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폭군 전하, K-탑스타는 처음이시죠?: Bab 21 - Bab 30

33 Bab

21. 질투하냐는 단어 하나로 얼어붙은 서재의 밤

이 남자, 지금 기분이 나쁘다.그것도 꽤 사적으로.은하는 눈을 가늘게 떴다.“전하.”“변명해 보아라.”“혹시 지금…”매화의 손이 허공에서 허둥거렸다. 제발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장 내관의 얼굴도 거의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은하는 그 모든 간절한 침묵을 느꼈지만, 이미 입은 움직이고 있었다.“질투하세요?”정적.시간이 잠깐 멈췄다.장 내관은 눈을 감았다. 매화는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문밖 궁인들까지 숨을 죽인 것 같았다.이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뭐라 했느냐.”은하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현대적으로 생각했습니다.”“현대적?”“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질투라 하였느냐.”목소리가 너무 낮아졌다.은하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이건 선을 넘었다. 심지어 왕이다. 아직 자신을 살려둔 이유도 완전히 모른다. 그런데 방금 왕에게 질투하냐고 물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재벌 회장에게 그러면 광고 잘릴 수 있는데, 조선에서는 목이 잘릴 수도 있다.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은하는 고개를 들었다.“전하께서 노하신 이유가 혹시 제가 위험한 사람을 만나려 해서인지, 아니면 사내를 만나려 해서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그 말에 이혁의 눈빛이 달라졌다.장 내관도 놀라 은하를 보았다. 말은 도발처럼 시작했지만, 끝은 정확했다. 문제를 개인 감정과 정치적 위험으로 나눴다. 그 순간, 은하는 다시 판을 바꿨다.이혁은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둘 다다.”짧은 대답.은하는 예상보다 솔직한 답에 잠깐 멈췄다.“둘 다요?”“너는 아직 정체가 불분명하다. 누군가 너를 이용하려 드는 것이라면, 그자는 나를 능멸하는 것이고.”이혁이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왕의 간택에 오른 여인이 한밤중에 정체 모를 자를 만나러 나가는 것 또한 내 권위를 더럽히는 일이다.”아주 논리적인 말이었다. 무섭게도 틀린 말이 없었다.그런데 은하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내 권위.말은 그렇게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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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죽을 말을 농담처럼 던지는 톱스타의 버릇 뒤에 숨겨진 진심

그게 우스웠고, 기이했고, 조금은…거슬릴 만큼 흥미로웠다.이혁이 손을 내밀었다.“서찰.”은하는 서찰을 건넸다. 이혁은 종이를 받아 향을 맡지도 않고 곧장 접었다. 이미 충분히 확인한 듯했다.“장 내관.”“예, 전하.”“후원 매화나무 주변에 그림자를 심어라. 자정 전까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예, 전하.”“그리고 윤설화.”은하는 몸을 바로 세웠다.“예.”“너는 나와 함께 간다.”“……예?”예상 밖이었다.감시를 붙이는 정도일 줄 알았다. 그런데 직접?은하는 눈을 깜빡였다.“전하께서 직접이요?”“네가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알고 있으면 된다고.”“아니, 알고 계시라는 거였지 같이 가자는 뜻은 아니었는데요.”“이제 그렇게 되었다.”“되게 일방적이시네요.”“왕이다.”“왕이면 다냐는 말, 제가 어제 했던 것 같은데.”“그래서 아직 살아 있는 것을 감사히 여겨라.”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매화는 이제 거의 혼이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왕이 간택 후보의 처소에 밤중에 찾아온 것도 모자라, 자정에 후원까지 함께 간다니. 이건 궁녀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불이 될 일이었다.은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전하, 그런데 이거 남들이 알면 좀…”이혁의 눈이 가늘어졌다.“무엇이 문제냐.”“간택 후보랑 왕이 한밤중에 후원에 같이 가는 거잖아요.”“함정 수사다.”“소문은 그렇게 안 나요.”“소문?”“궁녀들 정보력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이미 제가 찻잔 들고 춤췄다는 것도 돌던데요.”장 내관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아씨, 그건 이미 꽤 멀리…”“봐요.”은하는 이혁을 보며 손바닥을 펼쳤다.“이렇게 빨라요. 그러니까 작전도 중요하지만 이미지 관리도 중요합니다.”이혁은 또 모르는 말을 들은 얼굴이 되었다.“이미지?”“남들이 전하를 어떻게 보느냐요.”“내가 왜 그런 것을 신경 써야 하지?”은하는 진심으로 놀라 그를 보았다.“왕이시잖아요.”이혁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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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궁궐보다 밤을 닮은 폭군의 차갑고 깊은 어둠

“아씨, 정말 자정에 나가실 것입니까?”“그래야죠.”“전하와 단둘이…”“단둘이는 아닐 거예요. 아마 장 내관님 심장이 같이 갈 것 같은데.”문밖에서 장 내관이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은하는 웃다가 서찰이 있던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종이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혁이 가져갔다. 이상하게 손목이 허전했다.그리고 더 이상하게도, 방금 그가 직접 온 이유가 자꾸만 생각났다.왕의 권위 때문이라 했다. 간택 후보의 일탈 때문이라 했다. 수상한 밀서 때문이라 했다.전부 맞는 말이었다.그런데.‘둘 다다.’위험한 사람을 만나려 해서인지, 사내를 만나려 해서인지 물었을 때, 그는 둘 다라고 했다.은하는 입술을 꾹 눌렀다.“아니야.”매화가 놀라 물었다.“무엇이 아니옵니까?”“전하가 질투했을 리가 없잖아요.”“지, 질투요?”매화의 목소리가 뒤집혔다.은하는 손을 저었다.“아니야. 내가 말해놓고도 말이 안 돼. 만난 지 이틀 됐는데 질투는 무슨. 그냥 왕권 관리, 후보 관리, 미끼 관리. 그런 거지.”매화는 더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아씨께서는 전하를 두고 그런 말씀을 하셔도 무섭지 않사옵니까?”“무서워요.”“그런데 어찌…”“무서운 사람일수록 파악해야 하니까요.”은하는 창밖을 보았다. 달빛이 회랑 끝에 희미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자정까지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무대에 올라야 했다. 이번 무대는 조명이 아니라 달빛 아래였고, 관객은 보이지 않는 자객인지 밀사인지 모를 존재였다.그리고 가장 까다로운 심사위원은, 함께 무대에 오겠다고 했다.폭군 이혁.은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매화.”“예, 아씨.”“나 뛰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제일 편한 신발 찾아줘요.”매화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예. 그리고 아씨.”“응?”“제발 이번에는 뛰시기 전에 전하께 미리 말씀하시옵소서. 전하께서 놀라시면… 모두가 놀라옵니다.”은하는 웃었다.“걱정 마요. 전하 놀라게 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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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달빛 아래 매화나무를 배경으로 마침내 터져 나온 본격적인 탐색전

후원으로 향하는 길, 이혁은 앞서 걷고 은하는 반 걸음 뒤를 따랐다. 장 내관과 호위들은 멀찍이 떨어졌다. 단둘이라고 하긴 애매했지만, 가까이에서 들리는 숨소리는 둘뿐이었다.은하는 괜히 말을 걸었다.“전하.”“왜.”“원래 이렇게 밤에 순시 자주 다니십니까?”“필요하면.”“왕이면 그냥 시키면 되는 거 아니에요?”“남이 본 것만 믿고 살면 오래 못 산다.”은하는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무심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습관이 있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의 말. 그래서 직접 보고, 직접 판단하고, 직접 베는 사람.그의 폭군성은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생존 방식 같았다.은하는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전하께서는 사람을 잘 안 믿으시겠네요.”“믿을 만한 사람이 드물다.”“한 명도요?”이혁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답이었다.은하는 괜히 가슴 한구석이 조금 무거워졌다. 이상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시상식에 있던 자신이, 지금은 조선의 왕 옆에서 사람을 믿느냐 마느냐를 묻고 있다니. 그런데 이 남자의 대답 없는 얼굴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그녀는 곧장 분위기를 바꿨다.“그럼 저도 아직 안 믿으시겠네요.”“당연한 것을 묻는군.”“너무 바로 대답하시니까 좀 서운한데요.”이혁이 고개를 돌렸다.“서운?”“아니, 제가 오늘 목숨 걸고 미끼 역할 하러 가는데 신뢰도 0이면 일할 맛이 안 나죠.”“네게 일을 시킨 적 없다. 네가 제안했다.”“상사들이 꼭 그렇게 말하더라고요.”“상사?”“위에 있는 사람들요.”“나는 위에 있다.”“알죠. 너무 위에 계셔서 목 아파요.”이혁은 다시 앞을 보았다.그러나 은하는 봤다. 그의 입가가 또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는 것을.잡았다.은하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이 남자, 생각보다 웃음 참는 장벽이 낮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의 말이 정말 이상해서일 수도 있고.후원 매화나무는 달빛 아래 서 있었다. 아직 꽃이 만개할 철은 아니었지만, 가지 끝에는 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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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꺾기 전에 감상하려는 자의 다정함

“공자님은 저를 보호하시려고요?”“가능하다면.”“왜요?”백시윤은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지었다.“아씨 같은 분이 너무 일찍 꺾이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까.”아름다운 말이었다.하지만 은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확신했다.이 남자는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꺾기 전에 감상하는 사람이다.은하는 한 걸음 물러서지 않았다.“그럼 정보 주세요.”“예?”“저를 보호하고 싶으시면 구체적으로요. 누가, 어떻게, 내일 뭘 할 건지.”백시윤은 잠시 은하를 보았다. 예상보다 빠른 요구였을 것이다. 보통 겁먹은 후보라면 그의 다정함에 기대거나, 감사하거나, 더 가까이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하는 달랐다.그녀는 정보만 요구했다.“아씨께서는 참으로 거래에 능하시군요.”“제가 원래 계약서 많이 보고 살았습니다.”“계약서?”“아니에요. 계속하세요.”백시윤이 미소를 지운 듯 지우지 않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내일 향낭을 고르는 과제가 있을 것입니다. 규수의 취향과 품격을 보는 자리이지요. 그중 하나에 아씨를 곤란하게 만들 물건이 숨겨질 겁니다.”“어떤 물건이요?”“왕실에서 금하는 향입니다. 만약 아씨가 그것을 고르면, 누군가 일부러 전하를 유혹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우겠지요.”은하는 미간을 좁혔다.“향 하나로요?”“궁에서는 향 하나로도 여인이 죽습니다.”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은하는 손끝을 말아쥐었다. 이 궁은 정말 피곤한 곳이다. 말 한마디, 걸음 하나, 향 하나까지 죄가 된다. 카메라 앞에서 표정 관리하는 것보다 더하다.“왜 저한테 알려주시죠?”백시윤이 조용히 웃었다.“아씨께서 살아남아야, 간택이 재미있어질 테니까요.”은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이 남자도 관객이다.’다만 이혁과는 다르다. 이혁은 무대를 의심하며 본다. 백시윤은 무대를 설계하려 한다.바로 그때, 뒤쪽 그림자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재미라.”백시윤의 눈빛이 아주 작게 변했다.은하도 심장이 철렁했다.이혁이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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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왜 그자에게 웃었지?

'왜 그자에게 웃었지?'은하는 눈을 깜빡였다.“예?”“백시윤에게 웃었다.”은하는 잠시 멈췄다.후원 매화나무 아래.밤바람. 방금까지 목숨이 오가는 정보를 주고받은 자리.그리고 왕의 질문.‘왜 웃었지?’은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닫았다.이건…“전하.”“대답하라.”“진짜 그게 궁금하신 거예요?”이혁의 얼굴이 굳었다.은하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지금 웃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죽지는 않아도 굉장히 차가운 눈빛을 받을 것이다.하지만 참기 어려웠다.그 질문은 너무나 뜻밖이었고, 너무나 유치했고, 이상하게 귀여웠다.은하는 최대한 진지하게 대답했다.“사회생활입니다.”“사회생활?”“상대가 웃으면 저도 웃는 거요. 무기예요. 진심 아니고.”이혁은 그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웃음이 무기라.”“네.”“그럼 내 앞에서 웃는 것도 무기냐.”은하는 이번엔 정말로 말문이 막혔다.밤바람이 둘 사이를 지나갔다.이혁은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그게 더 문제였다. 이 남자는 연애를 모른다. 사람의 웃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왜 웃는지, 언제 진심이고 언제 방패인지 모른다. 그래서 칼을 의심하듯 웃음도 의심한다.은하는 잠시 그를 보았다.그리고 아주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전하 앞에서는…”이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었다.은하는 일부러 한 박자 쉬었다가 웃었다.“반은 생존이고, 반은 습관이요.”이혁의 얼굴이 싸늘해졌다.“장난치는 것이냐.”“아니요. 진짜예요.”“진심은 없군.”그 말이 이상하게 서늘했다.은하는 순간 그가 화난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화라기보다는, 아주 잠깐 무엇인가를 기대했다가 곧장 지운 사람의 표정. 너무 작아서 본인도 모를 감정.은하는 그런 표정을 많이 보았다.늘 강한 척하는 사람들이 가장 빠르게 숨기는 표정이었다.그녀는 한 걸음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만 조금 낮췄다.“전하.”“무엇.”“진심은 원래 그렇게 빨리 안 나와요.”이혁은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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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금향 하나로 여인을 죽이는 살벌한 궁궐식 프레임

“내일 붉은 매듭 향낭은 절대 고르면 안 된대요.”매화의 얼굴이 굳었다.“금향이옵니까?”“알아요?”“왕실에서 금한 향이 몇 가지 있사옵니다. 그중 하나는… 후궁들이 전하의 총애를 얻으려 몰래 쓴다는 소문 때문에 금지되었사옵니다.”은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그러니까 누가 저를 전하 유혹하려던 여자로 만들려는 거네요?”“그리 되면 간택장에서 바로 쫓겨나는 정도가 아닐 수도 있사옵니다.”“목이 또 등장하나요?”매화는 대답하지 못했다.은하는 바닥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여긴 진짜 하루가 너무 길다…”하지만 쉴 수 없었다. 내일은 두 번째 과제. 누군가 판을 짜고 있다. 백시윤은 정보를 줬지만 믿을 수 없고, 이혁은 도와주는 듯하면서도 언제든 자신을 미끼로 쓸 수 있다.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와중에 가장 자꾸 생각나는 건 이혁의 질문이었다.‘내 앞에서 웃는 것도 무기냐.’은하는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아니, 왜 그런 걸 물어봐서…”“아씨?”“아무것도 아니야.”매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은하를 보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은하는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내일의 향낭들이 떠다녔고, 백시윤의 미소와 이혁의 차가운 눈이 번갈아 나타났다.다음 날.두 번째 과제는 대비전 앞뜰에서 열렸다.향을 고르는 자리답게 낮은 탁자 위에는 수십 개의 향낭이 놓여 있었다. 붉은 매듭, 푸른 매듭, 금실, 은실, 옥 장식, 매화 자수. 규수들은 각자 품격과 취향을 드러낼 향을 골라, 그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은하는 탁자를 보자마자 속으로 욕했다.붉은 매듭 향낭이 하나가 아니었다.다섯 개였다.‘역시 판을 바꿨네.’이혁의 말이 맞았다. 상대는 이미 대비했다. 붉은 매듭 하나만 피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다섯 개 중 하나가 금향일 수도 있고, 어쩌면 붉은 매듭이라는 정보 자체가 미끼일 수도 있었다.은하는 천천히 향낭들 앞에 섰다.상석에는 대비마마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이혁이 있었다. 이혁의 시선이 은하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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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전하께서 웃으셨다

규수들 사이가 조용해졌다.그 답은 조선 규수의 모범 답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겼다.대비마마가 처음으로 물었다.“그럼 중전도 그래야 한다 생각하느냐?”은하는 대비를 바라보았다.“아닙니다.”심문관이 놀라 눈을 들었다.대비마마도 흥미로운 듯 눈썹을 올렸다.은하는 미소를 지었다.“중전은 필요할 땐 향처럼 곁에 있고, 필요할 땐 등불처럼 앞에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이혁의 손끝이 멈췄다.그녀의 말은 가볍게 시작해 결국 선명한 곳으로 갔다. 왕의 옆에서 보이겠다고 했던 어제의 답과 이어졌다. 이혁은 그 연결을 알아차렸다.대비마마가 천천히 웃었다.“윤설화라 하였느냐.”“예, 마마.”“참으로 말이 기이한데, 듣다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구나.”은하는 고개를 숙였다.“좋게 들어주셔서 감사하옵니다.”이번에는 말투도 꽤 자연스러웠다. 매화가 뒤에서 몰래 감격한 얼굴을 했다.그 순간, 한 상궁이 은하가 지나친 네 번째 붉은 매듭 향낭을 들었다. 향을 확인하던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마마.”대비마마의 눈빛이 변했다.상궁이 낮게 말했다.“이 향낭에서 금향이 납니다.”앞뜰이 얼어붙었다.규수들 중 누군가 숨을 삼켰다. 심문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은하를 떨어뜨리기 위한 함정이 드러난 것이다.이혁의 시선이 조용히 주변을 훑었다.“누가 이 향낭을 놓았느냐.”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은하는 향낭을 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살아남았다. 이번에도.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함정이 드러났다는 것은, 함정을 놓은 자가 아직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다.그때 백시윤이 멀리 회랑 끝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은하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마치 잘했다는 듯이. 은하는 그 웃음을 보고 확신했다.이 남자는 정보를 준 게 아니다.무대를 마련했다.그리고 이혁도 백시윤을 보았다.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잠시 후, 대비마마가 말했다.“윤설화.”“예, 마마.”“그대는 운이 좋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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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말대꾸도 그럴듯해졌다는 폭군의 핀잔과 칭찬으로 받아치는 배짱

“그대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말이 참 이상하구나.”은하는 고개를 더 숙였다.“송구하옵니다.”“송구하다는 말투가 이제야 조금 규수답구나.”멀리서 매화의 얼굴에 감격이 번졌다. 장 내관도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는 속으로 외쳤다.‘봤죠. 나 발전하고 있어요.’그때 이혁이 낮게 말했다.“겉만 그럴듯해진 것이다.”은하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상석에 앉은 왕이 저렇게 대놓고 초를 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반박하면 죽고, 가만히 있으면 억울하고, 웃으면 또 이상한 여자로 보인다. 하지만 은하는 물러서지 않았다.“겉이라도 그럴듯해진 것이면, 어제보다 나아진 것 아니옵니까.”앞뜰이 다시 조용해졌다.대비마마가 손끝으로 입가를 가렸다. 웃음을 참는 듯했다.장 내관은 멀리서 이마를 짚었다. 매화는 거의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았다.이혁의 눈이 아주 약간 가늘어졌다.“말대꾸도 그럴듯해졌군.”“칭찬으로 듣겠사옵니다.”“허락한 적 없다.”“그것도 이제 익숙하옵니다.”이번에는 대비마마가 정말로 웃음을 흘렸다. 아주 짧고 우아한 웃음이었지만, 앞뜰 전체에는 벼락처럼 떨어졌다. 대비마마가 웃었다. 윤설화의 말에. 그것도 두 번째로.규수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은하를 이상한 변수로 보던 눈들이 이제는 경계로 바뀌었다. 왕이 말문이 막히고, 대비마마가 웃고, 함정까지 피한 여자. 이 정도면 단순한 문제아가 아니었다.은하는 그 시선을 느꼈다.‘좋아. 욕이든 호기심이든 일단 이름은 박혔어.’연예계에서는 무관심이 가장 무서웠다. 싫어하는 사람은 다시 본다. 궁금한 사람도 다시 본다. 그러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다음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이곳에서도 다르지 않았다.이혁은 그런 은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여자는 겁이 없는 게 아니다.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고,조금 전 금향 이야기가 나왔을 때 눈빛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그런데 그 흔들림을 웃음으로 덮고, 말로 바꾸고,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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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겉은 비단이나 속은 칼밭인 조선식 연예계의 실상

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햇빛 아래 궁궐은 거짓말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안쪽에서 누군가는 향낭 하나로 사람을 죽이려 했다. 겉은 고운 비단인데 속은 칼밭. 조선 궁궐은 생각보다 연예계와 닮아 있었다.“오늘 밤엔 좀 자도 되겠지?”은하가 묻자, 매화는 애매한 표정으로 눈을 피했다.“아씨, 장 내관께서 저녁에 다시 예법을 보아야 한다 하셨사옵니다.”“또?”“내일은 시서와 문답이 있을 예정이라…”은하의 얼굴이 굳었다.“시서라면 시랑 글 말하는 거지?”“예.”“나 큰일 났네.”매화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예. 많이 큰일이옵니다.”이제는 매화도 은하를 조금 닮아가고 있었다.저녁이 되자 장 내관은 정말로 두툼한 책자와 죽은 눈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이미 이틀 만에 십 년쯤 늙은 얼굴이었다.“아씨.”“장 내관님, 저 혹시 글을 못 읽는 척하면…”“간택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높소.”“그럼 읽을 줄 아는 척하면?”“들킬 가능성이 높소.”“둘 다 별론데요.”“그래서 오늘 밤 외우셔야 하오.”은하는 책자 더미를 보았다. 한문, 시문, 궁중 문답. 현대에서 광고 콘티도 외웠고, 대본도 외웠으며, 일본어 가사도 발음만 따서 외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글자가 그림처럼 보였다.“장 내관님.”“말씀하시오.”“저 조선 기준으로 문맹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장 내관이 눈을 감았다.“그 말씀은 내일 절대 하시면 아니 되오.”“알겠습니다. 속으로만 생각할게요.”“속으로도 크게 생각하지 마시오. 얼굴에 다 드러나오.”매화가 조심스럽게 웃음을 삼켰다. 은하는 억울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나 그렇게 티 나?”“많이 나옵니다.”“아씨께서는 전하 앞에서도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실 때가 있사옵니다.”“그건 좀 위험한데.”“많이 위험하옵니다.”은하는 한숨을 쉬고 책자를 펼쳤다.“좋아요. 해봅시다. 대신 제가 아는 방식으로 외울게요.”“아씨가 아는 방식이란…”“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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