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10

14 فصول

1화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서아는 우산도 없이 골목을 달렸다. 젖은 운동화가 물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찬물이 발목까지 튀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등 뒤에서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윤서아!”아버지의 고함이 빗소리를 뚫고 골목까지 따라왔다.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조금 전까지도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등록금으로 모아 둔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없다고 하자 카드를 내놓으라고 했고, 그것마저 거절하자 손이 날아왔다.뺨을 맞고 바닥에 쓰러진 서아의 머리채를 움켜쥐어 일으킨 것도 모자라 목까지 졸랐다.숨이 막히는 순간, 서아는 있는 힘껏 무릎으로 아버지를 밀쳐 냈다.그리고 도망쳤다.휴대전화 하나만 손에 쥔 채였다.“너 이년, 잡히기만 해 봐!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놓을 테니까!”욕설이 멀어질 때까지 서아는 계속 달렸다.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저 집으로 다시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얼마나 달렸을까.큰길로 나온 뒤에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서아는 편의점 처마 아래로 몸을 숨기듯 들어가 벽에 기댔다.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목이 아팠다.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켜자 빗물이 화면 위로 떨어졌다. 서아는 손바닥으로 대충 닦아 낸 뒤 연락처를 천천히 내려 보았다.대학교 친구.아르바이트 사장님.과외 학생 어머니.손가락은 몇 번이나 번호 위에서 멈췄지만 결국 누르지 못했다.친구 집에 가면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올 것이다. 아르바이트 사장님에게 이런 사정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고, 과외 학생 집은 더더욱 아니었다.그러다 손가락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차이헌.단성그룹 대표.마흔 살.자신보다 정확히 스무 살 많은 남자였다.서아는 한동안 그 이름만 바라봤다.그와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몇 번 마주쳤고, 우연한 계기로 연락처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누구보다 먼저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말수가 적고 웃는 일도 많지 않은 남자.사람을 바라볼 때면 상대가 먼저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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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가기 싫으면 다른 데 가도 돼. 네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줄게.”그는 서아를 재촉하지 않은 채 우산을 그녀 쪽으로 조금 더 기울였다.“대신 오늘 너 혼자 두고 가는 건 못 하겠다.”빗물이 이헌의 어깨를 적셨다.서아는 한동안 열린 차 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헌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이상했다.서아가 자신의 차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조금 전부터 들끓던 분노가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마치 이제야 자신이 손댈 수 있는 곳까지 데려온 것처럼.그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밀어내지도 않았다.문을 닫으려던 이헌이 잠시 멈췄다.“서아야.”처음 듣는 호칭에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아무도 너 못 건드려.”문이 닫히는 순간 거센 빗소리가 차단됐다.서아는 따뜻한 코트 안으로 몸을 조금 더 웅크렸다.이상하게도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이헌의 집에 도착했을 때 서아는 현관에서부터 걸음을 멈췄다.넓고 조용한 집이었다.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 호텔처럼 정돈되어 있었지만 이상하게 차갑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신발을 벗던 서아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발뒤꿈치가 까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뒤따라오던 이헌이 곧바로 그것을 발견했다.그는 서아의 팔을 붙잡는 대신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왔다.“앉아.”“괜찮아요.”서아가 한 발을 내딛으려 하자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이헌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서아는 결국 의자에 앉았다.이헌은 집 안쪽을 향해 따뜻한 음식과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달라고 말한 뒤 직접 구급함을 가져왔다.그리고 서아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혔다.서아가 놀라 발을 뒤로 빼려 했다.“대표님, 제가 할게요.”이헌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아직도 떨리고 있었다.그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소독약을 적신 거즈를 꺼내 서아의 발목 가까이로 손을 가져갔다가 잠시 멈췄다.“조금 따가울 거야.”거즈가 상처에 닿자 서아의 발끝이 움찔했다.이헌의 손길이 곧바로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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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헌은 그제야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다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일도 드문 자신이 윤서아가 언제 웃었는지까지 기억하고 있었다.하지만 자신과는 스무 해나 차이가 났다.그래서 몇 번이고 선을 그었고, 예쁜 얼굴이 눈에 들어와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연락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먼저 연락하지 않은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그 정도의 절제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오늘 밤 전까지는.전화기 너머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갈 데가 없다고.그 말을 듣는 순간 이헌은 생각할 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빗속에서 엉망이 된 서아를 발견하고 목에 남은 손자국까지 본 순간에는 자신이 왜 그렇게 급하게 달려왔는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화가 났다.그녀를 저렇게 만든 인간에게도 화가 났지만, 그보다 먼저 든 생각은 놀라울 만큼 단순했다.데려가야겠다고.자신이 데리고 있어야겠다고.서아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래도 계속 대표님한테 신세 질 수는 없잖아요.”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아파트를 하나 구해 주고 경호원을 붙여도 됐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필요한 돈을 지원하는 것쯤은 이헌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그런데 그 방법들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렇게 하면 결국 서아를 자신의 집에서 내보내야 했다.이헌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젖은 머리를 말리고 자신이 준비하게 한 옷을 입은 채, 자신이 내준 음식을 먹고 있는 스무 살 여자.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마치 처음부터 저 자리에 있어야 했던 사람처럼.그 생각이 든 순간 이헌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날 뻔했다.고작 몇 번 본 여자였다.그것도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그런데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다.보내고 싶지 않았다.누군가에게 맡기는 것도 싫었다.내일 아침이 되었다고 다시 혼자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자 오히려 생각은 간단해졌다.“그럼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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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서아는 한동안 닫힌 문을 바라봤다.아직 자신의 것이 아닌 ‘내 아내’라는 호칭이 이상할 만큼 오래 가슴에 남았다.그날 밤 서아는 태어나 처음으로 방문을 잠그지 않은 채 잠들었다.벽 너머에서는 폭언도, 술병이 깨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고리가 갑자기 돌아갈까 봐 숨죽여 귀를 세울 필요도 없었다.협탁 위에는 물 한 병과 휴대전화 충전기가 놓여 있었다.서아는 한동안 충전기를 바라봤다.깨진 휴대전화와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를 누군가 눈여겨봤다는 뜻이었다.별것 아닌 배려였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다음 날 아침, 서재 앞을 지나던 서아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이헌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윤태식이 서아한테 직접 연락 못 하게 해.”어젯밤 자신에게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이헌은 창가에 서서 한 손으로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전화기 너머의 말을 듣고 있었다.“법적 절차는 서아가 원할 때 진행하고, 그전까지 돈 요구한 내역이든 폭행 증거든 전부 확보해 둬.”상대가 무언가를 묻자 소매 끝을 반듯하게 접던 손이 잠시 멈췄다.이헌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낮게 말했다.“접근 자체를 막아. 학교든 여기든 근처에 나타나면 바로 나한테 보고하고.”전화기 너머에서 다시 무언가가 들려왔다.“아버지?”이헌이 낮게 되물었다.서재 밖에 서 있던 서아의 손끝이 움찔했다.그는 천천히 책상 앞으로 걸어가 서류 한 장을 넘겼다.“딸 목을 조르는 인간한테 그 호칭까지 챙겨 줄 필요 없어.”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오히려 그래서 더 서늘했다.“한 번만 더 그 애한테 손대면 내가 직접 상대해. 그때는 나도 적당히 안 끝내.”통화가 끊겼다.이헌은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내려놓다가 문밖에 희미하게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했다.고개를 돌리자 서아와 눈이 마주쳤다.서아가 당황해 몸을 굳혔지만 이헌은 조금 전의 서늘한 기색을 거두고 그녀를 위아래로 한 번 살폈다.시선이 맨발에서 멈췄다.“슬리퍼.”“네?”이헌이 턱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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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어젯밤부터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멍든 얼굴로도 저렇게 웃는구나.가슴 한쪽이 묘하게 당겼다.문득 저 얼굴이 다 나으면 어떤 표정으로 웃을지 궁금해졌다.그리고 그때도 자신이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깊어졌다.그는 먼저 시선을 내려 계약서로 돌렸다.서아가 몇 장을 읽다가 종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저 사실 계약서 안 봐도 할 거예요.”이헌이 눈을 들었다.서아는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대표님은 제가 싫다고 하면 멈춰 주잖아요. 그래서…… 믿어도 될 것 같아요.”이헌의 표정에서 희미한 웃음기가 사라졌다.믿는다는 말이 예상보다 무겁게 들어왔다.그는 서아가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자신이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그녀가 싫다고 했을 때 멈춰 주었기 때문이었다.겨우 그것뿐이었다.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이 아이에게는 사람을 믿을 이유가 됐다.그 사실이 다시 한번 이헌의 속을 뒤틀었다.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왔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천천히 좁혀졌다.서아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이헌의 손이 올라와 부어오른 뺨 가까이 다가갔다.서아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손끝이 그대로 멈췄다.이헌은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손을 내렸다.“아직은 안 되겠네.”“뭐가요?”그는 대답하는 대신 서아가 들고 있던 계약서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그러니까 더 제대로 읽어. 네가 날 믿는 것하고 계약서를 확인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이헌이 한 걸음 물러나자 서아도 다시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그가 책상 모서리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나랑 결혼하면 네 아버지 일도, 학교 일도, 돈 문제도 더는 혼자 감당하지 마. 내가 할 거야.”마치 이미 결정된 일처럼 단정한 말투였다.서아의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대표님이 다 해 주시면 저는 뭐 해요?”이헌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그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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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서아가 계약서 마지막 장에 서명한 것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이헌은 그녀가 펜을 내려놓을 때까지 재촉하지 않았다. 책상 맞은편에 앉아 업무 서류를 검토하면서도 서아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간간이 시선을 주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조항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했을 뿐이었다.계약서는 그가 직접 검토한 것이었다. 서아의 학업과 진로에 관한 선택권을 보장했고, 결혼을 이유로 원하지 않는 신체적 관계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명시했다. 그러나 그녀의 안전과 관련된 조항만큼은 처음 작성한 그대로 남겨 두었다.거주지 변경 및 장기간 외출 시 상대방에게 사전 통보한다.신변에 위협이 발생하거나 긴급한 상황에 처했을 경우 즉시 연락한다.계약 기간 중 상대방과 연락이 두절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서아는 마지막 조항을 읽다가 펜을 멈췄다.“대표님, 이건 제가 어디를 가든 말씀드려야 한다는 뜻인가요?”이헌은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어디를 가든 보고하라는 뜻은 아니야. 다만 네가 연락도 없이 사라지면 내가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모르잖아.”“그렇긴 한데……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있다가 들어오는 날도 있을 텐데요.”“그런 날은 미리 연락하면 돼. 몇 시쯤 들어올 건지,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 줘.”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네가 누구를 만나는지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어. 대신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내가 바로 움직일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어.”서아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아버지에게 쫓기던 순간을 떠올리면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헌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다.그녀가 다시 계약서로 시선을 내리자 이헌은 조용히 커피잔을 들었다.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서아의 연락을 받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하루를 시작할 때 어디로 갈 것인지 알려 주고, 계획이 바뀌면 자신에게 먼저 이야기하며, 곤란한 일이 생기면 다른 누구보다 자신의 번호를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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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아버지에게 쫓겨 비를 맞으며 거리를 헤매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스무 살이나 많은 남자와 결혼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의 대표와.이헌은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면서도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계약서에 서명한 이상 법적으로 준비할 일은 자신이 처리하면 됐다. 그러나 서아의 마음까지 계약서 한 장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결혼의 무게를 실감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곳에 머물러도 괜찮다는 확신이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아 앞으로 걸어왔다.“서아야, 당장 달라지는 건 없어. 학교도 다니던 대로 다니고, 하고 싶은 공부도 계속해.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은 시키지 않을 거야.”서아가 여전히 펜을 쥔 채 그를 올려다보자 이헌은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무심코 펜을 건네자 그는 그것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집만 바뀌는 거야. 네가 돌아가기 싫어하는 곳에서, 돌아오고 싶은 곳으로.”서아는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돌아오고 싶은 곳.그런 집이 자신에게도 생길 수 있을까.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젯밤 처음으로 문을 잠그지 않고 잠들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헌은 더 묻지 않았다.지금 당장 자신을 믿으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믿음은 말 몇 마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누군가의 호의를 의심하는 데 익숙한 서아에게는 더욱 그랬다.아침마다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학교에 다녀오면 편히 쉴 수 있는 방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익히게 하면 됐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가능한 한 들어주고, 불편해하는 일은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었다.다만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일만큼은 예외였다.서아는 아직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니 적어도 그녀가 이 집에 머무는 동안은 자신이 먼저 위험을 살피고, 필요하다면 대신 결정을 내려 주는 편이 나았다.이헌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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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서아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대표님, 저 방에서도 공부할 수 있는데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돼요.”“침대에서 책 보면 목 아파.”“그래도 책상에 책장까지 사 주시는 건 너무 부담스러워요.”이헌은 책상 모서리를 살펴보다 그녀를 돌아봤다.“서아야.”낮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서아가 입을 다물었다.그는 그녀가 또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처음 저택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다. 물을 마셔도 되는지, 욕실에 놓인 수건을 사용해도 되는지, 심지어 밤에 불을 켜 두어도 되는지 물었다.서아는 자신이 누리는 것마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믿는 듯했다.이헌은 잠시 말을 고른 뒤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여기서 지내는 동안 네가 매번 허락받을 필요는 없어.”“하지만 제가 너무 많은 걸 받는 것 같아서…….”“네가 여기서 편하게 지내는 게 내게도 필요한 일이야.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서아는 그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해 주고, 그것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경험이 낯설었다.그녀는 한참 망설이다 창문 반대편 벽을 가리켰다.“그럼…… 책장은 저쪽에 놓아도 돼요? 창가에 앉으면 책이 바로 보였으면 좋겠어요.”이헌은 그녀가 가리킨 곳을 확인하고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해.”서아는 그제야 방 안으로 들어갔다.책상 앞에 앉아 보기도 하고, 서랍을 열었다 닫기도 했다. 그러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정원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이헌은 문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어제까지만 해도 그의 집은 지나치게 넓고 조용했다. 직원들은 필요한 말만 했고, 그가 퇴근하면 모든 것이 이미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그런 집에 낯선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고작 스무 살.아직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여자였다.그런데 그녀가 책상 하나를 두고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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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이헌은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서아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짐작하면서도 곧바로 설명하지 않았다.“내 침실이 이층 안쪽에 있어. 네 짐도 그쪽으로 옮기려고 해.”서아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꼭 맞잡았다.계약서에는 원하지 않는 관계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결혼한다면 같은 침실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저는…… 아직 좀 무서운데요.”그제야 이헌이 몸을 낮춰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하지만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잖아.”“그럼 잠은…….”“침대는 네가 쓰고, 나는 당분간 옆방에서 잘게. 두 방 사이에 연결문이 있으니까 불편한 것도 없을 거야.”서아는 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조금 안도했다.“그럼 지금 쓰는 방에 계속 있으면 안 될까요?”이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 서아가 사용하는 객실도 충분히 편안했고, 필요하다면 그 방에 책상을 들여놓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는 언제든 자신의 생활과 분리된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그는 서아가 자신의 침실에서 가까운 곳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밤중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곧바로 확인할 수 있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그녀가 집 안에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곳이었다.“서아야, 지금 네가 쓰는 방은 손님방이야.”이헌은 그녀의 손끝이 여전히 굳어 있는 것을 보며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앞으로는 손님처럼 지낼 필요 없어. 네가 편하게 쓸 수 있도록 침실도 따로 정리해 줄게. 연결문도 네가 원하면 잠가 두면 되고.”서아는 그가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했다. 같은 침대를 사용하자는 것도 아니었고, 문을 잠글 수 있다면 혼자 지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그럼…… 조금씩 익숙해져 볼게요.”“그래. 서두르지 않아도 돼.”이헌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먼지를 손끝으로 털어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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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다음 날 아침, 서아는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떴다.커튼 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침대 끝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젯밤까지 낯설기만 했던 넓은 방에는 그녀의 옷과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침대 옆 협탁에는 마실 물과 휴대전화 충전기까지 준비되어 있었다.서아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아직 자신의 공간이라는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누군가 문을 발로 걷어차며 당장 나오라고 고함칠 걱정은 없었다. 밤새 작은 소리에도 놀라 잠에서 깨던 지난날과 달리, 오늘은 알람이 울릴 때까지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욕실에서 씻고 나온 그녀는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챙겼다. 오전 아홉 시부터 전공 수업이 있었으므로 평소처럼 버스를 타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이층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향하던 서아는 아래층에 서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단정한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그녀를 발견하자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윤서아 아가씨 맞으십니까? 오늘부터 등하교를 담당하게 된 김 기사입니다. 차량은 현관 앞에 준비되어 있습니다.”서아는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어제 이헌이 차를 준비해 주겠다고 했던 것은 기억났지만, 매일 자신을 학교까지 데려다줄 전담 기사가 생길 줄은 몰랐다.“저는 그냥 버스 타고 다녀도 되는데요.”“대표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라서요.”남자는 난처한 듯 미소를 지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서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식당 쪽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이헌이 커피잔을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 잘 잤어?”그는 서아의 옷차림을 살펴본 뒤 기사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눈짓을 보냈다. 서아가 계단을 내려오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방을 받아 들고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수업이 아홉 시라면서. 아침부터 먹고 가.”“늦을 것 같아서요. 그냥 가는 길에 삼각김밥이라도 먹으려고 했어요.”“차로 가면 충분해. 식사 준비해 놨으니까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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