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전하, K-탑스타는 처음이시죠?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3 챕터

11. 중전 자리 얼마면 돼요?

“네가 가짜라면.”이혁의 목소리가 심문장 바닥을 낮게 긁고 지나갔다.“지금 이 자리에서 증명해야 할 것이다.”은하는 숨을 삼켰다.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는 감각이 들었다. 시상식 무대에서 조명이 떨어지던 순간보다 더 아찔했다. 그때는 적어도 사고였다. 지금은 심문이었다.그리고 이 심문에서 답을 잘못하면, 사고가 아니라 처형이 될 수도 있었다.심문장 안의 공기가 찬물처럼 굳었다. 조금 전까지 은하의 답을 기이하다는 듯 바라보던 규수들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가짜일지도 모르는 여자. 왕 앞에서 기이한 말을 늘어놓던 여자. 그리고 하필 진짜 윤설화라는 여인이 궁문 앞에 나타났다는 보고.이보다 더 완벽한 퇴장 타이밍도 없었다.물론 은하에게는 죽음의 퇴장이었다.심문관이 벌떡 일어났다.“전하, 당장 이 여인을 포박하심이 옳사옵니다. 간택 자리에 신분을 속인 자가 들어왔다면 이는 왕실을 능멸한 중죄이옵니다.”은하는 심문관을 보았다.저 사람은 방금까지 자신에게 중전의 덕목을 묻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불리해지자마자, 눈빛이 칼보다 빨라졌다. 익숙했다. 연예계에도 저런 사람들이 있었다. 시청률 잘 나올 땐 선배님, 논란 터지면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좋아. 판이 뒤집혔어.’은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도망칠 길은 없다. 울어도 안 된다. 애원하면 더 빨리 먹힌다. 그럼 남는 건 하나뿐이었다.판을 다시 짜야 한다.이혁은 상석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분노도, 흥미도, 판단도 전부 얇게 섞여 있었다. 어젯밤보다 더 위험했다. 비에 젖은 밤궁에서는 적어도 상황이 어수선했다. 지금은 모두가 지켜보는 공식 자리였다.은하가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전하.”심문관이 바로 소리쳤다.“감히 입을 열지 마라!”은하가 심문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지금 제 목이 걸린 일인데 발언권 정도는 있어야죠.”“발언권?”“아니, 그러니까… 말할 기회요.”규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08
더 보기

12. 궁궐에 떨어진 톱스타는 협상부터 합니다

“전하, 보셨사옵니까. 이 여인이 진짜 윤설화라 주장하고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저 괴이한 여인은”“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이혁의 한마디에 심문관이 입을 다물었다.은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윤설화를 바라보았다. 윤설화는 바닥만 보고 있었다. 무서워서라기보다, 누군가에게 익숙하게 눌린 사람의 자세였다. 도망쳐 온 사람.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은하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물렸다.사라진 규수.궁문 앞에 나타난 진짜 윤설화.어젯밤 후원 근처에 떨어진 자신.그리고 중전 간택.‘이 애도 뭔가에 쫓기고 있어.’은하가 조용히 물었다.“저기요.”윤설화가 움찔했다. 심문관이 버럭 했다.“네가 어찌 감히 윤 규수에게”“잠깐만요. 저랑 같은 이름 문제 걸린 당사자잖아요. 당사자끼리 대화 좀 합시다.”“당사자?”“아, 말 좀 어렵게 하면 괜찮아요? 관련자요.”장 내관의 영혼이 조금씩 닳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은하는 윤설화에게 시선을 맞췄다.“정말 윤설화 아씨 맞아요?”윤설화는 겁먹은 눈으로 은하를 보았다. 은하가 예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그녀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그, 그렇습니다.”“그럼 왜 사라졌어요?”“그것은…”윤설화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규수들, 심문관, 내관, 군사, 그리고 왕. 모든 시선이 그녀를 찌르고 있었다.은하는 그 침묵을 보았다.연예계에서도 그랬다. 무언가 말해야 하는데 말할 수 없는 사람은 눈부터 흔들렸다. 협박을 받았거나, 누군가를 지키고 있거나, 말하는 순간 더 큰 일이 벌어진다는 걸 아는 사람.은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누가 못 오게 했어요?”윤설화의 얼굴이 하얘졌다.‘정답이었다.’심문장 안의 공기가 변했다. 이혁의 눈빛도 바뀌었다. 그는 상석에 몸을 기댄 채 조용히 그 변화를 지켜보았다.심문관이 날카롭게 말했다.“허튼 추측으로 심문을 어지럽히지 마라.”은하가 심문관을 보았다.“왜 그렇게 급하세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08
더 보기

13. 미끼라도 몸값은 챙기겠다는 대한민국 톱스타의 깡

모든 시선이 다시 은하에게로 향했다.누군가 윤설화를 치우고 가짜 후보를 세우려 했다. 하필 그 시각, 은하가 궁 근처에 나타났다. 계획에 없던 변수였는지, 아니면 이 미친 타임슬립이 누군가의 판과 우연히 겹친 건지 아직 알 수 없었다.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은하는 누명을 쓰고 있었다.그리고 이 판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은하가 이혁을 보았다.“전하.”“말하라.”“제가 윤설화 아씨 자리를 훔친 게 아니라면요.”은하의 눈빛이 선명해졌다.“누군가는 윤설화 아씨 자리를 팔아먹으려 했다는 뜻입니다.”심문장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이혁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왕실 간택. 양반가 규수. 가문. 중전 자리. 그 모든 단어 뒤에는 권력의 냄새가 숨어 있었다. 누군가 후보를 바꾸려 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심문관이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전하, 저 여인의 말에 휘둘리셔서는 아니 됩니다. 애초에 저 여인 또한 정체가 불분명한”“그 정체 불분명한 여인이 지금 가장 빠르게 판을 읽고 있군.”이혁의 말에 심문관은 숨을 멈췄다.은하도 잠시 멈췄다.‘방금 칭찬이었나? 아니면 비꼼인가?’이혁은 은하를 바라보았다.은하는 그 시선 안에서 어젯밤과 다른 결을 느꼈다. 여전히 의심은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아주 얇은 관심이 생겼다. 위험한 관심. 무대 위에서 관객의 눈빛이 바뀌는 순간과 비슷했다.관객이 지루해하다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순간.은하는 속으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좋아. 아직 안 죽었어.’이혁이 장 내관에게 명했다.“윤설화는 보호하라. 윤 참판 댁과 관련된 자들을 즉시 잡아들여 조사한다.”“예, 전하.”“그리고 저 여인.”모두의 시선이 은하에게 꽂혔다.이혁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당분간 윤설화의 이름으로 남긴다.”은하의 눈이 커졌다.심문관이 다급히 외쳤다.“전하! 어찌 신분조차 알 수 없는 여인을 간택장에”“그 이름을 누군가 탐냈다면, 미끼로 쓸 만하다.”은하의 미소가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08
더 보기

14. 프라이버시조차 압수당한 채 시작된 초간택의 압박

심문장에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윤설화는 눈물을 닦다가 은하를 멍하니 보았고,규수들은 ‘저 여자는 대체 왜 아직 살아 있는가’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혁은 은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거리가 가까워지자, 은하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곧게 폈다. 그의 그림자가 그녀 위로 드리웠다. 피 냄새는 없었지만, 대신 묘한 향이 났다. 차갑고 매운 침향 같은 냄새.“네가 간택장에 남고 싶다면, 내일 정식 초간택에서 살아남아라.”“초간택이요?”“예비 심문은 끝났다. 내일부터가 진짜다.”은하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예비가 이 정도면 본게임은 대체 어느 수준이라는 말인가.이혁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낮게 말했다.“겁먹었느냐.”은하는 곧장 대답했다.“네.”예상 밖의 솔직한 대답에 이혁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은하는 이어 말했다.“근데 겁먹었다고 안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그녀는 이혁을 똑바로 보았다.“전 원래 큰 무대 전에 제일 떨려요.”“무대?”“사람들이 절 평가하는 자리요.”“그런 자리에 익숙하다 했지.”“네. 그런데 아무리 익숙해도 떨리는 건 똑같아요. 대신 티를 안 내는 거죠.”이혁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 말이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떨리지만 티를 내지 않는다.두려워도 무너지지 않는다.그건 왕에게도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그는 그것을 생존이라 불렀고, 이 계집은 무대라 불렀다.이혁이 조용히 물었다.“그리하여 이 무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은하가 웃었다.“살아남아야죠. 아직 엔딩도 못 봤는데.”“엔딩?”“끝이요.”그녀의 눈빛이 맑게 빛났다.“전 시작한 건 끝까지 가는 편이라.”이혁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좋다.”그 한마디에 심문장 전체가 다시 긴장했다.“윤설화라는 이름으로 초간택에 올려라.”“전하!”심문관이 다시 외쳤지만, 이혁의 시선 한 번에 입을 다물었다.“단, 그녀의 곁에는 감시를 붙인다. 한 발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라.”은하가 손을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08
더 보기

15. 팩트 폭격과 웃지 않고 웃는 연예계식 비즈니스 미소

“아씨.”“네.”“내일 초간택에서 죽지 않으시려면, 오늘 밤 배워야 할 것이 많소.”은하가 책자를 보았다.“그거 다요?”“이건 아주 일부요.”“장 내관님.”“말씀하시오.”“저 혹시 중전 말고 다른 안전한 직업 없어요? 예를 들면… 궁중 전속 가수라든가.”“가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궁에서 안전한 직업은 없소.”“냉정하시네.”“사실이오.”은하는 한숨을 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좋아요. 해봅시다.”그날 밤, 은하는 조선식 자기소개를 배웠다.“소녀 윤설화, 감히 전하와 대비마마의 은혜를 입어…”“잠깐만요. 감히가 너무 자주 나오는데요.”“궁에서는 감히가 자주 필요하오.”“자존감 떨어지는 단어네요.”“자존… 무엇?”“아니에요. 계속하세요.”그다음은 걷는 법이었다. 은하는 치마폭을 밟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다 썼고, 매화는 옆에서 거의 숨을 죽이며 따라왔다. 세 번째 걸음에서 은하가 비틀거리자 장 내관이 눈을 질끈 감았다.“아씨, 궁의 규수는 발소리가 크면 아니 됩니다.”“제가 원래 무대에서 힐 신고도 소리 안 나게 걷거든요. 근데 이 치마가 너무 길어요.”“치마가 문제가 아니라 걸음이 문제요.”“팩트 폭력은 조선에도 있네요.”“팩트…?”매화는 이제 은하가 이상한 단어를 말할 때마다 해석을 포기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은하는 계속 배웠다. 절하는 법, 대답하는 법, 시선을 내리는 법, 차를 받는 법, 웃지 않고 웃는 법.가장 어려운 건 마지막이었다.“웃지 않고 웃는 건 대체 뭐예요?”장 내관이 아주 진지하게 설명했다.“입꼬리는 조금 올리되 마음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오.”은하는 기가 찼다.“그거 완전 연예계 미소인데요.”“연예계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아씨께서는 그것만큼은 잘하실 듯하오.”“인정하기 싫은데 맞아요.”밤이 깊어질수록 은하는 점점 조선 규수의 껍질을 뒤집어썼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말투는 자꾸 삐끗했고, 걸음은 묘하게 당당했으며, 눈빛은 절대 다소곳해지지 않았다. 그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08
더 보기

16. 가산점을 주시옵소서

다음 날 아침. 초간택이 열리는 후원 별당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궁녀들은 향을 피우고, 규수들은 각자의 가문에서 보낸 장신구를 정리했으며, 심문관들과 상궁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후보들을 살폈다.은하는 매화의 손에 이끌려 별당 뒤편에 도착했다. 어젯밤과 달리 머리는 단정히 틀어 올렸고, 옷차림도 제법 규수다웠다. 문제는 눈빛이었다.매화가 걱정스럽게 속삭였다.“아씨, 오늘은 되도록 조용히 계셔야 하옵니다.”“그 말 어제도 들었어요.”“어제도 안 지키셨사옵니다.”“그래서 오늘 살아 있잖아요.”매화는 할 말을 잃었다.은하는 별당 안으로 들어섰다. 규수들의 시선이 곧장 쏟아졌다. 어제의 사건은 이미 소문이 되어 퍼진 모양이었다. 가짜일지도 모르는 여자. 왕이 살려둔 여자. 이상한 말을 하는 여자. 그리고 초간택에 그대로 오른 여자.그 시선들 중 몇몇은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다.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윤설화 아씨.”은하가 고개를 돌렸다.한 사내가 별당 입구에 서 있었다. 흰 도포에 가까운 밝은 옷차림, 단정한 얼굴, 눈웃음이 지나치게 부드러운 남자. 궁 안의 공기와 달리, 그는 마치 봄바람처럼 서 있었다.주변 규수들의 표정이 달라졌다.“백 공자님…”“영의정 대감 댁의 백시윤 공자 아니신가.”백시윤.은하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그리고 동시에 느꼈다.저 남자, 위험하다.백시윤은 은하에게 다가와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어제 곤란한 일을 겪으셨다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다정했다. 너무 다정해서 수상할 정도로.은하는 웃었다.“덕분에요. 그런데 저희 초면이죠?”“그렇습니다.”“그런데 왜 그렇게 친절하세요?”백시윤의 눈웃음이 조금 깊어졌다.“아름다운 분이 곤란을 겪었다면 걱정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주변에서 낮은 탄성이 흘렀다. 완벽한 말이었다. 부드럽고 예의 바르고, 누구에게도 책잡히지 않을 말.그런데 은하는 그 말에서 묘한 냄새를 맡았다. 너무 매끈한 사람에게서 나는 냄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08
더 보기

17. 찻잔을 기회로 바꾼 위험천만한 생존 댄스

심문장, 아니 별당 안이 고요해졌다.그 모습은 실수라기보다 의도된 동작처럼 보였다. 조선의 예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선이 빨려들었다. 은하의 움직임에는 무대에서 살아남은 사람만이 가진 중심이 있었다.은하는 곧장 무릎을 굽혀 찻잔을 올렸다.“전하, 차 올리옵니다.”목소리는 침착했다.이혁은 찻잔보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조금 전 분명 넘어질 뻔했다. 누군가가 방해했다. 그런데 이 계집은 그 방해마저 자신의 움직임으로 바꾸었다.‘무대라 했지.’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백시윤은 옆에서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이혁이 찻잔을 받았다.“방금 것은 무엇이냐.”은하의 심장이 덜컥했다.‘들켰나?’‘아니면 칭찬인가?’이 남자는 표정으로 구분이 안 된다.은하는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가장 자신다운 답을 골랐다.“위기 대처 능력이옵니다.”별당 안이 다시 술렁였다.이혁은 찻잔을 든 채 그녀를 보았다.“차를 올리라 했더니 춤을 추었느냐.”은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넘어질 뻔한 것을 안 넘어졌으니, 감점보다 가산점이 아닐까요.”장 내관이 멀리서 눈을 질끈 감았다.그러나 이혁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차를 마시는 동안, 그의 눈은 끝까지 은하에게 머물렀다.“살아남는 재주는 있군.”은하가 웃음을 참았다.“칭찬으로 듣겠습니다.”“허락한 적 없다.”“칭찬은 받는 사람이 정하는 거라서요.”이혁의 손끝이 멈췄다.그 짧은 틈을, 별당 안의 모두가 보았다.폭군이 또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상석 옆에 앉아 있던 대비마마가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아주 작고, 우아한 웃음이었다.그러나 충분했다.별당 안의 공기가 뒤집혔다.방금까지 죽을죄가 될 뻔한 은하의 말이, 대비의 웃음 한 번으로 기묘한 재치가 되어버렸다.은하는 속으로 외쳤다.‘잡았다.’이 판의 또 다른 심사위원.‘대비마마.’이혁은 대비의 웃음을 보고, 다시 은하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빛은 조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08
더 보기

18. 말 참 예쁘게 하신다며 왕의 턱끝을 다시 건드리는 배짱

‘또 무슨 일이냐.’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한 몸을 억지로 바로 세우고, 치마폭을 정리했다. 아직 초간택 하루도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왕의 호출이라니.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하나는 알았다.이혁은 자신을 그냥 미끼로만 보지 않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사실은 위험했다.왕의 서재로 향하는 길, 장 내관은 몇 번이나 조용히 당부했다.“아씨, 이번에는 정말로 말을 아끼셔야 하오.”“저도 매번 그렇게 생각은 해요.”“생각만 하지 마시고 실천을…”“노력해볼게요.”“그 말이 제일 두렵소.”은하는 피식 웃었다.서재 문 앞에 도착하자, 심장이 다시 조금 빨라졌다. 어젯밤과 달리, 이번에는 목에 칼이 없었다. 그런데도 긴장됐다. 이혁은 칼이 없어도 사람을 베는 분위기를 가졌다.문이 열렸다.서재 안에는 이혁이 홀로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책과 보고서들이 쌓여 있었고, 창밖으로는 늦은 오후의 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밤궁에서 본 폭군과는 또 달랐다. 낮의 이혁은 더 조용했고, 그래서 더 읽기 어려웠다.은하는 예를 갖추었다.“부르셨습니까, 전하.”이혁은 한동안 그녀를 보았다.“제법 규수 흉내가 나는군.”“밤샘 벼락치기의 성과입니다.”“벼락… 무엇?”“급하게 배웠다는 뜻이옵니다.”이혁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물건을 손끝으로 밀었다.은하의 하이힐 한 짝이었다.어젯밤 찾은 것과 다른, 잃어버렸던 나머지 한 짝.은하의 눈이 커졌다.“이걸…”“후원 연못가에서 찾았다.”은하는 천천히 다가가 하이힐을 집어 들었다. 두 짝이 완성되자,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서울과 그녀를 잇는 마지막 물건 같았다. 반짝이는 은색 굽은 조선의 서재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했다.이혁이 물었다.“그것이 네 나라의 신인가.”은하는 조심스럽게 하이힐을 내려다보다가 웃었다.“제 나라라기보다는… 제 전쟁터 신발이요.”“전쟁터?”“무대요. 사람들 앞에 설 때 신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08
더 보기

19. 업무상이라는 낯선 단어에 멈춰 선 폭군의 시선

“자주 보게 된다?”“아니, 그러니까 감시도 붙고 간택도 있고, 제가 미끼라면서요. 업무상… 자주.”“업무상.”이혁은 그 낯선 표현을 천천히 씹듯 되풀이했다.은하는 웃음을 참았다.“네. 업무상.”이혁은 한참 그녀를 보더니 손을 들어 물러가라는 뜻을 보였다.“가라. 내일 또 살아남아 보아라.”은하는 예를 갖추고 돌아서려다, 문득 멈췄다.“전하.”“무엇이냐.”“신발 찾아주신 건… 고맙습니다.”서재가 조용해졌다.이혁은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왕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목숨을 구걸하거나 은혜를 포장했다. 이 여자의 고맙다는 말은 이상하게 가벼웠고, 그래서 더 직접적이었다.은하는 덧붙였다.“증거든 뭐든요. 저한텐 중요한 거라.”그리고 이번에는 아무 말도 더하지 않고 나갔다.문이 닫힌 뒤, 이혁은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서재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까보다 조용하지 않았다.그 여자가 남기고 간 말들이 어지럽게 떠다녔다.‘하이힐도 권위예요.’‘제 세계에서는.’이혁은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참으로 미친 계집이군.”그런데 그 말끝에는 이상하게 분노가 없었다.서재 밖, 은하는 하이힐 두 짝을 품에 안고 회랑을 걸었다. 장 내관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전하께 무슨 말씀을 들으셨소?”“내일 또 살아남아 보래요.”“그건 아주 큰 격려일 수도 있소.”“저도 그렇게 해석할래요. 정신 건강에 좋게.”“정신… 건강?”“장 내관님도 챙기세요. 여기서 제일 걱정돼요.”장 내관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 궁에서 내관의 건강을 걱정하는 간택 후보라니.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피곤하고, 참으로 이상한 여인이었다.그리고 묘하게 미워하기 어려웠다.그날 밤, 은하의 처소 앞에는 궁녀들이 평소보다 오래 머물렀다. 매화가 문을 닫으며 낮게 말했다.“아씨, 궁녀들이 아씨를 두고 별명을 붙였사옵니다.”은하가 하이힐을 닦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08
더 보기

20. 전하, 그거 질투는 아니죠?

“내놓아라.”이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한마디에 방 안의 온도가 내려갔다. 문밖 회랑에는 밤 순시에 따라붙은 궁인들의 기척이 흩어져 있었고, 처소 안에는 매화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은하는 소매 안쪽에 감춘 서찰의 감촉을 또렷하게 느꼈다.얇은 종이 한 장.그런데 그 종이가 지금 그녀의 목숨보다 무거웠다.‘내일 두 번째 과제에서 아씨를 떨어뜨리려는 자가 있습니다. 살고 싶으시다면, 오늘 밤 자정에 후원 매화나무 아래로 나오십시오.’백시윤의 향이 묻은, 너무나 친절하고 그래서 더 수상한 초대장.은하는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급하게 웃으면 들킨다. 너무 늦게 웃어도 들킨다. 카메라 앞에서 수천 번 연습한 타이밍으로, 딱 반 박자 늦게.“전하.”“말 돌리지 마라.”“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매화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희어졌다. 저러다 죽는다. 그 표정이었다. 은하는 매화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혁의 시선이 그녀의 소매 끝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저 남자, 눈치가 너무 빠르다.’연예계였다면 최악의 기자였을 것이다. 아무 말 안 해도 이상한 부분부터 찌르는 타입. 웃으며 넘기기엔 상대가 왕이고, 이곳은 생방송 스튜디오가 아니라 조선 궁궐이었다.은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소매를 눌렀다.“이걸 꼭 보셔야겠습니까?”이혁의 눈빛이 가늘어졌다.“숨길 것이 있나 보군.”“숨길 게 있다기보다… 사적인 물건이라서요.”“이 궁 안에서 네게 사적인 것이 있다 생각하느냐.”“와. 전하, 그 말 되게 무서운 거 아세요?”“무서우라고 한 말이다.”“효과는 확실하시네요.”은하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도망칠 수 없다. 내놓지 않으면 의심을 키운다. 그대로 내놓으면 백시윤과의 연결이 드러난다. 백시윤이 보냈다는 확증은 없지만, 향이 문제였다. 이혁이 그 향을 알아챌지 모른다. 아니, 이 남자라면 알아챌 것 같았다. 근거는 없지만 이상하게 확신이 들었다.그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08
더 보기
이전
1234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