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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배덕한 여름: Chapter 51 - Chapter 60

61 Chapters

51

덕배의 시선은 작업대 한쪽에 놓인 꽃다발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며칠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J&J를 드나들던 강민우가 결국 여름에게 고백하며 건넨 꽃이었다. 더 마음에 안 드는 건 그 꽃다발을 여름이 직접 골라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덕배가 팔짱을 꼈다. “그래서 언제 대답하는데.” 여름은 덕배가 가져온 꽃의 줄기 끝을 다듬다가 고개를 들었다. “뭘요?” “고백.” “아직 모르겠어요.” “뭘 그렇게 오래 생각해.” 여름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늘 받았는데요?” 덕배의 입이 잠깐 닫혔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있잖아.” “좋은 분이긴 해요.” 덕배의 턱이 바로 굳었다. “좋아?” “좋은 분이라고요.” “그게 그거 아니냐?” 여름이 가위를 내려놓았다. “좋은 사람이랑 좋아하는 사람이랑 다르다고 사장님이 그랬어요.” 재희가 작업대 안쪽에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맞는 말 했네.” 덕배는 재희를 한번 보고 다시 여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안 좋아한다는 거네.” 여름은 잠깐 생각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그 대답이 또 마음에 안 들었다. 싫으면 싫다고 하면 간단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자로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는 건 결국 가능성을 열어둔 말이었다. 덕배의 미간이 깊어졌다. 재희는 그 얼굴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인기 많네, 서여름.” 여름이 고개를 돌렸다. “제가요?” “응.” “왜요?” 재희의 시선이 여름에게서 덕배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한 사람은 오늘 꽃다발을 들고 고백했다. 다른 한 사람은 시든 꽃 한 송이를 버리지 못해 약속한 날보다 사흘이나 먼저 찾아와놓고, 남의 고백 결과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정작 그 가운데 있는 여름만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여름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인기 많은 건 아니죠.” “왜.” “한 사람한테 고백받은 것뿐인데요.” 재희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덕배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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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배는 J&J를 나온 뒤 곧장 차에 올라탔다. 손에는 여름이 다시 손질해준 꽃이 들려 있었다. 조수석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시동을 걸었지만 바로 출발하지는 않았다. 사흘 뒤에 봐요. 별것 아닌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그보다 더 거슬리는 건 따로 있었다. 좋은 분이긴 해요. 아직 모르겠어요. 생각해본다고 했어요. 덕배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뭘 생각해.”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강민우가 뭐가 그렇게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고백 하나 받은 걸 뭘 그렇게 오래 생각해야 하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덕배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려다 멈췄다. 자기가 왜 이러는지는 이제 대충 알 것 같았다. 여름이 다른 남자에게 고백받았다는 게 싫었다. 그 꽃을 집에 가져간다는 건 더 싫었고, 민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질투.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덕배가 헛웃음을 흘렸다. “와, 씨발.” 자기가 스무 살짜리 꽃집 직원 때문에 질투하고 있었다.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 사랑이니 뭐니 거창하게 붙일 생각은 없었다. 신경 쓰이고, 자꾸 보고 싶고, 다른 놈이 들러붙는 건 좆같다.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덕배는 담배를 다시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저녁에는 차강수의 집무실에서 서쪽 건 후속 회의가 있었다. 덕배는 들어가자마자 자료부터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형님. 이 새끼 맞습니다.” 강수가 사진을 확인했다. “확실해?” “예. 돈 받은 날짜까지 맞습니다.” 정민이 추가 계좌 내역을 옆에 붙였다. “윗선은 아직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덕배가 소파에 앉으며 얼굴을 쓸었다. “잡힌 놈부터 까면 나올 겁니다.” 강수가 짧게 말했다. “내일.” “예.” “네가 가.” 덕배의 눈빛이 바로 달라졌다. “알겠습니다.” “선 넘지 말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강수의 시선이 잠시 덕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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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후, J&J에는 평일답게 손님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여름은 오전 예약 주문을 끝내고 냉장고 안쪽을 정리하고 있었다. 전날 민우에게 받은 꽃다발은 집으로 가져가 시골에서 가져온 들꽃 옆에 꽂아두었다. 고백에 대한 답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 민우가 싫어서 고민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사람이었다. 말투도 부드럽고, 며칠 동안 가게를 오가면서 무례하게 행동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연애라는 단어를 붙이는 순간 잘 모르겠어졌다. 좋아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도 여름은 아직 잘 몰랐다.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여름이 냉장고 안에서 몸을 빼다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어?” 민우였다. 오늘은 꽃을 사러 온 사람처럼 냉장고를 보지 않았다. 곧장 작업대 앞으로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꽃 사러 오셨어요?” 민우가 웃었다. “오늘은 꽃 말고 여름 씨 보러 왔어요.” 여름의 손이 멈췄다. 고백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똑같은 말도 전과 다르게 들렸다. “아…….”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민우는 그런 여름을 보고 웃었지만 놀리지는 않았다. “잠깐 얘기해도 돼요?” “네.” 여름은 장갑을 벗고 작업대 앞으로 나왔다. “어제 고백한 거 때문에 부담 주러 온 건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도 생각하고 있어요.” “알아요.” 민우는 잠깐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래서 생각만 하지 말고 저를 조금 더 알아보면 어떨까 해서요.” 여름이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요?” “데이트요.” 여름의 눈이 동그래졌다. 민우가 작게 웃었다. “오늘 저녁 어때요?” “오늘이요?” “네. 거창한 거 말고 저녁 먹고 커피 정도.” 여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고백받은 뒤 처음으로 둘만 따로 만나는 자리였다. 민우가 서두르지 않고 덧붙였다. “부담스러우면 다음에 해도 되고요.” 여름은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 “몇 시쯤이요?” 민우의 얼굴이 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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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여름은 평소보다 시계를 자주 봤다. 데이트라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일을 대충 끝낼 수는 없어 마지막 주문 꽃다발의 포장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앞치마를 벗었다. 재희가 계산대에서 여름을 훑어봤다. “그대로 가게?” 여름이 자기 옷을 내려다봤다. 연한 니트에 청바지였다. “왜요?” “첫 데이트잖아.” “밥 먹는 건데요.” “화장이라도 좀 하지.” “했어요.” 재희가 얼굴을 살폈다. “뭘.” “선크림.” “……됐다.” 여름은 가방을 챙기며 웃었다. “민우 씨도 회사 끝나고 오는 건데 뭘 꾸며요.” 일곱 시 반이 되기 조금 전 민우가 도착했다. 정장을 입지는 않았지만 회사에서 바로 온 듯 셔츠에 슬랙스 차림이었다. 손에는 꽃이 없었다. “오늘은 진짜 꽃 안 샀어요.” 여름이 웃었다. “내일 사신다면서요.” “기억하고 있었어요?” “매출은 중요하니까요.” 민우도 웃었다. 둘은 J&J에서 멀지 않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여름은 메뉴판을 한참 보다가 파스타 하나를 골랐다. 민우가 스테이크도 주문하려 하자 손을 저었다. “저 많이 못 먹어요.” “진짜요?” “네. 남기면 아깝잖아요.” 민우는 억지로 더 주문하지 않았다.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둘은 서로에 대해 처음으로 제대로 이야기했다. 민우가 먼저 물었다. “꽃집 일은 언제부터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것저것 하다가 제대로 시작한 건 얼마 안 됐어요.” “플로리스트가 꿈이에요?” 여름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 “네.” 꽃 이야기가 나오자 말이 많아졌다. 처음 자기가 만든 꽃다발을 손님이 좋아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꽃시장에 가면 새벽잠도 금방 깨는지, 언젠가는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큰 행사 장식도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민우는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진짜 좋아하나 보다.” “티 나요?” “엄청요.” 여름이 웃었다. “민우 씨는 디자인하는 거 좋아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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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여름은 퇴근 후 매일 민우를 만났다. 거창한 데이트는 아니었다. 회사가 가까운 민우가 퇴근 시간에 맞춰 J&J로 왔고, 둘이 저녁을 먹은 뒤 근처를 걷거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함께 있으면 편했다. 민우는 여름의 말을 잘 들어줬고, 꽃 이야기가 길어져도 지루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여름이 많이 먹지 못한다는 걸 알고부터는 음식을 과하게 주문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고민됐다. 설레는 건지는 아직 잘 구분되지 않았다. 다만 오후가 되면 자연스럽게 시간을 확인했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오늘은 어디서 뭘 먹을지 궁금해졌다. 민우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반갑기도 했다. 그 정도면 자기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렇다고 당장 좋다고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민우가 며칠 동안 꽃을 사며 마음을 표현했던 것도, 서두르지 않고 자신을 기다려주는 것도 알았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설픈 마음으로 대답하는 건 그 진심을 가볍게 만드는 것 같았다. 여름은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여름은 작업대 한쪽에 작은 유리병을 올려놓았다. 덕배가 처음 맡겨놓은 노란 꽃은 이제 완전히 말라 있었다. 생화일 때보다 색은 옅어졌지만 모양은 제법 예쁘게 남았다. 여름은 핀셋으로 꽃잎을 정리하다 혼자 웃었다. “잘 말랐네.” 오늘이 덕배와 약속한 날이었다. 잊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고개를 든 여름의 눈이 동그래졌다. 덕배였다. 한 손에는 며칠 동안 물을 갈아줬던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처음보다 고개가 많이 내려가고 꽃잎도 힘을 잃은 상태였다. 여름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 “진짜 왔네요?” 덕배의 눈썹이 올라갔다. “오라며.” “안 잊어버렸어요?” “내가 치매냐?” “그런 뜻 아니거든요.” 덕배는 작업대 앞으로 와 꽃을 내밀었다. “얘 이제 진 거 맞지?” 여름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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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를 나온 덕배는 차에 올라탄 뒤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점심도 먹지 않았는데 배고픈 줄도 몰랐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 본 장면만 계속 걸렸다. 덮밥 두 개. 뮤지컬 티켓 두 장. 그리고 그걸 받아 들고 웃던 여름. 덕배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씨발.” 질투하는 건 이미 인정했다. 다른 새끼가 여름에게 들이대는 게 싫었다. 둘이 매일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이제는 뮤지컬까지 같이 보러 간다고 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 있을 배덕배가 아니었다. 민우가 꽃을 사주고 밥을 사주고 공연을 보여주면서 점수를 따고 있다면 자신도 뭔가 하면 됐다. 덕배에게 여자 마음을 얻는 방법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수도 없이 봤다. 가방. 주얼리. 비싼 레스토랑. 갖고 싶다는 게 있으면 사줬고, 대부분 좋아했다. 돈은 많았고 그 정도 지출에 의미를 둔 적도 없었다. 신호에 걸린 순간 덕배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연락처를 내리다가 여자 하나를 골라 전화를 걸었다. 두어 번 함께 밤을 보낸 적 있는 여자였다. - 오빠? “어.” - 웬일이야? 먼저 전화도 하고. “물어볼 거 있어.” - 뭔데? 덕배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두드렸다. “요즘 여자들 무슨 가방 좋아하냐?”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 갑자기 가방? “어.” - 누구 사주게? “그건 알 거 없고. 요즘 제일 핫한 거.” 여자가 웃었다. - 나 사주려고? “너 말고.” - 너무하네. “빨리 말해.” 몇 가지 브랜드와 모델명이 줄줄이 나왔다. 덕배에게는 전부 처음 듣는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뭐가 제일 좋아.” - 나이대가 어떻게 되는데? 덕배가 잠깐 멈췄다. “스물.” 이번에는 전화기 너머가 더 오래 조용했다. - 오빠 양심 어디 갔어? 덕배의 얼굴이 바로 구겨졌다. “가방이나 처말해.” 여자가 한참 웃었다. - 알았어. 요즘 많이 찾는 게 있기는 한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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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끝내고 CH건설을 나온 덕배는 곧장 J&J로 향했다. 같은 날 오후였다. 뒷좌석에는 백화점에서 산 가방이 든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한 번씩 눈에 들어왔지만 덕배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늘 그랬다. 여자에게 선물을 고르는 데 오래 고민한 적도 없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사줬고, 직접 고르기 귀찮으면 가장 비싸거나 좋은 걸 골랐다. 상대는 좋아했고 덕배도 그걸로 끝이었다. 이번에도 다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J&J 앞에 도착한 그는 익숙하게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쇼핑백을 들고 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작업대에서 꽃을 정리하던 여름이 고개를 들었다. 덕배를 발견한 얼굴에 의아함이 먼저 떠올랐다. “아저씨?” “어.” “아까 갔잖아요.” “알아.” 점심 무렵 진 꽃을 맡기고 돌아간 사람이 몇 시간 만에 다시 나타났으니 이상할 만했다. 여름의 시선이 덕배 손에 들린 쇼핑백으로 내려갔다. “그건 뭐예요?” 덕배는 작업대 앞으로 걸어가 쇼핑백을 올려놨다. “너.” 여름이 눈을 깜빡였다. “저요?” “어.” “뭐가요?” “선물.” 덕배는 별일 아니라는 듯 턱짓했다. “열어봐.” 여름은 쇼핑백과 덕배를 번갈아봤다. 익숙한 명품 브랜드 로고였다. 표정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왜요?” 덕배의 눈썹이 올라갔다. 예상했던 반응과 달랐다. “뭐가 왜야.” “왜 저한테 선물을 줘요?” “주고 싶으니까.” “갑자기요?” “어.” 여름은 쇼핑백에 손도 대지 않았다. 덕배가 답답한 듯 직접 상자를 꺼냈다. “일단 봐.” “아저씨.” “왜.” “저 이거 안 받아요.” 덕배의 손이 멈췄다. “뭐?” 여름은 장난치는 얼굴이 아니었다. “안 받을래요.” “열어보지도 않았잖아.” “뭔지 대충 알 것 같은데요.” “가방이야.” “그러니까요.” 덕배의 미간이 천천히 좁아졌다. “가방 싫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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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전, 덕배는 현장으로 향하다 백화점 앞에서 차를 돌렸다. 어제 산 가방은 여전히 뒷좌석에 있었다. 상자조차 열어보지 않고 거절당한 물건이었다. 보통이라면 다시 매장에 보내든 누구에게 줘버리든 했겠지만 아직 그대로였다. 덕배는 가방이 아니라 다른 게 문제였다고 결론 내렸다. 취향. 서여름이 가방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걸 사면 됐다. 덕배에게는 단순한 문제였다. 백화점에 들어선 그는 어제와 다른 층으로 올라갔다. 여성 구두 매장이 이어진 곳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문제는 이번에도 아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덕배는 매장 직원에게 곧장 물었다. “스무 살 여자들이 뭐 신습니까?” 직원이 잠시 당황했다가 웃었다. “찾으시는 스타일이 있으실까요?” “예쁜 거.” “평소 스타일은요?” 덕배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름이 뭘 입었더라. 청바지. 운동화. 꽃집 앞치마. 양로원에 갔던 날도 운동화였다. “편하게 입습니다.” “그럼 로퍼나 플랫도 괜찮고요. 조금 꾸밀 때 신을 거라면 이런 펌프스도—” 덕배는 직원이 보여주는 구두를 훑었다. 그러다 가장 비싼 쪽에 시선이 멈췄다. “이건.” “시그니처 라인입니다.” “이걸로.” “사이즈는 어떻게 되세요?” 덕배가 멈췄다. “……사이즈?” “네.”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덕배는 잠시 서 있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배덕배: 야.] 답장은 잠시 뒤 왔다. [서여름: 왜요?] [배덕배: 발 몇이냐.] 이번에는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서여름: 제 발이요?] [배덕배: 그럼 내 발 물어봤겠냐.] [서여름: 235요. 근데 왜요?] 덕배는 화면을 확인하고 직원에게 말했다. “235.” 결제까지 끝낸 뒤에야 여름의 마지막 질문에 답했다. [배덕배: 그냥.] 쇼핑백을 들고 나온 덕배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번에는 가방이 아니었다. 신발은 누구나 신는다. 게다가 예뻤다. 가격도 충분히 비쌌다. 이 정도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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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덕배는 침실 한쪽에 놓인 쇼핑백 두 개를 보며 셔츠 단추를 채웠다. 가방. 구두. 둘 다 실패였다. 어젯밤 검색창에 "스무 살 여자 선물"을 쳐본 뒤 한참을 들여다봤지만 결과는 죄다 비슷했다. 가방, 향수, 주얼리, 화장품. 향수는 마음에 안 들었다. 여름에게서는 원래 꽃향기가 났다. 굳이 다른 냄새를 덮을 이유가 없었다. 덕배는 시계를 채우다 손을 멈췄다. 주얼리. “그래.” 가방도 아니고 구두도 아니다. 몸에 하고 다니는 건 다를 수 있었다. 어제 분명 아무것도 사오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밀어냈다. 점심 무렵 덕배는 주얼리 매장에 들어섰다. “선물 찾으세요?” “예.” “연령대가 어떻게 되실까요?” “스물.” 직원은 익숙하게 몇 가지 제품을 꺼냈다. 가느다란 목걸이와 귀걸이, 작은 펜던트가 달린 팔찌까지 차례로 놓였다. 덕배의 시선은 팔찌에서 멈췄다. 여름의 손목이 떠올랐다. 자기 팔에 붕대를 감아주던 작은 손. 꽃 줄기를 잡고 가위를 움직이던 가느다란 손목. 덕배는 팔찌 하나를 들어봤다. “이건 얼마입니까.” 직원이 가격을 설명했다. 덕배는 고개를 저었다. “더 좋은 거.” “조금 더 높은 라인으로 보여드릴까요?” “제일 좋은 걸로.” 잠시 뒤 다이아몬드가 작게 세팅된 팔찌가 나왔다. 화려하게 크지는 않았지만 가격은 앞서 본 것들과 확연히 달랐다. 덕배는 마음에 들었다. “이걸로.” “손목 사이즈는 아실까요?” 이번에는 덕배도 멈췄다. 발 사이즈는 물어봤다. 손목 둘레까지 물어보면 여름이 바로 눈치챌 게 뻔했다. “제일 작은 걸로 하면 안 됩니까?” “조절 가능한 제품이라 크게 문제는 없으실 것 같습니다.” “그럼 그걸로.” 결제는 또 빨랐다. 오후 세 시. J&J 문이 열렸다. 여름은 꽃바구니를 만들다가 고개를 들었다. 덕배를 발견했다. 그다음 그의 손을 봤다. 작은 쇼핑백. 여름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덕배는 아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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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배가 현장에서 빠져나온 건 저녁 일곱 시가 가까워진 뒤였다. 예정보다 일이 길어졌다. 오전부터 붙잡고 있던 협력업체 문제가 오후까지 이어졌고, 마지막 확인을 끝내고 나서야 현장사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차에 올라탄 덕배는 안전모를 뒷좌석에 던졌다. 그 옆에는 작은 쇼핑백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반지였다. 가방도 안 받았다. 구두도 안 받았다. 팔찌도 안 받았다. 그런데 덕배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어디까지 안 받나 보자는 오기가 붙었다. 오늘 고른 건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였다. 매장 직원이 선물 받는 사람과 무슨 관계냐고 물었을 때는 대충 얼버무렸다. 손가락 사이즈를 몰라 조절과 교환이 가능한 제품으로 골랐고, 이번에도 가격은 가장 높은 쪽이었다. 덕배는 시계를 확인했다. J&J 영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아직 있겠지.” 차를 출발시켰다. 꽃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일곱 시 이십 분이 넘어 있었다. 가게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덕배는 쇼핑백을 집어 들고 차에서 내렸다.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아저씨?” 여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덕배는 안으로 들어서다 걸음을 멈췄다. 평소와 달랐다. 앞치마도 없었다. 무릎 아래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밝은색 원피스를 입었고, 늘 풀어놓거나 낮게 묶던 긴 갈색 머리는 깔끔하게 올려 묶었다. 목선과 작은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옅게 화장까지 한 것 같았다. 덕배의 시선이 말없이 위에서 아래로 한번 내려갔다. 여름이 자기 옷을 내려다봤다. “왜요?” 덕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전 민우와 첫 데이트를 한다던 날에는 선크림만 바르고 갔다고 했다. 오늘은 누가 봐도 달랐다. “너 어디 가냐.” 여름이 거울을 보며 귀 옆 잔머리를 정리했다. “데이트요.” 덕배의 턱이 바로 굳었다. 알면서 물은 셈이었다. “그 새끼랑?” 여름이 돌아봤다. “민우 씨요?” “어.” “네.” 대답도 시원했다. 덕배는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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