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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덕배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알람이 울리기 전이었다.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다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 시 사십 분. 어젯밤 늦게 들어온 것치고는 잠을 제대로 잔 것도 아니었다.덕배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몸을 일으켰다.“피곤해 죽겠네.”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다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보던 시선이 입술에 잠깐 머물렀다.곧바로 미간이 구겨졌다.어젯밤 일이 또 떠올랐다.여름의 몸이 앞으로 쏠리고, 반사적으로 어깨를 잡았고, 입술이 잠깐 닿았다.그게 전부였다.덕배는 혀를 차며 수건을 던졌다.“사고였잖아.”누구에게 설명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그 사실이 더 짜증났다.여자와 키스 한 번 했다고 다음 날 아침까지 곱씹는 성격이 아니었다. 제대로 한 키스도 아니었다. 서로 놀라 바로 떨어졌으니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다.그런데 자꾸 생각났다.덕배는 생각을 끊듯 욕실 문을 열었다.아침 여덟 시가 조금 넘었을 때 CH건설 집무실에 도착했다.책상 위에는 어제 현장에서 넘어온 보고서가 쌓여 있었고, 오전 회의 전까지 확인해야 할 결재도 여러 건이었다.일을 시작하자 머릿속은 금세 정리됐다.덕배는 숫자가 맞지 않는 부분에 표시하고 담당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자재업체 문제도 후속 조치가 남아 있었다. 확인할 게 많았고, 업무에 들어가면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열 시가 가까워졌을 때 정민이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들어왔다.덕배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네 방 없어?”“있어.”“그럼 거기 가.”정민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회장님이 오후 두 시에 보재.”“서쪽?”“어. 그리고 어제 현장 보고도 같이.”덕배가 고개를 끄덕였다.정민은 바로 나가지 않았다.그 시선이 책상 한쪽에 머물렀다.작은 유리컵에 노란 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저건 또 뭐냐.”덕배의 펜이 멈췄다.어젯밤 집에 가져가려다 아침에 그대로 차에 두고 내렸고, 출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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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 시 반, 여름은 꽃시장 한복판에 있었다.어젯밤 집에 도착해 씻고 눕자마자 잠든 것 같은데 알람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재희의 차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지만 꽃시장 안으로 들어오자 잠이 조금씩 달아났다.새벽부터 시장은 이미 사람과 꽃으로 가득했다.카트가 좁은 통로를 오갔고, 상인들이 꽃 이름과 가격을 주고받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겹쳤다. 여름은 재희 뒤를 따라가며 오늘 필요한 목록부터 확인했다.“사장님, 장미 먼저요?”“응. 예약 주문 세 건 있잖아.”“제가 볼게요.”여름은 꽃 앞에 서자 피곤한 기색부터 사라졌다.같은 색 장미라도 줄기의 단단함과 꽃잎 상태가 조금씩 달랐다. 한 단씩 들어보고 겉잎을 살피던 여름이 하나를 내려놨다.“이건 안 돼요.”재희가 옆에서 봤다.“왜?”“여기 상했어요.”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지만 여름이 꽃잎을 살짝 벌리자 안쪽 끝이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거 골라.”“네.”여름은 다시 꽃 사이로 들어갔다.평소에는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도 일을 할 때는 달랐다. 특히 꽃을 고르는 순간에는 주변이 시끄러워도 좀처럼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았다.한 시간쯤 지나자 카트 위가 꽃으로 가득 찼다.재희가 시간을 확인했다.“배고프지?”“네.”“어제 고기 먹었다며.”여름이 눈을 깜빡였다.“제가 말했어요?”“새벽에 차 타자마자 네가 말했어.”“아.”그제야 기억났다.재희가 카트를 밀며 슬쩍 물었다.“배덕배 씨가 데려다줬다며?”“네.”“양로원까지 다시 데리러 왔다며.”“네.”“새벽에도 데려다주고.”“네.”재희가 걸음을 멈췄다.여름도 따라 멈췄다.“왜요?”“아무것도 아니야.”“뭔데요.”“너는 아무 생각 없어?”여름의 눈이 동그래졌다.“무슨 생각이요?”재희는 잠시 여름을 바라봤다.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됐다.”“뭔데 그러지.”여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금세 꽃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시장 안쪽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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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오후, 덕배는 본사에서 현장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조수석에는 서류가 쌓여 있었고, 통화를 끝낸 휴대전화를 그 위로 던지려다 문득 손이 멈췄다.컵홀더 옆에 노란 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양로원에서 돌아오던 날 여름이 보너스라며 준 꽃이었다. 며칠 동안 물을 갈아준 덕에 버티기는 했지만 꽃잎 끝이 말리고 고개도 눈에 띄게 처져 있었다.덕배가 꽃을 집어 들었다.“이거 왜 이래.”꽃이 며칠 지나면 시드는 건 당연했다.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그런데 버려야 하는 건지, 줄기를 다시 자르면 살아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덕배는 잠시 꽃을 내려다보다 내비게이션을 껐다.차는 다음 교차로에서 방향을 바꿨다.J&J 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어서 오세요.”여름이 고개를 들었다.덕배를 발견하자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아저씨.”덕배는 대답 대신 들고 온 꽃을 작업대 위에 내려놨다.“얘 왜 이래.”여름이 꽃을 내려다봤다.“……시들었는데요?”“그건 나도 봐서 알아.”“며칠 됐잖아요.”“그래서 어떻게 하냐고.”여름이 눈을 깜빡였다.덕배는 꽤 진지했다.그 사실이 웃긴지 여름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아저씨 이거 계속 물 갈아줬어요?”“어.”“매일?”“한정민이 매일 갈라며.”“그래서 진짜 했어요?”덕배의 미간이 구겨졌다.“왜. 하면 안 돼?”여름이 결국 웃었다.“아니요. 잘했어요.”“애 취급하지 마.”“꽃은 원래 시들어요. 얘는 잘 버틴 거예요.”여름은 꽃을 조심스럽게 들어 상태를 확인했다. 줄기 끝을 조금 잘라주고 시든 겉잎을 떼어냈지만 이미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다.“이제 보내줘야 돼요.”덕배의 눈썹이 올라갔다.“죽었어?”“아직 안 죽었는데 곧요.”“살리는 방법 없어?”여름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없어요.”덕배는 못마땅한 얼굴로 꽃을 바라봤다.그때 문이 열렸다.“안녕하세요.”며칠 전 고백할 꽃다발을 사갔던 남자였다.여름이 바로 알아보고 환하게 웃었다.“오늘도 오셨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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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나간 뒤에도 덕배의 시선은 한동안 유리문 쪽에 머물렀다.내일 또 온다는 말이 귀에 걸렸다.꽃집에 꽃 사러 오는 게 뭐가 이상하냐고 하면 할 말은 없었다. 더구나 돈 내고 물건 사가는 손님이었다. 그런데 여름이 그놈을 볼 때마다 반갑게 웃고, 내일은 다른 꽃을 추천해주겠다고 하는 꼴이 묘하게 거슬렸다.덕배는 그 감정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다.“아저씨.”여름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여름은 시들기 시작한 노란 꽃을 조심스럽게 정리하고 있었다. 마른 꽃잎을 떼어내던 손끝이 꽤 진지했다.“제가 꽃 예쁘게 말리면 유리병에 넣어드릴게요.”“유리병?”“네.”여름은 꽃을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나씩 모으면 진짜 예쁘거든요.”덕배는 별다른 대답 없이 작업대에 한쪽 팔을 기대고 섰다.꽃 한 송이 말려서 병에 넣는 게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꽃은 사면 시들고, 시들면 버리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다.“그걸 왜 모아.”여름의 눈이 동그래졌다.“예쁘니까요.”“시든 거잖아.”“말린 거예요.”“그게 그거 아니냐?”여름의 얼굴이 금세 진지해졌다.“완전 다른데.”덕배가 피식 웃었다.“뭐가 달라.”“잠깐만요.”여름은 갑자기 작업대 안쪽으로 사라졌다.덕배가 그 뒷모습을 보며 눈썹을 들었다.잠시 뒤 여름이 작은 유리병 하나를 양손으로 들고 돌아왔다.“아, 제가 모아놓은 거 있어요. 봐봐요.”투명한 병 안에는 작은 말린 꽃들이 층층이 들어 있었다. 흰색, 노란색, 연한 분홍색. 생화처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색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여름이 덕배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이쁘죠?”유리병을 보여주려고 몸을 가까이 붙인 탓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자연스럽게 좁아졌다.덕배는 병을 보려다 시선을 들었다.여름이 바로 옆에 있었다.동그란 눈은 유리병 속 꽃을 보느라 아래로 향해 있었고, 꽃 이야기를 하는 입술에는 웃음이 남아 있었다.덕배의 시선이 그 입술에서 잠깐 멈췄다.며칠 전 차 안에서 스쳤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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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를 나온 덕배는 곧장 현장으로 향했다.조수석에는 여름이 서비스라며 준 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신호가 바뀔 때마다 굴러다니는 게 거슬려 결국 컵홀더에 세워뒀는데, 그 뒤로는 이상할 만큼 시야에 자주 걸렸다.일주일 뒤에 오세요.덕배는 운전대를 두드리다 코웃음을 쳤다.“누가 간대.”그렇게 말해놓고도 꽃을 버리지는 않았다.현장에 도착한 뒤에는 생각할 틈도 없었다.덕배는 안전모를 쓰고 곧바로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자재 문제에 연루됐던 직원의 진술과 업체 자료를 다시 맞춰야 했고, 오후에는 본사 회의까지 잡혀 있었다.두 시간이 지나자 셔츠 등판이 땀에 젖었다.“이쪽 다시 뜯어.”덕배가 도면을 접으며 벽면을 가리켰다.“수치 안 맞는데 그대로 덮으면 나중에 더 커집니다.”“예, 이사님.”“오늘 안에 확인해서 사진 보내요.”현장 직원에게 지시를 끝낸 덕배는 안전모를 벗으며 밖으로 나왔다.뜨거운 공기 사이로 바람이 한번 스쳤다.그 순간 코끝에 희미한 냄새가 걸렸다.덕배의 걸음이 멈췄다.꽃향기.고개를 돌리자 현장 입구 화단에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별것도 아니었다.그런데 조금 전 J&J에서 가까이 서 있던 여름이 떠올랐다.유리병을 들고 이쁘지 않냐며 눈을 반짝이던 얼굴.그리고 가까이서 스쳤던 은은한 향.덕배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아, 씨발.”옆에 있던 현장소장이 움찔했다.“무슨 문제 있습니까?”덕배가 바로 걸음을 옮겼다.“아뇨. 더워서.”차에 올라탄 그는 에어컨부터 세게 틀었다.이상했다.처음에는 아저씨라는 말에 긁혀서 기억에 남았다. 그다음에는 만날 때마다 예상 못 한 짓을 해서 웃겼다. 사람 팔을 물고 매달리는 꼴까지 두 번이나 봤으니 잊는 게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거기까지는 이해가 됐다.그런데 향까지 기억하는 건 얘기가 달랐다.덕배는 잠시 생각하다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별걸 다 기억하네.”그날 저녁에는 채아를 만났다.채아가 먼저 예약해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뒤 자연스럽게 호텔로 자리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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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차강수의 집무실에는 평소보다 일찍 세 사람이 모였다.정민이 밤새 정리한 자료는 테이블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쪽 업장에서 시작된 돈은 몇 번이나 계좌를 갈아탔고, 끝에는 사뇌파 내부 인물 하나가 더 걸렸다.덕배는 사진과 거래 내역을 차례로 확인했다.“이 새끼까지 붙었으면 혼자 처먹은 게 아닙니다.”정민이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나도 그렇게 봐. 문제는 윗선이 어디냐는 거고.”덕배의 손가락이 사진 한 장 위에서 멈췄다. 오래 알고 지낸 얼굴이었다. 같은 조직 안에서 몇 번이나 일을 맡겼고, 술도 마셨던 놈이었다.표정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제가 만나겠습니다.”강수가 짧게 물었다.“확인할 수 있어?”“예.”“확실해지기 전까지 손대지 마.”덕배가 강수를 봤다.“형님.”“왜.”“저 새끼가 맞으면요.”강수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때 정리해.”덕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회의가 끝난 뒤에도 그는 한동안 자리에 남았다. 성질이 급하다고 해서 생각까지 짧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놈이 걸렸을 때는 더 확실해야 했다.정민이 자료를 챙기며 물었다.“오늘 바로 갈 거냐?”“어.”“같이 가?”“아니. 혼자 보는 게 나아.”“성질내지 말고.”덕배가 바로 눈을 흘겼다.“형님한테도 들었는데 너까지 지랄이냐?”“두 번 들어야 기억하니까.”“꺼져.”정민이 웃으며 집무실을 나갔다.그날 오후 덕배는 문제의 남자를 직접 만났다.장소는 사뇌파가 관리하는 업장 안쪽 사무실이었다. 덕배는 평소처럼 담배를 물고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처음부터 자료를 들이밀지도, 의심한다는 티를 내지도 않았다.“요즘 장사 어때.”“그럭저럭입니다.”“서쪽은?”남자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덕배는 못 본 척 담배 연기를 뱉었다.대화는 길지 않았다.몇 가지 날짜와 사람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졌고, 상대가 어느 지점에서 반응하는지만 봤다. 십수 년 현장에서 사람을 상대해온 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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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전, J&J는 예약 주문으로 정신이 없었다.여름은 작업대 한쪽을 차지한 채 꽃다발 세 개를 동시에 만들고 있었다. 같은 장미라도 주문마다 원하는 분위기가 달라 꽃을 섞는 조합부터 포장지까지 전부 달랐다.“여름아, 이쪽 두 시까지.”“네.”대답은 빨랐지만 시선은 손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꽃 줄기를 조금씩 돌려가며 모양을 잡던 여름은 마지막 한 송이를 넣었다가 다시 뺐다. 다른 꽃으로 바꾸고서야 만족한 듯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그때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어서 오세요.”습관처럼 인사하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안녕하세요.”며칠째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오는 남자였다.여름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오늘도 오셨어요?”남자가 웃었다.“네.”“오늘은 어떤 걸로 드릴까요?”“여름 씨가 골라주세요.”덕배가 있었다면 그 말에서부터 알아들었겠지만 여름은 달랐다.오히려 진지하게 고민했다.“계속 한 송이씩 드렸으니까 오늘은 색을 좀 바꿔볼까요?”“좋아요.”남자는 냉장고로 향하는 여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재희는 계산대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저 정도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도 재주다.”여름이 돌아봤다.“뭐라고 하셨어요?”“아무것도 아니야.”“분명 뭐라고 했는데.”“꽃이나 골라.”여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냉장고를 살폈다.잠시 뒤 연한 보라색 꽃 한 송이를 꺼냈다.“오늘은 이거요.”남자가 꽃보다 여름을 보며 물었다.“예쁘네요.”“그쵸?”여름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저도 이 꽃 좋아해요.”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럼 이걸로 할게요.”여름은 작은 포장지로 꽃을 감싸며 물었다.“고백은 잘되고 있어요?”“조금씩요.”“진짜요?”“네. 상대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긴 한데.”여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그럼 더 표현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재희가 뒤에서 눈을 감았다.남자는 웃음을 참으며 여름을 봤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포기하지 마세요.”“네. 안 하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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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배가 여름과 통화를 끝낸 건 오후 세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휴대전화를 책상에 내려놓고도 입가에 남은 웃음이 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김밥 반 줄을 먹어놓고 잘 먹었다고 우기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진짜 존나 조금 먹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덕배는 여름이 또 무슨 말을 보내왔나 싶어 별생각 없이 화면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이름은 아니었다. 윤세라. 몇 달 전 지인들과 술자리에서 알게 된 여자였다. 몇 번 같이 술을 마셨고, 두어 번 밤을 보낸 뒤 연락이 뜸해졌다. 서로 관계를 묻지도 않았고 다음을 약속하지도 않았다. 덕배에게는 익숙한 종류의 관계였다. [윤세라: 오빠.] 잠시 뒤 메시지가 하나 더 들어왔다. 호텔 이름과 객실 번호였다. [윤세라: 나 여기 있어.] 덕배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예전 같으면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시간이 되면 갔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다음에 보자고 했다. 그게 전부였다. 덕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다시 서류를 봤다. 몇 줄 읽기도 전에 화면이 또 켜졌다. [윤세라: 올 거지?] 덕배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오늘 저녁 일정은 없었다. 사뇌파 쪽도 강수가 기다리라고 한 상태였고, 현장 보고도 대부분 끝났다. 못 갈 이유가 없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움직였다. [배덕배: 몇 시까지 있어.] 답은 바로 왔다. [윤세라: 오늘 밤은 계속.] 덕배의 입꼬리가 익숙하게 올라갔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화면 위쪽에 조금 전 대화창이 보였다. [서여름] 덕배의 손이 멈췄다. 이유 없이 대화창을 한번 눌렀다. 마지막 메시지는 여름이 보낸 것이었다. [서여름: 아저씨가요.] 그 뒤로 전화해서 한참을 쓸데없는 얘기만 했다. 꽃 물을 매일 갈아야 한다는 얘기. 김밥 반 줄이 밥이냐는 얘기. 서른넷이 왜 아저씨냐는 얘기까지. 덕배의 미간이 조금씩 좁아졌다. “뭐 하는 거야.” 자기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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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방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 지나도록 덕배는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테이블 위 위스키는 두 잔째였다. 맞은편의 세라는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함께 술을 마셨지만 시간이 길어지자 슬슬 이상하다는 얼굴이 됐다. “오빠.” 덕배가 잔을 든 채 눈만 들었다. “왜.” “진짜 술만 마실 거야?” “어.” “여기까지 와서?” 덕배가 헛웃음을 흘렸다. “호텔 오면 꼭 뭐 해야 되냐?” “오빠가 그 말을 하니까 이상하지.” 그건 덕배도 인정했다. 세라와 이런 분위기로 호텔방에 앉아 술만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둘이 만나는 이유가 뻔했으니까. 세라가 소파에서 일어나 덕배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 오늘 별로야?” “아니.” “그럼?” “그냥 오늘은 별로 생각 없어.” 세라가 덕배를 빤히 바라봤다. “여자 생겼어?” 덕배의 손이 멈췄다. 대답은 바로 나왔다. “없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여자친구도 없었고, 누구와 연애를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순간적으로 작은 얼굴 하나가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진짜?” “어.” “좋아하는 여자도?” 덕배의 미간이 구겨졌다. “없다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거칠었다. 세라는 그 표정을 살피다가 더 묻지 않았다. “알았어. 화내지 마.” “화 안 냈어.” “그 얼굴로?” 덕배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미안.” 세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덕배가 사과하는 게 드물어서였다. “진짜 이상하네.” “오늘 그 말 몇 번째냐.” “오빠가 이상하니까.” 덕배는 대꾸하지 않고 남은 술을 마셨다. 잠시 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다.” “벌써?” “내일 일 있어.” “다음에는 제대로 놀아.” 세라가 장난스럽게 그의 허리를 한번 끌어안았다. 덕배는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주고 떨어졌다. “그래.” 다음이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호텔 밖으로 나온 뒤 찬 공기를 맞자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덕배는 담배를 물고 주차장 쪽으로 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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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한동안 꽃다발만 내려다봤다. 자기가 직접 고른 꽃이었다. 색을 맞추고 포장지를 바꾸고 리본까지 묶으면서 오늘 고백받을 누군가는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자신일 거라고는 정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저…….” 여름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민우는 재촉하지 않았다. 조금 긴장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 몰랐어요.”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여름 씨가 매일 응원해줬잖아요.” 여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포기하지 마세요. 진심이 중요하죠. 내일은 다른 꽃 추천해드릴게요. 지난 며칠 동안 자기가 했던 말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여름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재희가 뒤에서 웃음을 참았다. “웃지 마세요.” “안 웃었어.” “지금 웃잖아요.” 민우도 결국 작게 웃었다. 여름이 손을 내리고 그를 봤다. “죄송해요. 웃긴 게 아니라 제가 너무…….” “눈치가 없었죠.” 재희가 대신 말했다. “사장님!” 여름이 홱 돌아보자 민우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래서 더 편하게 올 수 있었어요.” 여름은 다시 꽃다발을 봤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민우가 싫은 건 아니었다. 며칠 동안 매일 봤고, 예의 바르고 말투도 부드러웠다. 꽃을 사면서 무례하게 군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여름은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민우도 그걸 알아챘다. “바로 대답 안 해도 돼요.” 여름이 눈을 들었다. “생각해보고 말씀드려도 돼요?” “네.” “저 이런 거 잘 몰라서요.” “천천히 생각해요.” 여름은 그제야 조금 안심한 얼굴이 됐다. 민우가 꽃다발을 다시 내밀었다. “이건 받아주세요.” “근데 제가 아직 대답도 안 했는데…….” “여름 씨가 만든 거잖아요.” 민우가 웃었다. “제가 가져가면 이상하죠.” 그 말에는 여름도 웃었다. 결국 두 손으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내일 또 와도 돼요?” 여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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