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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Chapters

제1화

백전백승을 자랑하던 여장군이 끝내 전장에서 쓰러졌다.소은하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귓가를 가득 메우던 함성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이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이윽고 모든 것이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소은하는 자신이 극락에 들었거나, 아니면 지옥에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다.그런데 다시 눈을 뜬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것은 뜻밖에도 황궁이었다.소은하는 멍하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희미하게 비치는 신체 너머로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이윽고 고개를 들자, 책상 앞에 곤용포를 입은 이건이 보였다.‘혹 죽기 전에 헛것이라도 보이는 건가?’이건은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상소문을 살피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든 듯했다.소은하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하지만 손끝이 닿기도 전에 이건이 번뜩 눈을 떴다.매서운 시선이 곧장 소은하를 향했다.순간 그녀는 이건이 자신을 발견한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이건은 그저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급보이옵니다!”그때 전각 밖에서 궁인이 큰소리로 아뢰었다.이건은 손끝으로 미간을 짚으며 낮게 말했다.“들라.”곧이어 급보를 든 금군 한 명이 황급히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폐하께 아뢰옵니다! 전장에서 대승을 거두었사옵니다! 소 장군께서는 적의 성 세 곳을 잇달아 함락하고 현진 아씨를 무사히 구해 내셨사옵니다. 이후 군사를 붙여 현진 아씨를 먼저 도성으로 돌려보내셨고, 아씨께서는 지금 궁문 밖에 당도해 계시옵니다. 다만 소 장군께서는...”금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지금 현진이가 돌아왔단 말이냐?!”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이건은 기쁨이 역력한 얼굴로 곧장 문밖을 향했다.“짐이 직접 나가 맞이하겠다.”금군은 다급히 뒷말을 이으려 했으나, 이건은 이미 전각을 나서고 없었다. 남겨진 그는 난감한 얼굴로 멀어지는 이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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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아무리 급한 전갈이라 해도 북방 변경에서 도성까지 닿으려면 보름은 족히 걸렸다.소은하가 죽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녀의 죽음이 도성에 전해지려면 적어도 보름은 더 걸릴 터였다.‘그때가 되면... 이건도 조금은 마음 아파할까? 자신을 그렇게 보낸 것을 후회할까?’두 달 전, 갓 황위에 오른 이건은 제국을 치라는 명을 내렸다.삼 년 전 화친으로 떠난 나현진을 되찾기 위해서였다.당시 소은하는 물론이고 조정 대신들까지 모두 나서서 그를 만류했다.선황이 승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황권이 굳건히 자리 잡지 못한 때였다.하지만 이건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소은하가 끝까지 강하게 반대하자,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겠다며 그녀에게 군장 서른 대를 내리기까지 했다.그 뒤로는 조정에서 감히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이건은 그토록 나현진을 연모했다.힘겹게 손에 넣은 황권이 흔들릴 수도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결국 황명이 내려졌고, 소은하는 군사를 이끌고 출정길에 올랐다.소은하는 천하에 이름난 여장수였다.아흔 번이 넘는 전장을 누비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비록 이건을 위해 그가 연모하는 여인을 되찾아 주는 싸움이라 해도, 그녀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나현진을 무사히 구해 낸 뒤, 소은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호위 병력을 넉넉히 붙여 먼저 도성으로 돌려보냈다.그러나 소은하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나현진을 호송할 군사를 떠나보낸 그날 밤, 적군이 기습해 왔다.소은하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맞섰지만, 병력의 열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결국 그 전투에서 그녀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소은하는 허공을 떠돌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나현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그러고 보니 이건이 어찌하여 저토록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알 것도 같았다.나현진은 본디 대주의 절세 미인으로 이름난 여인이었다.단아한 이마에 고운 눈썹, 아리따운 얼굴을 지녔으며 몸가짐 하나하나에도 명문가 규수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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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소은하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예전부터 이건은 자주 두통을 앓았다. 소은하는 그의 통증을 덜어 주려고 따로 지압하는 법까지 익혔다.‘결국 이럴 때야 만이 나를 떠올리는 건가?’전각 안은 고요했다.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건도 뒤늦게 정신이 든 듯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잠시 멍한 기색이 스쳤다.곁에 있던 어린 태감이 방금 그가 사람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 소 장군께서는 아직 북방 변경에 계시옵니다.”이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이윽고 낮게 물었다.“언제 돌아오느냐?”태감은 날짜를 헤아려 보고 아뢰었다.“별다른 변고가 없다면 대군이 개선해 도성에 이르기까지 보름쯤 더 걸릴 듯하옵니다. 혹 소 장군이 염려되시옵니까?”‘염려?’소은하는 그 말을 듣고 허탈한 눈으로 이건을 바라보았다.‘정녕 자신을 염려했다면, 어찌 마음에 둔 여인을 되찾겠다고 상처도 채 아물지 않은 자신을 전장으로 내몰았겠는가.’‘심지어 전쟁에서 패하면 구족을 멸하겠다는 어명까지 내렸으니.’이번 전투는 그야말로 참혹했다.오만 가까이 소가군(蘇家軍)이 이번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그 안에는 그녀도 포함되어 있었다.그 모든 희생이 고작 나현진 한 사람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이건은 차갑게 말했다.“그 아이는 무예가 출중하니, 굳이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그가 정작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다만 은하가 돌아올 무렵이면, 마침 짐과 현진의 혼례날이겠구나.”그 말과 함께 이건의 얼굴에서 온기가 사라졌다.태감은 곧바로 눈치를 챘다.이건이 황위에 오른 뒤 단 한 명의 후궁도 들이지 않았다.궁 안에 머문 여인은 소은하뿐이었다.한때는 궁녀가 이건이 온천에서 소은하를 품에 안고 나오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가까운 사이였다.그뿐만이 아니었다.이건은 거리낌 없이 밤마다 소은하의 처소를 찾았다.소은하에게 후궁의 품계가 없었을 뿐,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궁 안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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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소월이는 무릎을 꿇은 채 대답했다.“폐하께 아뢰옵니다. 조금 전 참새 한 마리가 담장에 부딪혀 죽는 바람에 피가 묻었사옵니다. 며칠 뒤면 장군께서 돌아오신다고 들었는데, 장군께서는 피 보는 것을 싫어하시기에 미리 깨끗이 치워 두려 했사옵니다.”‘은하가 피를 싫어한다고?’이건은 미간을 찌푸렸다.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은하는 무장이다. 전장을 수도 없이 누빈 사람이 어찌 피를 무서워한단 말이냐?”소월이는 고개를 저었다.“그 이유까지는 소인도 모르옵니다. 허나 장군께서 피를 무서워하시는 것은 사실이옵니다. 피를 보신 날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꾸셨고, 악몽을 꾸고 나면 꼭 열이 올라 며칠씩 앓으셨사옵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소월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한 번은 장군께서 잠결에 우시는 소리도 들었사옵니다. 자신이 너무 많은 사람을 해쳤다며... 주승원, 강태오, 최민석을 부르시면서 무섭다고 하셨사옵니다.”그 이름들을 듣는 순간, 이건의 표정이 굳어졌다.남들은 몰라도 이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모두 지난 세월 자신이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소은하의 손을 빌려 제거했던 자들이었다.소은하는 무예가 출중했다.황위를 둘러싼 다툼이 한창이던 시절, 이건의 즉위를 반대하는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그럴 때마다 소은하는 이건의 칼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하나씩 베어 냈다.이건은 소은하에게 사람을 베는 일쯤은 아무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칼을 휘두를 때마다 그녀가가 피로 물든 악몽에 시달리며 홀로 밤을 지새웠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그래서였을까.북방 변경에서 죽음을 맞던 순간, 소은하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평생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 왔으니, 자신에게 이런 끝이 닥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여겼다.소월이는 이건의 굳어진 얼굴을 살피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허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그녀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나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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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 사실을 깨닫자 이건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온몸을 집어삼킬 듯 치솟았다.터뜨릴 곳 없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그는 옥패를 챙겨 들고 소매를 떨치며 경옥궁을 나섰다.침전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남지 않았던 잠기운마저 말끔히 달아난 뒤였다.이건은 손에 든 옥패를 매섭게 노려보았다.보면 볼수록 속이 뒤틀렸다.평생 이 옥패를 몸에서 떼어 놓지 않겠다던 사람이었다.그런데 이제 와 고작 시녀 하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주다니!끝내 이건은 옥패를 힘껏 바닥에 내던졌다.쨍그랑!옥패가 산산조각 났다.소은하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자신은 이미 이건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고, 그가 그토록 원하던 나현진까지 되찾아 주었다.이제 자신에게는 더 이상 이용할 가치조차 없을 터였다.‘헌데 어째서 고작 옥패 하나 때문에 저리도 노여워하는 것일까?’“소은하, 그래. 아주 좋구나! 기어이 짐과 연을 끊고 싶다 이거지? 좋다. 네 뜻대로 해 주마!”이건은 이를 악문 채 방 안을 서성였다. 이윽고 전각 밖을 향해 버럭 외쳤다.“밖에 아무도 없느냐! 어서 붓과 먹을 가져오너라!”궁인들은 잔뜩 겁에 질린 채 붓과 먹을 들고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이건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교지를 써 내려갔다.붓을 놓자마자 그는 교지를 집어들어, 이를 전할 태감에게 던져 주었다.“소은하가 도성으로 돌아오면 이 교지를 전하거라.”교지에 적힌 것은 단 한마디뿐이었다.[대장군 소은하가 성심을 거슬렀으니, 평생 변경에 주둔하라. 또한 별도의 명이 있기 전에는 도성으로 돌아올 수 없느니라!]태감은 내용을 훑어보자마자 안색이 변했다.그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용기를 내어 간언했다.“폐하, 소 장군은 그간 수많은 전공을 세웠사옵니다. 오랫동안 폐하께 충성을 다해 왔으며, 이번에도 적군을 크게 무찌르고 현진 아씨를 무사히 구해 냈사옵니다. 헌데 이런 교지를 내리시면 조정 대신들의 마음마저 돌아설까 염려되옵나이다.”이건은 서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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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소은하는 두 사람의 뒤에 떠돌며,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건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예전에는 소은하도 몇 번이나 함께 난인사에 가서 복을 빌자고 했다.하지만 그때마다 이건은 괴이한 미신 따위는 믿을 것이 못 된다며 번번이 거절했다.이제야 알 것 같았다.그가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그저 자신과 함께 오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소은하는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져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지려 몸을 돌리던 순간, 난인사의 주지스님인 허공대사(虛空大師)가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소은하가 순간 흠칫했다.그러나 곧 그럴 리 없다고 마음을 놓았다.지금의 자신은 몸도 형체도 없는 혼령이기에, 아무에게도 보일 리가 없었다.소은하는 그대로 허공대사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그런데 스쳐 지나가려던 순간, 허공대사가 돌연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아미타불.”소은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그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레 물었다.“스님... 혹 제가 보이십니까?”허공대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보살님의 시신도 머지않아 고향으로 돌아올 터이니, 부디 미련을 내려놓고 하루빨리 극락왕생하시기를 바라옵니다.”그 말을 듣자 소은하는 씁쓸하게 웃었다.시선은 저절로 소원나무 곁에 선 이건과 나현진에게 향했다.어쩌면 혼백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날이 와야 비로소 모든 미련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허공대사는 더 말하지 않고 이내 자리를 떠났다.그사이 이건과 나현진은 이미 소원을 적은 비단띠를 나무에 매달고 있었다.나현진은 무심코 이건이 적은 글귀를 보았다.[한평생 오직 그대 한 사람만을.]짧은 한마디였지만, 나현진에게는 그 무엇보다 놀라운 약조였다.천하를 다스리는 황제가 자신에게 평생 오직 한 사람만을 두겠다고 약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나현진은 놀란 눈으로 이건을 바라보았다.그의 눈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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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소은하도 그 글귀를 보고 잠시 굳었다.그러다 이내 자조하듯 웃었다.그때의 자신은 참으로 어리석었다.언젠가는 자신도 이건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그 역시 자신에게 조금은 마음이 있다고 믿었다.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일이 끝나면, 두 사람도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소은하는 몰랐다.자신이 그저 이건이 황위에 오르기 위해 쓰던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을.사랑도, 백년해로도.이제 와 생각하면 모두 우스운 꿈이었다.이건은 손에 든 비단띠를 꽉 움켜쥐었다.지난날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예전에는 소은하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함께 난인사에 가서 복을 빌자고 했다.하지만 그는 매번 거절했다.소은하는 한 번 거절당하면 집요하게 매달리는 성정이 아니었다.그래서 그때마다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이건은 그녀가 난인사에 오는 것을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그러나 이제야 알았다.소은하는 해마다 이곳에 찾아왔다.그리고 비단띠마다 온통 자신을 위한 소원을 적어 놓았다.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이건은 손에 가득 쥔 비단띠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챙겼다.궁으로 가져갈 생각이었다.그 모습을 본 소은하가 순간 멈칫했다.나현진 역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눈썰미가 좋은 그녀는 비단띠 아래 적힌 이름이 누구인지 이미 보아 버렸다.대주에서 소은하가 이건에게 한결같은 마음을 품어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그렇다면 이건은 소은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두 사람이 오랜 세월을 함께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익히 들었다.자신으로서는 감히 견줄 수 없는 세월이었다.나현진은 천천히 손을 말아 쥐었다.마음속에 문득 위기감이 피어올랐다.지금까지도 이건이 어째서 자신을 이토록 총애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의 총애가 있었기에 자신은 제국의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게다가 이제는 대주의 황후 자리까지 눈앞에 두고 있었다.그녀로서는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가 없었다.“폐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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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소은하는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녀에게 얼마 남지 않은 여린 마음은 모두 이건에게 향해 있었다.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었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그때 그녀는 칼과 창밖에는 다룰 줄 모르던 손으로 처음 음식을 만들어 보겠다고 나섰다가, 하마터면 부엌을 태울 뻔하고서야 겨우 죽순 요리 하나를 완성했다.모양새도 썩 그럴듯하지 않았다.그런데도 이건은 아무 말 없이 한입 먹었다.“어떠시옵니까?”소은하는 첫 출전을 앞뒀을 때보다 더 긴장한 얼굴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입에 맞지 않으시면 뱉으셔도 되옵니다.”그런데 이건은 뱉기는커녕 웃으며 소은하에게 입을 맞췄다.느닷없는 입맞춤에 소은하가 어리둥절해하자 그가 귓가에 낮은 웃음을 흘렸다.“솜씨가 썩 좋지는 않구나. 단것으로 입가심이라도 해야겠다.”그 말에 소은하의 두 뺨이 금세 붉어졌다.돌이켜 보면 그때가 두 사람에게 가장 달콤했던 시절인지도 몰랐다.소은하는 쓸쓸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이건과 나현진이 술잔을 주고받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수라를 마칠 무렵 이건은 평소보다 술을 몇 잔 더 마셨다.나현진은 몸소 그를 부축해 침전으로 데려갔다.그제야 소은하는 나현진이 오늘 밤 마련한 자리가 단순히 술을 마시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아차렸다.넓은 침전에는 어느새 궁인들이 모두 물러가고 없었다.나현진은 이건을 침상으로 데려간 뒤 겉옷을 벗었다.그러고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흐릿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폐하, 오늘 밤은 제가 폐하를 모시게 해 주시옵소서.”얼굴을 붉힌 나현진이 이건의 허리띠에 손을 가져갔다.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이건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순간 나현진은 흠칫했다.고작 술 몇 잔으로 이건이 취할 리 없었다.그는 맑은 눈으로 나현진을 바라보더니, 뜻밖에도 그녀가 벗어 둔 겉옷을 도로 입혀 주었다.나현진에게는 그 행동이 뺨을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모욕적으로 느껴졌다.그녀는 눈물이 고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 폐하께서는... 제가 싫으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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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야기를 마친 이건은 나현진의 안색이 오히려 더 창백해진 것을 눈치챘다.“현진아, 왜 그러느냐?”나현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옵니다. 그날... 제가 조금만 더 일찍 폐하를 구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눈빛에 스친 당혹감과 불안한 기색을 감췄다.‘이건이 사람을 잘못 알고 있다 해도 이제 와 진실을 밝힐 생각은 없어.’‘다시는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눈앞에 다가온 황후의 자리도 놓치기 싫어!’‘다만 소은하는... 자신이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황후가 되기만 하면 돼.’‘허면 소은하는 황명대로 평생 변경을 지켜야 하니,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이건은 그런 나현진을 달래듯 품에 조금 더 깊이 끌어안았다.“네가 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나현진은 얌전히 그의 품에 기댔다.소은하는 담담한 얼굴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됐어. 이미 죽은 사람에게 진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운명이 이리 엇갈린 것을.’소은하는 더는 이렇게 이건의 곁을 떠돌고 싶지 않았다.몇 번이고 멀어져 보려 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그의 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건과 나현진의 국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혼례날이 다가오자 황궁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전각마다 등불과 비단이 걸렸고, 곳곳이 혼례를 축하하는 장식으로 가득했다.공교롭게도 소은하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도성에 전해질 날 역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새 황제가 황후를 맞는 날이니만큼, 온나라가 경사에 들썩였다.금란전(金鑾殿) 밖에는 만백성이 모여 황제와 황후에게 하례를 올렸다.이건은 나현진을 부축해 한 걸음씩 제단 가장 높은 곳으로 올랐다.대주의 예법에 따라 황제와 황후가 함께 선대 황실에 제를 올리고 나면 모든 혼례 의식이 끝난다.나현진은 봉관을 쓰고 화려한 황후의 예복을 갖춰 입었다.마침내 두 사람이 제단 앞에 나란히 섰다.그런데 이건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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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이건의 손에서 횃불이 툭 떨어졌다.바닥에 부딪힌 불씨가 사방으로 튀었다.나현진은 순간 놀한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저도 모르게 반걸음 물러섰다.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오늘 혼례는 더 이어 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속에서는 울화가 치밀었지만, 애써 슬픈 표정을 지으며 눈물 어린 눈으로 이건을 바라보았다.“폐하...”그러나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이토록 음울하고 살기 어린 이건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그는 이를 악문 채 궁문 쪽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한겨울 눈보라보다도 서늘했다.길한 징조라 여겨지던 횃불이 꺼진 것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이건은 비틀거리듯 제단을 내려와 군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나현진은 휘청거리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품었던 의심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어 버렸다.‘분명 폐하께서는 소은하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다 하지 않았던가?’이건은 자신을 막아서려던 정윤을 거칠게 밀쳐 냈다.“네놈들이 감히 짐을 속이다니!”그는 눈을 붉히며 포효했다.“소은하의 무예가 얼마나 뛰어난데 죽었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비켜라! 짐을 막지 마라!”이미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져 있었다.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것도 잊은 채 이건은 직접 관뚜껑을 열려고 달려들었다.그러나 먼 길을 옮겨 오는 동안 관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못질해 둔 터라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이건은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뚜껑을 뜯어내려 했다.“은하야... 소은하.”그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혹 그 교지를 보고 짐에게 화가 난 것이냐? 짐은 그저 겁만 주려 했을 뿐이다. 너를 평생 변경에 묶어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 당장 명을 거두겠다...”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마침내 관뚜껑이 힘껏 뜯겨 나가 옆으로 나동그라졌다.그리고 그 안에 누운 소은하의 모습이 드러났다.그러자 이건은 그대로 굳었다.동공이 급격히 좁아졌고 숨마저 멎은 듯했다.이번 전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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