بيت /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 / Chapter 21 -الفصل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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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소은하는 몇 마디 더 중얼거리다 이내 깊은 잠에 빠졌으나, 이건은 좀처럼 눈을 붙이지 못했다. 불안에 사로잡힌 그는 당장이라도 난인사로 다시 달려가고 싶었다. 어렵사리 얻은 기회였다. 소은하가 받은 상처를 만회할 기회를 어렵사리 얻은 그는, 온 하늘의 신과 부처님께서 한 번만 더 자신을 굽어살펴 주기만을 바랐다.전생에 온몸이 피로 물든 소은하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이건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기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부디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잠든 소은하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이건의 가슴은 답답하게 저려 왔다.‘은하를 연모하고 내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만 조금 더 주십시오.’이튿날은 조회가 없는 날이라 이건은 밤새 소은하를 지키다 날이 밝을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다.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검은 옷을 걸치고 머리를 높이 묶은 모습은 여느 때와 같았으나, 표정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이건은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며 다정히 물었다.“은하야, 어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느냐?”소은하는 애써 웃으며 손끝으로 다구를 만지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꾼 꿈이 너무도 생생하여, 좀처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규수는 여러 해 전 딱 한 번 본 것이 전부입니다. 빼어난 미모였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도 없지요. 헌데 꿈속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그 얼굴이 선명했습니다. 폐하, 혹 저와 그 여인 사이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소은하는 애써 가벼운 말로 이건을 웃기려 했으나, 시선이 그에게 닿는 순간 흠칫했다. 조금 전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었다. 입술은 핏기 없이 창백했고, 눈빛마저 빛을 잃은 채 고통을 참듯 몸을 떨고 있었다. 소은하가 급히 다가가 그를 부축하자, 손끝에는 식은땀이 흥건히 묻어났다.이건이 비틀거리며 자리에 앉자, 소은하는 뜨거운 물이라도 내오려 했지만 이건이 그녀를 덥석 붙잡았다.“은하야.”이건은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잔뜩 잠긴 목소리로 한동안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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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한밤중, 소은하는 침상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내려가 살피려던 찰나, 이건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신발조차 신지 못한 채 맨발로 전각 문을 향해 달려가며 울먹였다.“은하야, 은하야...!”전각 밖을 지키던 정대성은 머리를 풀어헤친 이건의 다급한 모습에 넋이 나갈 뻔했다. 그는 얼른 이건을 부축했다.“폐하, 어찌 이러십니까?”이건은 지푸라기라도 붙든 듯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혼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지금 연호가 무엇이지?”“경업 사 년이옵니다.”그제야 이건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소은하가 추봉된 해는 경업 오 년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너무도 또렷이 기억했다.그러나 안도하기에는 너무 일렀다.이건이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눈처럼 흰 잠옷을 걸친 소은하가 걸어 나왔다. 매서운 눈빛이 이건의 속을 꿰뚫었다.“폐하께서는 잠결에 연호마저 잊으셨습니까?”이건은 입술만 달싹일 뿐, 달리 해명할 말이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소은하의 손을 잡으려 했다.소은하는 뿌리치지 않고 그의 손을 내주었다. 정대성은 자신이 끼어들 일이 아님을 알고 조용히 전각 문을 닫았다.이내 방 안에서는 촛불 심지가 터지는 소리만 울려퍼졌다.소은하는 이건의 손을 잡아 한 걸음 물러선 뒤 곧장 침상 곁으로 향했다. 처음 와 보는 곳일 텐데도 망설임은 없었다. 몸을 숙여 침상 아래를 몇 번 더듬던 그녀는 이내 숨겨진 걸쇠 하나를 찾아냈다.가볍게 당기자 기틀이 움직이며 여러 폭의 화첩이 모습을 드러냈다.소은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이 말리려 했으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화첩을 펼쳤다.종이 위에는 살아 있는 듯한 미인이 그려져 있었다. 초승달처럼 고운 눈매에 두 뺨에는 옅은 홍조가 어려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붓끝이라도 실제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했겠지만, 그림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소은하는 한눈에 그 여인이 바로 승상의 여식인 나현진임을 알아보았다.그녀는 한참 그림을 내려다보다 입가를 비틀었다.“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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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행군길은 유난히 고되었다. 소은하는 속에 맺힌 울분을 풀 곳이 없었으나, 병사들에게 화풀이할 수는 없어 날마다 홀로 말을 몰아 선두에 섰다.꿈에서 엿본 것은 많지 않았다. 흩어지고 조각난 기억과 강렬한 통증이 억지로 밀려들어 왔을 뿐, 기억할 수 있는 내용은 극히 적었다.그날 밤 이건의 이상한 반응을 보고 꿈의 내용을 떠올린 끝에야 소은하는 십수 년을 함께 알고 지낸 정은 한눈에 반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알게 되었다.‘모두 덧없는 환상이다. 폐하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소은하가 눈물을 삼키며 말을 몰아 앞으로 내달리자 종사관 정윤이 급히 뒤따라오며 큰소리로 외쳤다.“장군! 장군! 이 숲만 지나면 큰 강이 나옵니다. 더 달리시면 안됩니다!”순간 소은하는 강물에 몸을 맡긴 채 떠내려가고 싶었지만, 뒤에는 십만 대군이 있었다. 자신을 내버려 둘 수는 있어도, 그들을 향한 책임만은 내려놓을 수 없었다.소은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뺨의 눈물을 훔쳤다.“명을 내려라. 오늘 밤은 이 근처에 진을 치겠다.”정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이튿날 강을 건너기로 했다. 병사들을 아끼는 소은하는 길을 재촉하지 않고, 쉬어 가며 기력을 아끼도록 했다.북방 변경은 도성만큼 춥지는 않았으나 모래바람이 거셌고, 그 바람 덕에 말발굽 소리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종사관과 장군의 군막은 가까이 세워졌다. 정윤은 창백하게 수척해진 소은하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장군, 궁에서 그리 많은 서신이 왔는데도 끝내 답장을 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소은하는 불 위에 올린 토끼 뒷다리를 뒤집으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어렵사리 여기까지 왔으니, 절대 폐하에게 발목을 붙잡힐 수 없다.’게다가 이미 그의 뜻대로 나현진을 데리러 왔으니, 서찰에는 뻔뻔한 위로와 감언이설만 적혀 있을 터였다. 그녀는 그 달콤한 말들은 절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기름방울이 불길 위로 떨어지며 작은 불꽃을 튀겼고, 잘 익은 토끼고기에서는 향이 진하게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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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숲을 지나 강을 건너면 북방 변경 땅이었다. 하룻밤 쉬고 강을 건너려던 소은하 앞에,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 나타났다.정대성은 비록 태감이었으나, 오랫동안 궁 안에서만 지내 온 터라 고생이라고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며칠을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자 허벅지 안쪽이 온통 쓸려 피가 배어 나올 지경이었고,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그러다 마침내 소은하를 발견소은하를 보자, 정대성은 금세라도 눈물을 쏟을 듯 울상을 지었다.“아이고, 장군님! 어찌 그리 발이 빠르십니까? 하루에 천 리라도 가신 겁니까?”소은하는 민망한 마음에 얼른 그를 부축해 군막 안으로 들였다.정대성은 한참 숨을 고른 뒤에야 본론을 꺼냈다.“소 장군, 그날 출정하시기 전 폐하와 크게 다투신 일이 도성에 큰 화를 불러왔습니다.”이건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십 년을 그를 향해 뛰었던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소은하의 가슴이 답답하게 저려 왔다.정대성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장군께서 군을 이끌고 성 밖에서 보름 넘게 머무르시니, 조정에는 장군께서 반역을 꾀한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허나 폐하께서는 그런 말을 믿지 않으셨고, 장군께 따져 묻지도 않으셨습니다.”“폐하의 마음은 하늘과 땅이 알 터인데, 장군께서는 어찌 서신 한 번을 들여다보지 않으십니까?”소은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어떤 말과 일은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소은하는 먼 길을 달려온 정대성을 달랬다.“제게 소식을 전해 주신 일은 고맙습니다. 날이 차가워지니 도성으로 돌아가시는 길에는 부디 몸조심하십시오.”정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품속에서 황색 비단으로 곱게 싼 물건 하나를 꺼내 소은하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목소리를 낮췄다.“폐하께서는 장군께서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시는 것을 염려하셨고, 밖에서 홀로 고립되실까 더욱 걱정하셨습니다. 폐하께서도 조정에서 장군과 비슷한 처지이시니, 일을 처리하시기 편하도록 이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소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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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강을 건넌 뒤, 그들은 곧 첫 전투를 맞았다. 소은하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늘 알고 있었지만 자신과 같은 옷을 입었든, 다른 옷을 입었든, 곁의 병사들이 쓰러질 때마다 이유 없이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소은하는 전장에서 기세가 꺾이는 쪽이 패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누구보다 물러서서는 안 됐다.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장병들의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붉은 창술은 피에 젖어 짙은 핏빛을 띠었다.소은하는 창대를 휘둘러 핏방울을 털어 낸 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장수들이여!”“예!”“나를 따라 돌격하라!”검은 갑옷에 은갑을 걸친 소은하는 장창을 휘두르며 적군의 시신을 딛고 나아갔다.멀지 않은 곳에서는 피에 젖은 깃발이 거센 바람에 펄럭이며 장군의 성씨를 드러냈다.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도 소은하의 눈빛은 별처럼 빛났고, 늠름한 기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그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뒤를 돌아 외쳤다.“우리가 이겼다!”그 외침에 장병들이 일제히 “이겼다!”, “승리다!”를 외치며 화답했다.장군 군막 안.군의관의 안색은 심각했고, 곁에 선 정윤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멀쩡해 보이던 장군이 모닥불가에서 의식을 잃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순간 정윤은 혼비백산했다. 상하의 예도, 남녀의 구분도 잊은 채 소은하를 안아 들고 군막으로 뛰어들었다.일렁이는 불빛이 잠든 소은하의 얼굴을 비추었다. 군의관은 식은 땀을 흘리며 떨리는 손을 맞잡고 허리를 굽혔다.“종사관 나으리, 소인이 부족하오나 맥을 잘못 짚었을 리는 없습니다... 장군께서는 진정 회임하셨습니다.”‘장군께서 아이를 가지셨다니!’정윤이 차가운 얼굴로 그의 말을 끊었다.“알았으니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가차 없이 죽인다.”군의관은 땀을 훔쳤다.“예, 나으리.”그는 군막을 나섰다. 막사를 나서며 마지막으로 돌아본 군의관은, 음울한 표정의 사내가 장군의 싸늘한 손을 감싼 채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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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소은하의 회임 사실을 안 뒤부터 정윤은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그녀와는 좀처럼 말을 섞지 않았지만, 말등에는 가장 푹신한 방석을 깔고 먹을 것은 속까지 바싹 익힌 것만 내왔다.그는 마치 하인처럼 소은하가 조금이라도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다했다.소은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자신을 이토록 조심스레 대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윤은 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녀를 피했다.그러던 어느 날, 병사 하나가 정윤이 소은하를 위해 고기를 굽는 모습을 보고 툭 내뱉었다.“종사관 나으리, 장군께 아부 좀 그만 떠십시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인이라도 모시는 줄 알겠습니다!”그 말에 정윤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내가 그러고 싶다는데, 네놈들이 떠들 일이냐?”아무리 둔한 자라도 이제는 그의 마음을 알 법했다. 소은하는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지금의 자신에게 누구의 마음을 받아들일 낯이 남아 있기는 한가.마침내 소은하는 정윤과 마주할 틈을 얻었다. 그가 서둘러 자리를 뜨려 하자, 그녀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지만 정윤은 그러지 않았다. 떨리던 입술 끝에 씁쓸하고 지친 미소가 걸렸다.모닥불 앞에 선 칠 척이 넘는 사내는 검고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은하는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면서도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내 마음에 더는 이건은 없다.”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둔하게 저려 왔다.“허나 다른 이를 마음에 품을 수도 없다, 정윤아.”정윤은 잠긴 목소리로 짧게 웃더니 소은하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장군과 종사관이 아닌, 남매와도 같았다.“참 매정하십니다. 다섯 해, 여섯 해를 기다리고서도 장군을 남에게 빼앗긴 줄조차 몰랐으니, 저는 참으로 못난 사내입니다.”소은하의 눈가가 붉어지자, 정윤은 도리어 웃었다. 오랫동안 전장에서 창과 칼을 쥔 그의 손에도 소은하처럼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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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은하야.”비단옷 위에 검은 망토를 걸친 이건은 피곤한 낯이었으나, 소은하를 향한 그리움만은 감추지 못했다. 장군의 군막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그는 그녀가 휘장을 젖히고 들어서자마자 다급히 다가갔다.그러나 정윤이 굳은 낯으로 소은하의 앞을 막아섰다.“폐하, 장군께서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셨습니다. 어찌 폐하의 옥체를 더럽히게 하겠습니까?”이건은 잠시 멈칫했다. 소은하도 동의하듯 바라보자, 그의 목소리가 절로 가라앉았다.“짐이 어찌 은하를 꺼리겠느냐. 은하만 짐을 꺼리지 않는다면 그만이다.”소은하는 순간 마음이 누그러졌으나, 이건과 더 말을 섞었다가는 무사히 이곳을 떠나겠다는 결심마저 흔들릴 것 같아 정윤을 돌아보며 말했다.“빈 군막을 하나 찾아 폐하께 씻을 물과 드실 것을 마련해 드려라.”그러고는 이건에게 담담히 덧붙였다.“군영은 궁과 다르니, 제대로 모시지 못하더라도 부디 너그러이 헤아려 주십시오.”이건은 소은하가 자신과 정윤을 대하는 태도가 다름을 곧 알아챘다. 전생에서 단 한 번 마주쳤던 종사관 정윤을 살피니, 훤칠한 데다 무예까지 뛰어난 사내라 이건은 속이 쓰렸다.정윤은 분명 소은하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이건은 불꽃이 일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어금니를 으득 갈았다.‘그렇다면 은하는 어떤 마음일까. 은하도 이 사내에게 마음을 줄까?’그때 정윤은 눈앞의 이가 황제인지 왕후장상인지 따질 마음도 없었다. 이건이 소은하를 아이 밴 몸으로 전장에 나서게 했다는 생각에, 백성들이 성군이라 칭송하는 그를 거의 증오하게 된 그는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폐하, 군영의 모든 일은 장군께서 빈틈없이 돌보고 계십니다. 이 관문을 뚫는 데도 열흘 남짓이면 족한데, 어찌 천 리 길을 마다하고 이곳까지 오셨습니까?”이건은 가볍게 웃었다.“짐은 은하가 보고 싶어 왔다.”정윤은 말문이 막혀 한동안 눈만 부릅뜨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군자는 위태로운 곳을 가까이하지 않는 법입니다. 폐하의 옥체에 상처라도 입으시면 어쩌시렵니까?”이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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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전생과는 시기도 전개도 같지 않았지만, 이건은 감히 운에 맡길 수 없었다. 소은하는 이미 그의 제멋대로인 행동 탓에 한 번 죽었다. 헌데 어찌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게 둘 수 있겠는가.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푸르스름한 멍이 든 준수한 얼굴은 한층 가엾어 보였다.“은하야, 이곳에 머물게 해 다오. 절대 네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그러나 소은하는 이번 전투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건이 후세에 길이 남을 성군은 아니어도, 제 몫을 다하는 임금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더구나 대주는 이제 막 한 차례 변혁을 겪었기에 백성들이 군주를 잃고 다시 내란에 휘말릴 수 없었다.만일 이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승에 있는 아버지께 어찌 떳떳할 수 있겠는가.소은하는 담담히 물었다.“나현진을 뵙는 일이 그리도 급하십니까?”그녀는 그가 아니라고 부인해 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제 입으로 그 말을 꺼낸 순간,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왔다.그런데도 이건은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이곳에 남기 위해 거짓을 말한 줄도 모른 채, 소은하는 가슴에서 번져 나가는 쓰디쓴 감정에 늦가을 바람 속 몸을 떨었다.“허면 폐하 뜻대로 하십시오.”소은하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고 미련 없이 군막을 나섰다. 이건은 지금 어떻게든 소은하를 살려 낼 생각뿐이라 마음이 어지러워 그녀의 이상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이튿날 군을 정비해 출정할 때, 병사들은 장군 곁에 사내가 둘이나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사람은 낯익은 정윤이었다.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낯빛이 유난히 어두웠다.그 옆에는 전날 밤 정윤을 꺾었다가 소은하에게 패한 사내가 서 있었다.다만 장군의 결정은 누구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군영 안에 작은 술렁임이 일었을 뿐, 이내 잦아들었다.정윤은 말 위의 이건을 보며 증오를 참을 수 없었다. 아침에 그자가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을 알았을 때만 해도 그저 못마땅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장군이 그를 지키라 명하자,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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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어째서 다시 돌아왔는데도 운명을 바꾸지 못한단 말인가?’이건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제국의 사신은 이미 군막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정예 병사 몇을 데리고 나서자 사신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띠고 길을 안내했다.정윤이 낮게 말했다.“폐하, 적이 계략을 꾸몄을지도 모르니 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는 그럴 기회조차 없었으니,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은하를 구해야 했다.다만 그토록 무예가 뛰어난 소은하가 어찌 적의 손에 떨어졌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제국의 태자 야율진은 이건과 또래였으나, 늙어서도 정정한 황제 탓에 아직 태자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군막에 들어선 이건을 자리에서 일어나 맞았지만, 이건은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물었다.“태자께서는 어떤 조건이면 소 장군을 대주로 돌려보내 주시겠습니까?”야율진은 그의 무뚝뚝한 말투를 개의치 않은 채 온화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로 대주와 제국은 원한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헌데 폐하께서는 어찌 친히 제국을 치러 오셨습니까? 제국에 잘못한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소문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정윤은 잠시 멍해졌다가 나직히 말했다.“제국의 태자께서 포악하다는 것은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몇 년 전 화친을 위해 시집온 승상의 여식 현진 낭자께서 제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야율진은 이제야 납득했다는 듯, 준수한 얼굴에 억울한 기색을 띠었다.“사실 화친은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현진 낭자에게 연정도 없었으나, 예를 갖춰 대했습니다... 대체 그런 헛소문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그러던 야율진의 목소리가 돌연 차갑게 식더니, 서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대주와 제국 사이를 이간질한 놈을 반드시 찾아내 뼈를 발라내고 가죽을 벗긴 뒤,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습니다.”이건은 가슴이 철렁했다. 야율진이 겉모습처럼 온화한 서생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몇 마디 말만으로도 변덕스럽고 잔인한 본성이 드러났다.그러나 이건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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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이건은 소은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소은하는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긴 속눈썹만 불안하게 떨고 있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이건은 소은하를 안아 데려갈 생각이었다.궁으로 돌아가면 가장 존귀한 자리를 내어 마음 편히 아이를 품게 할 작정도 이미 세워 두었다.그런데 그가 막 소은하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제국군이 좌우에서 장도를 내밀어 길을 가로막았다.이건의 낯빛이 굳었다.“지금 이게 무슨 뜻입니까?”야율진은 싱긋 웃었다.“폐하,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요구하신 것은 소 장군이지, 뱃속의 아이까지는 아니었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제 아내를 오래도록 연모하고도 얻지 못하셨다 들었습니다. 제가 그 근심을 덜어 드리고자, 나현진은 폐하께 돌려드리고 아이는 제가 남기겠습니다. 이보다 좋은 거래가 어디 있겠습니까?”이때 군의관 차림을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 소은하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 유산을 일으킬 탕약을 들이부었다.그 순간 이건은 목에 겨눠진 칼날도 잊은 채 달려들려 했다.“폐하, 아니 됩니다!”정윤이 황급히 그를 붙잡았지만, 이건은 뿌리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야율진! 네 이놈! 네놈이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그의 목에는 이미 칼자국이 나 있었지만, 이건은 고집스레 손을 앞으로 뻗었다.탕약이 바닥나는 것을 본 순간, 이건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장검을 뽑아 군막 안의 사람들을 베어 버리려 했다.정윤은 비통한 마음을 억누른 채 그의 허리를 힘껏 붙잡았다.“폐하, 아니 됩니다! 소 장군께서 무사히 돌아오시면 다시 대주의 핏줄을 이으실 수 있습니다!”이건은 속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예전 그가 소은하에게 거듭 회임을 막는 탕약을 먹인 탓에, 그녀는 다시 아이를 품기 어려운 몸이 되어 이건은 회임을 바라지도 못했다.그러다 마침내 두 사람에게 아이가 생겼는데 야율진이 그 아이의 목숨을 잔인하게 끊어 버렸다.이건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 눈에 핏발마저 섰다.정윤은 아무리 붙잡아도 그를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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