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나의 어린 아내가 도망쳤다: Chapter 21 - Chapter 30

32 Chapters

21화

서아가 다시 학교로 떠난 뒤, 이헌은 서재에서 윤태식의 채무 관련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서류에는 여러 채권자의 이름과 금액, 변제 기한이 정리되어 있었다. 정상적인 금융기관 대출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높은 이자를 요구하는 사채였고 일부는 채무 관계 자체가 불분명했다.이헌이 마지막 장을 넘길 무렵 수행비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대표님, 윤태식이 학교 근처를 떠난 뒤 사채업자 쪽에 연락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이헌은 펜을 내려놓았다.“무슨 이야기를 했지?”“서아 아가씨가 단성그룹 대표와 결혼했다면서, 조만간 큰돈이 들어올 테니 채무 상환을 기다려 달라고 했답니다.”이헌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윤태식은 자신이 채무를 확인해 정리하겠다고 한 말을 벌써 돈을 받아 낸 것처럼 떠벌리고 있었다. 채권자에게 직접 변제하겠다는 조건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딸의 결혼을 새로운 돈줄로 삼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채권자 쪽에서는 뭐라고 했는데?”“그중 한 명이 직접 사실을 확인하겠다고 했답니다. 윤태식에게 서아 아가씨의 연락처를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이헌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윤태식이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는 예상했다. 그러나 딸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넘기려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윤태식 채무 관계 전부 다시 확인해. 불법적인 추심이 있었는지도 살펴보고, 서아에게 법적 책임이 있는 채무가 있는지부터 분명히 해.”“알겠습니다.”“그리고 서아 연락처가 외부에 넘어갔는지 확인해. 실제로 연락하거나 접근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이헌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서아에게 접근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없도록 해.”전화를 끊은 그는 통창 너머로 펼쳐진 정원을 바라봤다.오후 햇살이 잔디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아는 지금쯤 강의실에 앉아 있을 것이다. 아침에 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놀라고도 다시 학교에 가겠다며 자신을 올려다보던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그렇게 작은 부탁을 하면서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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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오후 수업을 마친 서아는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학생들 사이에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학교 후문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는 기사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아직 다섯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차가 와 있다는 사실에 서아는 가방을 고쳐 메고 걸음을 서둘렀다.“윤서아!”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 것은 계단을 막 내려가려던 순간이었다.서아가 돌아보자 계단 아래에서 한 남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 웃을 때마다 부드럽게 접히는 눈꼬리까지 기억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선재 오빠?”뜻밖의 얼굴을 발견한 서아가 반가운 목소리로 부르자 강선재는 계단을 두 칸씩 올라와 그녀 앞에 섰다.“역시 너 맞네. 멀리서 보고도 긴가민가했어.”군 복무를 마치고 이번 학기에 복학한 선재는 오랜만에 만난 서아를 반갑게 바라봤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얼굴을 살피던 그의 웃음이 조금씩 사라졌다.예전에도 마른 편이었지만, 지금은 볼살마저 빠져 있었다. 밝게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눈가에는 피곤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그런데 너 왜 이렇게 말랐어? 방학 동안 무슨 일 있었냐?”서아는 저도 모르게 가방끈을 고쳐 잡으며 웃었다.“그냥 좀 바빴어. 오빠는 언제 복학했어?”“이번 학기부터. 군대 갔다 오니까 학교가 완전히 달라졌더라.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선재는 그녀가 들고 있는 두꺼운 전공 서적을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번호 바뀌었어? 전에 연락했는데 답이 없더라.”서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아버지에게서 걸려 오는 전화를 피하려고 한동안 휴대전화를 꺼 놓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친구들에게 온 연락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으니 선재가 보낸 메시지 역시 그 사이에 묻혀 버린 모양이었다.“그때 정신이 좀 없었어. 미안.”선재는 더 묻지 않았다. 예전부터 서아는 곤란한 일이 생기면 자세한 설명 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꺼내곤 했다.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을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그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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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서아가 검은색 세단에 올라타는 모습을 선재는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후문 앞에 세워진 차량은 평범한 학생이 이용할 만한 차가 아니었다. 운전기사가 직접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고, 서아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출발했다.선재는 차가 교차로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군대에 있는 동안 수없이 상상했던 재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복학하면 서아를 찾아가 밥부터 먹일 생각이었다. 예전처럼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거나, 그녀가 좋아하던 작은 카페에 앉아 군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러다 분위기가 좋아지면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도 조심스럽게 꺼내 볼 참이었다.그런데 막상 다시 만난 서아는 기억 속의 그녀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져 있었다.특히 점심을 먹자는 제안에 누군가에게 확인해 보겠다고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서아는 원래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허락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늘 조심스러워했지만, 학교에서만큼은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결정하려고 애썼다.아르바이트 시간을 조정하고 장학금을 신청하는 일부터, 조별 과제 때문에 밤을 새우는 일까지 혼자 해결하려 했던 아이였다.그런 서아가 친구와 점심을 먹는 일조차 누군가에게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선재는 조금 전 그녀가 타고 간 차를 떠올렸다.서아를 데리러 온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 앞에서도 그녀가 오늘처럼 조심스러운 얼굴을 하는지 궁금했다.선재가 처음 서아를 만난 것은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봄이었다.당시 그는 부모가 운영하는 회사의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부모는 아들이 대학을 졸업한 뒤 자연스럽게 경영 수업을 받기를 원했고, 선재 역시 그 계획에 특별한 불만이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교양 수업 조별 과제에서 윤서아를 만났다.서아는 발표 자료를 정리하는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이 각자 맡은 일을 미루거나 연락을 받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았고, 결국 대부분의 자료를 혼자 정리하고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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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지금 군대를 가겠다고?”아버지 강명준은 식탁 위에 놓인 입영 관련 서류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해외 연수 일정까지 다 잡아 놨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냐?”선재는 맞은편에 앉아 아버지를 바라봤다.“군대부터 다녀오겠습니다. 연수는 그다음에 가도 늦지 않아요.”“네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줄 알아? 회사에서 얼마나 준비했는데.”어머니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선재야, 졸업부터 하고 가면 안 되겠니? 네 아버지도 그게 좋겠다고 하시잖아.”선재는 부모가 자신에게 어떤 미래를 기대하는지 알고 있었다.집안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하고, 해외 경험을 쌓은 뒤 회사에 들어오는 것. 그 계획대로라면 군 복무는 졸업 후로 미루고 해외 연수부터 다녀와야 했다.하지만 선재는 더 늦추고 싶지 않았다.서아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려면 지금 입대하는 편이 나았다. 언젠가 반드시 마쳐야 할 군 복무를 더 미루고 싶지 않았고, 부모가 정해 준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해 보고 싶기도 했다.그러나 결정을 앞당긴 가장 큰 이유가 서아였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아버지, 저는 지금 제 일을 먼저 정리하고 싶습니다.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남은 공부를 끝내겠습니다. 그다음에는 해외 연수든 회사 일이든 다시 이야기하죠.”아버지는 한동안 아들을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혹시 여자 문제냐?”선재의 손이 잠시 멈췄다.그 짧은 침묵을 놓치지 않은 아버지가 헛웃음을 지었다.“정말 여자가 있는 거야?”“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선재를 바라봤다.“누군데? 같은 학교 학생이니?”“네. 그런데 아직 제 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네가 무슨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냐? 그 여자가 널 기다린다는 보장도 없잖아.”“기다려 달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제 시간을 기다려 줄 의무는 없으니까요.”선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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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선재는 학교 앞 벤치에 앉아 휴대전화를 꺼냈다.서아와 주고받았던 메시지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 그는 한동안 대화창을 바라보다가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서아야,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내일 시간 되면 연락해.]전송한 뒤에도 쉽게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오늘 서아가 타고 간 차량이 떠올랐다.누군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서아는 그 사람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듯 서둘렀다. 남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군대에 있는 동안 그녀의 곁에 다른 사람이 나타났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서아를 아끼고 행복하게 해 준다면 자신은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하지만 오늘 본 서아는 행복해 보이기보다 어딘가 긴장한 얼굴이었다.예전에도 그녀는 집에서 무슨 일이 생긴 날이면 작은 소리에도 놀랐고, 누군가 자신의 일정을 물으면 먼저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오늘도 비슷했다.선재는 벤치에서 일어났다.서아에게 남자 친구가 있든 없든, 자신이 좋아하는 마음을 당장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한 사람의 요구가 아니라, 언제든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다만 이번에는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같은 시각, 단성그룹 본사.이헌은 윤태식과 관련된 채무 조사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수행비서가 새롭게 확인된 사채업자들의 이름을 설명하던 중 태블릿을 내려놓았다.“대표님, 아가씨께서 수업을 마치고 차량에 탑승하셨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남학생 한 명과 약 십 분간 대화를 나누셨다고 합니다.”서류를 넘기던 이헌의 손이 멈췄다.“남학생?”“같은 학교 선배로 보입니다. 남학생이 먼저 아가씨를 불렀다고 합니다.”이헌은 잠시 생각하다 손을 내밀었다.“사진은?”수행비서가 태블릿을 건넸다.화면에는 학교 건물 앞에서 서아와 마주 서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이헌은 사진을 확대했다.서아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아침 내내 겁에 질려 있던 그녀가 자신에게는 겨우 안도의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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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저녁 무렵, 서아가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이헌은 이미 거실에 앉아 있었다.“이헌 씨, 벌써 오셨어요?”그녀가 반갑게 웃자 이헌은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서아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소파 옆자리에 앉혔다.“수업은 어땠어?”“좋았어요. 오늘 중요한 설명도 들었고요.”“그래. 다행이네.”이헌은 그녀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친구들도 만났어?”“네. 민지도 봤고…… 아, 오늘 오랜만에 아는 선배를 만났어요.”이헌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선배?”“네. 군대 갔다가 이번에 복학했대요.”“많이 친한가 보네.”서아는 그 말에 별다른 의도를 느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 많이 도와주셨어요. 제가 학교에 적응을 잘 못했을 때도 챙겨 주셨고요.”이헌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선재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서아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어떻게 도와줬는데?”“조별 과제도 같이 했고, 늦게 끝나는 날에는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셨어요.”이헌의 눈빛이 미세하게 가라앉았다.“자주?”“아주 자주는 아니고요. 오빠도 수업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같이 걸어갔어요.”“오빠?”그가 낮게 되묻자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네?”“그 선배를 오빠라고 부르는구나.”“아…… 네. 학교 선배라서요.”이헌은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구나.”그는 서아의 손을 놓고 찻잔을 들었다.차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들은 말들이 반복됐다.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그리고 서아는 그 남자를 자연스럽게 오빠라고 불렀다.이헌은 자신이 서아에게 아직 그런 호칭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이헌 씨라고 불렀다. 결혼한 뒤에도 그 호칭은 변하지 않았다.그는 그동안 서아가 자신을 편하게 대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선재에게는 이미 자신이 갖지 못한 친밀함이 있었다.“서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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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서아가 방으로 올라가자 이헌은 수행비서를 다시 불렀다.“강선재에 대해서 추가로 확인된 건?”“서아 아가씨와 같은 학과이며, 이번 학기에는 두 과목의 강의 시간이 겹칩니다.”이헌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강선재의 학적 정보와 복학 일정, 학교에서의 활동 내역이 정리되어 있었다.“서아랑 같은 조였던 과제도 확인했나?”“네. 군 입대 전 두 차례 같은 조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과제 진행을 위해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이헌은 서류를 내려놓았다.“그 가능성 말고, 실제로 얼마나 가까웠는지가 궁금한 거야.”수행비서는 잠시 말을 멈췄다.이헌은 서류에 적힌 강선재의 이름을 바라봤다.“오늘 서아한테 내일 점심을 먹자고 했다더군. 그런데 그 남자는 서아가 결혼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아.”“학교에는 아직 결혼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이헌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서아가 결혼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수행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이헌도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강선재가 서아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친한 후배라서 챙기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감정이 있는 것인지.그리고 만약 후자라면 자신이 어디까지 개입해야 할지도.“내일 학교 경호팀에 이야기해. 강선재가 서아에게 다시 접근하면 보고하라고.”“대표님,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경우에도 말씀입니까?”이헌은 고개를 들었다.“서아가 불편해하는지 확인하려는 거야.”수행비서는 더 묻지 않았다.이헌은 잠시 후 덧붙였다.“서아에게는 말하지 마. 괜히 신경 쓰게 할 필요 없으니까.”***그날 밤, 서아는 침대에 앉아 선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미안해. 내일 점심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못 먹을 것 같아. 다음에 같이 먹자.]잠시 후 답장이 도착했다.[괜찮아. 다음에 먹으면 되지. 그런데 서아야, 아까 너 좀 이상해 보였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서아는 화면을 바라보다 손가락을 멈췄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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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6화. 늦어진 귀가작업실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야 윤서아는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오후 여덟 시 사십 분.낮부터 모형 작업에 매달리느라 시간이 이렇게 늦어진 줄도 몰랐다. 책상 위에는 잘라낸 우드락과 색색의 마커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여러 번 수정하면서 버린 구조물들이 쌓여 있었다.서아는 커터칼을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자 기사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 두 통과 한 시간 전에 도착한 메시지가 떠 있었다.'사모님, 작업이 늦어지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메시지를 읽는 순간 서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원래 약속한 귀가 시간은 오후 여섯 시였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내려가겠다고 아침에 말해두었는데, 교수의 갑작스러운 수정 지시로 작업이 길어지면서 귀가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문제는 기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차이헌에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서아는 메시지 창을 열었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과제 때문에 늦었다고 하면 믿어줄까. 미리 연락하지 않은 것을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맞은편에서 모형을 조립하던 조원이 고개를 들었다.“서아야, 왜 그래? 어디 안 좋아?”“아니…… 시간이 너무 늦어서.”“이제 아홉 시도 안 됐는데 뭘. 우리 오늘 열 시까지는 달려야 할 것 같은데?”조원은 아무렇지 않게 글루건을 집어 들었다. 다른 학생들도 비슷했다. 삼각김밥을 먹으며 도면을 수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음악을 틀어놓은 채 모니터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었다.그들에게 늦은 귀가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과제가 많으면 밤늦게까지 남아 작업하는 것이 대학생의 평범한 일상이었다.하지만 서아에게는 달랐다. 늦게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들었다.“서아야.”옆에서 폼보드를 재단하던 강선재가 그녀를 불렀다. 선재는 서아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한 번 보더니 작업대 위에 자를 내려놓았다.“집에 연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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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이헌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천천히 말해.”서아는 입술을 다물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 아직 회사에 있는 모양이었다.“과제가 아직 안 끝난 건가?”“거의 다 했어요.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얼마나 더 걸리지?”서아는 복도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남은 조립과 정리를 마무리하려면 한 시간은 더 필요했다.“한 시간 정도요. 아니, 제가 지금 정리하고 나가도 되는데…….”“그럼 한 시간 더 하고 와.”“네?”“과제 때문에 남아 있는 거잖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내려와.”서아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당장 돌아오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헌은 오히려 과제를 끝내고 오라고 했다.“기사는 먼저 돌려보낼 테니, 끝나는 대로 내게 연락해.”“그럼 저는 어떻게 돌아가나요…….”“내가 데리러 가지.”서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차이헌이 직접 학교로 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늘 수행비서와 기사가 동행하고, 저택에서도 밤늦게까지 서재에 머무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과제 때문에 시간을 내겠다고 했다.“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제가 택시 타고 가면…….”“늦은 밤에 혼자 택시를 탈 이유는 없어.”잠깐의 침묵 뒤에 이헌이 물었다.“저녁은.”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짧은 침묵만으로도 이헌은 상황을 알아차린 듯했다.“알았다. 끝나면 연락해.”통화가 끊긴 뒤에도 서아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화를 내지도,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할 일을 끝내고 오라며 기다려주겠다고 했다.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창백했던 낯빛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작업실로 돌아온 서아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모형을 손질했다. 선재가 재단해둔 벽체를 붙이고 입구의 동선을 조정하는 동안 다른 조원들도 각자 맡은 부분을 마무리했다.“서아야, 이거 봐라.”선재가 모형 내부의 작은 LED 조명을 켰다. 투명한 아크릴을 통과한 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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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그가 낮게 되묻자 서아는 눈을 깜빡였다.“아…… 선재 오빠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서요.”이헌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다는 말이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서아의 시간을 저 남자는 알고 있었다.“오래된 사이인가 보군.”“네. 제가 입대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습니다.”선재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이헌은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까.”선재는 서아에게 몸을 돌렸다.“서아야, 내일 발표 자료는 내가 먼저 올려놓을게. 아까 수정한 사진만 보내줘.”“네, 오빠. 집에 가서 보내드릴게요.”이헌은 서아의 입에서 다시 흘러나온 호칭을 놓치지 않았다.두 사람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내일 다시 만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서로의 작업을 챙기는 모습에 오래 쌓인 친밀함이 묻어 있었다.서아는 자신에게는 늘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무언가 부탁할 때마다 눈치를 살폈고, 사소한 실수에도 먼저 사과했다.그런데 선재 앞에서는 그러지 않았다.“늦게까지 고생이 많았습니다.”이헌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정중한 말투였지만 대화를 마무리하겠다는 뜻도 분명했다.선재는 잠시 이헌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네. 서아 잘 부탁드립니다.”그 말에 이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자신의 아내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다른 남자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이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제 아내니까요.”서아가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선재 역시 잠깐 말을 멈췄지만 이내 평소처럼 웃으며 인사했다.“그럼 서아야, 내일 보자.”“네, 오빠. 조심히 가세요.”선재가 돌아선 뒤에도 이헌은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러다 서아의 모형 상자를 받아 뒷좌석에 올려놓았다.“이건 눕히면 안 돼요. 안에 조명이 있어서 흔들리면 떨어질 수도 있거든요.”서아가 설명하자 이헌은 상자를 세워놓고 안전벨트로 조심스럽게 고정했다.“이렇게?”“네. 이제 괜찮아요.”그는 상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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