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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왜 그자에게 웃었지?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8 14:02:16

'왜 그자에게 웃었지?'

은하는 눈을 깜빡였다.

“예?”

“백시윤에게 웃었다.”

은하는 잠시 멈췄다.

후원 매화나무 아래.

밤바람. 방금까지 목숨이 오가는 정보를 주고받은 자리.

그리고 왕의 질문.

‘왜 웃었지?’

은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닫았다.

이건…

“전하.”

“대답하라.”

“진짜 그게 궁금하신 거예요?”

이혁의 얼굴이 굳었다.

은하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지금 웃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죽지는 않아도 굉장히 차가운 눈빛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참기 어려웠다.

그 질문은 너무나 뜻밖이었고, 너무나 유치했고, 이상하게 귀여웠다.

은하는 최대한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회생활입니다.”

“사회생활?”

“상대가 웃으면 저도 웃는 거요. 무기예요. 진심 아니고.”

이혁은 그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웃음이 무기라.”

“네.”

“그럼 내 앞에서 웃는 것도 무기냐.”

은하는 이번엔 정말로 말문이 막혔다.

밤바람이 둘 사이를 지나갔다.

이혁은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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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아침, 문답 과제가 열리는 서연당은 어제의 앞뜰과 분위기가 달랐다. 향낭처럼 손끝으로 고르는 시험이 아니라, 말로 자신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규수들은 각자 준비한 답을 속으로 되뇌며 긴장했고, 상궁들은 한층 더 엄격한 눈으로 후보들을 살폈다.은하는 전날 밤 외운 구절들을 머릿속으로 흥얼거렸다. 입 밖으로 내면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이혁이 하지 말랬다.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고 싶어지는 게 문제였다.매화가 뒤에서 속삭였다.“아씨, 노래는 아니 되옵니다.”“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얼굴에 쓰여 있사옵니다.”“진짜 표정 관리 시급하네.”그때 별당 안으로 백시윤이 들어섰다. 그는 오늘도 완벽하게 다정한 얼굴이었다. 은하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은하도 짧게 고개를 숙였다.그 모습을 상석에 앉은 이혁이 보았다.백시윤은 웃었다.은하도 웃었다.이혁의 손끝이 서책 위에서 멈췄다.또 웃는다.그 생각이 들자마자 이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후원에서 이미 들었다. 사회생활. 무기. 진심이 아니다. 그러니 신경 쓸 일이 아니다.그런데 신경이 쓰였다.대비마마가 문답을 시작했다.“중전의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첫 번째 규수는 순종이라 답했다. 두 번째 규수는 효라 답했다. 세 번째 규수는 가문의 화합이라 답했다. 답들은 모두 모범적이고, 아름답고, 안전했다.은하는 속으로 생각했다.‘다들 정답지만 외웠네.’마침내 은하의 차례가 왔다.“윤설화.”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대비마마가 물었다.“그대는 중전의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은하는 잠시 침묵했다. 준비한 답은 있었다. 장 내관이 밤새 외우게 한 무난한 답도 있었다. 그러나 그 답을 말하면, 그녀는 이 방의 다른 규수들 사이에 묻힐 것이다.‘그럼 죽는다.’‘정확히는, 조용히 사라진다.’은하는 고개를 들었다.“버티는 힘이라 생각하옵니다.”서연당 안이 조용해졌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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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하, 사람 살려두는 이유가 너무 취향 위주인데요.”“문제 있느냐.”“아니요. 제 입장에선 굉장히 감사한 취향입니다.”이혁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아주 작았다. 하지만 이번엔 은하도, 매화도, 장 내관도 동시에 보았다.전하께서 웃으셨다.‘정말로. 그것도 아주 잠깐.’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은 동시에 굳었다. 이혁은 그 반응을 보고 곧장 표정을 지웠다.“무엇을 보느냐.”매화는 고개를 바닥에 박을 듯 숙였고, 장 내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아무것도 보지 못하였사옵니다.”은하는 차마 말을 참지 못했다.“저는 봤는데요.”이혁의 눈빛이 그녀에게 꽂혔다.“무엇을.”“전하 웃으신 거.”방 안이 다시 얼어붙었다.장 내관은 ‘끝났다’는 얼굴이었고, 매화는 거의 울상으로 은하를 보았다. 그러나 은하는 이상하게 겁이 덜 났다. 이혁의 웃음이 너무 짧고 어색해서, 그가 조금은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이혁은 한동안 은하를 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착각이다.”“아닌데요.”“네가 잘못 본 것이다.”“제가 표정 보는 직업이었습니다.”“그 직업 이야기 그만해라.”“부끄러우세요?”이혁이 한 걸음 방 안으로 들어왔다.은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공기가 달라졌다.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얇은 실처럼 팽팽해졌다. 이혁은 은하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늘이 그녀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윤설화.”“예, 전하.”“내가 웃었다는 말을 밖에 흘리면.”그는 아주 낮게 말했다.“그 입을 다시는 노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말은 살벌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은하는 그 안에서 아주 희미한 민망함을 읽었다. 협박이라기보다 들키기 싫은 사람의 방어에 가까웠다.은하는 최대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비밀로 하겠습니다.”“믿을 수 없군.”“전하 웃음 1호 목격자로서 책임감을 갖겠습니다.”“윤설화.”“예. 입 다물겠습니다.”이혁은 그녀를 한참 보았다.그녀가 정말 입을 다물겠다는 얼굴인지, 아니면 이미 머릿속으로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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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군 전하, K-탑스타는 처음이시죠?   30. 겉은 비단이나 속은 칼밭인 조선식 연예계의 실상

    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햇빛 아래 궁궐은 거짓말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안쪽에서 누군가는 향낭 하나로 사람을 죽이려 했다. 겉은 고운 비단인데 속은 칼밭. 조선 궁궐은 생각보다 연예계와 닮아 있었다.“오늘 밤엔 좀 자도 되겠지?”은하가 묻자, 매화는 애매한 표정으로 눈을 피했다.“아씨, 장 내관께서 저녁에 다시 예법을 보아야 한다 하셨사옵니다.”“또?”“내일은 시서와 문답이 있을 예정이라…”은하의 얼굴이 굳었다.“시서라면 시랑 글 말하는 거지?”“예.”“나 큰일 났네.”매화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예. 많이 큰일이옵니다.”이제는 매화도 은하를 조금 닮아가고 있었다.저녁이 되자 장 내관은 정말로 두툼한 책자와 죽은 눈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이미 이틀 만에 십 년쯤 늙은 얼굴이었다.“아씨.”“장 내관님, 저 혹시 글을 못 읽는 척하면…”“간택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높소.”“그럼 읽을 줄 아는 척하면?”“들킬 가능성이 높소.”“둘 다 별론데요.”“그래서 오늘 밤 외우셔야 하오.”은하는 책자 더미를 보았다. 한문, 시문, 궁중 문답. 현대에서 광고 콘티도 외웠고, 대본도 외웠으며, 일본어 가사도 발음만 따서 외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글자가 그림처럼 보였다.“장 내관님.”“말씀하시오.”“저 조선 기준으로 문맹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장 내관이 눈을 감았다.“그 말씀은 내일 절대 하시면 아니 되오.”“알겠습니다. 속으로만 생각할게요.”“속으로도 크게 생각하지 마시오. 얼굴에 다 드러나오.”매화가 조심스럽게 웃음을 삼켰다. 은하는 억울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나 그렇게 티 나?”“많이 나옵니다.”“아씨께서는 전하 앞에서도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실 때가 있사옵니다.”“그건 좀 위험한데.”“많이 위험하옵니다.”은하는 한숨을 쉬고 책자를 펼쳤다.“좋아요. 해봅시다. 대신 제가 아는 방식으로 외울게요.”“아씨가 아는 방식이란…”“가사

  • 폭군 전하, K-탑스타는 처음이시죠?   29. 말대꾸도 그럴듯해졌다는 폭군의 핀잔과 칭찬으로 받아치는 배짱

    “그대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말이 참 이상하구나.”은하는 고개를 더 숙였다.“송구하옵니다.”“송구하다는 말투가 이제야 조금 규수답구나.”멀리서 매화의 얼굴에 감격이 번졌다. 장 내관도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는 속으로 외쳤다.‘봤죠. 나 발전하고 있어요.’그때 이혁이 낮게 말했다.“겉만 그럴듯해진 것이다.”은하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상석에 앉은 왕이 저렇게 대놓고 초를 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반박하면 죽고, 가만히 있으면 억울하고, 웃으면 또 이상한 여자로 보인다. 하지만 은하는 물러서지 않았다.“겉이라도 그럴듯해진 것이면, 어제보다 나아진 것 아니옵니까.”앞뜰이 다시 조용해졌다.대비마마가 손끝으로 입가를 가렸다. 웃음을 참는 듯했다.장 내관은 멀리서 이마를 짚었다. 매화는 거의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았다.이혁의 눈이 아주 약간 가늘어졌다.“말대꾸도 그럴듯해졌군.”“칭찬으로 듣겠사옵니다.”“허락한 적 없다.”“그것도 이제 익숙하옵니다.”이번에는 대비마마가 정말로 웃음을 흘렸다. 아주 짧고 우아한 웃음이었지만, 앞뜰 전체에는 벼락처럼 떨어졌다. 대비마마가 웃었다. 윤설화의 말에. 그것도 두 번째로.규수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은하를 이상한 변수로 보던 눈들이 이제는 경계로 바뀌었다. 왕이 말문이 막히고, 대비마마가 웃고, 함정까지 피한 여자. 이 정도면 단순한 문제아가 아니었다.은하는 그 시선을 느꼈다.‘좋아. 욕이든 호기심이든 일단 이름은 박혔어.’연예계에서는 무관심이 가장 무서웠다. 싫어하는 사람은 다시 본다. 궁금한 사람도 다시 본다. 그러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다음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이곳에서도 다르지 않았다.이혁은 그런 은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여자는 겁이 없는 게 아니다.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고,조금 전 금향 이야기가 나왔을 때 눈빛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그런데 그 흔들림을 웃음으로 덮고, 말로 바꾸고, 다시

  • 폭군 전하, K-탑스타는 처음이시죠?   28. 전하께서 웃으셨다

    규수들 사이가 조용해졌다.그 답은 조선 규수의 모범 답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겼다.대비마마가 처음으로 물었다.“그럼 중전도 그래야 한다 생각하느냐?”은하는 대비를 바라보았다.“아닙니다.”심문관이 놀라 눈을 들었다.대비마마도 흥미로운 듯 눈썹을 올렸다.은하는 미소를 지었다.“중전은 필요할 땐 향처럼 곁에 있고, 필요할 땐 등불처럼 앞에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이혁의 손끝이 멈췄다.그녀의 말은 가볍게 시작해 결국 선명한 곳으로 갔다. 왕의 옆에서 보이겠다고 했던 어제의 답과 이어졌다. 이혁은 그 연결을 알아차렸다.대비마마가 천천히 웃었다.“윤설화라 하였느냐.”“예, 마마.”“참으로 말이 기이한데, 듣다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구나.”은하는 고개를 숙였다.“좋게 들어주셔서 감사하옵니다.”이번에는 말투도 꽤 자연스러웠다. 매화가 뒤에서 몰래 감격한 얼굴을 했다.그 순간, 한 상궁이 은하가 지나친 네 번째 붉은 매듭 향낭을 들었다. 향을 확인하던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마마.”대비마마의 눈빛이 변했다.상궁이 낮게 말했다.“이 향낭에서 금향이 납니다.”앞뜰이 얼어붙었다.규수들 중 누군가 숨을 삼켰다. 심문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은하를 떨어뜨리기 위한 함정이 드러난 것이다.이혁의 시선이 조용히 주변을 훑었다.“누가 이 향낭을 놓았느냐.”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은하는 향낭을 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살아남았다. 이번에도.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함정이 드러났다는 것은, 함정을 놓은 자가 아직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다.그때 백시윤이 멀리 회랑 끝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은하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마치 잘했다는 듯이. 은하는 그 웃음을 보고 확신했다.이 남자는 정보를 준 게 아니다.무대를 마련했다.그리고 이혁도 백시윤을 보았다.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잠시 후, 대비마마가 말했다.“윤설화.”“예, 마마.”“그대는 운이 좋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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