌아가자는 농을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그 말을 꺼낸 자신이 민망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함께 잠자리를 한 일이 한두 번도 아니건만, 어째서 오늘따라 자꾸만 얼굴이 붉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달빛이 지나치게 밝아서일 수도, 또 어쩌면 연모하는 사내의 눈빛이 너무도 다정해서일 수도...버섯국과 반찬을 거의 다 비운 뒤, 소은하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오늘은 이곳에서 쉬시겠습니까?”이건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으로 경옥궁에 묵게 된 이건은, 전생에 보았던 그대로 이곳이 몹시 검소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이리저리 둘러보자 소은하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이곳은 잠자리가 불편하니 건곤전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낫겠습니다.”그러나 이건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웃었다.“나는 은하의 향이 나는 여기가 좋다.”빈말이 아니었다. 소은하에게서는 늘 은은한 약 향이 났다. 행군길에서 다치는 일이 잦았던 탓일지도 몰랐다. 오랜 세월 소은하가 지낸 방과 침상에도 어느새 은은한 향이 배어 있었지만, 정작 그녀는 그 향을 느끼지 못해 이건이 자신을 놀리는 줄로만 알았다. 희미한 촛불만 흔들리는 방 안에서 소은하가 겉옷을 벗자, 이건은 곧장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목 아래 선명한 칼자국과 팔에 남은 할퀸 자국에 차례로 입을 맞추는 그의 손길에는, 자신을 위해 그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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