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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소나무 그늘 아래 너

초여름 볕이 강해지자 햇살은 농장 옆 소나무 그늘을 작업실처럼 쓰기 시작했다. 작은 의자 하나와 이젤, 물통. 그리고 오늘도 모델은 우식이었다. “거기 앉아.” 우식이 소나무 아래 나무 의자를 봤다. “또?” “응.” “얼마나.” “조금.” 우식은 그 ‘조금’이 한 시간이 넘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말없이 앉았다. 햇살은 붓에 색을 묻혔다. 짙은 눈썹. 햇볕에 그을린 얼굴. 또래보다 넓은 어깨. 몇 년 전 처음 그렸던 그림보다 이제는 훨씬 익숙하게 선을 잡을 수 있었다. “우식아.” “응.” “나 그림 잘 그리지?” “응.” “영혼이 없어.” “잘 그려.” 햇살이 웃었다. “그래. 그렇게 말해야지.” 바람이 한번 크게 불었다. 소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이젤 위 종이가 팔랑거렸다. 햇살은 붓을 내려놓고 손을 비볐다. “손 시리네.” 우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대답 없이 농장 앞 자판기로 걸어갔다. 잠시 뒤 따뜻한 캔 음료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햇살 손에 쥐여줬다. “이 더운 날 따뜻한 걸?” “손 시리다며.” 햇살은 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 안으로 퍼졌다. “너는 내가 말한 거 진짜 다 기억하네.” “응.” “무섭다니까.” 햇살은 웃으며 캔에 턱을 올렸다. 한참 조용히 있다가 문득 말했다. “나 서울 가도 너 기억날 것 같아.” 우식의 눈이 천천히 들렸다. “가?” “아직 몰라. 만약에.” 햇살은 소나무 너머 논을 바라봤다. “아빠가 계속 그림 배우려면 서울이 낫다고 하잖아.” 우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햇살이 고개를 돌렸다. “너는 내가 가면 좋겠어?” “네가 좋으면.” “또 그런다.” 햇살의 입술이 조금 나왔다. “맨날 내 생각만 묻지 말고 네 생각도 말해봐.” 우식은 한참 햇살을 바라봤다. 바람에 흰 머리카락 몇 올이 얼굴 앞으로 흘렀다. 우식의 손이 올라갈 듯하다가 멈췄다. 대신 낮게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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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장맛비 속 깨진 화병

장마가 시작된 날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밤이 되자 지붕을 두드릴 만큼 거세졌다. 태만은 그날 내려오기로 했다. 빛나는 저녁상을 차려놓고 몇 번이나 시계를 봤다. 아홉 시. 열 시.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햇살은 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척했지만 거실의 움직임을 전부 듣고 있었다. 찬장 문이 열렸다. 병뚜껑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햇살의 연필이 멈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햇살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아빠한테 전화해봐.” 햇살은 거실로 나왔다. 식탁 위에는 빈 잔과 술병이 놓여 있었다. “아까 했어. 안 받아.” “다시 해.” “엄마.” “다시 하라고.” 햇살은 전화기를 들었다. 몇 번을 걸어도 받지 않았다. “안 받아.” 빛나가 웃었다. “그래. 또 안 받지.” “엄마, 오늘은 그만 마셔.” “넌 왜 맨날 나한테 그만하래?” 목소리가 높아졌다. 햇살의 손이 전화기에서 떨어졌다. “그냥 자자. 내일 전화하면 되잖아.” “너는 쉽지?” 빛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오면 좋고, 안 오면 우식이한테 가면 되고.” 햇살의 얼굴이 굳었다. “우식이는 왜 나와.” “너는 갈 데라도 있잖아.” 빛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어디 가.” “엄마.” “나는 십팔 년을 여기서 기다렸어.” 손에 들려 있던 잔이 식탁 위에 세게 내려앉았다. 쨍. 햇살이 움찔했다. 빛나는 그 반응을 보고도 감정을 멈추지 못했다. “너도 결국 갈 거잖아. 서울 가서 그림 그리고 싶잖아!” “아직 안 간다고 했어.” “결국 갈 거야!” 빛나가 식탁 옆 작은 화병을 잡았다. 햇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엄마. 그거 내려놔.” “다 가.” “엄마!” 화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가 산산이 튀었다. 햇살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 발등이 날카로운 조각에 스쳤다. “아.” 하얀 피부 위로 붉은 선이 생겼다. 빛나의 술기운이 순식간에 가시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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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떠나야 하는 여름

비는 아침이 되어서야 조금 잦아들었다. 태만은 햇살을 데리고 언덕 위 집으로 돌아왔다. 빛나는 거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밤새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깨진 화병은 모두 치워져 있었다. 그래도 벽 아래에는 작은 유리 조각 하나가 빛을 받고 있었다. 햇살은 현관 앞에서 한참 들어가지 못했다. 빛나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왔어?” 햇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만이 낮게 말했다. “오늘 서울로 가자.” 빛나의 눈이 흔들렸다. 햇살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이번에는 안 돼.” “발 조금 베인 거야.” “그 얘기가 아니잖아.” 태만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햇살은 엄마를 봤다. “엄마 이제 안 그럴 거야.” 빛나는 손을 꽉 쥐었다. “그렇지?” 햇살이 다시 물었다. 빛나의 입술이 떨렸다. 딸을 붙잡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을 테니 한 번만 더 믿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이미 몇 번이나 했던 말이었다. 빛나는 햇살의 붕대 감긴 발을 봤다. 그리고 자기 손을 봤다. “가.” 햇살의 얼굴이 멈췄다. “뭐?” “아빠랑 가.” “엄마.” “가라고.” 목소리가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왔다. 태만이 빛나를 봤다. 빛나는 그 시선을 피했다. 햇살이 천천히 다가왔다. “나 가면 엄마 혼자야.” “혼자인 게 편해.” 거짓말이었다. 입안에서 피가 날 만큼 이를 악물었다. “너 있으면 나도 힘들어.” 햇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싫어?” 빛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한마디만 잘못하면 딸을 영영 잃을 것 같았다. 그런데 붙잡으면 정말 망가뜨릴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돌렸다. 햇살은 그 침묵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알았어.” 목소리가 너무 조용했다. 빛나의 눈물이 떨어졌다. 햇살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태만이 따라가려 했지만 멈췄다. 방 안에서는 서랍 여는 소리가 났다. 작은 여행가방 하나가 침대 위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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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들꽃에 묶은 매듭

서울로 떠나기 전 마지막 밤. 예주는 햇살이 좋아하는 반찬을 한 상 가득 차렸다. “이것도 먹고, 이것도 먹어.” “아줌마, 배 터져요.” “서울 가믄 누가 이렇게 챙겨주겄냐. 오늘은 묵어.” 햇살은 웃으면서도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춘식과 노향도 저녁이 되자 농장으로 찾아왔다. 춘식은 평소처럼 떠들었다. “야, 서울 가서 우리 모른 척하면 죽는다.” 햇살이 웃었다. “누가 보면 영영 가는 줄 알겠다.” “그라믄 금방 와.” 노향은 아무 말 없이 햇살을 꼭 안았다. 햇살도 두 팔로 등을 감쌌다. “왜 이래.” “그냥.” 노향의 목소리가 조금 잠겼다. “연락해.” “응.” “편지도 써.” “응.” 춘식이 옆에서 코를 훌쩍였다. 노향이 바로 돌아봤다. “너 우냐?” “누가 울어! 먼지 들어갔어.” “밤에 무슨 먼지.” 그 말에 모두 웃었다. 웃음이 가라앉고 춘식과 노향이 돌아간 뒤 농장은 조용해졌다. 햇살은 작은 방에서 짐을 정리하다 가방 안쪽의 나무 들꽃을 꺼냈다. 몇 해를 가지고 다닌 탓인지 줄기 부분에 가느다란 금이 가 있었다. 햇살은 한참 바라보다 방을 나왔다. 우식은 축사 옆 헛간에서 연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우식아.” “응.” 햇살이 손을 폈다. “이거 좀 봐.” 우식의 눈이 나무 꽃에 멈췄다. “금 갔어.” “그러게.” “줘.” 우식은 꽃을 받아 헛간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칼로 갈라진 부분을 다듬고 얇은 나무 조각을 덧댔다. 마지막에는 가느다란 갈색 끈을 줄기 아래에 단단히 감았다. 햇살은 작업대 옆에 턱을 괴고 앉아 그 모습을 봤다. “이제 안 부러져?” “응.” 우식이 꽃을 돌려줬다. 햇살은 새로 묶인 매듭을 손끝으로 만졌다. “더 예뻐졌네.” “아니.” “내가 그렇다는데.” “응.” 둘은 헛간 밖으로 나와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한여름 밤공기에는 풀냄새와 축사의 마른 볏짚 냄새가 섞여 있었다. 멀리서 풀벌레가 울었다. 햇살은 나무 꽃을 손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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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들꽃이 떠난 길목

아침부터 마을 어귀에 사람들이 모였다. 검은 차 한 대가 우식네 농장 앞에 서 있었다. 햇살의 짐은 많지 않았다. 작은 여행가방 하나. 그림 도구가 든 가방 하나. 그리고 품에 안은 스케치북. 태만이 트렁크에 짐을 싣는 동안 예주는 햇살의 옷깃을 몇 번이나 만졌다. “서울 가서 밥 잘 묵어야 혀.” “네.” “아프믄 바로 병원 가고.” “알았어요.” “아침 거르지 말고.” 햇살이 웃었다. “아줌마, 저 금방 올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예주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래. 금방 와.” 결국 햇살을 끌어안았다. “아이고, 이쁜 새끼.” 햇살도 예주의 허리를 꼭 안았다. 춘덕은 조금 떨어져 서 있다가 햇살이 다가오자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잘 갔다 와.” “네, 아저씨.”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네.” 춘식은 괜히 밝은 목소리를 냈다. “야, 서울 가서 촌년이라고 놀림받지 마라.” 햇살이 바로 받아쳤다. “나 원래 서울에서 왔거든?” 춘식이 머리를 긁었다. “아, 맞다.” 노향이 옆에서 웃다가 금세 입술을 깨물었다. 햇살이 먼저 팔을 벌렸다. “와.” 노향은 그대로 안겼다. “연락해.” “응.” “진짜로.” “응.” “편지 안 쓰면 내가 서울까지 간다.” “알았어.” 두 사람이 떨어지고 나자 잠깐 조용해졌다. 햇살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우식을 찾았다. 우식은 당산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늘 그렇듯 말없이. 햇살은 천천히 걸어갔다. “왜 혼자 거기 있어.” “그냥.” “나 간다.” “응.” 햇살은 우식을 올려다봤다.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커진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도, 찢어진 눈도 그대로였다. 말 없는 것도. 햇살이 웃었다. “나 갔다 올게.” 우식의 목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응.” 햇살은 기다렸다. 더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끝이야?” 한참 뒤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조심해.”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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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낯선 문턱에 닿은 손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긴 차 안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던 햇살은 창밖으로 빽빽하게 늘어선 건물들을 바라봤다. 신호등, 높은 담장, 낯선 사람들. 몇 해 전까지 익숙했던 도시인데도 이상하게 모든 것이 멀게 느껴졌다. 주머니 안에서는 나무 들꽃이 손끝에 닿았다. 갈색 끈이 묶인 줄기를 한번 꼭 쥔 뒤에야 햇살은 손을 뺐다. 차가 커다란 대문 앞에 멈췄다. 태만이 먼저 내렸다. 햇살은 문이 열리고도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높은 담장 안쪽으로 반듯하게 다듬어진 정원과 커다란 집이 보였다. 흙냄새보다 잔디와 돌바닥의 차가운 냄새가 먼저 났다. 태만이 손을 내밀었다. “햇살아.” 햇살은 그 손을 잠시 바라보다 잡았다. 열여덟이나 됐는데 아빠 손을 잡고 내리는 게 조금 우스웠다. 그래도 놓고 싶지는 않았다. 현관문이 열렸다. 박진주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잘 다듬어진 머리와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 몇 년 전 시골집에 찾아왔던 때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진주의 시선이 태만에게 닿았다가 곧 햇살에게 내려왔다. 하얀 머리. 창백한 얼굴. 손에 들린 작은 가방. 그리고 태만과 맞잡은 손까지. 눈길이 아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왔네.” 말은 평범했다. 햇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태만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그때 거실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나오다가 멈췄다. 진건이었다. 햇살보다 다섯 살 어린 열세 살. 잘 차려입은 옷과 달리 표정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건의 시선이 햇살 얼굴에 박혔다. 둥글고 큰 두 눈. 왼쪽의 황금빛과 오른쪽의 에메랄드빛. 그리고 허리 가까이 내려오는 새하얀 머리카락. 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태만의 얼굴이 굳었다. 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생겼어?” 햇살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피하지 않았다. 건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머리도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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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낯선 식탁 위의 저녁

저녁이 되자 방문 밖에서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햇살은 창가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햇살아.” 태만이었다. “밥 먹자.” “응.” 햇살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을 나서기 전 창가의 나무 들꽃을 한번 바라봤다. 낯선 방 안에서 유일하게 제 것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음식 냄새가 났다. 길고 반듯한 식탁에는 접시와 잔이 빈틈없이 놓여 있었다. 고기와 생선, 이름 모를 요리까지 잔뜩 차려져 있었지만 햇살에게는 예주가 내주던 된장찌개 냄새나 엄마가 해주던 김치전보다 낯설었다. 진주는 먼저 앉아 있었다. 건은 맞은편에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햇살이 태만 옆자리에 앉자 건의 시선이 다시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그 머리 염색 아니야?” 햇살이 물컵을 들다 멈췄다. “아니.” “태어날 때부터?” “응.” “눈도?” “응.” 건은 대놓고 얼굴을 들여다봤다. “신기하긴 하네.” 햇살도 건을 빤히 봤다. “너도.” “내가 뭐가?” “사람 처음 봐?” 건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빠, 얘 원래 말 저렇게 해?” 태만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누나한테 얘라고 하지 마.” “누나는 무슨.” “진건.” 낮은 목소리에 건이 입을 다물었다. 진주는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보다가 와인잔을 손끝으로 돌렸다. “애들끼리 처음 만났으니 그럴 수도 있죠.” 햇살의 시선이 진주에게 닿았다. 말은 부드러웠지만 건을 나무라는 기색은 없었다. 진주는 햇살 쪽으로 접시 하나를 밀었다. “먹어요.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네.” 햇살은 젓가락을 들었다. 한입 먹고 씹다가 문득 식탁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주 집에서는 춘식이 먹는 것마다 감탄했고, 노향은 시끄럽다고 핀잔을 줬다. 춘덕은 예주에게 반찬부터 밀어줬고, 우식은 아무 말 없이 햇살 접시에 맛있는 걸 하나씩 올려놓곤 했다. 여기에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밖에 없었다. 그때 고기 한 점이 햇살 접시 위에 놓였다. 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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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불빛 너머 닿지 않는 목소리

다음 날 아침에도 빛나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햇살은 눈을 뜨자마자 전화기부터 들었다.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결국 아무도 받지 않았다. 햇살은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한 채 한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엄마, 뭐 해.” 작게 중얼거려봐도 돌아오는 건 기계음뿐이었다. 창가에 놓인 나무 들꽃이 아침볕을 받고 있었다. 햇살은 꽃을 손에 쥐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서울집에서의 하루는 이상하리만큼 길었다. 방은 넓었고 필요한 것은 전부 있었다. 새 옷도, 그림 도구도, 깨끗한 침구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데 편한 건 하나도 없었다. 아침 식탁에서는 식기 소리만 났고, 거실에서는 누구도 큰소리로 웃지 않았다. 햇살이 계단을 내려가면 진주의 시선이 먼저 따라붙었다. 흰 머리. 서로 다른 두 눈. 태만이 사준 옷. 들고 다니는 스케치북까지. “그 옷 마음에 들어요?” 어느 날 진주가 물었다. “네.” “태만 씨가 직접 골랐다던데.” 햇살의 손이 옷자락에서 멈췄다. 진주는 웃었다. “참 다정하죠. 마음 쓰는 사람한테는.” 말끝은 부드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서늘했다. 건은 여전히 대놓고 빈정거렸다. “또 그림 그려?” “응.” “그걸 왜 맨날 그려.” 햇살이 스케치북을 덮었다. “네 얼굴 보는 것보다 나아서.” “진짜 재수 없어.” “너도.”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더 힘든 건 태만이었다. 처음 며칠은 아침마다 햇살 방을 확인했다. 필요한 건 없는지 묻고, 밥은 먹었는지 확인하고, 학교 문제도 직접 알아봤다. 그럴 때마다 진주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졌다. 태만이 햇살에게 새 화구를 가져다준 날에는 저녁 식탁에서 햇살 자리만 빠져 있었다. “실수였어요.” 진주는 태연하게 말했다. 태만이 햇살 옆에 앉아 밥을 챙겨준 다음 날에는 세탁된 교복 셔츠가 햇살 것만 빠져 있었다. “하필 그것만 놓쳤네.” 미소까지 지었다. 처음에는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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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전화 너머로 멎은 여름

아침부터 서울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햇살은 창가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쳐놓고도 한 줄도 긋지 못하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이틀째였다. 아무리 술을 마셨어도 다음 날이면 꼭 한 번은 전화를 받던 사람이었다. 햇살은 연필 끝으로 종이만 톡톡 두드렸다. 침대 옆에는 나무 들꽃이 놓여 있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태만이 먼저 받는 소리가 들렸다. 햇살은 별생각 없이 다시 스케치북을 내려다봤다. 잠시 뒤 집 안이 이상할 만큼 조용해졌다. “……여보세요.” 태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예주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태만 씨. “네.” 짧은 숨소리. 그리고 한참의 침묵 끝에 겨우 이어진 말. -빛나 씨가…… 태만의 손이 굳었다. “무슨 일입니까.” 다시 침묵. -오늘 아침에 우리가 갔는디…… 예주의 목소리가 끝내 무너졌다. 그 뒤의 말은 작았지만 충분했다. 태만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손에서 수화기가 미끄러질 뻔했다. 계단 중간에 서 있던 햇살도 움직이지 못했다. 언제 내려왔는지 본인도 몰랐다. “아빠.” 태만이 천천히 돌아봤다. 햇살은 맨발이었다. 하얀 머리는 한쪽으로 흘러내렸고,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엄마 뭐.” 태만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엄마가 뭐.” 햇살이 한 계단 내려왔다. “왜 예주 아줌마가 엄마 이름 말해.” 태만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햇살아.” 그 한마디에 햇살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니지?” “…….” “아빠.”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아니지?” 태만이 다가가려 하자 햇살은 뒤로 물러났다. “오지 마.” 그 말에 태만의 발이 멈췄다. 햇살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엄마한테 전화해.” “햇살아.” “지금 전화하라고.” 햇살이 거실 전화기로 달려갔다.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무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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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국화 향이 머문 자리

서울의 작은 장례식장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복도 끝 빈소 앞에는 조문객 신발 하나 놓여 있지 않았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하얀 국화 향과 묵은 향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영정 사진 속 빛나는 웃고 있었다. 햇살이 기억하는 오래전 얼굴이었다. 앞치마에 밀가루를 묻힌 채 피자를 굽고, 손등에 파란 물감을 묻힌 채 친구들을 반겨주던 엄마. 술 냄새도 없었다. 붉게 충혈된 눈도, 깨진 유리잔도 없었다. 그냥 오빛나였다. 햇살은 빈소 입구에서 한참 발을 떼지 못했다. 태만이 조금 뒤에 서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얼굴은 며칠 사이 몇 년은 늙은 사람처럼 보였다. “들어가자.” 햇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긴 흰 머리를 검은 옷 위로 풀어 내린 햇살은 영정 앞에 멈춰 섰다. 국화 한 송이를 들었다. 손이 떨렸다. 꽃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몇 번이나 위치를 잡지 못했다. 결국 태만이 손을 뻗으려 하자 햇살이 작게 말했다. “내가 할게.” 태만의 손이 멈췄다. 햇살은 혼자 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영정 사진을 올려다봤다. “엄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움직였다. 빛나는 술에 취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사실을 들은 뒤에도 햇살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 왜 자기를 보내고 바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마지막 전화 한 번 받지 않았는지. 햇살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나 싫어서 보낸 거 아니었지?” 태만의 얼굴이 굳었다. 햇살은 영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 있으면 힘들다고 한 거.” 숨이 한번 크게 떨렸다. “거짓말이었지?”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향 연기만 가늘게 위로 올라갔다. 햇살의 손이 바닥 위에서 주먹으로 말렸다. “그러면 말을 했어야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엄마가 무섭다고. 힘들다고. 나 보내야 된다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왜 나 싫다고 했어.” 태만은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의자 끝에 앉았다.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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