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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화. 물빛이 흔들리는 오후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네 사람은 학교보다 개울가에서 더 자주 만났다. 낮이면 매미 소리가 산을 뒤덮었고, 개울물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춘식은 도착하자마자 바지를 걷어 올렸다. “오늘은 진짜 큰 거 잡는다.” 노향이 바위 위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어.” “오늘은 느낌이 달라.” 햇살은 물가에 쪼그려 앉아 손을 담갔다. “차갑다.” 우식이 옆에 서 있었다. “미끄러워.” “알아.” “천천히 가.” “알았어.” 햇살은 입으로는 대답하면서도 가장 먼저 물속으로 들어갔다. 매끈한 돌을 밟고 두어 걸음 옮기던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어?” 허리가 뒤로 기울기 전에 우식의 손이 팔을 잡았다. 햇살은 그대로 그의 가슴팍에 부딪쳤다. 물소리 사이로 둘 다 잠깐 멈췄다. “봐.” 우식이 낮게 말했다. “뭘.” “미끄럽다고 했잖아.” 햇살이 민망한 듯 웃었다. “안 넘어졌잖아.” “내가 잡아서.” “그러네.” 우식이 손을 놓자 햇살은 괜히 팔목을 한번 만졌다. 춘식이 멀리서 소리쳤다. “야! 둘이 거기서 뭐 하냐!” 햇살이 바로 물을 퍼 춘식 쪽으로 던졌다. “너나 물고기 잡아!” 잠시 뒤 개울가는 물장난으로 난리가 났다. 노향도 결국 물에 들어왔고, 춘식은 온몸이 젖은 채 도망다녔다. 우식은 처음에는 물가에 서 있기만 했다. 햇살이 두 손으로 물을 퍼 그의 배 쪽에 끼얹었다. 우식의 셔츠가 젖었다. “오햇살.” “왜.” “하지 마.” 햇살이 웃었다. “싫어.” 한 번 더 물이 튀었다. 우식은 가만히 햇살을 보다가 발로 물을 세게 걷어찼다. “악!” 햇살이 머리까지 젖었다. 춘식과 노향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소우식도 저런 걸 하네!” 햇살은 젖은 흰 머리를 얼굴에서 걷어내며 우식을 노려봤다. “너 두고 봐.” “응.” 한참 놀고 난 뒤 네 사람은 바위 위에 앉아 예주가 싸준 주먹밥을 먹었다. 햇살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다가 하늘을 올려다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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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비 냄새가 번진 저녁

장마가 끝나갈 무렵, 하루 종일 잔비가 내렸다. 햇살은 학교에서 돌아와 젖은 운동화를 현관에 벗어놓았다. 집 안은 조용했다. “엄마?” 대답이 없었다.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가자 빛나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햇살의 걸음이 멈췄다. 잔 안에는 투명한 술이 조금 담겨 있었다. 빛나도 딸을 봤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밖에서 빗물이 처마를 두드렸다. “엄마.” 햇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빛나의 손이 잔에서 떨어졌다. “안 마셨어.” “근데 왜 따라놨어.” 빛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 낮 태만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달도 내려오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기다려달라는 말도 들었다. 익숙한 말들이었다.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햇살은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예전처럼 화를 내지도, 술병을 빼앗지도 않았다. 그저 빛나를 바라봤다. 그 눈이 빛나에게는 어떤 꾸지람보다 아팠다. 빛나는 결국 잔을 들었다. 햇살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 빛나는 그 움직임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잠시 뒤 잔을 싱크대에 부었다. “가자.” 햇살이 눈을 깜빡였다. “어디?” “예주 언니네.” 빛나는 찬장에서 남은 술병까지 꺼냈다. “혼자 있으면 마실 것 같아.” 햇살은 한동안 엄마를 바라보다 우산을 다시 폈다. 두 사람은 빗길을 걸어 우식의 집으로 향했다. 예주는 문을 열자마자 빛나 손에 들린 병부터 봤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들어와요.” 빛나는 마루에 앉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언니.” “응.” “나 오늘 진짜 마실 뻔했어.” 예주는 빛나의 손에서 병을 가져갔다. “근디 안 마셨잖어.” “다음엔 모르겠어요.” “다음에도 와.” 짧은 말이었다. 빛나의 눈이 붉어졌다. 햇살은 부엌 쪽에 서 있었다. 우식이 축사에서 들어오다가 햇살을 발견했다. 젖은 머리 끝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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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코스모스 핀 운동장

가을 운동장 담장 아래로 코스모스가 길게 피었다. 학교 축제 날이라 교실마다 종이꽃과 색종이가 붙었고, 복도에서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햇살은 미술부 천막 앞에 쪼그려 앉아 커다란 도화지를 바닥에 펼쳤다. 오늘은 현장에서 학교 풍경을 그리는 대회가 있었다. 춘식이 옆에 서서 물었다. “뭘 그릴 건데?” “학교.” “그건 누구나 그리잖아.” “그러니까 너는 못 그리지.” “야.” 노향이 웃으며 춘식을 끌고 갔다. “방해하지 말고 가자.” 우식은 한동안 햇살 뒤에 서 있었다. “너는 안 가?” 햇살이 올려다봤다. “어디.” “축제 구경.” “보고 있어.” “뭘.” 우식의 시선이 도화지로 내려갔다. “그림.” 햇살은 피식 웃었다. “재미없을 텐데.” “괜찮아.” 햇살은 다시 붓을 들었다. 흰 종이 위에 운동장이 생기고, 오래된 교사가 올라갔다. 담장 아래 코스모스도 한 송이씩 그려졌다. 마지막에는 운동장 한쪽 나무 아래 서 있는 작은 사람 넷이 들어갔다. 춘식, 노향, 햇살. 그리고 가장 키가 큰 우식. 우식이 그림을 내려다봤다. “나야?” “응.” “왜 커.” 햇살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네가 크니까.” 잠시 뒤 심사 시간이 되자 햇살은 천막을 나왔다. 네 사람은 떡볶이를 사 들고 운동장 가장자리에 앉았다. 춘식은 입안이 가득 찬 채 말했다. “햇살이가 상 타면 뭐 사줘야 되냐?” 노향이 바로 대답했다. “왜 네가 사줘?” “친구니까.” “네 돈으로?” 춘식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좀 생각해보고.” 햇살이 웃음을 터뜨렸다. 멀찍이 있던 진태가 친구들과 지나가다 그림들을 힐끗 봤다. 햇살의 그림 앞에서 걸음이 잠깐 멈췄지만 이번에는 시비를 걸지 않았다. 우식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예전처럼 함부로 손댈 나이가 아니란 걸 아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후가 되자 결과가 발표됐다. “최우수, 오햇살.” 햇살의 눈이 커졌다. 노향이 먼저 비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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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겨울 창가에 걸린 그림

겨울이 가까워지자 학교 복도 창문마다 찬 김이 서렸다. 햇살의 그림은 시내 학생 미술전에 출품됐다. 전시회 날 아침, 빛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햇살의 흰 머리를 차분하게 묶어줬다. “긴장돼?” “조금.” “그림이 어디 도망가니.” 햇살이 웃었다. “엄마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 빛나는 괜히 코트 단추를 만졌다. 전시장에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가득했다. 춘식과 노향은 입구에서부터 시끄러웠고, 우식은 말없이 햇살 뒤를 따라다녔다. 햇살의 그림은 가장 안쪽 벽에 걸려 있었다. 초록 논길 끝에 농장과 전원주택이 나란히 있었고, 그 사이 길을 네 아이가 걷고 있었다. 제목은 ‘집으로 오는 길’. 춘식은 그림 속 작은 사람 하나를 가리켰다. “이게 나냐?” “응.” “왜 내가 제일 작아?” 노향이 웃었다. “실제 비율 아니야?” “진노향!” 햇살도 웃다가 전시장 입구를 한번 봤다. 태만이 오기로 한 날이었다. 오전이 지나고 점심이 됐다. 사람들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익숙한 검은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햇살은 더 이상 입구를 보지 않으려고 그림 앞에 섰다. 우식이 옆으로 왔다. “안 와?” 햇살은 잠깐 멈췄다가 대답했다. “바쁜가 봐.” “전화했어?” “아니.” “왜.” “오면 오는 거지.” 햇살은 웃었다. “나 이제 안 기다려.” 말은 가벼웠다. 우식은 그 얼굴을 잠깐 보다가 그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잘 그렸어.” 햇살이 눈을 들었다. “진짜?” “응.” “뭐가 제일 좋아?” 우식은 그림 안의 네 사람을 봤다. “길.” “왜?” “같이 있잖아.” 햇살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빛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만이었다. 빛나는 전시장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통화는 짧았다. 오늘은 내려오지 못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다음에 꼭 보겠다는 말. 빛나는 눈을 감았다. “알았어.”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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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열일곱의 봄바람

다시 봄이었다. 열일곱이 된 우식은 지난해보다 또 키가 컸다. 교실 맨 뒷자리에 앉으면 책상이 작아 보였고, 체육복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은 농장 일을 오래 한 어른처럼 단단해졌다. 말수는 그대로였다. “우식아.” “응.” “오늘 농장 가도 돼?” “응.”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알았지?” “응.” 햇살이 웃었다. “진짜 재미없어.” 그 말과 달리 매일 먼저 우식을 찾는 것도 햇살이었다. 햇살 역시 조금 달라졌다. 긴 흰 머리는 허리 가까이 내려왔고, 둥글던 얼굴선도 조금씩 가늘어졌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몇 시간이고 말없이 앉아 있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춘식이 장난을 치면 가장 크게 웃고, 노향과 시장 떡볶이를 먹으러 갈 때면 누구보다 먼저 뛰는 건 여전했다. 방과 후 네 사람은 늘 걷던 논길로 나섰다. 마을 할머니 하나가 밭에서 허리를 펴다가 손을 흔들었다. “학교 끝났냐?” “네!” 햇살이 먼저 대답했다. 할머니는 네 아이를 훑어보다 웃었다. “햇살이는 우식이네 며느리마냥 맨날 농장 가네.” 춘식이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할머니, 맞아요!” “장춘식!” 햇살이 주먹을 들자 춘식이 노향 뒤로 숨었다. 우식은 앞만 보고 걸었다. 햇살이 옆으로 붙었다. “너 귀 빨개졌어.” “더워.” “봄인데?” “더워.” 햇살이 한참 웃었다. 농장에 도착하자 예주가 찐빵을 한 접시 내왔다. “고등학생 됐다고 얼굴 보기도 힘들 줄 알았더니 맨날 오네.” 춘식이 찐빵을 집으며 말했다. “저희가 의리가 있잖아요.” “넌 먹으러 오잖어.” 노향이 바로 받아쳤다. 햇살은 평상 한쪽에 스케치북을 펼쳤다. 우식은 축사에서 건초를 옮기고 있었다. 햇살의 연필이 움직였다. 넓어진 어깨. 무거운 건초 자루를 드는 팔. 소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는 손. 우식이 일을 마치고 가까이 왔다. “또 나야?” “응.” “왜.” 햇살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기 편해서.” “왜.” “안 움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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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등에 내려앉은 오후

체육 시간이 끝난 뒤였다. 햇살은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잘못 디뎠다. “아.” 짧은 소리와 함께 몸이 휘청했다. 난간을 잡긴 했지만 오른쪽 발목에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가장 먼저 돌아온 건 우식이었다. “어디.” 햇살은 계단에 주저앉아 발목을 잡았다. “조금 삔 것 같아.” 우식이 눈앞에 쪼그려 앉았다. “일어나봐.” 햇살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걸을 수 있어.” 한 발을 디디자 얼굴이 바로 찌푸려졌다. 우식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햇살이 눈을 깜빡였다. “뭐 해?” “업혀.” “싫어.” “왜.” “애들 보잖아.” 우식은 복도 끝을 한번 봤다. 반 아이들 몇 명이 이미 이쪽을 보고 있었다. “봤어.” “그게 문제가 아니거든.” 햇살의 귀가 붉어졌다. 우식은 그대로 기다렸다. “빨리.” “너 가끔 되게 막무가내야.” 그래도 결국 햇살은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우식이 일어섰다. 평소 옆에서 볼 때보다 등이 훨씬 넓었다. 햇살은 괜히 몸을 조금 띄우려 했지만 우식이 허벅지 아래를 단단히 받쳤다. “가만히 있어.” “나 무겁지?” “아니.” “진짜?” “응.” 복도를 지날 때마다 친구들이 흘끔거렸다. 햇살은 얼굴을 우식 어깨 뒤로 숨겼다. “너 때문에 창피해.” “왜 나 때문에.” “네가 업었잖아.” “네가 다쳤잖아.” 반박할 말이 없었다. 보건실에서 발목에 붕대를 감고 나오자 우식은 다시 앞에 섰다. “이제는 걸어도 된대.” “절뚝거려.” “조금.” “업혀.” “싫다니까.” 우식은 움직이지 않았다. 햇살도 버텼다. 결국 보건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얘 말 들어.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햇살은 투덜거리며 다시 등에 업혔다. 학교를 나서자 바람에 벚꽃잎 몇 장이 날렸다. 춘식과 노향은 일부러 한참 앞서 걸었다. “쟤들 왜 저렇게 빨리 가?” 햇살이 묻자 우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논길로 들어서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햇살은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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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한발 늦게 핀 마음

노향은 오래전부터 우식을 좋아했다. 언제가 처음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릴 때 넘어졌을 때 말없이 손을 내밀어준 날이었는지, 겨울에 장갑 한 짝을 벗어준 날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우식은 다른 남자애들과 달랐다. 그런데 열일곱 봄이 되어서야 노향은 하나를 확실히 알았다. 우식은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점심시간. 햇살이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우식은 자기 것을 내밀었다. “써.” 햇살이 받으며 웃었다. “너는?” “하나 더 있어.” 그 작은 행동을 노향은 봤다. 체육 시간 햇살이 발목을 다치자 누구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도. 농장에서 햇살이 소 가까이 가면 뒤를 지키는 것도. 햇살이 말할 때면 다른 사람보다 조금 오래 보는 것도. 노향은 이제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방과 후에는 춘식과 둘이 먼저 걸었다. 햇살의 발목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 우식과 천천히 뒤따라오고 있었다. 춘식이 물었다. “너 오늘 왜 조용하냐?” “내가 언제 시끄러웠다고.” “맨날 나한테 뭐라 하잖아.” “오늘도 해줄까?” 춘식이 웃었다. “그럼 됐고.” 노향은 뒤를 한번 돌아봤다. 햇살이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우식은 한마디씩 대답하며 걷고 있었다. “춘식아.” “왜.” “너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춘식의 발이 돌에 걸렸다. “뭐?” 노향이 피식 웃었다. “없구나.” “갑자기 그걸 왜 묻냐.” “그냥.” “너는?” 노향은 다시 뒤를 봤다. 햇살이 웃으며 우식 팔을 툭 쳤다. 우식은 피하지 않았다. “있었던 것 같아.” 춘식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누군데?” “몰라도 돼.” “내가 아는 애야?” “왜 이렇게 캐.” 춘식은 입을 다물었다. 조금 뒤 네 사람은 마을 가게 앞 평상에 앉았다. 춘식이 아이스크림을 네 개 사왔다. 햇살은 딸기 맛, 우식은 팥, 노향에게는 메론 맛을 건넸다. 노향이 받아 들며 물었다. “내가 메론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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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문밖에 켜진 불

가을이 가까워질 무렵, 태만의 방문은 다시 뜸해졌다. 전화도 전보다 짧아졌다. 처음에는 빛나도 버텼다. 약속이 미뤄져도 술을 찾지 않았고, 햇살 앞에서는 평소처럼 밥을 차렸다. 그러던 어느 밤. “이번 달은 내려가기 힘들 것 같아.” 수화기 너머 태만의 목소리에 빛나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다음 달은?” -확실하지 않아. “또?” -빛나. 빛나는 더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방 안에서 그림을 그리던 햇살은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뒤 부엌에서 병뚜껑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연필 끝이 멈췄다. 햇살은 바로 나가지 않았다. 한참 뒤 방문을 열었을 때 식탁 위에는 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빛나는 첫 잔을 비우고 있었다. “엄마.” 빛나가 고개를 들었다. “왜.” “예주 아줌마네 갈래?” “싫어.” “그럼 나 갈게.” 빛나의 눈빛이 달라졌다. “뭐?” 햇살은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작은 가방을 꺼냈다. 갈아입을 옷 한 벌과 학교 공책, 필통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나무 들꽃도 챙겼다. 빛나가 방문 앞까지 따라왔다. “어디 가냐고.” “우식이네.” “엄마 놔두고?” 햇살의 손이 가방 지퍼 위에서 멈췄다. 예전 같으면 그 말 하나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술 냄새가 진해진 뒤에는 무슨 말을 해도 서로 상처만 남는다는 걸. “엄마도 예주 아줌마네 오면 되잖아.” “내가 왜 거길 가.” “그럼 술 그만 마셔.” 빛나가 잔을 꽉 쥐었다. 햇살의 어깨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걸 본 빛나의 얼굴이 굳었다. 둘 사이가 조용해졌다. 햇살은 가방을 멨다. “아직 아무 일도 안 났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래서 지금 갈 거야.” 빛나는 붙잡지 못했다. 대문 밖으로 나온 햇살은 빠르게 언덕을 내려갔다. 해가 진 논길은 어두웠지만 길은 익숙했다. 우식네 대문에 도착했을 때 우식은 마당에서 소 여물통을 씻고 있었다. 햇살을 보자 손을 멈췄다. 작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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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서울이라는 먼 이름

며칠 뒤 태만이 내려왔다. 햇살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대문 앞에 익숙한 검은 차가 서 있었다. 예전 같으면 먼저 뛰었을 텐데 이번에는 걸음을 조금 늦췄다. 현관 앞에 태만이 서 있었다. “왔어?” “응.” 햇살은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부터 벗었다. 빛나는 부엌에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난 뒤 태만이 말했다. “산책할까.” 햇살은 잠깐 엄마를 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논길로 나갔다. 해가 거의 져서 벼 끝이 어둑하게 물들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걷던 태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울에서 그림 배워볼래?” 햇살의 걸음이 멈췄다. “갑자기?” “좋은 선생님 알아봤어.” “엄마도 같이 가?” 태만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햇살의 얼굴이 굳었다. “또 나만?” “당분간만.” “싫어.” “햇살아.” “나 가면 엄마 혼자잖아.” 태만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네가 있어도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야.” “그래도 혼자보다 낫잖아.” “네가 다 감당할 일이 아니야.” 햇살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누가 해.” 태만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에 햇살이 웃음 없는 얼굴로 말했다. “아빠도 없잖아.” 태만의 턱이 굳었다. 햇살도 바로 후회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둘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농장 쪽 길로 조금 더 걸었다. 축사 앞에는 우식이 건초를 쌓고 있었다. 태만은 멀리서 우식을 보고 햇살에게 말했다. “친구랑 있다 와.” 그리고 먼저 돌아섰다. 햇살은 축사 쪽으로 걸어갔다. 우식이 손을 털며 나왔다. “왜.” “뭐가.” “표정.” 햇살이 피식 웃었다. “이제 표정도 알아?” “응.” 평상에 앉자 우식도 옆에 섰다. 햇살은 한참 발끝만 보다가 말했다. “아빠가 서울 가재.” 우식의 시선이 돌아왔다. “언제.” “몰라. 그림 배우라고.” “가고 싶어?” 햇살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림은 배우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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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열여덟, 마지막 봄

또 한 번 겨울이 지나갔다. 열여덟의 봄. 햇살은 학교 미술실보다 마을 곳곳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마을회관 처마. 춘식이네 마트 앞 낡은 간판. 노향과 함께 걷던 우체국 담장. 우식네 축사와 오래된 평상. 스케치북을 넘길 때마다 익숙한 풍경이 한 장씩 쌓였다. 그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우식이었다. 소에게 물을 주는 뒷모습. 트럭 짐칸에서 사료 포대를 내리는 모습. 소나무 아래 앉아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모습. 그날도 햇살은 농장 옆 소나무 그늘에 앉아 연필을 움직이고 있었다. 우식이 축사에서 나와 물병을 들이켰다. “또 그려?” “응.” “뭐.” “너.” 우식이 스케치북을 내려다봤다. “왜 나 많아.” “맨날 보이니까.” “다른 사람도 보이잖아.” 햇살은 연필을 돌리며 웃었다. “너는 가만히 있어서 편해.” 우식은 조금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평상에서는 춘식과 노향이 수박을 먹고 있었다. 춘식이 가장 가운데 빨간 조각을 노향 앞에 내려놓았다. “먹어.” 노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좋은 건 맨날 나 줘?” “남아서.” “거짓말.” “먹기 싫으면 줘.” 노향은 얼른 수박을 가져갔다. “싫다는 말 안 했거든.” 햇살이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둘이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우식이 물었다. “뭐가.” “아니야. 넌 몰라도 돼.” 우식은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햇살은 다시 그림을 그렸다. 한참 뒤 바람이 불어 종이가 넘어갔다. 우식이 손바닥으로 스케치북 끝을 눌러줬다. 햇살은 그 손을 바라보다 문득 말했다. “나 졸업하면 뭐 할까.” “그림.” “그건 하고 싶지.” “그럼 해.” “서울 가야 할 수도 있대.” 우식의 손이 잠깐 멈췄다. 햇살은 그걸 못 본 척했다. “아빠가 계속 말하거든. 제대로 배우려면 서울 오라고.” “갈 거야?” “몰라.” 이번에는 햇살이 정말 몰랐다. 지난해까지는 무조건 싫다고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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