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덕한 여름

배덕한 여름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9-28
작가:  서담최근 업데이트
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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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넘쳤고, 사랑은 필요 없었다. CH건설 이사이자 사뇌파 행동대장 배덕배, 서른넷. 돈도 힘도 통하지 않는 스무 살 플로리스트 서여름을 만났다. “아저씨, 차 좀 빼주세요.” 겁은 먹으면서도 눈 하나 피하지 않는 맹랑한 여자. 처음엔 짜증 났고, 그다음엔 오기가 생겼다.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자꾸 그 여자 앞에 서 있었다. 열네 살 차이. 평생 사랑 따윈 모르던 거친 남자에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여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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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챕터
1
찌걱찌걱-하흣!!너무좋아~~오늘 호텔라운지 바에서 처음만난여자였다.함께 위스키를 마시고 이야기 하고누가 뭐랄것도 없이 키스하고 호텔 스위트룸으로 올라와서로를 탐닉하고 알몸인체 여자는 덕배 위로 올라가허리를 열심히 움직였다.씨발허리 잘 돌리네덕배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두어 시간 전 라운지 바에서 이름을 주고받았고, 술잔이 세 번쯤 비었을 때는 서로 오늘 밤 뭘 원하는지도 진작 끝난 얘기였다.여자도 적극적이었고 덕배는 그런 여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오빠, 좋아?”“보면 몰라?”“말로 해줘.”“잘한다고.”“그거 말고.”덕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뭐. 사랑한다고 해줘?”“미쳤어? 오늘 처음 봤는데.”“알긴 아네.”여자가 웃으며 그의 가슴을 때렸다. 덕배는 그 손을 잡아 제 입가에 가져갔다가 그대로 끌어당겼다.여자야 좋았다.예쁘고, 잘 맞고, 같이 있는 동안 즐거우면 됐다. 거기에 사랑이니 미래니 하는 거창한 이름까지 처붙여야 할 이유는 모르겠었다.만나고 싶으면 또 만났다.마음에 들면 가방도 사주고 주얼리도 사줬다. 덕배에게 그 정도 돈은 큰돈도 아니었다. 상대가 둘 사이를 연애라고 생각하든 아니든 굳이 바로잡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대신 하지 않은 약속을 한 적도 없었다.새벽이 가까워져서야 스위트룸 안이 조용해졌다.덕배는 침대 아래 떨어진 바지를 주워 입었다. 넓은 등에 남은 손톱 자국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셔츠를 걸치자 침대에 엎드려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오빠, 가?”“어.”“자고 가지.”“내일 일 있어.”“주말인데 무슨 일?”덕배가 단추를 채우며 피식 웃었다.“씨발, 나도 그게 궁금하다.”여자가 깔깔 웃었다.“오빠 무슨 일 하는데?”“건설회사.”“현장직?”덕배의 손이 멈췄다.“내가?”“몸이 그렇잖아.”덕배가 자기 몸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야, 회사 이사한테 현장직이 뭐냐.”“진짜 이사야?”“가짜 이사도 있냐?”“안 어울려.”“뭐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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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름의 눈이 동그래졌다.차를 빼달라고 했더니 돌아온 건 사과도, 알겠다는 대답도 아니었다. 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저씨냐고 묻는 남자를 여름은 잠시 말없이 올려다봤다.사실 처음부터 기분이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저 커다란 검은 차는 벌써 십 분 가까이 꽃집 앞을 막고 있었다. 꽃을 실으러 온 차량은 입구로 들어오지 못해 도로 한쪽에서 비상등을 켜고 있었고, 기사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한 것도 두 번이었다.그래도 차주가 나타났으니 좋게 끝내려고 했다.그런데 이 남자는 엉뚱한 데서 시비를 걸고 있었다.“……네.”덕배의 눈썹이 꿈틀했다.“네?”“아저씨 맞으시잖아요.”“야, 내가 어디가 아저씨야.”여름은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참자.차만 빼면 된다.“제가 잘못 불렀으면 죄송한데요. 지금 차 때문에 꽃을 못 싣고 있어요. 먼저 빼주세요.”여름은 최대한 또박또박 말했다.덕배는 차에 타기는커녕 문에 한쪽 팔을 걸쳤다.“나 서른넷이야.”“네.”“서른넷이 어떻게 아저씨야?”여름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저 스무 살이에요.”이번에는 덕배가 잠깐 멈췄다.“스물?”“네. 그러니까 저한테는 아저씨 맞아요.”“열네 살 차이밖에 안 나잖아.”그 말에 여름의 인내심이 조금 더 깎였다.“열네 살이면 많이 나는데요?”“뭐가 많아.”“제가 여섯 살일 때 스무 살이셨잖아요.”덕배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야, 계산을 왜 그따위로 해?”여름은 결국 헛웃음이 나왔다.“빼기를 했는데 그럼 어떻게 계산해요?”“이게 자꾸 말대꾸하네.”“아저씨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하시잖아요.”“또 아저씨.”덕배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오빠라고 해.”여름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싫어요.”“왜.”“제가 왜요?”“그럼 계속 아저씨라고 할 거야?”“네.”“야.”“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요?”여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덕배가 눈썹을 들었다.“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그 한마디가 제대로 불을 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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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배는 결국 차부터 뺐다.시동을 걸어 꽃집 입구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에 차를 세운 뒤에도 속이 묘하게 긁혀 있었다. 처음부터 잠깐 세워둔 건 자기 잘못이 맞았다. 평소라면 욕 한마디 하고 차를 옮긴 뒤 끝냈을 일이었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아저씨라는 말 한마디에 괜히 시비를 걸었고, 그 결과 스무 살짜리 여자애한테 길바닥에서 한바탕 얻어맞듯 잔소리를 들었다.“씨발, 스물이면 다냐.”차에서 내린 덕배가 문을 닫았다.그대로 가면 됐다. 이미 약속 시간도 미뤄진 상태였다.그런데 꽃집 앞에서 기다리던 배송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덕배의 얼굴이 구겨졌다.기사님한테도 사과하세요!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내가 왜 저 말을 처듣고…….”욕을 씹으면서도 발은 그쪽으로 향했다.덕배가 다가오자 배송 기사가 먼저 긴장한 얼굴을 했다. 덩치부터 압도적인 데다 눈썹 위 흉터까지 있으니 좋은 인상을 주는 얼굴은 아니었다.덕배는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기사님.”“예?”“차 때문에 기다리셨죠.”“아, 예. 조금…….”“죄송합니다.”짧고 분명했다.꽃집 앞에서 화분을 정리하던 여름의 손이 멈췄다.정말 할 줄은 몰랐다.덕배가 기사에게 고개를 한번 숙이고 돌아서는 순간 여름과 눈이 마주쳤다.여름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방긋 웃었다.조금 전까지 얼굴이 벌게져 바락거리던 사람과 같은 여자인가 싶을 만큼 순식간에 표정이 달라졌다.“감사합니다.”덕배가 걸음을 멈췄다.“뭐가.”“사과해주셔서요.”“내가 잘못했으니까 한 거야.”“그럼 됐어요.”여름은 정말 그걸로 끝이라는 듯 다시 화분을 들었다.덕배는 오히려 맥이 빠졌다.“야.”여름이 고개를 들었다.“왜요?”“아까는 사람 잡아먹을 것처럼 지랄하더니 이제 끝이야?”여름이 눈을 깜빡였다.“사과하셨잖아요.”“그래서?”“잘못한 사람이 사과했고 차도 빼셨는데 제가 계속 화낼 이유가 없죠.”덕배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여자애는 성질이 더러운 건지 좋은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여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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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난 건 밤 아홉 시를 넘긴 뒤였다.덕배는 마지막까지 남아 수정된 자재 수량과 현장 보고를 다시 맞춰봤다. 숫자가 어긋난 이유는 단순한 입력 실수가 아니었다. 발주 단계에서부터 수량이 다르게 올라왔고, 중간 결재를 거치면서도 아무도 잡아내지 못했다.그는 보고서를 덮으며 담당 팀장을 바라봤다.“내일 아침까지 발주서 원본 전부 올려요. 누가 어디서 잘못 건드렸는지 확인하고.”“예, 이사님.”“현장에는 내가 직접 나갑니다. 괜히 말 맞추려고 전화 돌리지 말고.”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회의실 안에 남아 있던 직원들이 동시에 긴장했다.덕배는 성질이 급했고 욕도 잘했지만 일을 감정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먼저 잡았고, 책임질 사람이 있으면 그다음이었다. 현장을 오래 굴러본 만큼 보고서 몇 장으로 상황을 넘겨짚는 짓도 하지 않았다.회의실을 빠져나온 그는 느슨하게 넥타이를 풀며 휴대전화를 확인했다.부재중 전화 두 통.안채아였다.덕배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전화를 걸었다.- 오빠.“왜 전화했어.”- 꼭 용건 있어야 전화해?“두 번이나 했잖아.”채아가 웃었다.- 보고 싶어서 했지. 일 끝났어?“방금.”- 나 지금 친구들이랑 있는데 올래?덕배는 시간을 확인했다. 내일 아침 현장에 나가야 했지만 지금 바로 집에 들어가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어딘데.”주소를 들은 그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채아가 있는 곳은 강남의 라운지 바였다.덕배가 들어서자 가장 먼저 채아가 눈에 띄었다. 몸의 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짙은 원피스에 풍성한 긴 머리, 또렷한 화장까지 어디에 있어도 시선이 갈 만큼 화려했다.“오빠.”채아가 웃으며 팔을 뻗었다.덕배는 익숙하게 허리를 감싸 안고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옆자리에 앉았다.“친구들은?”“방금 갔어.”“나 오니까 보냈냐?”“응.”“독하네.”“싫어?”“내가 언제.”채아가 웃으며 그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둘 사이에는 설명이 필요 없는 익숙함이 있었다. 몇 달째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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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조금 넘긴 시간, J&J 앞은 평소보다 한산했다.여름은 가게 밖에 내놓은 화분에 물을 주다가 길 건너편에서 들리는 큰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아니, 할머니가 긁었잖아요!”중년 남자가 인도 가장자리에 세워둔 차 옆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작은 손수레를 끌던 할머니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여름은 처음에는 남의 일이라 생각했다.그러다 할머니가 연신 허리를 숙이는 모습에 물조리개를 내려놓았다.“미안해요. 내가 못 보고…….”“미안하면 끝이에요? 이거 얼마짜리 차인지 알아요?”남자가 차 문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할머니는 겁먹은 얼굴로 그곳을 들여다봤지만 여름의 자리에서는 흠집이 있는지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보험도 없죠? 이거 다 물어내셔야 돼요.”“얼마나…….”“몇백 깨져요. 이런 차는.”할머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여름은 결국 가게 앞으로 나왔다.“저기요.”남자가 돌아봤다.여름은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가까이 갔다. 누가 잘못했는지 보지도 않고 할머니 편부터 들 생각은 없었다.“혹시 어디가 긁힌 거예요?”“아가씨는 뭔데?”“바로 앞 가게 직원인데요. 큰소리가 나서요.”여름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차를 살폈다.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얇은 자국 하나가 있었다.여름은 손수레도 봤다.높이가 맞지 않았다.“할머니 손수레가 여기 닿은 거 맞아요?”“맞다니까!”남자의 목소리가 확 커졌다.여름은 움찔했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저한테 화내실 필요는 없고요.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봤어? 못 봤잖아.”“네. 못 봤어요.”여름은 순순히 인정했다.“그래서 확인해보자는 거예요. 저희 가게 앞에 CCTV 있어요.”남자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여름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확인하면 되겠네요.”“뭘 그렇게까지 해. 할머니가 자기가 그랬다고 하잖아.”할머니가 당황해 손을 저었다.“나는 그냥 지나가다가 이 사람이 갑자기 차를 세워서…… 내가 부딪힌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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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강수의 집무실에는 늦은 오후까지 사뇌파 관련 자료가 펼쳐져 있었다.덕배는 소파 한쪽에 앉아 서쪽 업장에서 올라온 정산 내역을 넘겼고, 맞은편의 정민은 태블릿에 정리된 계좌 흐름을 확인하고 있었다. 집무실 가장 안쪽에서는 강수가 별말 없이 보고서를 읽었다.“숫자가 안 맞습니다.”덕배가 먼저 자료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지난달부터 조금씩 빼돌렸어요. 액수 작게 쪼개서 티 안 나게 처먹은 것 같은데, 이번 달부터 금액이 커졌습니다.”정민이 화면을 돌렸다.“명의만 다른 계좌가 세 개입니다. 최종적으로 들어간 곳은 같습니다.”덕배가 화면을 훑었다.“누구 건데.”“아직 확인 중.”“얼마나 걸려.”“오늘 안에는 나와.”덕배가 혀를 차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성질대로라면 당장 현장에 내려가 책임자를 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돈이 어디까지 흘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먼저 움직이면 꼬리부터 자를 가능성이 컸다.강수가 그제야 보고서를 내려놓았다.“기다려.”짧은 한마디였다.덕배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예, 형님.”“확인되면 움직여.”“알겠습니다.”정민도 별다른 질문 없이 태블릿을 거뒀다. 중요한 상황에서 셋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강수가 방향을 잡으면 정민은 필요한 정보를 모았고, 덕배는 현장에서 움직였다.회의가 끝나자 팽팽하던 공기도 조금 풀렸다.덕배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며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씨발, 요즘 왜 이렇게 돈 처먹는 새끼들이 많냐.”정민이 자료를 정리하며 대꾸했다.“네가 돈이 많아서 이해를 못 하는 거 아닐까.”“내 돈은 내가 번 거고.”“조직 돈 빼먹는 놈들도 나름 열심히 벌었다고 생각할걸.”덕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너는 가끔 어느 편인지 모르겠다.”“돈 주는 편.”“형님, 저 새끼 월급 끊으십시오.”강수는 휴대전화를 확인하다 짧게 말했다.“네가 줘.”덕배의 얼굴이 바로 구겨졌다.“제가 왜 줍니까?”정민이 소리 없이 웃었다.덕배가 쿠션 하나를 집어 던지려다 강수의 집무실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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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아가 보낸 주소는 호텔 라운지였다.덕배가 들어서자 바 안쪽에 앉아 있던 채아가 먼저 손을 들었다. 몸에 붙는 붉은 원피스는 풍만한 몸매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와 또렷한 화장까지 어느 하나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없었다.“오빠.”덕배는 맞은편이 아니라 채아 옆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자 채아가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늦었어.”“일했잖아.”“주말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고. 무슨 이사가 그래?”“존나게 바쁜 이사.”채아가 웃음을 터뜨렸다.“그 말 좋아하지?”“사실인데 뭘.”덕배는 채아가 내민 잔을 받아 단숨에 절반쯤 비웠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채아와는 굳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같은 게 필요하지 않았다. 어떤 술을 좋아하고,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지, 서로 뭘 원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덕배에게는 편한 관계였다.“오빠, 나 가방 봐둔 거 있는데.”“사진 보내.”“가격 안 물어봐?”“보고 마음에 들면 사.”채아가 그의 어깨에 기대며 웃었다.“이래서 내가 오빠 좋아한다니까.”“가방 사줘서?”“그것도 있고.”덕배가 코웃음을 치며 잔을 내려놓았다.“솔직해서 좋네.”채아는 그의 턱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오늘 위에 방 잡았어.”덕배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네.”“싫어?”“내가?”짧은 웃음과 함께 입술이 겹쳤다.그 뒤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늦은 밤 호텔방을 나온 덕배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셔츠 소매를 정리했다. 채아는 먼저 잠들었고, 덕배는 내일 아침 현장 일정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지하주차장에 도착하자 휴대전화가 울렸다.정민이었다.“왜.”- 계좌 주인 나왔어.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느슨한 기색이 덕배의 얼굴에서 바로 사라졌다.“누군데.”이름을 들은 그의 걸음이 멈췄다.“확실해?”- 두 번 확인했어. 회장님께는 내가 보고할게.“하지 마. 같이 들어가.”- 지금?“어. 이건 전화로 끝낼 일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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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각, 여름은 커다란 꽃바구니를 양손으로 안고 호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J&J에서 종종 주문을 받는 호텔이었다. 객실로 직접 전달하는 건 드물었지만 오늘 주문은 투숙객에게 보내는 기념일 선물이라 프런트 확인을 거쳐 직접 올라가게 됐다.“스위트룸 층…….”여름은 주문서에 적힌 객실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꽃바구니가 제법 컸다. 시야 아래쪽이 반쯤 가려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몸부터 조심스럽게 내밀었다.조용한 복도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여름은 객실 번호를 하나씩 확인하며 걸었다. 긴 갈색 머리는 낮게 묶었고 흰 셔츠 위에는 J&J 앞치마를 그대로 두르고 있었다. 품 안에서는 장미와 리시안셔스, 여러 생화가 뒤섞인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목적지까지 몇 걸음 남겨두지 않았을 때였다.앞쪽 스위트룸 문이 열렸다.여름은 꽃바구니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앞을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죄송합니다.”습관처럼 먼저 말한 뒤 지나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너 뭐냐?”여름의 걸음이 멈췄다.꽃바구니 옆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어?”덕배였다.검은 셔츠의 위쪽 단추를 두어 개 풀어놓은 채 스위트룸에서 나오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보다 흐트러져 있었고 한 손에는 재킷이 걸려 있었다.그 옆에는 화려한 여자가 함께였다.몸의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원피스에 풍성한 긴 머리, 또렷한 화장. 채아는 덕배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고 있었다.여름은 둘을 번갈아봤다.덕배도 어이가 없는지 여름의 앞치마와 품에 안긴 꽃바구니를 훑었다.“네가 여기 왜 있어?”“꽃 배달 왔는데요.”“호텔까지?”“호텔에는 꽃 배달 오면 안 돼요?”“그런 말이 아니라.”덕배가 헛웃음을 흘렸다.며칠 전 길바닥에서 자기한테 차 빼라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여자애를 호텔 스위트룸 복도에서 다시 볼 줄은 몰랐다.여름이 꽃바구니를 고쳐 안았다.“아저씨는 여기서 뭐 하세요?”덕배의 눈썹이 즉시 꿈틀했다.“야.”“왜요?”“여기서도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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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배달을 마친 여름은 빈 바구니를 정리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1층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조금 전 스위트룸 앞에서 마주친 덕배와 여자가 떠올랐다. 흐트러진 셔츠에 여자와 나란히 객실에서 나오던 모습이면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뻔했다.데이트가 아니라면 더 이상했다.여름은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갸웃했다.“요즘은 저런 것도 데이트라고 안 하나?”그게 전부였다.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생각도 함께 끝났다. 남이 누구와 호텔에 가든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호텔 밖으로 나온 여름은 J&J로 돌아가기 전에 꽃시장에 들렀다. 재희가 부탁한 포장재와 리본을 챙기고 예약 주문에 필요한 꽃까지 확인하느라 오후가 빠르게 흘렀다.J&J로 돌아왔을 때는 손님이 몰려 있었다.“여름아, 왔어?”“네. 리본도 가져왔어요.”“잘됐다. 이쪽부터 좀 받아줘.”여름은 곧바로 앞치마를 고쳐 묶었다.손님을 응대할 때는 호텔에서 있었던 일 따위 완전히 잊었다. 꽃을 고르는 손님에게 색을 맞춰 보여주고, 선물 받을 사람이 좋아하는 분위기를 물었다. 익숙하지 않은 주문은 재희에게 확인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찾아 움직였다.해가 질 무렵에야 가게가 조금 한산해졌다.재희가 작업대에 기대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호텔 배달은 잘했어?”“네.”“스위트룸 층이라 길 안 헤맸고?”“저 길 잘 찾아요.”“지난달에 지하상가에서 삼십 분 헤맨 사람이?”여름의 손이 멈췄다.“그건 출구가 너무 많았잖아요.”재희가 웃었다.여름은 포장지를 정리하다 문득 말했다.“아, 거기서 그 아저씨 만났어요.”“누구?”“차 안 빼던 아저씨요.”재희가 바로 알아들었다.“그 무섭게 생긴 사람?”“네.”“호텔에서?”“스위트룸에서 여자분이랑 나오던데요.”재희가 커피잔을 내리며 여름을 봤다.“둘이?”“네.”“그래서?”여름이 고개를 들었다.“뭐가요?”“아니, 그냥.”“여자친구인가 봐요. 엄청 예쁘던데.”말투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여름은 채아의 화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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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부터 CH건설 현장은 분주했다.덕배는 안전모를 눌러쓴 채 지하층에서 올라온 자재를 직접 확인하고 있었다. 며칠 전 보고서에서 잡힌 수량 차이는 예상대로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서류상 들어왔다는 자재 일부가 실제 현장에는 없었고, 거래업체가 제출한 납품서에도 손댄 흔적이 있었다.“이 업체 결제 보류해.”덕배가 납품서를 현장소장에게 돌려줬다.“이미 들어온 건 전부 다시 세고. 창고 CCTV도 지난달 것부터 확보해.”“예, 이사님.”“본사에는 내가 보고할 테니까 현장 사람들 입단속부터 시켜. 누가 장난질했는지 확인되기 전까지 업체 쪽에 연락하지 말고.”덕배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욕도 쉽게 튀어나오고 반응도 컸지만 일이 걸리면 오히려 판단부터 빨라졌다. 책임자를 잡아 족치는 건 증거가 모인 뒤에도 늦지 않았다.현장을 빠져나왔을 때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덕배는 안전모를 뒷좌석에 던지고 차에 올라탔다. 아침부터 커피만 마신 속이 쓰렸다. 근처에서 아무거나 먹을 생각으로 큰길에 들어섰지만 주말 도로는 예상보다 막혔다.신호가 두 번이나 바뀌도록 차가 제대로 빠지지 않았다.“아, 씨발.”덕배가 창문을 조금 내렸다.그때 오른쪽 골목 너머로 익숙한 간판 하나가 보였다.J&J.덕배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며칠 전 여기다 차를 세웠다가 스무 살짜리 여자애한테 길바닥에서 바락바락 잔소리를 들었다.생각하자 또 어이가 없었다.마침 앞차가 움직였다.덕배도 그대로 지나갔다.꽃집에 볼일은 없었다.그런데 한 블록쯤 갔을 때 도로변에 작은 분식집이 보였다. 덕배는 배부터 채울 생각으로 근처에 차를 세웠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튀김 냄새와 매운 떡볶이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점심시간이 지난 덕분인지 안에는 손님이 몇 없었다.덕배는 빈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훑었다.“순대 하나, 떡볶이 하나, 김밥 두 줄 주세요.”주문을 마친 순간 가게 문이 열렸다.“사장님, 저 왔어요.”익숙한 목소리에 덕배가 고개를 들었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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