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장수에게 가장 걸맞은 최후는 전장에서 맞는 죽음이라 했다. 소은하는 죽었다. 천 리 밖 북방 변경의 전장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은 채. 붉은 술을 단 창을 손에 쥔 소은하는 피투성이가 된 채 땅에 무릎을 꿇었다. 흐려지는 시야 너머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멀리 펄럭이는 군기와, 그 위에 새겨진 커다란 ‘소(蘇)’ 자였다. ‘나현진은 무사히 대주국으로 돌아갔겠지?’ ‘이건... 그대가 바라던 대로 제국으로 출병해 나현진을 되찾았으니...’ ‘이제 그대는... 더없이 기쁘겠구나.’
Lihat lebih banyak율이가 두 살이 되자, 이목구비가 한층 또렷해졌다. 이건은 포도알처럼 까만 아이의 천진한 눈을 마주한 순간, 온몸이 굳었다.‘이 아이가... 짐의 아들이었다니.’옹왕이 저리도 득의양양했던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옹왕이 웃으며 말했다.“황제 자리도 충분히 누렸으니, 이제 친아들에게 물려줄 때가 되지 않았나? 이건, 내가 그리 어리석어 보이느냐. 네놈을 죽여 버리면 내가 어찌 황위에 오르겠느냐? 염려 마라. 네가 죽은 뒤 어린 황제는 내가 잘 돌볼 테니.”저들이 노린 것은 섭정의 자리였다. 이건이 선위 조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율이를 죽이고, 서명한다 해도 이미 황위를 내놓은 태상황이 죽는 일쯤은 큰 파문을 일으키지 못할 터였다.소은하는 그제야 옹왕의 속셈을 깨닫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건을 살피며 차갑게 말했다.“율이는 폐하의 아이가 아닙니다. 허니 선위 조서에 손을 대시면 저들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이건은 손에 든 조서를 내려다보다 소은하를 향해 웃었다.“은하야, 짐의 아이를 낳아 주어 고맙다.”그는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말했다.“서명하겠다. 다만 소은하와 잠시 말을 나누게 해 다오.”사방은 군사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있어, 그들이 다른 수를 쓸 수는 없었다.율이는 억지로 끌려가면서도 울거나 보채지 않았다. 옹왕은 소은하를 이건 곁으로 거칠게 떠밀었다. 그제야 소은하는 이건의 몸에 깊고 얕은 상처가 가득한 것을 보았다.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 그 역시 저항했음이 분명했다.피비린내가 코를 찌르자 소은하는 눈가가 붉어졌다.“이리하신들 저들이 저와 율이를 살려 두겠습니까? 결국 우리도 죽을 것입니다.”이건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소은하는 뿌리치지 않았다.그의 손은 따스했으나 가늘게 떨렸고, 소은하의 손바닥에는 피가 묻어났다.이건이 낮게 말했다.“은하야,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짐은 너를 연모한다. 이런 끝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부처님께서 짐을 가엾게 여기셨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소은하는
하늘도 사람 뜻을 다 들어주지는 않는지, 평온하던 날들은 끝내 깨지고 말았다.요 며칠 정윤은 조정에서 돌아올 때마다 근심에 잠긴 얼굴이었다. 이제 몇 마디 말을 할 줄 아는 율이는 늘 잘 돌봐 주던 정윤이 기운 없어 보이자 덩달아 안달이 났다. 아이는 그의 다리에 매달려 안아 달라 보챘다.정윤은 율이를 번쩍 안아 뺨에 입을 맞췄다.“이를 어쩌나. 아저씨는 전쟁에 나가야 하니 한동안 율이를 못 보겠구나.”마침 음식을 들고 나오던 소은하는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무슨 일입니까?”정윤은 한숨을 내쉬었다.“오황자 기억하지? 지금의 옹왕 말이다.”소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한 예감은 정윤의 다음 말로 확신이 되었다.“그자가 제국의 현 황제, 옛 태자 야율진과 손을 잡았다. 지금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이라더군.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폐하께서 그자의 서신을 가로채셨으니 저들의 계획은 거의 드러났다.”“지금 폐하를 죽이면, 옹왕만이 황실의 핏줄로 남게 되니 말이다...”율이는 어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지 못했다. 무거운 기운에 겁을 먹은 아이는 울먹이며 소은하에게 안아 달라 손을 뻗었다.소은하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출전은 승산이 있습니까? 옹왕의 병력은 많습니까?”“많지 않다.”정윤이 고개를 저었다.“저들이 노리는 건 폐하의 목숨이다. 군사는 겨우 천여 명이지만 그마저도 눈속임일 뿐이지.”정윤에게 남은 소가군은 만여 명의 정예뿐이었으나, 그들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소은하는 그 말에 마음을 놓았다.지난 두 해 동안 한결 부드럽고 고와진 소은하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정윤은, 가슴 한편이 쓰려 물었다.“아직도 이건을 연모하느냐?”소은하는 그 물음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한참 뒤에야 나직이 대답했다.“아닙니다. 다만... 폐하께서 좋은 황제이신 것만은 사실입니다.”정윤도 그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이건이 못마땅하기는 해도, 대주는 그의 치세 아래 밤이면 문을 잠그지 않고 길에 떨어진 물건도 주워 가지 않
이건의 낯빛이 워낙 좋지 않아 정윤은 한동안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소은하에게 눈을 돌렸다.소은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율이를 안고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제 얼굴을 더 닮은 아이의 얼굴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율이는 부드러운 입술이 뺨에 닿을 때마다 까르르 웃었다.정윤은 한숨을 내쉬며 율이의 상투에 걸린 꽃잎을 떼어 냈다.“됐다. 너 때문에 또 아비 노릇을 하는구나.”소은하가 그를 흘겨보았다.“율이의 아비 노릇이 그리 억울하십니까? 공짜가 싫으면 어서 여인을 하나 만나 아이를 낳으십시오. 우리 율이를 탐내지 말고요.”정윤은 쓴웃음을 지었다.지난 한 해, 두 사람은 가족으로 지낼 때만큼은 더없이 편안했다. 이대로 한평생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도 복이라 여겼으나, 이건을 다시 본 순간 정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이건은 율이가 제 아이라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으니,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비록 지금은 감출 수 있다 해도 아이가 더 자란 뒤에는 어찌하겠는가. 이건은 끝내 황후를 맞을 뜻이 없었고, 율이는 훗날 대주의 태자이자 황위를 이을 유일한 계승자가 될 아이였다.율이의 콧날과 입술은 소은하를 빼닮았지만, 두 눈만큼은 이건과 꼭 닮아 있어 조금만 더 자라면 숨길 수 없을 터였다.정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율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어찌 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느냐. 네 못된 아비와는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좋을 텐데.”소은하가 입술을 삐죽였다.“제국 태자는 변덕이 심한 사람입니다. 그때 그와 협상해 제가 대주의 군을 물릴 방도가 있다고 하자, 제게 가짜 탕약을 마시게 해 주겠다고 했지요. 하지만 전 제국에 남아 그를 위해 일하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대주도 제국도 모두 위험한 곳이었지만, 적어도 이건은 제 핏줄을 해치지는 않을 터였다. 그에 비하면 제국 태자는 너무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정윤도 그저 입에 담아 본 말이었다.그 역시 소은하가 다시 전장에 나가
“이제 그만하거라.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바람을 쐬면 아니 된다. 율아, 이리 오너라. 어미가 힘들어한다.”다정한 목소리 사이로 아이의 옹알이와 소은하의 짐짓 성난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제가 그리 약한 줄 아십니까? 자꾸 이러면 율이를 안겨 주지 않겠습니다.”“아이고, 율이는 일 년에 두어 번 안아 볼까 말까 하면서, 아이는 늘 내가 돌보지 않았느냐? 한마디 추켜세웠더니 아주 기세가 올랐군.”이건은 비틀거리며 물러나 나무 줄기에 몸을 기댄 채 허리를 숙였다. 가슴이 찢기는 듯 아파 숨조차 가쁘고, 눈앞은 눈물에 젖어 흐릿했다.눈물 한 방울이 막 돋아난 풀잎 위로 떨어져서야 이건은 자신이 또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킨 채, 비웃는 목소리 하나만 메아리쳤다.‘은하는 너를 십수 년이나 기다렸는데, 네가 무슨 낯짝으로 더 기다리라 하느냐?’‘그래, 내가 무슨 낯짝으로.’그러다 이건이 무심코 밟은 나뭇가지가 뚝 부러지자 정윤은 곧장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누구냐?”정윤은 율이를 소은하의 품에 넘겨준 뒤 검을 뽑아 들고 다가왔다. 이건은 그대로 돌아서려 했으나, 결국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짐이다.”몹시 잠긴 목소리였다. 그를 바라보던 소은하는 문득, 이건이 병이 든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고작 한 해 만에 이건은 몰라보게 쇠약해져 있었다. 야윈 탓에 옷이 헐렁했고, 앙상한 턱선과 높게 선 콧날, 푹 꺼진 눈가에는 병색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품속의 율이는 어른들이 갑자기 입을 다문 까닭을 알지 못한 채, 고사리 같은 손으로 허공의 꽃잎을 잡으려 했다.그 모습을 본 이건은 창백한 입술로 간신히 웃었다.“은하야, 그 아이는 네 아이냐?”소은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이 아이를 보려 다가서자 그녀는 율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한 걸음 물러섰고, 동시에 정윤이 소은하의 앞을 가로막았다.서로를 지키려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오래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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