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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닿지 못한 발걸음

월요일 아침, 햇살은 평소처럼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춘식은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었고, 노향은 창가에서 머리를 묶고 있었다. 맨 뒷자리 우식은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내고 있었다. 햇살은 제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다가 우식의 얼굴부터 봤다. 입술 옆에 붙였던 밴드는 없어졌지만 옅은 상처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햇살이 곧장 뒤로 걸어갔다. “다 나았어?” “응.” “진짜?” “응.” 햇살은 못 믿겠다는 듯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우식이 아주 조금 고개를 뒤로 뺐다. “왜 피해?” “안 피해.” 춘식이 엎드린 채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둘이 뭐 하냐. 사람 잠 좀 자자.” 노향이 교과서로 춘식의 뒤통수를 툭 쳤다. “학교에서 잠을 왜 자.” 교실에 웃음이 번졌다. 햇살도 따라 웃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주말에 오기로 했던 아빠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우식은 묻지 않았다. 같은 시각, 서울. 태만은 사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진주가 들어왔다. “주말에는 얌전히 있었더군요.” 태만의 시선이 차갑게 돌아갔다. “그 집에 찾아간 거, 당신이지.” 진주는 태연하게 소파에 앉았다. “내 남편이 자꾸 드나드는 곳인데 궁금할 수도 있죠.” “다시는 가지 마.” “그건 당신 하기 나름이에요.” 진주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학교 정문이었다. 하교하는 아이들 사이로 흰 머리의 햇살이 찍혀 있었다. 태만의 얼굴이 굳었다. “너.”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해요?” 진주는 사진 끝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나는 그냥 당신 딸이 어느 학교 다니는지 알게 됐을 뿐인데.” 태만의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건드리면 죽여.” 진주의 웃음이 멎었다. 그러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럼 가지 마요.” “…….” “오빛나한테도, 그 애한테도. 당신이 조용하면 나도 조용할 테니까.” 문이 닫힌 뒤에도 태만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사진 속 햇살은 친구들과 웃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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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저녁이 길어진 날

며칠 뒤, 학교가 끝난 아이들은 마을 뒤편 개울가로 향했다. 봄볕이 제법 따뜻해져 물가에는 연둣빛 풀이 올라왔고, 돌 사이로 흐르는 물은 햇빛을 받아 잘게 반짝였다. 춘식은 바지를 걷어 올리자마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오늘은 진짜 송사리 잡는다!” 노향이 돌 위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코웃음을 쳤다. “저번에도 돌멩이 잡아놓고 난리더니.” “오늘은 다르당께.” 햇살은 개울가 넓은 돌 위에 스케치북을 펼쳤다. 우식은 그 옆에 앉아 작은 나뭇가지로 젖은 흙을 긁고 있었다. “우식아.” “응.” “움직이지 마.” 우식의 시선이 스케치북으로 내려갔다. “또 그려?” “응. 저번 건 마음에 안 들어.” “왜.” “눈이 너무 무섭게 나왔어.” 우식이 잠시 햇살을 봤다. “원래 그래.” 햇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인정하네?” 연필 끝이 종이 위를 사각사각 움직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춘식이 물을 튀기며 노향에게 쫓겨 다녔다. “야! 진노향! 옷 젖잖아!” “먼저 튀긴 게 누군데!” 아이들 웃음소리가 개울물 위로 번졌다. 햇살은 그림을 그리다 문득 연필을 멈췄다. “아빠가 이번 주에도 못 올 수도 있대.” 우식은 아무 말 없이 햇살을 봤다. “엄마는 괜찮다고 하는데.” 햇살은 연필 끝으로 종이를 톡톡 두드렸다. “안 괜찮아 보여.” “응.” “너도 그렇게 보여?” “응.” 햇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일부러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엄마 많이 웃겨줘야겠다.” 우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햇살의 스케치북이 바람에 넘어가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끝을 눌러줬다. 햇살은 그 손을 한번 보고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날 저녁. 빛나는 평소보다 일찍 밥상을 차렸다. 태만이 온다는 말은 없었다. 그런데도 습관처럼 반찬 하나를 더 꺼냈다. 햇살은 그걸 보고도 모른 척했다. “엄마, 나 오늘 우식이 또 그렸어.” “그래?” 빛나가 웃으며 국을 떴다. “잘 나왔어?” “이번엔 좀 사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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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비어 있는 자리의 온도

며칠 뒤, 학교가 끝난 네 아이는 우식의 집으로 향했다. 햇살은 축사 앞 평상에 앉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봄볕에 데워진 나무판자에서는 마른 햇빛 냄새가 났고, 멀리 소들이 여물을 씹는 소리가 느릿하게 이어졌다. “오늘은 안 그리냐?” 노향이 햇살의 가방을 힐끗 보며 물었다. “오늘은 그냥 놀래.” 춘식이 기다렸다는 듯 팔을 걷어붙였다. “그럼 우리 내기하자. 저기 건초 자루 누가 먼저 옮기나.” 노향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왜 놀러 와서 일을 만들어?” “일이 아니고 승부제.” 우식은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말없이 건초 자루 하나를 들었다. 춘식이 입을 벌렸다. “야! 너는 빼야지. 니가 들면 게임이 되냐?” “몰라.” 우식은 그대로 축사 안으로 들어갔다. 햇살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뒤 예주가 큰 양푼에 삶은 감자를 담아 나왔다. “아이고, 뭔 애들이 학교만 끝나면 여기로 몰려온대냐. 그래도 잘 왔다. 먹어.” 춘식이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아줌마, 소금 있어요?” “니 손부터 씻어라.” “아, 깨끗해요.” “흙이 손톱 밑에 시커먼디 뭐가 깨끗혀!” 노향이 배를 잡고 웃었다. 햇살도 감자 하나를 집어 반으로 갈랐다. 김이 올라오자 손가락을 호호 불었다. 우식이 옆에 앉았다. 햇살이 반쪽을 내밀었다. “먹어.” 우식은 가만히 받았다. “맛있지?” “응.” 햇살은 잠깐 웃다가 마당 너머를 바라봤다. “우리 엄마도 감자 좋아하는데.” 우식의 시선이 햇살에게 돌아왔다. “가져가.” “뭘?” 우식이 양푼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감자.” 햇살이 피식 웃었다. “이거 네가 만든 것도 아니잖아.” “우리 집 거야.” “그건 맞네.” 예주는 그 말을 듣고는 벌써 작은 바구니에 감자를 담고 있었다. “빛나 씨 갖다 줘라. 혼자 밥 대충 먹을 것 같더라.” 햇살의 손이 잠깐 멈췄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냥 얼굴이 좀 말라 보이던디.” 햇살은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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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늦은 봄밤의 발소리

며칠이 더 흘렀다. 교실 창밖 벚나무에는 꽃잎 대신 연둣빛 잎이 돋기 시작했고, 운동장 끝에서는 체육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다녔다. 미술 시간이 끝난 뒤에도 햇살은 혼자 자리에 남아 그림을 마저 그리고 있었다. 노향이 옆에서 고개를 기울였다. “또 우식이네 농장이야?” “응. 이번엔 송아지도 넣었어.” 춘식이 그림을 들여다보다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없는데?” “아따, 나는 친구도 아니냐?” 햇살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너 넣으면 그림 시끄러워 보여.” 노향이 책상에 엎드려 웃음을 터뜨렸다. 맨 뒷자리에서 가방을 메던 우식의 입술 끝도 아주 조금 움직였다. 햇살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너 방금 웃었지?” “아니.” “웃었어.” “안 웃었어.” 춘식이 혀를 찼다. “둘이 하루 종일 저러고도 안 질리냐?” 햇살은 그림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요 며칠 아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빠가 언제 오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 대신 학교가 끝나면 우식과 춘식, 노향을 따라 논길을 걷고, 집에서는 엄마 옆에 붙어 그림을 그렸다. 기다리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빛나는 햇살을 재운 뒤 거실 창가에 앉아 있었다. 작은 스탠드 아래에는 그리다 만 그림이 놓여 있었다. 연필을 들고도 한참 선 하나 긋지 못한 채 창밖만 바라봤다. 늦은 시각, 대문 밖에서 차 소리가 났다. 빛나의 손이 멈췄다. 며칠 동안 자동차 소리에 놀라지 않으려 애썼지만 몸은 마음보다 먼저 반응했다. 잠시 뒤 현관문이 열렸다. 태만이었다. 빛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왔어?” “응.” 태만은 넥타이도 매지 않은 셔츠 차림이었다. 얼굴은 피곤했고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햇살은?” “자.” 태만의 시선이 닫힌 방문에 머물렀다. “깨우지 마.” 빛나가 낮게 말했다. “겨우 아빠 안 기다리고 자는 버릇 들였어.” 태만의 얼굴이 굳었다. 빛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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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머물다 간 아침

아침 햇빛이 주방 창문을 넘어 식탁 위로 길게 번졌다. 빛나는 된장국을 데우고 있었고, 햇살은 막 잠에서 깬 얼굴로 식탁에 앉아 계란말이 끝부분만 젓가락으로 집어먹었다. 태만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아빠가 아침 식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햇살은 기분이 좋은지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아빠, 어제 내가 그린 송아지 그림 볼래? 우식이네 송아지 진짜 귀여워. 다리가 이렇게 가늘어.” 햇살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길쭉한 선을 그렸다. 태만이 웃었다. “밥부터 먹어.” “보고 나서 먹으면 안 돼?” “식어.” 빛나가 국그릇을 내려놓으며 끼어들었다. “니 아빠 말이 맞아. 아침부터 입만 움직이지 말고 먹어.” 햇살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밥을 한 숟갈 크게 떴다. 태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빛나에게 향했다. 빛나는 그 시선을 느끼고도 모른 척 반찬 그릇만 정리했다. 어젯밤의 말들은 아침이 왔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햇살 앞에서는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뒤 태만은 마당으로 나갔다. 며칠 전부터 삐걱거리던 대문 걸쇠를 몇 번 만져보더니 공구함을 가져와 나사를 조였다. 빛나가 현관에 기대 서서 물었다. “그걸 지금 왜 해?” “헐거워.” “원래 그랬어.” 태만은 대답하지 않고 걸쇠를 한 번 더 당겨봤다. “밤에는 꼭 잠가.” 빛나의 눈썹이 조금 모였다. “갑자기 왜 그래?” “그냥.” “햇살도 혼자 늦게 다니게 하지 말고.” 빛나는 가만히 태만의 등을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 태만의 손이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다. “없어.” 빛나는 더 묻지 않았다. 이제 그 대답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교복을 입은 햇살이 현관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나 학교 간다!” 가방 끝에서 작은 들꽃 열쇠고리가 흔들렸다. 태만이 고개를 들었다. “데려다줄까?” “싫어. 애들이랑 갈 거야.” “조심하고.” “응.” 햇살은 대문을 나서다 다시 돌아와 태만에게 달려갔다. 두 팔로 허리를 한번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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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술잔 밑에 잠긴 마음

태만이 다녀간 뒤로 며칠이 흘렀다. 집 안은 전과 같은데도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아침이면 빛나는 여전히 햇살의 도시락을 쌌고, 저녁이면 국을 끓였다. 하지만 식탁에 앉는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부엌 찬장 안쪽에 있던 술병은 어느새 식탁 한쪽으로 나와 있었다. 처음에는 한 잔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만 조금. 그다음에는 저녁밥을 먹기 전에 한 잔.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해가 지기도 전에 잔에 술이 따라졌다. 햇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평소처럼 웃었다. “야, 오햇살! 이것 좀 봐.” 춘식이 체육복 주머니에서 개구리 한 마리를 꺼내 들자 햇살이 질색하며 뒤로 물러섰다. “미쳤어? 치워!” 노향이 춘식의 팔을 후려쳤고, 개구리는 운동장 풀숲으로 폴짝 뛰어갔다. 햇살은 배를 잡고 웃었다. 우식은 그 모습을 가만히 봤다. 웃음은 전과 같았는데, 방과 후가 되면 햇살은 집 쪽을 먼저 바라봤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농장 갈래?” 춘식이 묻자 햇살은 가방끈을 고쳐 멨다. “나 오늘은 집에 갈래.” “왜?” “그냥.” 우식이 햇살을 한번 봤다. “같이 가.” “됐어. 가까워.” 햇살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거실은 어두웠다. “엄마?” 대답이 없었다. 주방으로 들어가자 빛나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빈 술병 하나와 반쯤 남은 병. 안주도 없이 잔만 놓여 있었다. 햇살의 걸음이 느려졌다. “엄마, 밥 안 먹었어?” 빛나는 대답 대신 잔을 들었다. 햇살은 가방을 내려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내가 계란 부쳐줄까?” “됐어.” 목소리가 낮았다. 햇살의 손이 멈췄다. “엄마.” “됐다고.” 빛나가 잔을 내려놓았다. 탁. 작은 소리였는데 햇살의 어깨가 움찔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햇살은 괜히 식탁 위에 놓인 스케치북을 펼쳤다. “오늘 미술 시간에 그린 건데 볼래?” 종이 위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그 사이에서 손을 잡고 웃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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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문 너머의 소리

그날 이후, 언덕배기 전원주택에서는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고함이었다. “그만 좀 해!” 빛나의 목소리가 열린 창문 너머로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며칠 뒤에는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고, 또 어느 날에는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와 무언가 벽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도 모를 수가 없었다. “빛나 씨! 문 좀 열어봐!” 한밤중에 예주와 몇몇 아주머니가 대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다. 한참 뒤 문을 연 빛나에게서는 술 냄새가 짙게 났다. “애 있는 집에서 이게 뭔 일이여!” 예주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빛나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무 일이 아니긴 뭐가 아무 일이 아니여. 동네 끝까지 다 들리겄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문이 닫혔다. 그 뒤로도 비슷한 밤은 몇 번 더 있었다. 햇살은 학교에서는 여전히 웃었다. 춘식이 쓸데없는 장난을 치면 같이 웃었고, 노향이 간식을 나눠주면 잘 먹는 척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면 밥을 반도 먹지 못했다. “너 요새 왜 이렇게 깨작거려?” 노향이 물으면 햇살은 숟가락 끝으로 밥알을 모으며 웃었다. “입맛이 없어.” “아픈 거 아니야?” “아니야.” 교복 소매는 전보다 자주 길게 내려와 있었다. 날이 따뜻해져 다른 아이들이 소매를 걷어 올릴 때도 햇살은 손등 가까이까지 단추를 잠갔다. 우식은 그걸 말없이 봤다. 체육 시간이 끝난 날이었다. 햇살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다가 소매가 젖어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렸다. 희고 가는 팔 안쪽에 누렇게 번진 멍 하나가 보였다. 우식의 눈이 멈췄다. 햇살도 그 시선을 알아챘다. 서둘러 소매를 내렸다. “넘어졌어.” 우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짜야.” “응.”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햇살은 억지로 웃었다. “왜. 안 믿어?” 우식은 잠시 햇살을 바라보다 말했다. “안 물었어.” 햇살의 웃음이 멈췄다. 우식은 더 캐묻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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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뜨거운 바람이 불던 날

초여름이 되자 마을의 빛깔도 달라졌다. 논은 어느새 짙은 초록으로 차올랐고, 낮이면 매미가 아직 서툰 울음을 시작했다. 볕은 봄보다 한층 뜨거워졌고, 흙길에서는 마른 먼지가 얇게 일었다. 그동안 태만의 발길은 더 뜸해졌다. 생활비와 햇살의 미술도구는 빠짐없이 왔지만, 사람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 검은 세단 한 대가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왔다. 뒷좌석에 앉은 태만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옅은 여유가 있었다. 꼬여 있던 일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지만, 전처럼 막막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빛나에게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이번에는 정말이라고. 차가 마을 어귀에 멈추자 태만은 기사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 직접 걷고 싶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평상에 앉아 있던 할머니 하나가 그를 알아봤다. “아이고, 햇살이 아부지 아니여?” 태만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할 때가 아니제.” 걸음이 멈췄다. 옆에서 고추를 다듬던 다른 아주머니도 손을 털며 일어났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집을 그렇게 비우믄 쓰겄소?” 태만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뭔 말이긴. 밤마다 그 집서 소리 나는 거 동네 사람이 다 아는디.” “애는 뭔 죄여. 햇살이가 요새 살이 쏙 빠져갖고, 팔이고 다리고 멍이 안 가신다니께.” 태만의 눈빛이 달라졌다. “멍이요?” “몰랐소?” 또 다른 사람이 혀를 찼다. “예주가 몇 번이나 뛰어갔어. 춘덕이도 가고. 빛나 씨가 술만 먹으면 난리가 난다니께.” 태만은 더 듣지 못하고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쨍그랑! 언덕 위 전원주택 쪽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빛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내려왔다. “나 좀 내버려 둬!” 태만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같은 시각, 우식의 집 전화가 울렸다. 예주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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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너무 늦게 닿은 손

태만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예주의 품에 안긴 햇살은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얇은 반팔 아래로 드러난 팔목에는 손가락 모양처럼 번진 멍이 남아 있었다. 태만이 천천히 다가갔다. “햇살아.” 햇살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작은 어깨가 움찔했다. 태만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 짧은 움직임 하나가 어떤 말보다 세게 가슴을 후벼팠다. “……아빠야.” 햇살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러면서도 예주의 옷자락을 놓지는 않았다. 태만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춘덕이 깨진 유리 조각을 발끝으로 한쪽에 밀며 낮게 말했다. “오늘은 애 우리 집에 데려가겠소.” 빛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요. 내 딸인데.” 예주의 얼굴이 굳었다. “니 딸인께 더 이러면 안 되제.” “내가 뭘 어쨌다고요!” 빛나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햇살의 몸이 또 움츠러들었다. 그걸 본 태만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만해.” 낮은 목소리였다. 빛나가 웃었다. “이제 와서?” “햇살 앞에서 그만하라고.” “햇살 앞?” 빛나는 비틀거리며 식탁을 짚었다. “당신이 햇살 앞에서 뭘 했는데? 오겠다고 해놓고 안 오고, 전화 한 통 하고, 돈 보내면 다였잖아.” “빛나.” “왜! 틀렸어?” 예주가 햇살의 귀를 감싸듯 품을 더 깊게 끌어안았다. 춘덕은 태만을 한번 보고 말했다. “둘이 할 말 있으면 애 없는 데서 하쇼.” 태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예주는 햇살의 손을 잡았다. “가자. 우리 집 가서 밥 묵자.” 햇살은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엄마를 봤다. 빛나는 그 시선을 피했다. 아빠를 봤다. 태만은 말없이 서 있었다. “엄마 혼자 두고 가도 돼?” 그 말에 빛나의 얼굴이 흔들렸다. 예주가 햇살의 머리를 쓸어줬다. “오늘만 우리 집서 자자.” 햇살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 밖으로 나서자 우식이 있었다. 소식을 듣고 농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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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돌아가야 하는 집

아침부터 매미가 울었다. 창문 너머로 뜨거운 햇빛이 들어왔고, 우식의 집 부엌에서는 된장국 냄새와 달걀 부치는 냄새가 퍼졌다. 햇살은 작은 방에서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먼저 보였다. 잠깐 멍하니 있다가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깨진 유리잔. 엄마의 목소리. 자기 팔을 잡았던 손. 그리고 대문 앞에 서 있던 아빠. 햇살은 이불 속에서 팔을 끌어안았다. 문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우식이었다. “응.”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잠시 뒤 우식이 다시 말했다. “밥 먹어.” 햇살은 그제야 조금 웃었다. “너 진짜 밥밖에 모르지?” “아니.” “그럼?” 대답이 없었다. 햇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으로 나오자 예주가 밥 한 공기를 수북하게 퍼놓고 있었다. “일어났냐? 얼른 앉어.” “많아요.” “많긴 뭐가 많어. 니 얼굴 봐라. 볼이 쏙 들어갔잖여.” 예주는 말은 세게 해도 햇살의 팔을 잡지는 않았다. 그저 의자를 빼주고 국그릇을 앞으로 밀어줬다. 춘덕도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먹어. 남기면 우식이 주면 되니까.” 우식은 이미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햇살이 숟가락을 들었다. 처음에는 입맛이 없었다. 그런데 따뜻한 국물이 목을 지나가자 배가 고팠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햇살은 조용히 밥을 먹었다. 예주는 아무 말 없이 반찬만 하나씩 앞으로 밀어줬다. 그때 대문 밖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햇살의 숟가락이 멈췄다. 우식도 고개를 들었다. 잠시 뒤 태만이 마당으로 들어왔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춘덕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빛나 씨는?” “집에 있습니다.” 예주의 얼굴이 굳었다. “정신은 좀 들었소?” 태만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햇살은 밥그릇만 내려다봤다. 태만이 가까이 와서 멈췄다. “햇살아.” “응.” “집에 가자.” 숟가락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태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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